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시
나희덕 羅喜德
1966년 충남 논산 출생.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뿌리에게』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그곳이 멀지 않다』 『어두워진다는 것』 『사라진 손바닥』 『야생사과』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파일명 서정시』 등이 있음.
rhd66@hanmail.net
선 위에 선*
1
27년간 감옥에 갇힌 만델라, 그를 칭송하던 언론들도 우리에 대해서는 침묵했어요. 이 땅에 30년 넘게 갇혀 있는 장기수가 이렇게 많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그들은 ‘대한민국 만세’를 불러야 약을 주겠다고 했어요. 그러나 맞아 죽으나 얼어 죽으나 아파 죽으나 별로 다를 게 없었지요.
하루는 팔순이 넘은 노모가 동생이 보낸 영치금 5만원을 들고 어렵게 면회를 오셨어요. 물론 나를 설득하라는 조건으로 이루어진 면회였지요. 어머니, 이 돈으로 보약이나 해서 드세요. 보약이 따로 있나. 감옥에서라도 네가 건강한 게 나에겐 보약이지. 그 5만원으로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날이 추워지고 비까지 추적추적 내리는 날, 스피커를 통해 들려오는 가족들의 편지는 정말 견디기 어려웠어요. 성우가 낭송하는 애절한 편지를 듣다보면 내가 얼마나 모진 놈인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지요. 비 내리는 늦가을 저녁에는.
그들은 사람을 괴롭히는 데 자연조차 활용했어요. 4월이면 솜옷을 거두어가는데, 변기 위의 통기구로 들어오는 찬바람을 홑껍데기로 견디자니…… 뼛속 깊이 파고드는 냉기에 잠을 잘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그 구멍을 신문지로도 막지 못하게 했어요. 바람이 우리의 고문자였지요.
어떤 때는 한평도 안 되는 방에 열명을 밀어넣었어요. 인간이 인간을 못 견디게 하려는 체벌이었지요. 그러나 벽에 무릎이 닿은 채 다른 사람을 무릎에 앉히고 이야기를 나누느라 우린 한숨도 자지 못했어요. 몸은 불편해도 얼마나 행복했는지 몰라요.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린다는 것이 꿈만 같아서.
출소를 했지만 그들은 가족의 연락처도, 병원도, 심지어 부모님 묘지가 어디 있는지도 가르쳐주지 않았어요.
형기를 다 채우고 나왔는데, 1975년 사회안전법이 생기면서 다시 수감되었어요. 나온 뒤에도 석달마다 보안관찰 신고를 해야 했지요. 2년마다 재심사를 받아야 했고요.
사상이 대체 뭐길래 너희는 가족도 모르고 버티느냐? 그들은 말했지요. 사상, 그런 것도 중요했지만 무엇보다 내 양심을, 자존심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어요. 인간이라는 품성을.
세상이 나를 몰아간 것인지 내가 그 길을 선택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아마 둘 다겠지요. 내가 원치 않는 무언가를 하지 않는 일만으로 그렇게 힘들었어요. 42년, 한생이 다 지나갔어요.
2
몇개의 선들이 전류처럼 흘러들었다
선 위에 너무 오래 서 있어 그대로 선이 된 사람
어디 한발 디딜 곳 없이 살아온 사람
아직 고향에 닿지 못한 사람
영하 7도, 머리맡에 물이 얼어도 정신은 얼지 않았던 사람
고문에 못 이겨 오줌통에 뛰어들었던 사람
나란히 놓인 이혼서류와 전향서 앞에서 오열했던 사람
종이 한장의 무게를 견뎌낸 사람
핏줄이라는 선조차 포기해야 했던 사람
그들이 원하는 말을 끝내 하지 않으려고 혀를 깨물었던 사람
백련강(百鍊剛), 백번을 두들겨 맞아 더 단단해지는 쇠처럼 버텼던 사람
손이 부서지도록 벽을 타전하며 자신이 인간임을 확인했던 사람
영혼이라는 게 있음을 증명한 사람
0.75평의 감옥에서 붓을 세워 선을 따라갔던 사람
감옥 밖에서도 또다른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
그러나 형형한 눈빛과 목소리만은 빼앗기지 않은 사람
선 위에 서서 선이란 무엇인가 묻고 있는 사람
무수한 선들을 넘어 무수한 선들과 함께 무수한 선들을 이룬 사람
—
* 장기수 붓글씨 전시회 「선(線) 위에 선〔立〕」. 이 시는 2019년 4월 21일 장기수 선생님들에게 들은 내용을 재구성한 것이다.
거대한 빵
이 빵으로 말할 것 같으면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빵입니다
비법이 뭐냐구요?
매일 반죽을 조금씩 떼어두었다가
다음 날의 반죽에 섞는 것,
발효는 그렇게 은밀히 계승되어왔습니다
오늘도 빵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빵 속의 터널에서 만났다 헤어지는 사람들은
같은 빵을 먹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서로를 식구라 부릅니다
밀가루로 된 벽과 지붕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그러나 이 거대한 빵은
오병이어의 기적처럼 계속될 것입니다
지금도 빵을 먹어 들어오는 저 왕성한 소리가 들리십니까?
이미 한쪽에선 곰팡이가 피기 시작한, 그래도
아직 먹을 만한 이 빵은
유구한 반죽 덕분에 발효와 부패 사이를 오가고 있습니다
더이상 보장된 미래는 없다고,
더 많은 빵을 만들어내야 한다고, 말들 하지만
오늘의 반죽이 어떤지는 알 수 없지요
빵의 분배 역시 마찬가지,
파이를 나누는 일에 정해진 규칙이란 없습니다
나이프 쥔 사람 마음대로지요
그가 눈을 감은 채 칼을 휘두르지 않기만 바랄 수밖에요
빵에 갇힌 자로서
빵의 미래를 어찌 알겠습니까
눈앞의 빵조각에 몰입할 뿐
빵처럼 부드러운 제 살을 황홀하게 먹어 들어갈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