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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임솔아 林率兒
2013년 중앙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시집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 『겟패킹』 등이 있음.
sol.a.2772@gmail.com
한밤중
너무 높은 베개를 베고 자다가
한밤중에 베개 솜을 끄집어내고 있을 때
연락이 끊어진 친구에게
전화가 온다.
낯설고 어색해하며 무엇인가를 전하려고 애쓰면서 오래 묵은 이야기를 털어놓고 네가 있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꼭 보자고, 다시 보자고, 우리는
죽은 이를 보내면서 할 법한
말을 한다.
남은 것들을 고이 보관해왔지. 제멋대로 썩지 못하도록 숨도 쉬지 못하도록 밀봉해서 진공팩에 넣어두었지. 냉동고를 열 때마다 마음이 든든하다. 한조각을 꺼내 녹이면 갓 만든 것처럼 촉촉하겠지.
듣고 싶었던 말을 듣고 있으면
들고 있던 것들을 떨어뜨리는 느낌이 들어서
의외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내 목소리가 옛날과 똑같다는 얘기나 그냥 그렇게 지냈다는 얘기 말고 운전을 배우기 시작했다거나 방울토마토를 키우고 있다거나 별것 아닌데도 나의 친구는 안 그럴 것만 같아서 상상이 잘 되질 않는 이야기를
전화를 끊으면 발치에
흥건히 녹아 있다. 시뻘겋고 물컹하게
갓 태어난 것들이.
나는 창고에 들어간다.
구급함과 공구함과 소화기
쓰지 않길 바라며 모아온 것들 사이에서
결연한 마음으로 김장봉투를 꺼낸다.
묵직한 것을 들고 집을 나서다가
뒤를 돌아본다.
숫자가 닳아 있는 리모컨과
유통기한이 지난 영양제
밤새 창문과 이마를 맞대고 모아온
빗방울들. 떨어뜨리면 사방으로 튀는 것들.
그것들이 예측 가능한 범위를 넘어갈 때
가로등이 고개를 처박고 빛을 떨어뜨린다.
비가 고이는 부분에 빛을 보탠다.
새벽배송하는 사람이 손수레를 끌고 간다.
내일이 오늘로 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