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인터뷰 | 새로운 25년을 향하여 | 한국정치
희망의 거처가 되는 정치를 위하여
한영인 韓永仁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문학과 정치’에 대한 단상」 「세계의 불안을 견디는 두가지 방식」 「‘한류’와 협동적 창조의 가능성」 등이 있음.
jwhyi@naver.com
정치는 한 사회가 맞닥뜨린 공동의 과제를 슬기롭게 풀어내는 현실적인 기예인 동시에 우리 곁에 존재하는 가능성의 싹을 포착해 새로운 미래의 꿈으로 제시하는 과업이기도 하다. 현실에 대한 냉철한 인식과 미래에 대한 급진적인 상상이 조화를 이룰 때 우리는 비로소 정치를 통해 다른 미래로 나아갈 동력과 희망을 얻게 된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한국정치를 그와 같은 희망의 거처로 삼는 사람들의 숫자는 점점 줄어들고 있는 듯하다. 무엇이 문제일까? 우리 정치는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까? 간단치 않은 물음들을 함께 나누기 위해 창비서교빌딩에서 기본소득당 용혜인 의원을 만났다.
저도 대학생 때 『창작과비평』을 읽었어요. 저만 아니라 같이 일하는 의원실의 동료들도 『창작과비평』의 팬이어서 처음에 200호 특집 인터뷰 제안을 받았을 때 무척 기쁘면서도 부담이 많이 됐습니다. 그래서 우리끼리 아, 이건 정말 잘해야 되는 인터뷰다 하면서 준비를 많이 했어요. 영광스러운 자리인 만큼 긴장도 많이 되네요.
자리에 앉은 그는 탁자 위에 두툼한 서류 더미 하나를 올려두었다. 미리 보낸 허술한 질문지가 무색하게 서른장에 가까운 서류에는 빼곡한 답변이 정리되어 있었다. 그걸 보는 순간 용혜인 의원에 대해 “기세로만 보면 일당백이 아니라 ‘일당 299’라 해도 부족하지 않다. 대체불가이다”(김소희 「‘일당 299’ 용혜인의 일갈 “윤 대통령 방미 멈추라”」, 『한겨레21』 2023.4.30)라고 평가한 어느 칼럼의 문장이 떠올랐다. 최근 용혜인 의원이 보여주는 ‘대체 불가한’ 활약의 근저에는 특유의 담대한 기질과 더불어 저와 같은 성실함이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용혜인 의원이 사람들에게 처음 얼굴을 알린 것은 세월호참사가 발생한 직후, ‘가만히 있으라’ 침묵행진을 조직하면서였다. 검은 상복을 입고 애도와 분노를 머금은 채 세상을 바라보던 그의 얼굴은 당시 분노와 무력감으로 휩싸인 사람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시대의 이미지로 아로새겨졌다. 하지만 대형 참사에 무기력한 국가의 행태는 작년 이태원에서 고스란히 반복되었다. 아니, 참사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윤석열정부의 행태는 마치 박근혜정부로부터 배운 교훈이 그것밖에 없다는 듯 더욱 뻔뻔하고 노골적이었다. 용혜인 의원은 ‘용산 이태원참사 진상규명과 재발방지를 위한 국정조사특별위원회’ 위원으로 참여해 무책임하고 둔감한 책임자들을 날카롭게 추궁했다.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을 향한 질의 말미에 그는 울음을 참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세월호참사를 목격했던 세월호 세대로서, 그리고 또래들을 끔찍한 참사로 떠나보낸 청년의 한 사람으로서 오늘 정부부처 기관장들, 자치단체장들 답변을 보면서 참 절망스러웠습니다. 이 절망 속에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참사가 반복되지 않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희망을 찾겠다는 약속을 희생자들과 유가족분들과 국민들 앞에 드립니다.” 이태원참사가 발생했을 때 윤석열정부의 비겁한 행태를 보면서, 그리고 이에 맞서 울분을 삼키는 용혜인 의원의 떨리는 목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이것이 윤석열정부의 실체를 집약하는 최악의 장면이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윤석열정부는 그 최악의 장면을 거듭 갱신하는 놀라운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이런 정부를 최전선에서 맞닥뜨려야 하는 야당 정치인으로서 그는 윤석열정부를 어떻게 평가할까.
