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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김소형 金昭亨
1984년 서울 출생. 2010년 『작가세계』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ㅅㅜㅍ』 『좋은 곳에 갈 거예요』 등이 있음.
voixfleur@gmail.com
죽지 않으면 살 수 없는 마음*
이야기는 동의 없이 시작됐다가 동의 없이 끝난다
너는 물속에 발을 담그고
아무 장이나 읽는다
페이지는 반쯤 젖어 있고
발은 아무 감정 없이 무심하게 놓여 있을 것이다
어제는 처음 진박새를 봤어
윗가슴은 검었고 흰색 뺨이 작고 보드라웠지
계단에 놓인 새를 보고 누군가
엄마 저기 새가 있어
외쳤고
너는 하늘을 쳐다본다
유리 건물에 구름이 비치고
건물에 부딪힌 새는 감정을 몰라 무심하게 놓여 있을 것이다
이제 너는 어쩌면 좋을지
무리생활을 하던 새는 왜 여기에 있고
계단을 올라가려던 발은 왜 여기에 있을까
사람들의 시선이 모인다
어제는 처음으로 진박새를 만져볼 수 있었어
화단에 놓인 새의 발이 하늘에 향한 채 놓여 있다
발 사이로 구름이 지나가고
이야기는 끝났지만
너는 젖은 페이지의 귀퉁이를 접고
미래의 화단을 찾는다
아무것도 상상할 수가 없어서
—
* 고(故) 문중원 기수 부인 오은주씨 인터뷰 중 “죽지 않으면 살 수 없는 마음이었던 건데 그 마음을 제가 감히 상상을 못하겠는 거예요.” 경향신문 2020.3.21.
being alive
삼척이라는 단어가 좋아
파도 소리를 들으며 맨발로 너와 걷는 건 더 좋아
노인이 되면 새로운 건 다 이상하게 느껴진다는데
물의 온도가 높아져도 느끼지 못하는
해수어가 된 기분으로
바다를 생각하는 건 더 좋아
모래 알갱이는 머리카락 사이에 엉켜 있고
그걸 전혀 모르는 사람들을 쳐다보며 일을 하는 것도
그걸 알고는 툭툭 털어주는
물마루 같은 너의 얼굴을 보는 건 더 좋아
풀벌레 소리를 녹음하다가
버튼을 누르는 걸 잊었다고 말하는 너를
죽어도 날 잊지 말라는 내 말을 지키고
산 사람은 살아야지 하는 사람들의 말에
기억하면 더 고통스럽죠
그런데 잊을 순 없죠
단호하게 말하던 네가
사는 게 두렵다고 말할 때
사는 게 두렵지 않다면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어?
한없이 가볍게 말하는
나를 잃어버린 내가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