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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김유림
1991년 출생. 2016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flowingchara@naver.com
해송 숲
조개 수천개가 깔린 해변이었다 조개 하나 뒤집으면 빨간 돌, 조개 하나 뒤집으면 또 빨간 그러나 시간의 경과로 저녁을 알리는 빨간 돌, 조개 하나 뒤집으면 그렇게 빨간 돌, 조개 하나 뒤집으면 달리 빨간 돌, 조개 하나 뒤집으면 두번 다시 빨간 돌, 조개 하나 뒤집으면 잊은 듯이 빨간 돌, 조개 하나 뒤집으면 뒤집어진 그러나 여전히 빨간 돌, 조개 하나를 뒤집으면 익은 돌, 조개 하나를 뒤집으면 이미 익은 빨간 돌이다
태양민박을 지났다
아주머니에게 하룻밤에 얼마지요 물었더니 뭐라 뭐라 대답을 한다
어린 개 한마리가 나를 따라오길래 잠시 기다려보라고 했다
조개 수천개가 깔린 해변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길은 달라지고 있다 해풍에 기울어진 소나무가 여러그루 모여 작은 숲을 이루는데 해변을 가리기엔 빈약해서 숲 너머로 해변이 점점이 보인다 나는 숲을 가로지를지 숲을 우회할지 그도 아니면 뒤로 물러서, 이 그림 그대로를 가져갈지
망설인다
가르마 한가운데
물 한방울이 떨어졌으나 비로 이어지지 않았다
언덕의 민가 불빛들 가까워지고 등대 공원에 오래된 운동기구가 하나 둘 셋 넷, 다섯개 있다 그중 하나가 여전히 쓸 만해서 산책 나온 사람들이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린다 전부 늙은 사람들이다 나는 난간에 손을 얹고 숲으로 들어가는 그림자를 본다
해변을 등지고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본다
사람들을
멀어진 해변을 보다
갑자기 비가 쏟아지고 내 그림이 젖고 내가 손댄 몇개의 돌들이 빨갛게 번쩍인다
등대의 빛은 검은 해변을 쓸고 지나간다
푸른 바다 면도기
그날 창문을 열었을 때 자연은 그대로였다 푸른 바다
면도기*가 녹슬었다 열어둔 창문 너머로 그것을 던졌다
그대로 바다에 떨어졌다, 당장 가져와
화난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림 한점이 침대맡에 걸려 있다 컬이
인상적인 가발을 쓰고 그림 속 인물의
얼굴은 오후의 빛으로 빛난다 새가 발가락을 쪼고 있다 홀로 미소 지을 줄 아는 새처럼 미소 짓는 새를 그렸다 인물은 무엇이 자신의 발을 간질이고 있는지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날
내가 이불 밖으로 두 다리를
꺼내놓았을 때
바닥엔 낡은 실내용 슬리퍼 두켤레
개의 비듬, 자기 전 코를 풀고 탁상에 올려뒀지만
떨어지고 만 휴지가 있었다 나의 두 다리는 덜렁이는
낡은 슬리퍼를 꿰어 신고 창가로 갔다 파도가 일렁이고
창문틀을 손가락으로 문지르자
소금이 묻어나왔다 섬이 여러개 보였다 얼굴이 보였다 당장 가지고 와 정면에서 나를 응시하는 그가 보인다 창문과 나
사이에서
손끝에서
하얀 결정이 녹고 있었다
그가 물러섰을 때 바다는 파도를 밀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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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lue Sea Razor. 미국의 면도기 브랜드 중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