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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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세실 呂世實

1997년 출생. 2021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tptlf0205@naver.com

 

 

 

가속

 

 

너는 배를 깔고 누워 곤충도감을 읽고 또 읽었지 초콜릿의 은박 껍질들이 네 머리맡에 나뒹굴고 형광등 속으로 날아 들어간 초파리들이 날개 부딪혀 타닥거리는 소리 들렸지 깜박이는 방 안에서 너는 쓰름매미 사진을 오렸지 너의 아버지가 돌쩌귀를 부수고 들어와 고함칠 때 너는 쓰름매미의 푸른 눈 속으로 손을 뻗었지 몸통을 감싸고 있는 두 날개에는 여름을 가로지르는 지도가 그려져 있어 너 쓰름매미의 날개 위에서 헤맸지 골목 어귀에 주저앉아 아버지 흐느껴 울 때 너는 날파리 한마리가 공중의 힘줄을 팽팽히 잡아당기는 것을 보았지 동생이 늑장을 부리며 라디오에서 나오는 말들을 공책에 받아쓰다 옆집 개가 무녀리 새끼를 낳았다는 소식에 창밖을 기웃거렸지 어린 동생의 새까만 발바닥, 너는 그 기슭 같은 발바닥에 천사가 붙어산다는 걸 알았지 그 발바닥에 붙어 있는 밥풀 속에 천사가 우글우글 알을 까고 산다는 걸, 지구본을 돌리면 천사가 그 위를 전력질주하고 있다는 걸, 무고한 빗소리 너머로 아이들은 짱돌을 던지고 범람한 저수지 곡괭이로 구름을 찍어 내리듯 빗속으로, 빗속으로 정면돌파…… 너는 도화지 위에 쓰름매미의 울음소리를 그렸지 이 횡재 속에서 너는 네가 너인 것이 기뻐 동생을 번쩍 들어 안았지 소염제를 주워 먹은 개들, 빗줄기는 여름을 소급하고 있었지 숲은 우거지다 담장은 젖어 있다 앞장서서 걸어가라, 너 마침내 외침을 들었지 외침 속에서 버둥거리며 너 멀리 더 멀리 너를 던졌지 너 방과 함께 컸지 무모함 속에서도 자라고 비겁함 속에서도 자랐지 나무는 무성하고 어디에나 절벽이 있었지 달아남과 마주침 속에서 너는 거듭되고 있었지 몇번이고 박살났지 그 박살남 위에서 너 조용히 미소 지었지

 

 

 

휴일에 하는 용서

 

 

나뭇가지의 호주머니에는

노란색 알사탕이 잔뜩 들어 있다

나무의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어

한주먹 사탕을 훔쳐 먹는다

끝내 용서하지 않겠노라고

사탕을 어금니로 부숴 먹는다

골목이 딸꾹질을 한다

어깨를 들썩인다

코를 막고

따뜻한 물을 마시고

얼마간 숨을 참는다

그러고 나서도

금세 온몸을 들썩인다

푸른 멍 속에 집을 짓고 살면서

용서하지 않겠노라

다짐한

그 이후에도

살아남아 밥을 지어 먹고

볕 좋은 날을 골라

빨래를 하는 날들이 있으므로

용서에 대해 생각하는 날보다

다 쓴 치약을 가위로 잘라

알뜰하게 치약을 쓰고

속옷을 삶아 빨고

잘 개어 서랍에 채워 넣을 생각을 하는 날이

더 많으므로

그 이후에도

유통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달걀과 우유를 처리하려고

계란빵을 만드는 법을 검색하고

박력분을 사러

마트에 갔으므로

끝내 용서하지는 않겠노라

이후의 다짐이

청소기 필터를 교체하고

젖은 고무장갑을

뒤집어 말려놓게 했으므로

이후의 다짐이

매끼마다 짝이 맞는 젓가락을 고르게 하고

제철마다

귤 딸기 수박을 사 먹게 했으므로

바람이 내게 쥐여주겠노라고 약속한

칼날을 갈아

무를 썰고

뭇국을 끓여 먹을 생각에

침이 고인다

빛이 든다

 

빛의 목구멍에 걸려 있는

열쇠 하나

내 얼굴을 열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