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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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경 徐大炅

1976년 서울 출생. 2004년 『시와세계』로 등단. 시집 『백치는 대기를 느낀다』 등이 있음.

foodrobber@naver.com

 

 

 

가을육교

 

 

가을육교에서 깼다. 어젯밤엔 겨울다방에 앉아 있었는데. 가을참새 몇몇 햇볕 속을 종종거리고. 가을이불 덮고 가을베개 베고. 가을육교에서 다시 잤다. 가을하늘엔 바람에 흔들리는 고압선. 머리맡엔 누군가 두고 간 가을라디오 하나, 가을굴뚝 셋, 가을닭장 하나.

 

겨울다방에 앉아 있었는데. 어젯밤엔. 겨울다방에서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다가. 겨울골목을 빠져나와. 겨울광장을 가로질러. 겨울넥타이 풀어헤치고. 눈발 자욱한 겨울홍등가 걸으며 울었는데. 겨울웃음소리 붐비는 겨울술집에서. 겨울노래방에서. 겨울목욕탕에서. 겨울새벽에 겨울전차 타고. 차창에 머리 기대고. 흘러가는 겨울육교 바라보며 울었는데. 그리고 오늘 아침엔

 

가을육교에서 깼다. 가을육교 위로 가을직장인들 걸어가고 가을어린이들 지나가고. 나는 가을이불 걷어 개고 가을베개 햇볕에 말려두고 양치질한다. 가을넥타이 매고 가을가방 들고 출근 준비한다. 햇볕이 옮아가고. 고압선 그림자 바람에 흔들리고. 가을육교 위로 겨울그늘 덮이고, 덮이고.

 

전차 종소리 울리고. 바닥이 쿵쿵 울리고. 누군가 두고 간 가을라디오 하나, 가을굴뚝 셋, 가을닭장 하나도. 쿵쿵 흔들리고. 건너편 고가선로 위로 느릿느릿 겨울전차 지나간다. 마른 눈가루 흩날리고. 차창에 머리 기댄 겨울요나, 창백한 너의 겨울눈빛 지나간다.

 

 

 

케이블카

 

 

산 아래 골짜기에 얼어붙은 기차가 누워 있다. 어두운 눈보라가 휘몰아치며 기차의 부서진 지붕을 흔들고 산의 검은 주름들을 꿈틀거리게 한다. 차창 구멍에서 박쥐들이 쏟아져 나온다. 솟구치는 박쥐들의 비명, 그러나 차디찬 달빛이 냉혹한 서리처럼 그 소리를 응결시키고 대기의 거대한 침묵 속으로 삼켜버린다. 산 중턱에는 얼어붙은 기차역. 불 켜진 플랫폼 의자에 소녀가 앉아 있다. 그녀의 무릎 위로 박쥐 한마리 내려앉는다. 소녀의 머리가 있던 자리에, 작고 둥근 공 모양의, 균열하는, 은빛의, 속삭이는, 별이 천천히 회전하면서 그것을 바라본다. 플랫폼 위 공중으로 표시등을 깜박이며 케이블카가 지나간다. 박쥐의 날개가 별의 속삭임으로 물든다. 박쥐가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오른다.

 

케이블카 안에서 원숭이와 서대경씨가 도시의 밤을 내려다보고 있다. 눈보라 치는 검은 야산들, 광장 시계탑을 중심으로 뻗어가는 도로들, 그리고 그 위를 기어가는 빛의 얼룩들이 서대경씨의 어깨 위에 앉은 원숭이의 붉은 눈동자 위로 천천히 흘러간다. 「이 도시는 끝없이 변신하고 있네.」 서대경씨가 말한다. 「밤마다 골목들이 자라고, 갈림길이 생겨나고, 거미줄처럼 얽혀 새로운 동네를 만들어내지. 홍등가가 있던 자리에 공장 지대가 들어서고 도박장 골목은 버려진 묘지 터가 되었다네. 매일 밤 상가 불빛이 옮겨가고, 막다른 길이 전차 선로가 되고, 공터마다 잿빛 철탑이 세워지고, 불면의 천장 위로 고가도로가 뻗어가고, 그리고 조금씩 위치를 바꾸는 저 검은 산들. 얼어붙은 기차들. 별의 소녀들. 저 모든 것이 내 의식의 실체를 변화시키고, 내 문장들을 휘게 하고, 내 시를 얼어붙게 하고, 소리 지르게 한다네.」

「별의 소녀는 거미 여왕이기도 하지. 어릿광대가 비명이기도 하듯이. 자네가 쓰는 모든 시 속엔 그녀들이 숨어 있어. 그녀들이 자네를 쓰게 하는 거야.」 바닥으로 내려서며 원숭이가 말한다. 「하지만 자넨 거미 여왕과 별의 소녀 사이에서 아무것도 보려 하지 않지. 그녀를 변신케 하는 눈〔雪〕의 광기, 자넨 그것만을 갈망할 뿐이지. 이제 난 자네의 악취미엔 질려버렸다네.」

 

케이블카가 야산 꼭대기의 불 켜진 역 안으로 들어선다. 원숭이가 앞장서고 서대경씨가 팔짱을 낀 채 따라 내린다. 창밖으로 눈보라가 휘몰아친다. 서대경씨가 창으로 다가가 아래를 내려다본다. 원숭이가 서대경씨의 어깨 위로 뛰어오른다. 서대경씨는 나부끼는 나뭇가지들 사이로 저 멀리 보이는 얼어붙은 기차와 기차역 플랫폼의 침침한 불빛이, 그리고 공중을 맴도는 박쥐들의 검은 형체가 서서히 눈보라 속으로 지워져가는 것을 지켜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