국정을 이끌어갈 정책 기조가 보이지 않고 통치이념이나 고유한 정치철학이라고 할 만한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자신만의 비전이 없으니 지지율이 낮을 수밖에 없고, 그래서 자신의 핵심 지지층에 의탁하다보니 자꾸 퇴행적인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는 거죠. 지금 한국은 지정학적 위기, 지경학적 위기, 기후위기와 디지털 전환 문제, 불평등과 양극화 심화라는 엄중한 과제를 마주하고 있어요. 그런데 윤석열정부는 오늘날 한국사회가 당면한 위기를 극복할 능력도 의지도 없는 정부 같습니다. 지금은 미중 패권경쟁이 격화되는 격동기인데 정부는 한미동맹을 절대선으로 여기는 낡은 냉전적 인식에 붙들려 있죠. 그 와중에 쓸데없는 말로 외교안보의 위기를 스스로 증폭시키고 있고요. 한국사회가 역사적 과정을 통해 합의해온 것들이 있지 않습니까. 4·3항쟁이나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역사인식의 합의가 대표적이죠. 힘들게 마련해온 한국사회의 합의마저 윤석열정부와 집권여당은 전혀 존중하지 않는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마침 윤석열 대통령의 워싱턴포스트 인터뷰 논란이 터진 다음 날(2023.4.25)이었다. 대통령이 “100년 전 일로 일본에 무조건 무릎 꿇으라는 건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발언한 사실이 알려지자 여당에서는 일제히 이 문장의 주어는 ‘일본’이라며, 대통령의 진의를 왜곡하는 가짜뉴스 선동을 멈추라고 윽박질렀다. 여당 내부에서도 이 말의 주어가 윤석열 대통령 자신이었다고는 차마 생각할 수 없었던 모양인데, 이후 해당 인터뷰를 진행한 기자가 주어 ‘나’가 명시된 원문을 공개하면서 사람들의 분노는 대통령을 넘어 집권여당으로까지 번지고 있다. 일본에 대한 이해할 수 없는 저자세 외교도 문제지만 국민의 합당한 비판을 성급하게 ‘가짜뉴스’로 규정하여 고립시키려는 행태 또한 이 정부의 작동방식을 여지없이 보여준다.
저는 그런 일들을 보면서 이것이 검찰공화국의 한계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모든 사안을 무죄 혹은 유죄로, 무죄면 좋은 사람이고 유죄면 악당으로 보면서 선과 악의 적대적 관계로 치환하고 대응하고 있어요. MBC 보도에 대한 ‘바이든/날리면’ 논란도 그렇고 이재명 대표를 비롯한 야당에 대한 태도도 마찬가지죠. 한일정상회담에 대한 국민적 비판마저 국민들의 정당한 평가가 아니라 적대세력의 악의적인 공격인 것처럼 받아들이는 모습은 이해하기 어려워요. 대통령부터가 그러니 국무위원들도 국회에서 의원들과 싸우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열심히 노력합니다. 예를 들어 얼마 전 한덕수 국무총리가 “독도는 우리 땅 맞죠?”라는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맹성규 의원의 질문에 “절대로 아닙니다”라고 답변해서 논란이 있었잖아요. 저는 한덕수 총리가 정말로 독도가 일본 땅이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대답했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다만 야당 의원의 말이라면 일단 부정부터 하면서 반박하고 각을 세워서 싸워야겠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실수가 나온 거죠. 정부만 아니라 여당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국민의힘은 대통령의 사당(私黨)이나 마찬가지예요. 그동안 우리가 정당민주주의에 대해 가져왔던 합의와 상식을 노골적으로 무시하고 있습니다. 저는 선을 넘는 윤석열정부의 퇴행성을 저지하기 위해서라도 야권의 공조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윤석열정부에 맞서기 위해 힘과 지혜를 모아 연대해야죠. 그런 점에서 최근 민주당의 행보는 좀 우려스럽습니다. 대통령 지지율 하락과 여야 지지율 역전에 안주하려는 생각을 버려야 해요. 그런 낡은 관성에 기대는 순간 다음 총선은 필패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민주당은 기득권 거대 양당으로서 자신의 지위를 보장하는 지금의 선거제도가 야권의 연대·연합을 가로막는 결정적인 요소라는 걸 분명히 직시해야 합니다.
