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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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 제18회 창비신인시인상 당선작

 

 

곽문영 郭文榮

1985년 충북 청주 출생. ansdud2002@naver.com

 

 

 

조랑말 속달 우편

 

매일 죽음도 불사하는 숙련된 기수여야 함

고아 환영*

 

 

달리던 기수의 뺨에 벌레가 앉았다 그것을 만지자 힘없이 부서졌다 바람에 죽기도 하는구나 야생 선인장이 많은 고장을 지나고 있었다 식물의 생사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아직도 알지 못했다 매일 잠들기 전 기수는 그날 만난 바람을 필사했다 그것은 잘 썼다고도 못 썼다고도 말할 수 없는 일기였다 달리는 기수와 조랑말의 모양만큼 매일 바람은 일그러졌다 사무소를 출발한 기수는 열흘 이내에 동부의 모든 마을에 나타났다 기수는 작고 왜소해서 말에서 내리면 가장 먼 곳으로 심부름을 떠나온 아이 같았다 기수는 가끔 다른 지역의 기수에게 편지를 쓰기도 했다 다 쓴 편지를 자신의 가방에 넣고 스스로 배달하기도 했다 기수는 늘 휴대용 성경을 지니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는 이야기였다 한 사람이 태어난 이야기였다 기수는 매일 잠들기 전 누워 사무소에서 배운 대로 성호를 그었다 가슴 위로 그의 작은 손짓이 만든 바람이 잠깐 불다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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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랑말 속달 우편(1860~61) 기수 모집 공고

 

 

 

미래의 자리

 

 

너는 매년 가족들과 몇기의 무덤을 돌보러 그 산에 갔는데 너는 그것들이 누구의 무덤인지는 모르지만 그곳의 모든 비석에 너의 이름이 있어서 너의 무덤도 그곳에 생길 것이라고 말했다 너는 그곳에 가면 오래 풀을 뽑다 왔는데 잔디와 잡초가 어떻게 다른 것인지 몰라서 의심이 가는 풀을 매우 조심스럽게 다루느라 네가 만진 풀은 모두 중간에서 잘려 있었다 수풀 속에서 다양한 소리를 내는 벌레들이 그곳에 많았는데 한번도 벌레를 본 적은 없어서 그것은 너의 가족들이 속으로 하는 말 같다고도 너는 말했다 우리는 함께 그 산에 올라 네가 누울 곳을 미리 바라보기도 하였다 한명의 자리에 같이 누워보기도 하였다 그곳에서 숨소리도 메아리가 되었다

 

 

 

그것의 단위

 

 

길 위에 버려진 신발들은 언제나 한쌍은 아니었다 무수한 바람이 그곳에 발을 집어넣었지만 신발은 자기보다 빠른 것은 한번도 태워본 적 없었다 신발은 사실 혼자 있으면 한 발자국도 걷지 않았다 신발 한짝이 저곳에 놓일 수 있는 경우들을 상상하고 그중 가장 슬프지 않은 것을 믿기로 한다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은 무심하구나 그러나 상상과 믿음에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으니까 나는 누구도 의심하지 말아야지

 

할머니가 죽었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나는 몹시 취해 있었다 그녀의 마지막 신발은 맨발이었겠지 이 고장에는 장례식장이 너무 많아 나는 가야 할 곳을 찾지 못했다 가장 가까운 곳에 들러 명복을 빌었다 육개장은 짰다 그곳에 많은 신발들이 놓여 있었다 어지러워지는 대열을 수시로 정리하는 사람이 있었다 신발은 가지런히 놓일 때 더욱 죽은 사람의 것 같아 보인다 영혼을 세는 단위를 켤레라고 여기기 시작한다 그곳에서 사람들이 하나의 영혼을 위해 신발을 벗고 잠시 영혼이 되어준다 그곳에서 아무도 나에게 어떤 사람이냐고 묻지 않았다 잠시 사람이 아니었던 동안

 

 

 

 

 

처음에 사랑은 세명이 하는 것이었다 사람이 맨 처음 발견하지는 않았다

 

앞뜰의 토끼가 임신한 사실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토끼는 이제 점프하지 않았다 달과 조금 먼 사이가 되었다 우리는 토끼가 채식하는 모습을 한번도 보지 못했다 문밖에 내놓은 짬뽕 그릇에 토끼가 오래 얼굴을 파묻었을 때부터 붉게 물든 얼굴을 들었을 때부터 우리는 그를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누구도 내색하지는 않았다

 

처음에 사랑은 뜰에서 해체되는 일이었다 달과 멀어졌다 가까워졌다를 무한히 반복하는 일이었다 사랑이라는 이름이 붙기 전의 일이다

 

편지를 다 쓴 다음에야 깨닫는 것이 있었다 나는 잉크가 다한 펜으로 편지지를 가득 메웠구나 약하게 눌린 자국을 너는 알아보지 못하겠지 작년에 토끼는 무사히 새끼를 낳았고 무사히 새끼를 버렸단다 이제 우리 집에서는 몇시가 되어도 달이 보이지 않는단다

 

한 신발을 오래 신은 사람은 마침내 자기만의 바닥을 갖게 된다 나는 나의 바닥으로 한번도 너를 초대하지 못했고

 

전화를 건다 통화 연결음이 들린다 나는 오래 사용하지 않은 목을 가다듬기 시작한다 통화 연결음이 들린다 헛기침이 격렬해진다 가벼워진 토끼는 이전보다 높이 점프한다 그러나 더이상 무엇과도 친해지지는 않으면서 통화 연결음이 들린다 가다듬은 목소리를 사용하지 않는다

 

 

 

수경

 

 

어제처럼만 하면 돼 분홍색 한복을 입은 수경이 말했다 너의 왼쪽과 오른쪽 얼굴을 반복해서 바라보며 하나의 얼굴을 완성하는 춤을 추었다 그래도 겁이 나면 한명의 엄마를 같이 바라보자

 

너의 어깨를 짚는 나의 자세를 너는 돌아보지도 않고 손질해준다 너의 몸이 커질수록 매일 조금씩 이동하는 너의 지점

 

하나의 책상을 나눠 가지는 사람들이 커서 하나의 아이를 나눠 가지는 사이가 되는 것으로 알았고

 

우리는 책상에서 매일 새로운 무늬를 발견했다 나뭇결은 나무가 한때 격렬하게 춤추었던 흔적 새로운 무늬를 발견하지 못한 날에는 무늬를 새겨주었다

 

너는 모든 것을 리본으로 접을 줄 알았다 수명이 다한 것들만을 접었다 공중에서 잠자리의 날개가 떨어져나가는 것을 보았다

 

잘린 날개가 잠자리보다 오래 날았다 너는 그것을 주워 접다가 더 잘게 찢어버렸다

 

우리의 몸이 더이상 자라지 않을 때 춤은 완성된다 우리의 몸이 다시 작아지기 시작할 때 우리는 새로운 춤을 출 수 있다

 

잠자리를 묻고 내려가는 숲길이 어두웠다 우리는 오래 헤맸고 만약 더 어두웠다면 숲속에서 빛을 내는 것들을 쉽게 알아볼 수 있을 텐데

 

그렇다면 눈을 감자 우리 모두 밤을 만들 줄 아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