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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류휘석 柳輝錫
1994년 충남 서산 출생. 2019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dhqpdl3@naver.com
거울에는 내내 텅 빈 것이 비치고
나는 사랑이 끝난 몸을 아무렇게나 던져둔다
물병을 물로 씻는 건 당연한 일인데
사랑이 끝난 몸은 사랑으로 헹궈낼 수 없고
지구는 선택되었다고 한다
아무도 거리로 나와 사랑을 외치지 않으면서
오로지 지구에서만 사람이 살 수 있다고
나는 텅 빈 소행성이고
지구에는 물과 사람과 사랑이 가득하다
새벽이 되면 종종 거리로 나가
곧게 선 구조물 앞에 가만히 서 있기도 했는데
지구에는 이만한 슬픔을 담아낼 봉투가 없고
나는 영영 수거되지 못할 것 같다
창문은 어쩌자고 저렇게 다량의 빛을 끌어안고 있을까
나는 이 도시를 차갑다고 표현해야만 하는데
거리의 끝에는 환한 가로등과
불을 끄러 온 사람이 풍경처럼 가만히 있다
어디를 눌러야 꺼질까요
글쎄요, 우리는 처음 본 것 같아서
사라지는 풍경마다 행선지를 물었다
그때마다 멀리서 빛과 굉음을 몰고 무언가 들이닥쳐
모든 걸 수거해 갔다
믿음
그의 이름을 부른 지 오래되었다 나는 해마다 그에게 새로운 이름을 붙여주었는데 얼마 전부턴 그도 이름도 떠오르지 않았다
무엇이 먼저 사라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하나의 이름과 하나의 몸을 가졌고
그것이 그에게는 불리했을 것이다 몇해를 지나오면서도 그가 정확히 어떤 존재인지 파악하지 못했으니까
아니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는 억울해할까 그가 나의 존재를 모를지도 모르지만
무수한 악몽을 지나쳐오면서 단 하나도 기억되는 얼굴이 없다
베개를 뒤집으면 거기에 새 이름과 새 얼굴이 있고
나는 매일 갈아입는다
이것이 일종의 구원이라면 누가 나의 이름을 부를 수 있을까 어디를 올려다보고 있어야 내민 손을 잡을 수 있을까
그도 이름도
그리고 나도
아주 오래된 것만 같다
어디선가 그가 실존하고 있다면
그리고 억울해하고 있다면
어쩐지 기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