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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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목  

1981년 서울 출생.

시집으로 『연애의 책』 『식물원』 『작가의 탄생』 등이 있음.

eugenemok@naver.com

 

 

 

사인

 

 

내게는 좋은 부엌과 좋지 않은 부엌이 있습니다.

 

기왕이면 좋은 부엌을 선택하고 싶어요.

나는 좋은 부엌에서 요리를 해요.

 

비싼 칼로 잘 익은 레몬을 정확히 반으로 잘라요.

 

인덕션 위에는 수프가 끓고 있어요.

레몬은 전기를 끄기 전에 넣을 거예요.

 

내가 요리를 하면

부엌의 모든 것이 나를 따르기 시작합니다.

 

깊이가 다른 냄비들

크고 작은 팬들

 

접시의 무늬는 특히 아름다워요.

 

나는 요리를 하고

설거지는 하지 않아요.

 

그런 건 저절로 되어버리는 세계니까요.

 

좋지 않은 부엌에서 당신은

너무 오래 서 있었네요.

 

냄새나는 개수대에서

어제 먹은 것을 떠올리고 있죠.

 

아마 배 속에도 같은 것이

들어 있겠죠.

 

당신이 숨을 쉬면 썩은 냄새가 나요.

 

당신은 여자를 기다리고요.

 

밤에는 식탁 의자에 앉아 혼자서 사정했어요.

구겨진 휴지가 사방에 흩어져 있네요.

 

현관에는 쓰레기가 가득해요.

 

그러지 않기가 어려운 것이 당신의 삶이라는 것을

당신은 당신 자신을 통해 오랫동안 실천해왔어요.

 

당신의 방에서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죽었는지

세어본 적이 있나요?

 

너무 오래 서 있었어요.

당신의 부엌에는 한조각 빛도 들지 않는데요.

 

나는 좋은 부엌을 가졌지만

오직 시를 쓸 때만 부엌은 여기 나와 함께 있어요.

 

시로 끓인 수프와 시로 자른 레몬

시로 집어 든 칼

 

좋은 부엌에서 좋지 않은 부엌으로

지금부터 나는 옮겨갈 건데요.

 

당신은 레몬 향을 맡고 고개를 돌려요.

 

어둠 속에 내가 서 있죠.

 

당신이 내 손에 죽어가는 모습

보이나요?

 

나는 아름다운 무늬가 그려진 그릇에

뜨거운 수프를 담아요.

 

더러운 바닥에 당신은 누워 있어요.

 

벌어진 입에서 구더기가 기어 나와요.

방금 눈꺼풀을 비집고 구더기 한마리가 들어갔어요.

 

나는 수프를 맛있게 먹어요.

 

 

 

사인

 

 

한참 만에 그는 밖으로 나왔다. 안에서 있었던 일들은 전부 잊어버리자. 닫히는 문을 보며 그는 생각했다.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여자를 찾아간 것이었다. 여자가 감추었던 것들을 전부 보고 싶었다. 여자는 매일 밤 자위를 하고 다음 날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 일어날 것이다. 그는 여자 생각을 하며 발기하지 않는 육체가 낯설었다. 여자 생각을 하면 그는 항상 발기했었다.

 

여자를 그는 죽이고 싶다.

 

여자가 잠든 사이에 목을 조르거나

베개로 얼굴을 덮으면

 

여자는 그 어느 때보다 힘차게 몸을 움직일 것이다. 여자는 격렬하게 움직이면서 잠시 동안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여자는 살고 싶어할까? 여기서 그는 발기한다. 빠르게 끝낼 자신이 있었다.

 

어쩌면 좀더 오래 그 일을 하며 여자와 시간을 보낼 수도 있을 것이다.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할 때까지. 죽여달라고 애원할 때까지. 여자와 함께 시간을 보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럴 때 여자의 사인은 다르게 판명된다.

 

후자인 그는 불꽃처럼 터지는 벽의 핏자국과 구름처럼 떠 있는 바닥의 핏물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집에 돌아오면 여자가 차린 밥을 먹고

잠들기 전에는 여자와 섹스를 하고

 

남자는 그것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는 맞은편 의자에 여자를 앉히고 자신도 식탁에 앉았다.

여자는 마침 저녁을 먹으려던 참이었다.

 

창문 밖에는 레몬을 닮은 것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