용혜인 의원은 노동당 소속으로 2016년 총선에 참여했지만 국회에 들어온 건 지난 20대 총선에서 민주당의 비례위성정당인 더불어시민당을 통해서였다. 위성정당 참여에 대해 여전히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다시 선거법 개정이 논의되고 있는 지금, 그는 당시의 선택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준연동형 비례대표제 자체가 잘못된 제도라곤 생각하지 않아요. 한국정치의 고질적인 문제인 비례성과 대표성 그리고 다양성의 약화를 해결하는 방안을 정치권과 시민사회가 오래 고민했고, 그 원칙하에서 만들어진 제도라고 생각합니다. 제 선택에 대한 회고보다는 소수정당이 국회에 있어야 하는 이유를 증명하기 위해 기본소득당이 해왔던 여러 노력과 활동들을 겸허히 평가받는 일이 현재로서는 중요한 것 같아요. 기본소득당은 고유의 메시지나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하위 파트너로서 위성정당에 참여한 것이 아니라, 총선 당시 저희의 정책을 연합정당의 공약으로도 내걸었고 이후로도 나름의 독자적 세력으로서 노력해왔다고 자부합니다.
그의 자부에는 충분한 근거가 있어 보인다. 용혜인 의원은 피선거권 연령을 하향하고 기탁금을 종전의 30%로 낮추어 청년층의 정치적 참여를 보장하는 법안을 시작으로 정치적 다양성을 증진하기 위한 제도 마련에 힘썼고, 기본소득이라는 새로운 정치적 의제를 한국사회에 널리 퍼뜨리는 데 일정 부분 성공하기도 했다. 윤석열정부의 퇴행을 날카롭게 비판하면서도 민주당이라는 거대 정당의 구심력에 휩쓸리지 않았으며 이를 통해 소수정당의 존재 이유를 꾸준하게 국민들에게 설득해왔다. 하지만 소수정당이 마주하고 있는 현실적인 장벽은 여전히 높다.
얼마 전 국회에서 19년 만에 선거제도 개혁을 논의하기 위한 전원위원회가 열렸잖아요. 국민들의 기대가 굉장히 높았는데, 결국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국회방송 유튜브에서 ‘전원위원회는 실패했습니다’라는 제목의 제 연설이 의원 100여명의 발언 영상 중 조회수 1위를 기록한 것도 실패라는 저의 규정에 많은 국민들이 공감한 증거라고 생각해요. 전원위가 실패한 이유는 우리 사회가 합의한 선거제도 개혁 방향과 원칙을 무시한 채 진행됐기 때문입니다. 대표성, 비례성, 다원성을 강화하자는 게 바로 그 원칙이었죠. 흔히 디지털 경제의 특징으로 승자독식을 꼽는데 대한민국 정치도 마찬가지거든요. 소선거구제와 단순다수대표제의 결합은 기본소득당 같은 소수정당 혹은 급진적인 대안을 내놓는 진보정당의 국회 입성을 가로막고 거대 양당의 적대적 공생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정치적 지체를 온존시키고 있다고 생각해요.
윤석열정부의 퇴행을 막기 위해서도 2024년 총선에서 여권의 패배와 야권의 승리라는 결과를 만들어내는 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 점에서 제1야당인 민주당도 역할을 잘해야겠죠. 제가 제안했던 선거제도 개혁 방향은 네가지입니다. 첫번째는 연동의 강화. 연동형 비례대표제란 지역구에서 정당 득표율만큼의 의석을 얻지 못할 경우 비례대표에서 그만큼 의석을 가져갈 수 있게 하는 것인데, 한국은 그 연동 정도를 낮춘 ‘준연동형’이에요. 이를 100% 연동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두번째는 비례대표 의석의 획기적 확대예요. 지역구 의석과 비례대표 의석이 최소한 2:1 비율로 맞추어져야 하고, 그러려면 국회의원 의석수 확대도 필수적일 거라고 봐요. 세번째는 봉쇄조항을 3%에서 1%로 하향하는 것입니다. 현재는 정당 득표율 3% 미만이면 비례대표 의석을 얻을 수 없게 되어 있잖아요. 정당 득표율 1%면 50만명의 지지를 얻은 것인데, 그 정도 지지를 받는 정당이라면 국회에서 국민을 대표해 일할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선거연합이 가능하도록 법제도를 정비해야 해요. 한국의 정당법과 정치관계법은 선거연합을 강하게 가로막고 있어요. 협치와 합의의 정치문화가 잘 자리 잡은 다른 나라들을 보면 선거연합이 폭넓게 가능하죠. 각자의 정당 소속을 유지하면서도 연합할 수 있다면, 고유한 정치적 주장을 지닌 다양한 소수정당의 원내 진입, 즉 다당제 정당민주주의의 실현도 거대 정당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겁니다.
