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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김중일 金重一
1977년 서울 출생. 200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국경꽃집』 『아무튼 씨 미안해요』 『내가 살아갈 사람』 『가슴에서 사슴까지』 『유령시인』 등이 있음.
ppooeett@naver.com
유독 무릎에 멍이 잘 드는 너와 산책하는 일
*
빌딩 대형 스크린에 단풍 든 산맥들이 펼쳐지다 까맣게 불탄 산봉우리에서 멈춘다.
산은 구부린 공중의 무릎 같고, 그중에 불탄 산은 멍든 무릎 같다.
기어오르던 벼랑에서 그만 미끄러지는 절체절명의 어느 순간
자일 한줄이 허공에서 나를 잡아채듯
너의 손이 나를 붙든다고, 할 수도 있지만
실제는 내가 스크린에 시선을 빼앗긴 채 넘어지려는 너를 아슬하게 붙잡는다.
다행히 너의 무릎은 간신히 바닥에 찧지 않는다.
너는 날 보며 배시시 웃는다.
우리는 뒷산 산책로로 들어선다.
길섶의 둥근 무덤은 뒷산의 무릎 같다.
뒷산은 무덤의 수만큼 낮게 무릎 꿇고 있다.
산책이란 인생에서 어떤 의미일까.
인생이 곧 산책이 아니겠냐는 생각은 일단 접어두고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그리고 한가지만 더.
네가 걸핏하면 넘어지는 이유는 무얼까.
놀랍도록 천천히 걷는 네가 급히 걷거나 뛰는 사람들에 비해 유독 잘 넘어지는 이유는 무얼까.
너의 싱거운 농담처럼 정말 이 지구의 자전 속도 때문일까.
세상 누구도 1초에 465미터의 속도로 움직일 수 없는데
나보다 두배로 느린 네게는, 두배로 빨리 지구는 자전한다.
지구의 자전 속도;
식탁 위에 남겨진 눈물 젖은 음식들과 음식이 담긴 식기들 아직 흘리지 않고 용케 참고 있는 눈물이 가득한 투명한 유리컵을
넘어뜨리지 않고 다음 사람 앞에 그 위치 그대로 똑같이 놓기 위해, 순식간에 식탁보만 빼내는 속도.
지구의 하루하루는 한장 한장 빼내는 얼룩진 식탁보.
그 걷히는 식탁보에 넘어지며 테이블 밖으로 딸려 나가버린 사람들,
내가 아는 죽은 사람들.
자주 넘어지는 너는 그 사람들과 많이 닮았다.
너는 그 사람들을 나보다 더 못 잊는다.
내가 잠시만 한눈팔면, 넘어지는 너는 하루아침에 테이블 밖으로 식탁보에 딸려 나갈 것 같다.
**
우리의 우주가 넘어지는 순간
바닥에 찧고 꿇은 무릎이 지구야.
그래서 지구는 매일 검붉게 물들고 욱신거린다.
무릎에 찬 물처럼
바다가 차지.
지구는 우주의 무릎이다.
우주는 매일 넘어지고
그때마다 어 어
밀물의 바다가 해안으로 출렁 넘치고
바람이 모든 창문을 침몰시키고
배가 기울고
빌딩이 흔들리고
정전된다.
우주는 최소 하루에 한번 벌써 수십억번째 넘어지고
이십사시간 지구의 절반은 검게 멍들고
물이 찬 무릎처럼
지구의 안쪽은 온통 검은 멍으로 가득 차도
하루에 한번은 무릎 짚고 일어선다.
시커멓게 멍든 무릎으로 툭툭 털고 일어서면
하늘 땅 바다가 온통 다 같은 멍빛이다.
양수처럼 고요한 멍들 속에 둥둥 떠 있는 죽은 사람들.
죽은 사람들 걱정 그만 시키게,
오늘은 부디 넘어지지 말고 넘어가자 당부하며
우리는 메신저를 닫고 각자의 자리에서 퇴근을 준비한다.
퇴근길 우두커니 멈춰 선 듯 유독 천천히 걷고 있는 너의 손을 뒤에서 꽉 붙잡는다.
아무런 장비도 없이 맨몸으로, 놓치면 끝장인 벼랑에 매달린 것처럼
너의 손을 낚아채는 바람에 너는 그만 놀라며 주저앉듯 넘어진다.
너의 무릎에서 저녁이 순식간에 멍빛으로 올라온다.
황급히 너를 일으켜 세우는
그 순간에도 아랑곳 않고 너의 시선이 꽂힌 저 멀리
우리가 수시로 산책하는, 묘지가 유독 많은 우리 동네 뒷산 산책로가 산불로 활활 훨훨 타오르고 있다.
백자
온 세상에 무수히 실금이 가 있다
봄날의 아지랑이에서 한겨울의 나뭇가지까지,
무수히 무심한 얼굴들의 주름들
특히 네 입술의 주름들, 키스하는 순간 산산이 깨질 것 같다
기어이 백자를 깨뜨릴 듯 검은 새 한마리가 내 정수리 위로 화살처럼 스치고 간다
머리카락이 백자 위로 난 실금처럼 쭈뼛 선다
이러다가 내 머리 바로 위에서 백자가 산산조각 날까 무섭다
내 머리 위에서 땅거미가 내 머리카락으로 거미줄을 치고
밤마다 내 꿈 밖으로 달아나는 것들이 걸리길 기다린다
달아나다 공중에 난 실금에 걸려드는 순간 백자가 산산조각 나는 꿈
하나뿐인 백자에 누군가 매일 던지는 짱돌처럼 해와 달이 눈부시게 날아든다
백자 한쪽에 오늘은 검은 구멍이 뚫린 듯 먼 산의 연기와 불길,
연기와 불길을 뿜으며 하늘로 까마득히 추락하듯 산 넘어 멀어지는 비행기
너는 거대한 산불을 흔들리는 눈으로 바라보며
우리에게 언제나 단 하나 남은 백자를
무심히 내쉬는 한숨에도 재처럼 허물어질 온통 실금투성이 오늘 하루를 두 손으로 조심히 들어올린다
무척
깨지기 쉬우나
그래서
깨지지 않는다
사람들의 유골이 담긴 오늘의 백자를 검은 창에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