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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김상혁 金祥赫
1979년 서울 출생. 2009년 『세계의문학』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이 집에서 슬픔은 안 된다』 『다만 이야기가 남았네』 『슬픔 비슷한 것은 눈물이 되지 않는 시간』 등이 있음.
redinsilver@naver.com
마을 광장
길을 걷는다는 것은 하나의 꿈
길을 따라 걷다가 하나의 광장을 마주한다는 것은 또 하나의 꿈
마을 한복판 원형 광장의 분수대에 이르기까지
아무런 의심 없이
아무런 고민 없이
아침에 눈 뜨고 대충 먹을 것 삼키고 어제의 험한 이야기 흘려들으며
문을 박차고 나가서 곧장 향한다는 것은
모두의 싸움과 놀이의 양상이 거리 가득 눈부시게 흐르는 햇빛 속에 은폐되었다는 것이다
비 쏟아지는 날 우리가 사랑과 모함의 웅덩이를 첨벙첨벙 신나게 밟으며 같은 곳에 도착하리라는 것이지
광장에 모인다는 것은
광장 분수에 이른 뒤에야 질문을 시작하는 것이다
분수대 옆 길쭉한 조경수 몇십그루 심어둔 자리 ‘숲’의 팻말 앞에 모여서
어제의 좋은 사진과 다르지 않은 사진 한장을 이내 남기리라는 것이고
서늘한 그늘도 간편한 우산도 되지 못하는 숲
그편에 서서 분수대 너머 낮고 평범한 지붕들이 끝없이 펼쳐진 마을 쪽으로 시선을 던지는 것이다
하나의 꿈마저 잊은 채
광장에서 가장 먼 집이 광장으로 걸어오기까지
누군가 나무를 오른다는 것은
올라가는 물을 바라본다는 것은
광장이란 어두워지기 전에 돌아가 편히 잠들어야 한다고 모두를 부추기는 함정이라는 것이지
그러자 함성이 울리는 더 깊은 광장을 향하여 걸어가는 것이다
버스정류장
깊은 잠에 빠진 사람더러 죽은 것 같다고 말하면 안 됩니다.
말이 씨가 되면 어쩌지? 하는 생각에 숨을 멈추고 귀 기울이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이든 먹고 마셔서 죄송하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멸망하여 둘만 남는다면? 그러다 나만 남는다면? 그려보는 것이고
우는 나 쳐다볼 사람 다 죽었는데, 내가 얼마나 울게 될지를 가늠하는 것입니다.
버스정류장까지 나갔다가 허겁지겁 돌아왔고 죽은 듯한 그를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불변하는 얼굴을 지키는 시간이란 얼마나 길고 지겨운지? 내 사랑과 인내는 거기까지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베갯머리 그가 펼쳐둔 책장에서 어제까지의 그의 기쁨을 짐작하는 것입니다.
천장을 바라보는 그의 연약한 꿈과 이야기를 조금 비틀어두면 어떨지?
눈까풀 밑을 떠도는 먼지 같은 세계가 잠자는 이마 위로 조용히 쌓이는 것입니다.
죽은 것같이 잠에 빠진 사람더러 잠시 후에 그를 깨울 침묵이 가짜라고 말하면 안 됩니다.
세상 멀쩡한 가운데 그가 혼자 남더라도
다시 버스정류장까지 나를 잘 밀어내고 이번에는 문을 잠그라고 충고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