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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정화진 鄭華鎭
1959년 경북 상주 출생. 1986년 『세계의문학』으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 『장마는 아이들을 눈 뜨게 하고』 『고요한 동백을 품은 바다가 있다』 등이 있음.
loquens-school@hanmail.net
버지니아
똑, 똑, 계세요? 그녀는 왜, 그 먼 버지니아로 떠났을까요
크로커스 기르는 법을 알려드리지요
오늘은 봄바람에 눈이 부셔
고양이와 함께 물푸레나무 가지 위에 새집을 얹어둡니다
지붕 위에 굶주린 왜가리 한마리
오래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네요
아이들은 자전거를 타고 개울을 건너 숲으로 숲으로 가고 없어요
푸른 꽃이 피는 정원은 햇살 아래
슬픔을 머금고 있군요
그대는 왜 그렇게도 먼 숲, 버지니아로 떠났나요
똑, 똑, 수국은 자르지 말아주세요
장식용으로도, 실내로도 들여다놓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창가 유리 화병에 꽂힌 가위들, 단풍잎들이 벌써 떨고 있네요
멀리서 겨울이 오려나봐요
토분을 감쌀 볏짚 몇단을 당신은 구해주실 거죠?
추위가 오기 전 크로커스 기르는 법을 알려드릴게요
내일은 또 그녀가 검은 흙을 다독이며
구근을 심겠군요
왜 그리도 먼 버지니아 숲으로 그녀는, 그냥 그토록 말없이 그 겨울에, 떠나야만 했을까요
꽃집 소녀
경첩들, 고리들
그녀 떠나고 열린 서랍 사이 웨딩드레스 아사 천이, 뜨개실 꽃문양 몇조각이, 삐져나와 있네 살포시 아침이네
그녀 떠나고 이슬비가 뜰을 적시고 강아지풀들 머리 숙이네
그녀 떠나고 작약은 피고 바람 불고 단풍 이미 붉어져 꽃잎 날개 하염없이 흩뿌리네
얼룩무늬 아기 고양이 느티나무 가지 위에서 내려오지 못하네
그녀 떠나고 경첩 녹슨 고리가 떨어지네 수국은 보랏빛 뜰 한켠에 부풀며 아프네
그녀 떠나고 유리공예사 자그마한 불 조리개 속 꽃을 심고 둥근 유리 덧씌워 흔드네
하염없이 첫눈이 오네 눈이 오네
바람 불고 겨울은 경첩을 흔들며 오네 북풍의 거리들 의자들 싸늘히 식어가네
마을의 노파들 모포로 몸을 감싸고도 집 밖으로 나오지 못하네
그녀 떠나고 꽃집 소녀 가등을 켠 듯 노란 국화꽃 위에 서리 내리고 북국의 소식을 전하러 쇠기러기떼 날아오네 호수가 얼어붙고 있네
거짓과 혼돈과 무지와 헛된 신념과 분노와 열정과 사랑과 비극을 볍씨 물듯
흑두루미들 강변 모래밭을 찾네 그녀 떠나고
봄은 언제 오려나 꽃집 소녀 눈이 멀었네 그는 붉은 토분을 안고 오랜 기다림에 지친 채 옛집으로 쓸쓸히 돌아오네
단풍나무 위에 언 눈꽃들, 녹슨 경첩들, 고리들, 흔들리네 그녀는 언제 돌아오려나
꽃집 소녀 떠나고 바람 불고 첫눈이 오네 하염없이 검은 눈 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