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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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백규 崔伯圭

1992년 대구 출생. 2014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qkenr312@hanmail.net

 

 

 

천국을 잃다

 

 

 

발을 구를게 지금이 마지막이야

 

스크래치다 처음 보는 뒷골목이다 이길 수 있어 우리는 쟤들이랑 다르잖아 다 쓸어버리자 패배하고 깨진 이를 뱉으며 돌아설 때까지

 

마지막 오디션에서 아무것도 못하고 카메라만 봤다 저것 때문에 평생을 망쳤구나

 

손바닥에 녹이 스미고 있다 해수면 위로 눈이 떨어진다

 

일을 마친 후 귀가하는 새벽녘마다 안전주의 표지판을 걷어차며 다짐했다 실컷 굶어 쓰린 배를 움켜쥐고

 

수척한 등을 씻겨주다보면 창밖을 바라볼 때가 많다 신도 무언가 만들어놓고 당황했을 것이다

 

죽었다고 의사가 말해서 눈꺼풀을 쓸어내렸는데 자꾸 다시 벌어졌다

초점 없이 노랗게 번지는 두 눈동자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살가죽이 서늘해질 것이다

심장에 귀를 댔는데 뛰지 않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뼛가루를 안은 채 생각했다 인생은 결국 서서히 죽음을 인정하는 과정 같다 이제 매일 낯선 여진에 몸부림치다가 허물어지겠지 병든 복사꽃들

 

도축당한 짐승들은 어떻게 될까 인간이 그린 천국과 지옥에는 인간밖에 없어서

 

미결수들만 모아놓은 감옥 안에 부처가 머물러 있다 타워크레인이 헐거워지고 비둘기 무리가 연달아 땅을 박차오른다

 

정류소에 개가 쓰러져 있었다 버스 서너대가 지나가는 동안 흔들어도 움직이지 않았다

 

이름 없는 해변의 모텔로 무서운 일들이 밀려든다

 

타일에 낙서하고 안주를 뒤적거리며 들은 이야기 중에는 틀린 게 없었다 각자 떠드는 고백이 모두 옳았다 누나는 합격 통보를 기다렸다 세상이 망할 줄 모르고

 

나는 비가 오지 않는 집을 갖고 싶다

 

월요일에 죽은 아버지가 좋아하던 비가 월요일마다 온다 어머니도 불 앞에서 차를 달이는데

 

마주 앉아 쌓인 여름옷을 개는 오후 같은 것이 좋았다 사이좋게 오늘의 저녁이나 정하며

 

숨을 오래 마시면 이곳이 녹슬었다는 사실만 알 수 있다 흰 돌과 우주에 내일이 오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침대에 누워 뜨거운 가슴을 움켜쥔 채 보이지 않을 때까지 멀리 바라보았다

 

그립지 않아서 슬퍼할 수가 없다

 

 

 

비행

 

 

목련도 모가지를 분지르는 사춘기였다

 

너는 웅크리고 앉아 꽃 덤불이나 뒤적거리며 홀로 우거진 목련나무를 견디고 있다

 

버려진 관에 스스로 들어가는 나를 구경했다 마른 팔과 다리는 가지런히 접어 넣기에 알맞아 보였다 새처럼 가벼운 몸짓으로 죽어갔다 다가가 보니 입안 가득 빛을 피운 미래가 누워 있었다

 

언젠가 이 낙화가 멈추면 우리도 영영 추락할 거라 예감했다

 

갈 곳 없는 학생들은 빈 공사장으로 모였다 그늘에 널린 몸을 아무도 해치지 못하도록 끌고 왔다 친구들은 멀리 버리거나 태우자 했다 시들어가는 식물의 뿌리를 대하듯이

나는 서투른 우리를 모아 올린 대성당이라 칭했다 그곳에서 짧은 기도를 청하고 오지 않는 종말과 천사를 기다렸다

 

이대로 마지막이 될 거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잊어버리지 말라는 인사가 혀에서 떨어지지 않아 목이 말랐다

 

어깨에 쌓인 첫눈을 털어내는 온도와 닮은 이름을 덥히면

 

꿈에서

헤집어진 늑골엔

머릿속이 뒤흔들릴 정도로 화사한 4월이 펼쳐졌다

 

희박한 빗소리로 울고

 

선잠에서 벗어나듯 아침이 오고 있었다 공터를 돌아다니며 소리쳐보았지만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목련도 관도 공사장도 그대로 있는데 세상에서 나만 사라진 듯했다 몽롱한 채로 열꽃의 잔해를 털었다

 

너는 타오르는 목련나무를 맹렬히 노려보고 서 있다

 

너무 뜨거워 설핏 녹아버릴까봐 겁이 난다 캄캄한 동굴 같은 눈으로 나를 전부 집어삼킬 것만 같다 죄악감을 태우는 냄새가 번지기 시작한다 흰 날갯짓이 돋아나듯이

 

누가 계속 올라와야 할 시간이라 부르고 있어서

 

목련을 밟으며 앞으로 걸어나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