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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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란 朴笑蘭

1981년 서울 출생. 2009년 『문학수첩』으로 등단.

시집 『심장에 가까운 말』 『한 사람의 닫힌 문』 등이 있음.

noisepark510@hanmail.net

 

 

 

낙석 주의

 

 

위험하오니, 앞에서 망설이는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어떤 펜스도 넘지 않습니다 무섭습니다

저기 낙석지대가

저기서 사람을 맞닥뜨리는 일이

 

도시는 대부분 안전하고

모르는 것투성이, 회사도 학교도 병원도

좀체 흔들리지 않습니다

어쩌다 동네 커피숍에는 오랜만에 오셨네요 인사하는 알바생이 있고

 

까페 헤세 ×

 

체크리스트가 하나씩 늘어갑니다

그러나 또 금세 줄어들 것입니다

그동안 저희 가게를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 임대 문의 ○

 

coming soon ×

 

시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다시, 시작,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간단히 헤어지고 복잡하게도 헤어집니다

어떤 번호도 남기지 않습니다 전화하지 않습니다

기억보다 먼저 기록을 지웁니다

 

무섭습니다

별안간 공중에서 쏟아진 돌, 돌에 맞아 피 흘리는 얼굴이

그 얼굴이 마침

내가 미처 지우지 못한 사람의 것이라면

 

진로마트 앞 횡단보도 ×

봄약국 사거리 ×

 

바닥의 검붉은 얼룩이 말끔히 정리될 때까지

 

기다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한산한 뒷길을 돌고 돌아 집으로 갑니다 어디든 안전하게 당도합니다

 

미국 ○

 

미네소타에 캐셔로 일하는 친구가 있습니다

그 애와는 이런저런 걸 터놓는 사이, 사는 게 힘들다, 응, 춥고 외롭지, 그럴 때마다

전화기 속에서 육중한 울음을 굴리는 싸이렌

그럴 때마다 구글에서 지도를 찾아보며 가슴을 씁니다

이렇게나 멀구나 우리는 멀리서 무사하구나

 

 

 

간장

 

 

어때? 묻자

짜다 너무 짜, 질끈 감았다 뜬 너의 눈가에 어두운 물기가 어린다

 

나는 괜히 생수를 한 컵 따라 들이켠다

 

더는 어떤 맛도 생각할 수 없다

간장 때문에

 

우리는 불행해질 것이다

 

애간장을 졸이다,라는 말이 있고

너는 슬며시 고개를 든다

끓는 물에 마음을 통째로 담근 채 몇날 며칠 불 앞에 앉아 그걸 달인 핼쑥한 얼굴로

나를 본다

창 쪽으로 한걸음 물러선 나를

 

짜다 너무 짜

 

뭐가 이리도 우리를 지치게 하는지 진저리 치게 하는지

불투명한 물음조차 이제는 싫어서

도무지 가시지 않는 게 악착같은 게

 

네게서 받아 든 사발, 그 속에 녹아 있는 독 같은 게

 

나는 엎지른다 모른 채 엎질러버린다

시커먼 걸레 옆에 그냥 천천히 썩어가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