양당제와 다당제의 장단점은 뚜렷하다. 양당제가 본질적으로 악인 것도 아니고 다당제가 그 자체로 선인 것도 아니다. 관건은 양당제냐 다당제냐가 아니라, 어떤 양당제냐 혹은 어떤 다당제냐에 있다. 같은 정치제도라도 그 나라의 정치 풍토와 주체들의 운용방식에 따라 국민들이 느끼는 정치적 효능감은 크게 달라진다. 서로 다른 지향과 비전을 가진 두 당이 치열하게 경쟁한다면 비교적 안정적인 지반 위에서 사회적 갈등과 쟁점을 효과적으로 해결할 수도 있다. 하지만 과연 오늘날 한국의 양당제가 그런 ‘교과서적’ 기대를 충족시켜준다고 말할 수 있을까? 정쟁에 매몰되어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상대를 악마화함으로써 반사이익을 노리는 데 골몰하고 있는 것이 한국정치의 현실은 아닐까?
정쟁 자체가 나쁘다기보다 정쟁을 부정적인 것으로만 치부하고 갈등을 무조건 봉합해야 할 것으로 바라보면서 발생하는 악순환이 더 문제 아닐까요? 정쟁이 필요할 때 치열하게 하지 않고 적당히 봉합하고 넘어가는 행태가 거대 양당의 적대적 공존의 실체가 아닐까 싶습니다. 국민의힘과 민주당은 늘 사활을 걸고 싸우는 것처럼 보이지만 부동산 부자들의 세금 깎아주는 문제, 대기업 법인세 깎아주는 문제에서는 여야가 합의하는 모습을 보여왔잖아요. 저는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지 못하는 걸 한국정치의 문제로 꼽는 시각에도 동의하지 않아요. 총선 때마다 의석의 절반 정도는 초선의원이 당선되거든요. 그런데 왜 한국정치는 여전히 나아지지 않을까요? 그건 새로운 인물이 아니라 새로운 ‘세력’이 국회로 진입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국민의힘과 민주당이 있고 가령 이준석 신당이나 그와 비슷한 제3당이 생긴다면, 그 자체로 다당제인가요? 새로운 노선과 가치를 이야기하는 새로운 정치세력이 등장해야 해요. 제가 기본소득당을 통해서 계속해서 정치에 참여하고 유의미한 결과를 내려고 하는 것 역시 그런 새로운 정치세력을 만들려는 시도입니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그가 창당한 기본소득당의 이념과 지향으로 이어졌다. 오늘날 기본소득을 새로운 사회적 권리의 차원에서 인식하는 사람들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 코로나 사태에 대한 대응으로 지급되었던 전국민 재난지원금이 가져온 대중적 인식전환이 하나의 계기가 되었지만 그가 기본소득에 관심을 가진 건 훨씬 이전부터였다고 한다.
제가 기본소득을 처음 접한 건 20대 초반이었습니다. 저희 부모님은 평생을 열심히 일하셨는데도 아빠가 하시던 사업이 잘 안되면서 경제적으로 굉장히 어려워졌던 시기가 있었어요. 교통비 2천원이 없어서 학교를 못 가는 날도 있었는데, 기존 복지제도하에서는 집과 차가 있으면 어떤 혜택도 받을 수 없는 거예요. 평생을 성실하게 노동하며 살았지만 어려움이 생겼을 때 기존의 복지제도로는 안전망을 누릴 수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기본소득이라는 아이디어가 굉장히 중요할 수 있겠다는 점이 와닿았습니다.
하지만 자신을 사로잡은 정치적 아이디어가 있다고 해서 누구나 정당을 창설해 정치에 뛰어드는 것은 아니다. 그런 면에서 지금 돌이켜보아도 용혜인 의원의 선택은 즉각적이고 과감했다.
저는 한국 민주주의의 커다란 특징이 광장민주주의라고 생각합니다. 제도정치가 꽉 막혀 있을 때 그 난맥을 돌파하는 역할을 광장민주주의가 해왔어요. 박근혜정부를 퇴진시킨 촛불도 그 연장선에 있죠. 저는 그때 촛불광장에서 터져 나온 목소리 속에 새로운 미래에 대한 시민들의 요구가 분명히 존재했다고 생각해요. 그 목소리를 단지 권력에 대한 저항으로 볼 것이 아니라, 주권적인 창설 행위로 견인할 수 있는 정당의 역할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고 그래서 창당을 결심했습니다. 그 무렵 시리자(그리스의 급진좌파연합)나 뽀데모스(스페인의 급진좌파정당)의 등장을 지켜보면서 한국에도 그런 정치적 실험이 필요하다고 느끼기도 했고요.
