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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김경윤 金璟潤
1957년 전남 해남 출생. 1989년 무크지 『민족현실과 문학운동』으로 등단.
시집 『아름다운 사람의 마을에서 살고 싶다』 『신발의 행자』 『바람의 사원』 『슬픔의 바닥』 등이 있음.
kky5787@hanmail.net
달마의 슬하
고단한 필생의 길을 끌고 마음수레 굴리며 여기까지 왔다
길 위에서 가만가만 부르던 그리운 이름들
화산 현산 지나고 월송 서정 외돌아서 가파른 달마에 오르니
산 아래 풍경들은 납화처럼 납작 누워 있다
산그늘 내려와 저수지에 발목 적시듯
어스름 기척도 없이 슬며시 숲길 어루만질 때
바다는 어느새 붉은 노을방석 깔아놓고
달마는 애저녁에 어둠경전 펼쳐놓았다
어둠이 바다와 하늘의 경계를 지웠으니
저 무구한 하늘에 무슨 글자가 필요할까
별빛의 불립문자여!
스스로 빛나는 것이 너의 길이라면
그저 별빛 아래서 어둠 경(經)을 읽는 것은 나의 일
여기 달마의 슬하에선 오만가지 길들이 하나의 길로 눕고
어지러웠던 생(生)의 물음들도 마침내 단순해지는 것을,
어느새 이곳에도 가을이 들어
울창했던 녹음의 맹목이며 만발했던 꽃들의 장엄도
수묵 같은 농담으로 색을 벗으니
하늘에는 솜털처럼 뭉쳐졌다 흩어지는 구름뿐이다
그 여름 사구미
땅끝해안로 벼랑길 모퉁이 돌아가다
불쑥 출몰한 해무에 발목 잡힌 마음이 사구미에 주저앉았다
사구미는 늙은 고양이처럼 적막한 포구
여름이 와도 손 없는 해변민박 평상에는 파란만장 펼쳐놓은 바다가 종일 책갈피만 넘기며 글썽이다 저물고
저녁을 뒤따라온 지친 길들도 모래언덕에 발목을 풀어놓았다
얼마나 오랫동안 삼키고 뱉었는지 그 이름도 사구미(沙口味)란다
고양이 살결처럼 곱고 부드러운 사구(砂丘)에 어둠이 깔리면
바람은 서편 하늘 별빛들 끌어다가 바다 위에 은근슬쩍 뿌려놓고
민박집 달방에 세 든 나는 창문 너머 캄캄한 바다만 바라볼 뿐
저 건너편 뿌연 등댓불이 건네는 위로의 꽃 한송이도 차마 받지 못하고
그저 꽃 같은 불빛 끌어안고 밤새 뒤척이다
입안 가득 머금은 침묵의 말들 모래톱에 뱉어놓았다
더는 눈물로 생을 보내지 말자고 다짐의 몽돌들 심연에 던져놓던 흰 밤도
부질없어라 만 갈래로 흩어지는 포말들!
잠귀에 고이는 파도소리에 뒤척이다 깨어보면 금 간 유리창 아래까지 밀려와 어깨 들썩이던 바다
날마다 날마다 자꾸 밀려오는 슬픔의 만조(滿潮)여
사는 일이 때론 하염없이 울먹이는 파문 같은 것이어서
누구나 울면서 파도소릴 들어야 할 때가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