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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이희형 李喜亨
1991년 서울 출생. 2018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hyung0615@nate.com
막창
선배는 조문에 서툴렀다
한낮부터 막창에 막걸리를 마시면서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했다
밤이면
학교 앞 공원에서 주차장에서
벤치에 가방과 맥주를 올려놓고
배드민턴을 함께 치면서
별일 아닌 일을 별일처럼 이야기하면서 시간을 버리는 일들은
자주 바닥에 닿는 셔틀콕과는 무관한 일이라
어쨌든 보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젓가락으로 간을 뒤적이면서
선배 그 사람은 죽었어요
말했다
나는 부고에 서툴렀고 그건 젓가락질에 서투른 나와는 무관한 일이라서
정말 별일이다
선배가 말했다
불판이 달궈지고 있었고
우리는 빈 접시를 놓고
소주 한병을 더 시키고
다 타버린 마늘을 계속 뒤집었다
후두둑
창밖에서
셔틀콕들이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이제 예전만큼 자주 걷지 않지만 방 안에서도 산책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이 하나씩 미루어지는 동안
봄은 다 끝나버린 것 같습니다
해가 바뀌고
매일 한명 이상의 사람이 죽고
병에 걸리는 일이 계속되면서
마스크는 이제 일주일에 한번만 살 수 있습니다
당신과 나는 월요일에 약국에 가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거리라는 것도 갖게 되었습니다
보고 싶지 않은 사람들을 보지 않아도 되는 이유가 겨우 생겨나다가
그것은 이제 모두를 위하는 일이 되어버립니다
꽃은 다 져가는 중인데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한 사람만큼의 자리가 자라나고 있습니다
나는 이게 꼭
누군가의 빈자리 같은데요
그럼에도 벚꽃 잎이 비처럼 내리는 봄도 분명히 있었습니다
아파트 사이에 놓인 의자에 앉아 있으면
떨어지는 잎들이 사정없이 얼굴을 때렸던 일
그건 가볍고 그건 아름다워서 나는 손을 자주 뻗었고 손등에 내려앉은 꽃잎 몇장을 자주 생각했지만
떨어진 잎은 결국 떨어지게 되는 것이라
결국 아름다운 건
언제나 단 한번뿐이었는데요
그런가 하면 비 내릴 때 물을 잔뜩 머금은 꽃잎들이 달콤한 과일처럼 후두둑 떨어지고 땅바닥에서 빗물이 터지는 이런 날에 나는 침이 고여서 우산을 들고 밖으로 나가고 싶었는데
삼월이 다 끝났는데도
아무도 시작하지 않고 있습니다
당신은 이미 다 알고 있을 테지만
한번 들은 이야기를 다시 전해 듣는 것과 이미 보았던 영화를 돌려 보는 것을 나는 좋아합니다 당신이 나를 좋아한다는 말과 내가 당신에게 했던 말들을 당신의 목소리로 다시 들어보는 일
나는 이제 예전만큼 자주 걷지 않지만
방 안에서도 산책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요
그러다보면 마주치는 사람이 없어 사람이 너무 멀다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다들 어디에 있는 걸까요 만나지 않아도 헤어지는 사람들이 분명
지금도 막 생겨나는 중인데
나는 천천히 꽃잎을 맞고 있는 중입니다
봄은 계속해서 떨어져가고 있는데요
아마도 이때쯤이었을 것입니다 당신이
내가 선물로 주었던 시계를 잠시 말려두려다
어딘가에 두고 돌아와버린 건
아마도 지금일 것입니다 누군가
길가에 가지런히 놓인 벚나무를 따라 천천히
사라지고 있는 건
느리게 날아가는 꽃잎들이 그의 등 뒤로 따라가 묻습니다
이게 정말 끝은 아니라는 듯이
길 끝에서 등은 단호한 모습으로 사라집니다
이제 끝은 지긋지긋하다는 듯이
벚나무 밑에 앉아 있습니다
당신과 나의 머리 위로
가만히 꽃잎이 쏟아져버릴 때
우리는 약국에 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