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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이소연 李昭延
1983년 경북 포항 출생. 2014년 한국경제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나는 천천히 죽어갈 소녀가 필요하다』 『거의 모든 기쁨』 등이 있음.
leesoyoun83@hanmail.net
모른 척하기
은행나무1하고 말하고 싶어 거기에 간다면
날 미친 사람이라 하겠지
나무에 말을 거는 사람 중에 나쁜 사람 없어
미쳤다는 증거지
나무가 돈다는 생각
그래서 지구가 돌고 있다는 생각
은행나무는 새를 삼키고
지구 반대편을 돌아온 봄을 내어주지
다큐멘터리를 찍고 싶다
수령이 여러번 바뀌어도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는
안다는 건
돌고 돌아 모르는 것이 된다
무성한 새를 사랑하듯
지금껏 가둔 물빛을 다 꺼내는 중
물이 가득 든 은행나무를 마셔보고 싶다
새장에 든 작은 물그릇은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졌고
새는 언제나 물이든 나무를 향해
떠나고 싶어했다
나무는 종이를 용서할까?
까진 무릎을 하고
모른 척 수피를 벗겨 쓴다
모르는 것도 죄가 된다던 사람들이
아는 건 뭐였는지
그런데 여긴 왜 왔을까
몸에 붙어 있는 저 푸른빛을
누가 잎이라고 했을까
내가 가진 잎을 너는 눈동자라 부르고
눈을 감으면
떨어진다
뿌리가 허물을 껴입고 자란다
그 무엇도 버리지 않겠다는 듯
884년을 덮고 있던 흙이 갈라진다
두더지가 태어나 가장 오래된 뿌리를 타 넘는다
자식 아홉을 둔 시어머니가
자식들을 모두 이끌고 와서
나무의 둘레를 재는 상상을 한다
모르는 채로 혈육의 손을 잡는 의식
가지 많은 나무에 붙은 바람들
바람이 바람을 쐰다
좋다
백번 넘게 가도
나를 모른 척하기
목이 타는 순간마다
말이 하고 싶다
말 속에 물이 지난다
저 꽃은 저물 무렵
화장실에 꽃을 두고 왔다
모래사장에 짐을 내려놓고서야 생각났다
메리골드는 처음이잖아
이러니까 그리운 게 나쁜 감정 같네
누굴 주려던 건 아니지만
두고 온 꽃을 가지러 갈까?
이미 늦은 일이야
그냥 평생 그리워하자
꽃을 두고 왔어
내가 말했을 때
우리 중 평론가만이 그걸 가지러 갔다
나는 소리친다
지하 2층에 있어!
화장실 비밀번호는 꽃집 데스크에!
해변에서 자꾸만 멀어지는 등
뒤를 돌아본 것도 같고
가방 속에서 지갑을 꺼내려는데
말벌 한마리가 붕붕거린다
여기 있었네
왜 꽃을 두고 왔다고 했을까?
너무 오래 기다린다
어느 화장실을 뒤지고 있니
없으면 그냥 와도 되는데
눈앞에서 평론가가 사라졌다
지갑만 꺼내려다
반복하고 싶지 않아서
커다란 가방을 둘러메고 바닷가를 걷기 시작한다
모래사장은 끝이 보이지 않아 저물 무렵 죽는다지
이제 그만 돌아와
내가 잘못했어
뭍은 뭍으로 걸어가 언덕이 되고
평론가가 온다
저 꽃은 내가 두고 온 것이 맞다
―
- 방학동에는 600살 은행나무가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