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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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우 金宣佑

1970년 강원 강릉 출생. 1996년 『창작과비평』으로 등단.

시집 『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 『도화 아래 잠들다』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 『녹턴』 등이 있음.

lyraksw@hanmail.net

 

 

 

천문

 

 

하늘을 오래 바라보다 알게 되었다

별들이 죽으면서 남겨놓은 것들이

어찌어찌 모여서 새로운 별들로 태어난다는 거

숨결에 그림자가 있다는 거

당신도 나도 그렇게 왔다는 거

우리가 하나씩의 우주라는 거

 

수백억광년의 과거로부터 오늘에 이른

빛의 내음

소리의 촉감

온갖 원자들의 맛

 

지구에서 살아가는 나는 가끔

죽은 지 오래인 별들의 임종게를 발굴해 옮겨 쓴다

 

그대들이 세상이라 믿는 세상이여, 나를 받아라. 내가 그쪽을 먼저 사양하기 전에.

 

오늘 아침 닦아준 그림자에서 흘러나온 말

임종게가 늘 탄생게로 연결되는 건 아닐 테지만

가끔 유난히 아름다운 탄생의 문양들이 있어

우주가 지나치게 쓸쓸하진 않았다

 

 

 

아무의 제국

 

 

아무도 아닌 아무인 존재가

날마다 자라난다 광활한 용량만큼

빠른 속도로 이인칭이 사라진 자리에

아무와 시간을 보내는 아무들

 

아무랑 놀고

아무에 묻고

아무에게 팔고

아무로부터 사고

아무를 베낀다

아주 바쁘게, 아주 뜨겁게

 

산책자도 없는 산책자들의 도시

아무가 바삐 오간다

아무를 손에 들고

아무에게 속삭이며

몸속에 심장이 없다는 걸 티 내지 않는다

종종 두뇌가 실종된다는 것도

 

오늘이 사라지는 속도만큼

아무의 영토가 커진다

아무의 밤은 날마다 융성하나니

—뭘 더 바라겠어요

잠시 사라지는 허기면 족하죠

 

아무 속에선 아무도 외롭지 않다

아무는 항상 바쁘기에

아무에게 불만을 가질 여유가 없다

아무랑 즐겁기에

아무에게 투정할 필요도 없다

 

어둡게 삼켜지는 아무의 시간

차갑게 식어가는 아무의 온기

밝게 빛나는 아무의 우주

뜨겁게 번창하는 아무의 자연

 

아무는 먹고

아무는 버리고

아무는 뿌리 뽑고

아무는 살해하고

아무는 외면한다

아주 배부른 채, 아주 한가롭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