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시
채길우 蔡佶佑
1982년 울산 출생. 2013년 『실천문학』으로 등단.
시집 『매듭법』 등이 있음.
gitaru@gmail.com
하품
졸린 아이는
카메라의 조리개를 점점 넓히다가
찰칵, 셔터를 누른다.
그러곤 흘러나온 현상액
한방울을 무심히 닦아낸다.
초점 맞지 않는
밝고 묽고 나른하게
흐릿한 순간으로부터
아이는 낮잠에 든다.
너는 무엇을 본 거니?
어떤 사진을 찍을래?
용액 속에 담긴 꿈을
일찍 흔들어 깨운다면
무슨 메마른 생각과 궁금하리만치
이루지 못한 습작들이 인화될까
활짝, 때론 궁색하거나 새침할 만큼
어떻게 문을 닫고 어느 창을 열어야 하는지
얼마나 빠르게 다만 너무 조급하지 않도록
기다림과 망설임과 유혹과 후회의 전부, 혹은
어색한 흑백 미소와 총천연색의 환한 떨림 사이
기껏해야 얇고
새까만 막일 뿐인 한 시절 위로
크게 벌린 기지개이거나
수줍게 오므린 입술로서 다가가
잠시 숨을 불어넣고 들이쉬며 빛 가린 채
입김 스민 자국 속에 미온한 손을 넣어 끼적여본
그림과 글자와 색깔이 미처 지워지지 않은 동안의
눈부신 투명에 더 가까운 어둠에서조차
아이가 비로소 눈을 뜨고 일어나
스스로의 그림자를 선택해 당연하고
평순하지만 유일한 계조와 명암으로
사로잡힌 비밀과 영원을 정착할 수 있도록
이 세상 그 모든 노출과 그늘 아래서
이 맑고 많은 광원들 안에서
이 전부를 다 기억하지 못한다 해도
이게 오직 진짜는 아니더라도
태아처럼
아버지 돌아가시고도 오랫동안
우리는 아버지가 즐겨 머무시던
낡은 나무 의자를 창가에서
치우지 못한다.
어떻게 아버지가 그 의자에
마지막으로 앉아 있었는지
기억나지는 않는다.
아버지는 어느 순간 서 있지 못했고
언제부턴가 앉을 수 없었고
마침내 숨이 가빠 등을 웅크려
엎드리거나 가로눕지 않는다면
침대에서조차 자세를 가누지 못해
자꾸만 바닥으로 내려와
가슴을 구부려야 했다.
아버지 떠나가신 날들이 지나고
나서도 여전히 볕과 바람이 찾아와
맑은 어느 오후, 우리는
그날의 창으로 다가가
아버지 대신 의자에 내려온
햇살에 손을 대어 인사하고
신중히 머리와 어깨를 짚어
아버지가 가장 편안해하던 모습으로
결과 표면이 닳아 반들거리는
의자를 옆으로 뉘어준다.
무릎을 심장께에 맞대고
가만히 호흡하는 숨결에서
낮고 청결한 나무 내음이 전해지면
시간은 미처 존재하지 않는
물질처럼 투명하게
오므린 몸과 살갗으로
거기에 와 있다.
무척 작고 깨끗한 기척이 되어
잠들어 있는 그늘에 기대서서
우리는 아주 먼 옛날의
처음 우리를 바라보던 아버지처럼
다시 태어날 것만 같은
환한 빛으로 가득히
울음을
터뜨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