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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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유미 孫柔美

1991년 인천 출생. 2014년 창비신인시인상을 받으며 작품활동 시작.

w0thsdbal0w@hanmail.net

 

 

 

모두 모여 태양 모양

 

 

우리는 평화로워라

 

한밤에도 붉게 빛나는 대추나무 아래를 지날 때 우리의 작은 태양이 주렁주렁 열렸구나 다복하게도 열려서 이 길을 비춰주네 이런 말을 주고받으며 돌아가고 있었다 또다른 둥근 태양을 사 들고 우리 집에 가면 이 태양을 갈라 나눠 먹으며 부분일식 개기일식 사라진다 다 먹었다 하자 다만 손을 타고 흐르는 붉고 맑은 물만 남았네 해 그러나 우리는 알지 우리에겐 또다른 태양이 남아 있다는 걸 내일도 내일의 내일의 내일이라도 따듯한 기운을 채워줄 붉고 둥근 불운

 

아닌 것들이

있어 그런

 

생각을 하면 허리가 곧추선다 목이 길어지고 잘 씻은 청포도알처럼 이마가 깨끗해진다 우리

 

평화롭지? 평화로워라 우리 평화롭지? 안전하다 대수롭지 않다 의연하다 나란하고 가지런하다 카세트테이프처럼 보리냉차처럼 우양산처럼 식물원처럼 채광처럼 소포처럼 뜰처럼 우리 좋아하는 말들을 반복해서 걸어갈 때 별안간 주위를

 

채우는

 

붉은 트랙을 달리는 러너의 땀방울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농구공

뛰는 아이들의 볼 뺨

아이가 넘어진다 무릎이 까진다 딱지가 앉는다 그리고

새살이 나기까지 얼마간의 시간

그걸 바라보는 오후 고양이의 홍채 얇아짐 가늘어짐 길어짐 긴

 

비가 온다

 

한소끔 식히러 이 모든 풍경을

타고 흐르는 붉지

않고 맑은

 

비가 내려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그래서

우리도 돌아가고 있었지

 

붉고 둥근 불안

아닌 것들을

가지고

 

 

팥알만큼이나 팥알만큼이나

 

 

팥죽을 지나치게 오래 끓여도 되나 적당히 끓인 것만 못할까 누군가, 왔다 인기척이 들렸다 현관엘 갔는데…… 이런 식으로. 한눈을 팔아서 한눈을 팔지 않았다면 맞이할 수도 있었을 중요한 순간을 놓쳐버렸다 그러니까

 

가장 맛있는 팥죽이 지나가버린 것 같아 공들여 쑨 게 이런 식으로 지나가기도 하네 맛을 잘 아는 이웃에게 주고 싶은 팥죽 나의 옹심이 같은 이웃 사람 팥죽 같은

 

옥수수 같은 그런

토마토 같은 걸

유난히 좋아하는 이웃 사람

열매의 동그라미를 좋아하는 나의 이웃 사람은 아마

 

좋은 사람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일걸

 

조금 뭣하게도…… 돌연

 

팥죽 같은 밤에 나는 전화를 걸었네 당신은

자고 있었다 잠을 자고 있었어 정말 잠에 취해 있었는데 어떻게 잠을,

자요.

 

지나치게 끓인 팥죽은 너무 되고 된 것은

무겁고 문득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 당신 아마

 

모르겠다

 

무엇을 놓치려고 오는지 또

저 인기척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