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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김현 金炫
1980년 강원 철원 출생. 2009년 『작가세계』로 등단.
시집 『글로리홀』 『입술을 열면』 『Untitled』 『호시절』 『낮의 해변에서 혼자』 『다 먹을 때쯤 영원의 머리가 든 매운탕이 나온다』 등이 있음.
rin00@hanmail.net
하얀 사슴
새까만 밤이었다
제주의 감귤나무 사이로
하얀 사슴들이
나타났다
순백이나 결백이나 자백이 다 그러하듯
오염된
사슴들은
감귤잎을 뜯어 먹었다
뿔이 잘린
하얀 사슴들 그래서 영검한 기운도
정백한 빛도 다 사라져
가축이 되어버린
인간의
손을 타면
뭐든 다 더러워지고 망가진다는 얘기를
내게 처음 해준 사람이 누구였더라
언제였더라
그 예언이
다 맞는 말이라는 걸 깨달은 게
이런 것을 생각도록 하는
오염된 가축들이
밤의 도로 위를 줄지어 걷는다
그들 옆으로 차들은 무심히 달리고
안개가 점차로 짙어진다
사슴의 형상으로
사슴을 다 잊을 때까지
더러 운전대를 잡고 차를 몰며 잠에 빠지는 사람
꿈속으로 하얀 사슴들이 출몰한다
티 없이 아주 깨끗한 흰빛
소복을 입은 여인이 종을 흔들며
손짓한다
이리 와요 따라오세요
하얀 사슴들이 뿔을 치켜든
안개 행렬은
멀리 오리 밖까지 뻗치고 있다
이런 이야기를 짓게 하는 하얀 사슴들은
동물체험농장에서 탈출한 가축들로
귀신도 쓸쓸하여 살지 않는1 그 농장에는
양과 말
꿩과 닭
청계와 거위
토끼와 공작
갓 태어난 병아리와 죽은 개체
인간이 뒤엉켜 있었다
제주시와 제주도자치경찰단은
농장주를 상대로 축산법과 가축분뇨법, 건축법 위반 여부 등을 조사하고 있다고
밝혔다
어디로 갔을까?
울타리를 넘어
감귤밭 사이를 지나서
안개에 힘입어
순례를 시작한 그 흰빛들은
더러 인간의 탈을 쓰고
마음에 하얀 사슴을 품은 채
―
- 정지용의 시 「백록담」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