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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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일 金昇日

1987년 경기 과천 출생. 2009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에듀케이션』 『여기까지 인용하세요』 『항상 조금 추운 극장』 등이 있음.

seed1212@naver.com

 

 

 

감사의 말

 

 

나도 좋은 게 뭔지는 압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도 압니다 사람들은 좋은 점을 찾아내고야 마는 사람을 좋아해요 추운 날에는 따뜻할 수 있어서 좋다고 하고 더운 날에는 함께 그늘에 앉아 사람들은 아름답다고 말하는 사람을 좋아해요 날씨가 많은 이곳에서 우린 얼마나 많은 것을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나요? 어떤 날에 잡티들은 도드라지고 녹조 덮인 개천에서 강바닥에서 물고기가 부패하고 미끄럽나요? 물고기가 부패하고 반짝이나요? 너를 위해 기도할 때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것이 모두 날씨입니다 새벽입니다 빗속의 벤치입니다 떠올릴 수 있는 것이 모두 날씨뿐이라 모든 것은 그 얼마나 그리운가요? 사람들은 그립다고 말하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나를 좋아합니다 나는 날씨가 없는 곳으로 가자고 했는데, 날씨가 없는 것이 그곳의 날씨라고 했는데, 나는 비유를 싫어한다고 했는데, 그런데도 날씨는 신의 감정이라고 말했는데, 그곳에 가면 감정이 없는 것이 그 신의 감정이라고 말했는데, 나를 안아주었어요 사랑한다고 말해주었어요

 

날씨에는 좋은 점이 없다.

 

내가 그렇게 말하는 것을 보고 어떤 사람의 눈이 반짝였어요. 분명 그 사람은 좋아하는 날씨가 있을 텐데. 있었을 텐데. 십년 동안 나는 날씨가 없는 곳으로 떠나겠다고 떠들었어요. 십년 동안 나는 모든 게 다 날씨 때문이라고 말했어요. 웃기게 말했어요. 슬프게 말했어요. 날씨를 좋아한다고는 말하지 않았어요. 당신은 어떻게 나를 좋아했나요? 어떻게 아직도 좋아하나요.

 

기억이 나질 않아요. 언제였는지. 아파트 앞에 심어진 정원수가 초록이었죠. 여름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봄도 아니었고요. 가을도 아니었어요. 겨울은 절대 아니었겠죠. 나는 조금 흘러내린 안경을 고쳐 썼는데. 또렷하게. 정원수의 색이 순식간에 연해졌어요. 그날의 빛은 강렬했는데. 날씨는 조금도 무덥지 않았죠. 그날 처음으로 혼잣말을 해본 것 같아요. 그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이제 나는 날씨가 없는 곳의 신. 당연히 그런 곳은 존재하지 않죠.

 

 

 

오늘의 나

 

 

희극과 비극이 경계 없이 섞인 작품은 오늘의 내게 별로 매력적이지 않은 것 같다. 희비극. 어차피 내가 쓰는 슬픈 얘기는 잘 들여다보면 전부 조금은 웃긴 얘기들이다. 코미디에도 슬픔이 섞여 있고. 희극과 비극을 어떤 비율로 섞을지 고민하며 작품을 만들다보면, 매번 귀여운 것만 쓰게 될지도 몰라.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것은 늘 애처롭고, 애처로우면 어떻게든 조금쯤은 귀여우니까. 난 이것이면서 저것인 것을 쓰고 싶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것을 쓰고 싶지는 않다. 그러니까 나는 비극의 2막이 끝나고 잠시 쉬는 시간에 막간극으로 희극이 공연되기를 바라며, 그러고 다시 4막까지 비극이 공연되기를 바란다. 그리스 시대에 그랬던 것처럼. 그러면 탁월한 막간극(희극)은 어떤 내용이어야 하는가? 자신이 막간극임을 잘 알고 있으며, 그리하여 1, 2부의 내용을 신랄한 비평가처럼 평가하고, 3부와 4부에 일어날 일에 대한 스포일러도 하는 막간극. 그러면서도 사람들을 웃게 만들어야 함. 막간극이 공연 전체를 비정하게 비평하면서 동시에 웃기기까지 하는 건 정말 힘든 일일 것이다. 그러니까 둘 중의 하나만 택해야 한다면. 어쨌든 웃겨야 한다. 어쨌든 우리는 중간에 꼭 웃긴 얘기를 넣어야 한다. 그리하여 오늘의 나는 언제 어디서든 웃길 수 있는 코미디언의 덕목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다. 확실한 유행어나 레퍼토리 하나가 구비된 코미디언. 레퍼토리. 레퍼토리를 구비하도록 하자. 자 이제 슬프고 고통스러운 얘기를 하다가 잠시 웃긴 얘기를 해야만 할 때, 나는 기계적으로 이 농담을 할 것이다. 어느날 나는 꿈에서 윤석열을 강간하였다. 식은땀을 흘리며 일어난 나는 아내에게 꿈을 묘사하였고, 아내는 깜짝 놀라 토끼 눈을 뜨고 내게 말했다. 오늘이 무슨 요일이지? 토요일은 아니지? 대통령 꿈은 로또 사야 돼! 웃긴 얘기를 했으니 다시 슬픈 얘기를 하자면. 나는 남들이 하는 섹스코미디에는 잘 웃지만 살면서 섹스에 대한 코미디, 특히 강간 같은 심각한 범죄가 나오는 웃긴 얘기는 도통 해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섹스 얘기를 웃기게 잘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는 걸까? 잘하는 사람들에게 하라고 두자. 잘하는 사람들이 잘하게 두자. 난 하지 말자. 뭐든지. 솔직히 말해서, 나는 꿈에서 윤석열을 강간하지도 않았다. 강간당했다. 아내가 윤석열이라면 매주 로또를 사겠지? 나는 거의 매일 내가 나오는 꿈을 꾼다. 대부분 그렇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