기본소득을 둘러싼 사람들의 입장은 크게 갈린다. 용혜인 의원은 여기에는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가 구분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노동을 신성한 권리이자 의무로 이해하는 사람들은 기본소득이 건전한 노동윤리를 파괴하여 일하지 않는 게으른 사람을 양산할 거라 우려한다. 복지국가의 이념에 충실한 사람들 역시 기본소득이 과연 시민들의 공공복리를 증진하는 데 가장 효율적인 방식인지에 의문을 표한다. 보편적인 기본소득보다 정말 필요한 사람들에게 선별적인 지원을 해주는 것이 제한된 재원을 더욱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라는 반론 또한 만만치 않다.
이런 질문을 던져보고 싶어요. 임금소득이 주요한 소득 원천인 사회가 과연 바람직할까? 그 점에서 기본소득당은 임금소득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난 사회를 지향합니다. 무엇보다 임금노동을 소득의 일차적이고 주요한 원천으로 간주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어요. 그리고 자영업자, 프리랜서, 플랫폼 노동자들이 얻는 소득은 최저임금이라든가 임금 인하를 막는 장치와 같은 노동법적 보호를 적용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한편으로 주식이나 가상화폐 혹은 부동산 투자소득 같은 불로소득에 대한 욕망도 압도적이고요. 기본소득은 사실 복지국가만큼 오래된 아이디어예요. 그런데 전후 복지국가는 완전고용을 전제로 설계되었거든요. 사회보험을 통해 완전고용의 빈틈을 보호하면 빈곤이 제거될 수 있을 거라고 전제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불안정노동이 일상화되었고, 이 경향은 앞으로도 더 심해질 겁니다. 완전고용을 전제로 설계된 복지국가의 이념으로 새로운 삶의 불안정을 포괄하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어요. 동시에 노동에 대한 사회의 관점도 바뀌어야 한다고 봐요. 제가 한 토론회에서 “노동이 신성한 것이 아니고 인간이 존엄한 것입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어요. 2017년 개헌 움직임이 있었을 당시에는 ‘온국민기본소득운동본부’를 만들고, 작은 경차 하나를 타고 일년 동안 3만 킬로미터를 뛰었습니다. 전국을 다니면서 기본소득을 지지하는 다양한 정당 혹은 시민사회 조직을 많이 만났고, 국민의 권리로 기본소득을 넣는 것은 물론 노동의 의무에 대한 조항을 삭제하자고 주장했어요. 노동의 의무를 헌법 수준에 담은 나라가 별로 없습니다. 박정희정권 시기 만들어진 우리 헌법과 스딸린체제의 쏘비에뜨 연방 정도예요. 기본소득의 철학은 노동을 사회적 성원의 조건으로 전제하지 말고, 노동 여부와 상관없이 인간의 존엄을 보장할 수 있는 사회체제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기본소득을 내걸고 전국을 누볐다는 그의 말을 듣는 순간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장편소설 『천국은 다른 곳에』(2003, 한국어판 새물결 2010)가 떠올랐다. 그 소설에 나오는 고갱의 외할머니 플로라 트리스땅은 빈곤과 사회적 비참에 신음하는 세계를 바꾸기 위해 자신이 직접 쓴 『노동조합』 책자를 들고 프랑스 전역을 순례한다. 트리스땅이 간직했던 꿈이 훗날 유럽의 역사를 뒤바꾸어놓은 노동자운동과 연결되었듯이 오늘날 정치인 용혜인이 품은 선명한 희망이 앞으로 한국사회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갈 소중한 상상력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까. 우리의 대화는 오늘의 진단을 넘어 내일의 구상으로 접어들었다. 미래를 예측하는 건 어려운 일이지만 동시대의 상상력과 사유, 지금 우리 곁에 존재하는 다양한 가능성을 사고실험해볼 수 있는 흥미로운 작업이기도 하다. 그는 25년 후 한국사회의 모습을 어떻게 그리고 있을까?
