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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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근상 陸根箱

1960년 대전 출생. 1991년 『삶의문학』으로 등단.

시집 『절창』 『만개』 『우술 필담』 등이 있음.

yookism@hanmail.net

 

 

 

메밀꽃

 

 

추석 대목이랬자

보따리 들고 엄니 따라

아홉 고개 넘어가는 일

 

이 집은 아들 다섯

저 집은 홀아비만 둘

오동나무집 들어서면

여시 왔다

주원네 달여시 왔다

 

사흘이고 나흘 지나

부소무늬라는 외가 돌아

강 길 밟아 오면

서늘한 강바람에 핀

엄니 등허리 꽃

 

메밀꽃

메밀꽃

 

 

바라실 미륵원지(彌勒院址) 노을집

 

 

오늘은 생일(生日)이라서

엄니랑 툇마루 앉아 먼 산이라도 바라보고 싶어

보따리 하나 들고 기우뚱 쪽배 오르면

버드나무는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 강물에 적시는구나

손끝 갈라진 절벽은 목매바위 넘어가고 있구나

 

시누대 길 내려온 바람이 산 빛 보듬어 강물에 부딪히기도 하지만

먼 데서 날아왔을 새들이 신산(辛酸)스럽게 살다 간 툇마루 앉아

컴컴하게 흘러내리는 저녁 하늘이며 에돌아간 마당귀 아주까리 이파리에 말 걸면

밥 짓는 매운 연기 산문(山門)까지 지랄나드이

아자씨 오시까 까막까치 아침부터 허천나게 짖어부렀나보우이

젊어 혼자 된 목포내기 희수 엄니 담장 너머로 화답이다

나는 멋쩍게 웃고 아무도 없는 빈 마당 한바퀴 돌다

엄니가 발판으로 삼았을 맷돌에 핀 쑥부쟁이 바라보며 옛날처럼 피워보는데

 

엄니는 기둥 더듬어 부엌 불 켜고

찬장 올려둔 미역 한주먹 꺼내 불릴 것이다

아욱 밭 풀벌레는 마을 돌아 나가는 강물 소리로 울고

새벽잠 많은 나는 돌아눕다 탁자(卓子) 모서리에 찧은 이마 비비다 다시 잠들 것이고

아버지는 양철대문 활짝 열어 마른기침 뱉고 계실 것이다

꿈결에 잠깐씩 다녀가는 장작 타는 소리와 도마질 소리와

달궈진 냄비에 미역 볶는 소리와 들기름 냄새 데리고 들어온

서늘한 바람에 콜록콜록 인기척이면

엄니는 차가운 손등으로 얼굴 비벼 일어나라 콧등 주름 잡아 웃고 계실 것이다

그러면 나는 찡그린 눈으로 진저리치다 다시 홑이불 둘둘 감을 테지만

등짝 얻어맞고 잘 떠지지 않는 눈으로 밥상머리 앉아 구운 고등어나 지범거리고 있을 것이다

 

나는 어느새 저 달이 떴다 질 나이라서

물소리밖에 들리지 않는 툇마루 앉아 엄니 가신 길 더듬어보거늘

나처럼 늙어간 고욤나무나 무너져 내린 대밭 길이나 장꽝이나

툇마루 한쪽으로 밀려나 누추(陋醜)한 저녁 맞이하는 것인데

노을처럼 타오르던 한 사내로 살기까지

몇번이고 쏟아냈을 엄니 울음소리는 오늘 밤 강물 소리로 출렁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