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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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혜빈 劉惠彬

1997년 서울 출생. 2020년 창비신인시인상으로 등단.

object_petit_a@naver.com

 

 

 

그 여자의 마당

 

 

언젠가는 너의 마당에 가보고 싶어

 

그녀가 소리 없이 웃는다

 

나는 그녀의 마당에 가본 적 있을까? 나는 오래도록 내 마당에 서 있을 따름이야. 내 마당에 멀뚱히 서 있으면, 저 멀리, 그녀의 마당에 자라난 물푸레나무의 가지와 열매, 그런 것들만이 보일 뿐인데, 그녀에 대해 쓸 수 있는 말은 내게 단 한줄도 없는 것 같고

 

내가 밟고 있는 여기가 너의 마당이야?

 

……

 

왜 물푸레나무는 보이지 않아?

 

……

 

너도 가끔씩 내 마당에 오고 있어?

 

왜 우리가, 속삭이는 목소리와, 계절과, 떨어진 과실과 그 안의 과육과 과즙이, 벌레의 꿈틀거림과 물푸레나무, 물푸레나무의 열매는. 왜 그래야 했던 걸까. 왜 끝까지 자기 자신이어야 했던 걸까. 그건 왜 우리의 마음에 자리를 잡았을까. 나는 그럴 때마다 고개를 젓고 마는데

 

이렇게 글자를 늘어뜨릴 때마다 나는. 나의 뒷마당으로 깊숙이 들어서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그 속에서 하염없이 말하는 거야. 나의 깊숙한 마당 속에서. 여기가 너의 마당이니? 너의 마당은 어떤 모습이니? 나의 마당에는 검붉은 체리가 열릴. 다만 아직 채 자라지도 못했을 뿐인. 나무가 기약 없이 있어. 언제 조금이라도 자랄지. 나무다운 모습이 되기는 할지. 나는 그 검붉은 열매를 볼 수 있을지……

 

거긴 어떠냐고. 그곳에는 어떤 나무와 꽃이 있는지. 앞뒤로 흔들거리는 그네가 있는지. 넓은 의자가 있는지. 너의 사람들이 자주 놀러 와 기쁨을 주는지. 어떤 열매가 열리고 있는지

 

멀리서 조용히 웃고 있는 물푸레나무와 가지들

 

 

 

자유가 있는 숲길

 

 

잠에 들었다

먼저 잠든 사람들을 생각하다가

 

수없이 많은 눈길 속을 거슬러 도착한

 

자유의 열매가 열린다는 숲에서

 

맨발로 걷는 사람들

 

(그곳을 걷다가

 

서로의 눈동자 속에서

우리 스스로를 발견했을 때

그건 너무 많은 물감을 씻어낸 물통 같아서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구정물에 영혼이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숲에서는 많은 열매가 열리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언덕에 떨어진 자유를 주울 수 있었다 사람들은 떨어진 자유로 신을 엮어 신었고 사람들은 그 자유를 먹고 마시고 바르고 흩뿌리고 그 위에서 뛰어놀기도 했다 그뒤로

 

발이 부어오르는 일

갖은 생채기가 나는 일 따위

 

더는 없었지만

 

자유를 주우러 발 디딜 때마다

 

자유를 으깨어 마실 때마다

 

자유를 엮어 신는 것에서 자유를 먹고 마시는 것에서 바르고 흩뿌리는 것에서 그 위에서 뛰어노는 것에서 결국에는 그 모든 것들로부터

 

멀어지고 있었다

 

멀어질수록 멀쩡해지는 사람들

 

나는 다시 눈을 뜨고

침대에 누워

주워 온 열매들을 헤아려본다

 

신발을 신고 잠든 오후였다

 

이미 그 숲에서 멀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