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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이다희 李多熙
1990년 대전 출생. 201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zldpfmzldpfm@naver.com
공복
때를 놓쳐 끼니와 끼니 사이에 끼니를 챙겼다. 조용한 식당에 들어가 주문을 하고 목도리를 벗어 빈 옆자리에 두었다. 혼자 온 여자 손님이 잠시 두리번거리다가 내 옆 식탁에 와 앉는다. 나도 혼자 온 여자 손님이므로 그녀는 무심코 내 옆이 편하다고 느꼈을 것 같다.
숟가락과 젓가락을 나란히 놓고도 시간이 남아서 나는 목도리에 붙은 머리카락을 한올씩 떼어 식탁 위에 올려둔다. 정전기가 일어 머리카락들은 식탁 위에 납작하게 몸을 붙인다. 조금 넘치게 따라서 흘러내리는 물처럼 시간이 남는다. 나는 냅킨을 뽑아 물을 닦는다.
25일이 지났는데 식당 구석에는 크리스마스트리가 있다. 병을 앓고 난 후 스스로가 정말 괜찮은지 알아보기 위해 천천히 달려보는 사람의 속도로 크리스마스트리에 있는 작은 알전구가 깜빡거린다. 길고 긴 국수 면발이 입안에 가득 들어찬다. 어두운 뱃속이 환해진다. 마법이 풀려 아무렇게나 늘어진 머리카락들이 구불거리다 흩어진다. 마법이 풀려 아무렇게나 늘어진 인형들의 낮잠처럼.
나는 길고 뜨거운 국수를 열심히 먹고 땀을 흘린다. 손목에 있던 검정 머리끈을 잡아당겨 머리를 높이 묶었다. 계속 땀이 흘러내린다. 계산을 하고 식당을 나와 다시 머리를 풀었다. 머리끈은 다시 얌전히 왼쪽 손목에 있다. 머리카락이 목에 닿자 목도리를 두고 온 것이 생각났다. 나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야 한다. 어쩔 수 없이 나는 빙글 돌았다.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
트렁크
오늘만 해도 트렁크가 두번이나 뒤집어졌어 호텔 로비에서 어떤 남자가 트렁크 좀 보자고 했지 나는 거절했어 여기에 뭐가 있을 줄 알고 당신이 알면 깜짝 놀랄걸 엘리베이터 앞에 섰지 남자는 뒤따라와 자꾸 말을 걸어 그럼 이야기나 하자고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할 줄 알고 룸 앞까지 따라온 남자가 물어봐 나도 들어가면 안 되냐고 나는 짜증이 나서 내가 북한 여자라고 대꾸했어 구글에서 노스코리아를 검색하라고 갑자기 내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나도 모르겠어
남자를 밀치고 룸으로 들어왔어 방에서 조금 쉬다가 호텔 지하 식당으로 내려갔고 거기서 그 남자를 또 봤지 다른 여자한테 또 트렁크 좀 보자고 말을 하고 있었고 그 여자는 난처하게 웃고 있었어 아시안이더군 이제 그 남자의 취향을 알 것 같았어 나는 수프와 디저트까지 나오는 정식을 주문하고 이른 저녁을 먹었어 음식은 꽤 입에 맞았고 지배인에게 가서 내일 조식을 먹을 수 있는지 물어봤지 그때까지도 그 남자는 로비에서 서성거렸어 나는 트렁크에 그를 담는 상상을 하다가 다시 방으로 올라왔지
방에는 싱글사이즈 침대 하나 간이탁자 하나 아주 작은 냉장고와 냉장고 위에 놓인 전기포트가 있어 간이탁자 위에는 내가 마시다가 둔 커피가 있고 재떨이가 있어 이 호텔은 건물 전체가 금연인데 재떨이가 있어 지배인은 신중한 것일까 너그러운 것일까 생각하다가 구글 검색창에 north korea를 쳤어
밤이 깊어지고 다시 방을 나왔어 로비에는 또 그 남자가 있었지 이번에는 내가 먼저 인사하고 당당하게 그의 앞을 지나갈 생각이었어 그 남자 피곤해 보이더라 그런데도 나한테 또 트렁크를 보자고 하는 거지 내 손에는 트렁크가 없는데 살면서 노스코리아 우먼 처음 본다고 웃더라 난 그가 불쌍해져서 컵라면이라도 사주고 싶었지만 난 돈도 없고 여기엔 한국 편의점이 없으니까 어쩔 수 없지
내가 밖으로 나가려고 하니까 남자가 앞을 가로막았어 여기는 밤 되면 너무 위험하다고 나는 갑자기 오늘 있었던 일을 털어놨어 공원 벤치에 앉아서 샌드위치를 먹고 있었는데 그사이에 소매치기를 당했다고 지갑에 사진도 있는데 너무 아깝다고 그가 날 진심으로 위로하는 거야 나는 눈물이 핑 돌았어 그가 방에 올라가서 이야기하자고 하더라 나는 3초 만에 눈물이 그쳤지 아임 노스코리아 우먼 소리치고 뒤를 돌아 엘리베이터로 걸어갔어 뒤를 돌 때 얼핏 그 남자 얼굴이 십년은 늙어 보이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