저는 ‘투자국가의 새로운 발명’이라는 키워드로 다가올 미래를 희망해보고 싶습니다. 미래 연구에서는 미래를 ‘가능 미래’ ‘위험 미래’ ‘선호 미래’라는 세가지 개념으로 구분하더라고요. 가능 미래는 지금의 상황을 그냥 내버려두면 다가올 미래이고, 위험 미래는 가능 미래보다 더 비관적인 미래를 뜻하며, 선호 미래는 지금 상황에서 뭔가를 바꾸어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갔을 때 도달할 수 있는 좋은 미래죠. 정치는 위험 미래를 피하고 선호 미래를 도래시키기 위한 방안을 고민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바라는 기본소득사회는 복지국가 이후 단절된 ‘투자국가’를 새로이 발명하는 과제를 대면하고 있어요. 관련해서 저는 경제학자 마리아나 마쭈까또(Mariana Mazzucato)로부터 많은 영감을 얻었는데, 경제혁신 과정에서 정부와 국가의 역할을 중시한 논의로 유명합니다.
투자국가는 크게 ‘국가’와 ‘투자’라는 두 개념적 요소로 이루어집니다. 오늘날 불평등과 기후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역할이 필수적인데, 문제는 정부가 이제까지 해온 방식대로 대응해서는 이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더 적극적으로 가치를 창출하고 시장을 형성하는 투자자 역할에 나서야 해요. 욕심 같아서는 GDP 2000조원의 절반인 1000조원 정도를 정부 재원으로 조달해서 미래에 투자하자고 말하고 싶지만, 지금 현실에서는 가능하지 않죠. 그래서 더욱 새로운 투자국가의 발명이 필요한 거고요. 저는 중앙은행이 정부가 발행하는 녹색채권을 직접 인수하는 방식이나 정부가 필요한 만큼의 화폐를 직접 찍어내는 방법을 제안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건 현행 통화제도와 재정정책에 대한 아주 큰 틀의 개혁이 수반되는 과정이에요. 쉬운 일은 아니지만 국가와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죠. 그리고 그 투자는 장기투자여야 합니다. 우리 시대의 불평등과 기후위기 문제를 해결하려면 투자가 혁신의 성과를 낼 때까지 장기적으로 인내할 수 있는 인내자본이 절실하거든요. 새롭게 발명된 투자국가가 탈탄소 녹색산업과 디지털 전환에 집중 투자하고 여기서 발생하는 투자 성과를 기본소득으로 배당하자는 것이 제가 고민하고 있는 ‘미래투자국가’의 모습입니다. 사실 지금도 국가는 각종 연구개발과 세액공제 같은 조세감면의 형태로 기업에 보조금을 제공하고 있잖아요. 이를 정당화하는 논리는 그렇게 기업을 지원하면 기업이 일자리를 창출하고 세금도 많이 낸다는 건데, 기업의 성장이 대규모 일자리의 확대를 가져오지 않는 디지털 전환기에는 이런 논리가 적용되기 어렵습니다. 국가의 투자는 공동자산의 투자인 만큼 산업에 투입되었을 때 국민의 지분을 반영해 기업이 낸 수익을 국민 모두가 평등하게 나눌 수 있는 분배체계를 새롭게 도입할 필요가 있어요. 저는 이걸 ‘공유지분형 기본소득’이라고 부르는데, 제가 구상하는 새로운 투자국가에서는 공유지분형 기본소득이 도입될 수 있을 거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정부에 대한 기존 통념은 물론이고 통화제도의 근간까지 건드리는 발본적인 전환의 상상력을 마주하자 어쩔 수 없이 마음이 고무되었다. 대화 중 용혜인 의원은 최근 진보정당을 포함한 한국정치가 굉장히 미시적인 것만을 이야기한다는 아쉬움을 표했다. ‘거대담론은 끝났다’는 이야기에 자신은 동의할 수 없으며, 오히려 거대담론의 부재가 한국정치의 상상력을 가로막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사회의 대전환을 화두 삼아 걸어온 ‘창비’였기에 거대담론의 부재를 비판하며 담대한 전환을 요구하는 그의 목소리가 더욱 반가웠다. 평소 『창작과비평』은 대전환의 과제를 단기·중기·장기로 나누어 접근할 것을 제안해왔다. 그에게 선거제 개혁을 통한 정치적 다양성의 확보가 당면한 단기 과제라면 미래투자국가의 발명은 장기 과제에 해당할 터, 그렇다면 중기 과제는 무엇일까?
