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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한연희 韓姩熙
2016년 창비신인시인상으로 등단.
시집 『폭설이었다 그다음은』 등이 있음.
hanyama@hanmail.net
불가사의한 통조림
북유럽 곳곳에서는 정어리를 먹는다
나는 참치를 먹지만 우리는 같은 난류에 속해 있다
첫 낚시에서 낚아 올린 수확물에 대해 난감해하다가
이 작고 귀여운 납자루를 존중하면서
이대로 나도 반짝반짝하다가 사라져버리면 좋다고 여기는 것이다
지구에 머물러 있는 가시고기와 우렁이가 나를 대신해 잘 살아냈으면
살짝 비리고 쿰쿰한 냄새를 맡으면서 아직 오지 않은 멸망이란 단어에 대해 곰곰이 따져보는 것이다
오늘은 분명 세계 참치의 날이라고
옆에 앉은 아이들이 수군대며 기다리고 있다
무엇을 기다리는 것일까 나는 너희들에게 줄 것이 없음에도 여기에 서서 낯선 것을 조심하세요 어디로 가버리면 안 돼요 주의를 준다 너희들은 분명 나를 보는 것 같으면서도 전혀 다른 곳을 응시한다
점점 배가 불러와요 선생님 점점 물이……
강변의 수면이 임계점을 넘어 산책로를 잠식한다
우리는 꼼짝하지 않고 목격자가 되기로 한다
얘들아, 그런데 나는 선생이 아니야 나는 참치를 뜯어 먹고 자라난 불가사리쯤 될까 여기는 바다가 아니니까 다슬기 정도쯤 될까
강바닥에는 둥글고 풍족한 공물이 가득히 쌓여가는데 어째서 그것은 썩어가지 않을까 내가 잠시 잠들어 있는 동안 지구의 생명은 어디론가 훌쩍 건너간 모양일까 너희는 수풀에 모여 앉아 절대 자라지 않는 종족, 그래서 이렇게 흔들리고 있는 걸까
아스파라거스와 베체트병
메니에르병과 람부탄
콘비프 옆에는 알츠하이머
이국의 글씨만 가득한
불가사의한 세계에 마음을 빼앗기게 내버려두고서
무엇이 밀봉된 것인지 모른 채 낡은 깡통이 부풀고 있으니까 부패한 세계는 곧 터져버리고 말 테니까 그럼 속 시원히 억울했던 일에 대해 말할 수 있을 테니까
우리의 할 일은 그저 눈동자를 통조림 속에 가만히 담아보는 것이다
유통기한이 일주일 남은 것을 꺼내두는 것이다
그렇지만 무심코 고리를 당겨 개봉한 순간
찰랑이는 수면 아래 온갖 멸종된 이름들이 떠올랐습니다
딸기해방전선1
딸기가 점점 썩어버렸다
그런 당연한 일들이 벌어지곤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맨 처음 딸기를 수북하게 담은 날이 떠올랐다
누구의 집이었지
재미없는 삶이었지
아니 달콤한 말이었지
생경한 거실 한복판에서 멍이 든 손목을 내려다봤다
찬장에 이가 나간 그릇이 쌓여갔다 냄비는 손잡이를 잃고 칼은 무뎌졌다 책이 글자를 지우거나 다 타버린 초가 바닥에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먼지와 털이 구르는 동안 초침은 타닥타닥 제자리만 걸었다 저기 방문을 걸어 잠그고 나오지 않는 이가 누구인지 잊어버렸다
딸기를 짓이겼다
손가락이 부풀었다
일상은 썩어가는 과정을 반복하는 거구나
당연한 걸 늘 까먹고 말아서 이렇게 쉽게 멍들어버리는 거구나
방문 손잡이가 덜그럭덜그럭 돌아갔다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
손가락을 데었다
전혀 아프지 않았다
딸기 아래엔 구더기가 있고 구더기 아래엔 이야기가 있을 것이고 그것은 물컹거리며 달콤해지다가 사라질 수도 있었다 침묵과 침묵 사이에서 말 못한 사연은 끈적하게 상처에 달라붙었다
너무 간지러워 긁고 또 긁었다
이것을 부스럼이라 부를지 부질없음이라 부를지
인간 대신 다른 무언가가 되어야 한다면 딸기 같은 것도 좋지 않을지
끈질기게 달라붙어 남에게 깨알 같은 흔적을 남길 수 있으니
그러니까 지금 나는 새로운 딸기에 진입한 거구나
새하얗고 여린 열매로서
건넌방에 웅크린 짐승에게 다가갔다
이제야 알겠어
보듬보듬 이마를 매만지면
갓 따온 딸기 향이 죽을 만큼 방 안에 채워진다는 것
사랑과 세균이 범벅된 채 몸은 없어지고 만다는 것
그리하여 이번 삶에선 증오를 내버려두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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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빈 월 키머러 『향모를 땋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