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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이설야 李雪夜
1968년 인천 출생. 2011년 『내일을 여는 작가』로 등단.
시집 『우리는 좀더 어두워지기로 했네』 『굴 소년들』 『내 얼굴이 도착하지 않았다』 등이 있음.
snow7173@naver.com
사일로
0
바다열차는 거대한 사일로를 지나는 중이었다
나는 공중에 떠 있었고
세계에서 가장 크다는 야외 벽화가 기차를 천천히 끌고 간다
창문 가득 곡물 저장창고가 서서히 움직이며 다가온다
유리창에 부딪히다가 멀어진다
비가 내리자 바다열차 밖은
수족관처럼 물속에 잠기고
하늘이 잘 보이지 않는다
누가 다 먹을까
푸르고 싱싱한 곡물들
1
미시간 호숫가 시카고곡물거래소는
세계의 농산물이 거래되는 곳
곡물 저장창고 사일로에
소들이 먹을 옥수수를 산처럼 쌓아놓지
식량은 아주 잘 있지
때론 몇십만마리 건강한 소들을 불태우거나 매장하지
최저가격을 위해
몇개의 자루만 불리기 위해
햇빛과 바람마저 다 가져가지
유전자변형 콩은 하늘을 찌를 듯 쑥쑥 자라고
곡물거래소 탑은 뾰족하게 높아만 가지
높아만 가다 눈이 부시지
눈이 부시다 못해 눈이 멀어버리지
남아도는 식량들
죽어가는 아이들
2
기차가 지나가면 죽은 땅들, 죽은 집들, 죽은 사람들
그 위에 사일로가 하나둘 생겼다지
철로가 만든 지도 위로
곡물 저장창고가 세상 끝으로 하나둘 뻗어나갔다지
실핏줄처럼 곳곳을 지나갔다지
아직 도착하지 못한 것들
물고기가 놓친 물결들, 새들이 잃어버린 목소리들
3
대지의 땀과 구름의 포식자
유전자변형 작물 종자, 제초제, 살충제의 화신
다국적 기업들은 독으로 채운 염낭을 옆으로 늘려가며
기다란 다리로 심장을 파먹지
독을 뿌려야 곡물이 쑥쑥 잘 자라지
풀과 벌레를 다 죽여버리지
썩지 않고 배 속에서도 계속 잘 자라지
봄을 지연하는 명백한 문서들
사일로는 사일로만 한 침묵의 외투2를 입고 세상 끝까지 뻗어가지
아이들이 얻은 겨우 한줌의 식량
돌개바람이 빼앗아가네
시들어가는 꽃잎 위의 꽃잎들
아이들은 국제기구와 유엔에서 구조할 테니 상관없죠
우리는 우리의 일을 할 뿐이랍니다
사일로에 곡식은 많고 슬픔은 그저 파도의 것이랍니다
4
인류 최후의 날 노아의 방주에 올라탈 씨앗들
스피츠베르겐섬 땅속 종자저장고에 잠자고 있다지
어제의 달은 낮에 겨우 눈을 뜨지만 소용없다네
가파른 시간의 벼랑 아래
식량창고는 무엇을 딛고 서나
발밑이 녹아내리는데
점점 가라앉는데
마지막 씨앗들은 미래로 태어날 수 있을까
눈을 뜰 수 있을까 잠자던 씨눈들
언제까지 살아남아 눈꺼풀을 깨워 파도를 이길 것인가
0
바다열차는 사슴공원을 돌아
예전부터 있던 예전(藝殿)경양식을 지나
바다횟집이 있는 곳으로 휘돌아가고 있었다
저 물고기들을 언제까지 먹을 수 있을까
나는 아직 공중에 떠 있고
세상은 거대한 수족관
빛으로 잠들지 못하는 유리관
넘칠 듯
쏟아질 듯
위험하다
내일이 조금씩 옆으로 새고 있다
―
- 장 지글러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유영미 옮김, 갈라파고스 2007, 9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