저출생 문제가 그에 해당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0.78명이라는 합계출산율은 굉장히 충격적인 숫자죠. 왜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이 재생산을 멈추게 되었을까, 그 원인을 철저하게 탐구해야 해요. 대한민국에서 출생아 수가 급격하게 떨어진 때가 두번 있어요. 한번은 IMF 직후에 해당하는 2000~2002년 사이이고, 다른 한번은 코로나 국면과 부동산 폭등이 겹치면서 ‘벼락거지’라는 말이 유행했던 2020~23년 사이예요. 여러 통계가 임금 수준과 혼인, 그리고 출산 사이에 깊은 관련성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소득과 혼인과 출산이 맞물린 사회에서 불평등과 불안정에 대응하는 가장 합리적인 선택지가 가족을 구조조정하는 것이죠. 그런 점에서 사회 전반의 불평등과 불안정을 축소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저출생 문제의 해법입니다. 또한 출생률이 높은 국가들의 공통점은 GDP 대비 가족 지원 투자가 높다는 거예요. 그런데 한국은 GDP 대비 1% 미만으로 매우 낮습니다. 다양한 가족 형태를 보장하고 공공이 돌봄과 재생산에 적극적으로 투자하지 않으면 출생률을 반등시키기 어려울 겁니다.
용혜인 의원은 국회 임기 중 출산한 세번째 의원이다.
아이 낳기 전에는 눈앞에 닥친 일이 없더라도 늘 사무실에 남아서 책을 읽거나 논문을 봤는데 아이를 낳고 나니까 그게 불가능해지더라고요. 퇴근하면 아이를 어린이집에서 픽업해서 밥 먹이고 놀아주고 씻기고 재우느라 바빠요. 그동안 남편은 청소, 빨래, 설거지 등 집안일을 하고요. 그러고 나면 오후 열시 정도 되는데 그때부터 각자 책을 보거나 유튜브를 보면서 쉬어요. 보통의 워킹맘들과 비슷하죠. 주말에 아이랑 24시간 붙어 있는 건 쉽지 않은 일이더라고요. 친정의 도움을 받기도 하고, 여의치 않을 땐 아이를 데리고 열심히 밖으로 나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노키즈존도 많이 늘어났고 막상 아이를 데리고 갈 수 있는 공간이 많지 않아요. 아이를 키우는 일상을 산다는 게 쉽지 않다는 걸 여러모로 절감하고 있어요.
용혜인 의원은 2021년 아이를 출산한 뒤 기자회견을 열어 “임신, 출산, 육아에 대한 부담이 저출생 문제의 본질”이며 “임신, 출산, 육아에 공적 지원을 늘리고 성평등한 돌봄 시스템을 마련해야 저출생 문제도 풀어갈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현실에서 매일같이 이 문제에 맞닥뜨리고 있음에도 국회에 구성된 인구위기특별위원회에 그의 자리는 없다. 소수정당의 설움으로 치부하고 넘어가기에는 오늘날 우리 국회가 가진 대표성과 다양성의 한계가 너무 크게 도드라진다. 그 점이 아쉬웠는지 용혜인 의원은 대화의 말미에 자신이 제안했던 선거제 개혁의 원칙과 방향을 재차 강조하기도 했다.
열띤 대화를 마무리하고 아쉬운 인사를 나누면서 25년 뒤 용혜인 의원을 꼭 다시 만나 이야기해보고 싶은 소망이 생겼다. 과연 그때 한국정치는 그리고 한국사회는 어떻게 달라져 있을까. 우리는 위험 미래의 덫을 피해 우리가 꿈꾸던 선호 미래에 얼마만큼 도달해 있을 수 있을까. 한국정치는 과감한 개혁에 성공해 새로운 미래에 선제적으로 대응할 수 있을까. 그가 원대하게 제시했던, 공유지분형 기본소득이 실현된 세계를 마주할 수 있을까. 물론 그 미래로 나아가는 길은 쉽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합의할 수 있는 미래의 모습이 반드시 기본소득으로 모아질 거라는 전망도 섣불리 내놓기 어렵다. 그럼에도 용혜인 의원과의 대화에서 어떤 감동마저 느껴진 것은 미래를 적극적인 개입의 공간으로 사유하고, 선호하는 세계의 구성을 위해 기꺼이 뛰어드는 열정이 마음에 와닿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