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송승언 宋昇彦

1986년 강원 원주 출생. 2011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철과 오크』 등이 있음.

sunroomer@naver.com

 

 

 

재의 연대기

 

 

우리가 말한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우리가 이룬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한때 우리에게 집이 없었고

우리가 집을 갖게 되고

우리가 집이라 불렀던 곳이 산의 장막 되고

그 장막 거두어질 때

너희의 장소 될 때

그들의 터 되고

아무의 것도 아닌 자연 될 때까지

우리는 말했고

우리는 이루었지만

우리가 하려던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우리가 믿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집에서 연기 나고

불이 집을 삼키고

무너져내린 잔해 속에서 겨우 명멸하고 있는

잉걸불로 남았을 때

 

입 없던 우리가 입 만드느라 흘린 피가 입술 되고

뚫린 입에서 나오는 신음이 말 되고

절반은 알아들을 수 없는 그러므로

절반은 분명하게 들리는 말을 하면서

우리의 얼굴은 분노 슬픔 기쁨 뒤섞여

저들 꿈속의 괴물을 닮아갔지만

우리가 말한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살아 있는 책을 출간해야 했다

읽지 않은 책과 읽히지 않는 책으로 가득 찬 서가의 운명이

소방대의 가치관에 전적으로 내맡겨질 때

모국어의 운명을 아는 책들이 자살을 결심했을 때

책이 스스로 경험을 쌓고

우리의 필담을 비웃고

더 쓸모없는 장르로 진화하는 가운데

책의 분신을 지켜보는 와중에

 

우리가 마지막 꿈을 꾸고 깨어났을 때

아니, 우리의 깨어남이 마지막일 때

영원한 꿈으로 돌아가는 초입에

우리가 보았던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모르그에서의 하룻밤은 따뜻했지, 그것은

이 사회에 얼마 남지 않은 따뜻함이었어

우리는 서로의 정신병을 살피며

약을 늘리고 줄이고

입장료를 내고 들어오는 사람들을 위해

죽음을 공수해왔지

검은 눈처럼 쌓인 잿더미는

차갑지도 않고 부드러웠어)

 

이듬해 첫눈이 내리고서야 알았다

우리가 무엇을 보아왔는지

알고 난 뒤에 또한 알게 된 것들

그리 대단한 게 아니었다

 

우리의 몸이 빠르게 썩기 시작해서

여름이 온 것을 우리는 안다

소각장으로 옮겨진 뒤

일부는 불타 정신 되고

일부는 남아 물질 되었지만

울고 있는 사람들을 보니

여름이 오기 전까지 우리가 말해온 것들

그것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눈 뜨고는 보지 못해 마음으로만

봐야 했던 괴물 당신이

내가 믿던 신이라는 생각과

내가 당신을 닮아간다는 감각

그 사이에 바치는 기도

나는 헌금 생각만 했어)

 

신전을 짓자

아무것도 아니었던 말들을 하며

 

우리는 우리가 불타지 않는 곳으로 이사를 간다

신전을 짓자

 

 

 

아스모데우스

 

 

화났다

옳은 네가 싫어서

풀지 않고 넘겼던 난제에 대해 생각하면서

오늘도 나는 율법을 배우지만

당신이 아주 나쁘지는 않듯이

아주 옳지는 않다고 생각해

 

상황이 되면 고향으로 내려가려고 해

 

나는 몰랐어

내가 알았었다는 것을

뒤늦게 내가 알았었다는 것을

알았지, 봐

아는 걸 아는 게 이렇게 모를 일이다

 

세상은 좋은 모든 것들 내게 주고

나쁜 모든 일들 겪게 만들지

이 악마적인 힘

 

나는 좋을 거야. 좋다는 감각이 다 사라질 때까지. 그리고 무한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