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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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 다시 읽고 싶은 책

 

 

김성희 『똑같이 다르다』, 사계절 2013

힘주어 말하지 않아도

 

 

임선애

林善愛 / 영화감독. 주요 연출작으로 「69세」 등이 있음 imageta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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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10년 전쯤인 것 같다. 김성희 작가의 만화를 처음 접한 것은. 온라인에서 연재했던 『오후 네시의 생활력』(창비 2015)이라는 작품으로였다. ‘생활력’이라는 제목에 이끌려 작품을 보다가 나는 두가지 측면에서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었다.

첫번째는 단연 그림체였다. 가는 선으로 힘주어 그리지 않은 듯한 무심한 스케치에 마음이 빼앗겼달까. 솔직히 말하자면 아, 만화를 이렇게도 그릴 수가 있구나, 나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다. 물론 그 생각은 얼마 못 가 쉽게 꺾였지만. 두번째 충격이 바로 그 이유에 있다. 이 만화는 나 혹은 주변의 누군가와 닮은 완숙하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인물들의 대사로, 때로는 지문으로 건네는 작가의 ‘말’에 나는 종종 ‘치였다’. 그 말들에는 세상에 대해 대책 없는 낙관도, 터무니없는 비관도 하지 않는 작가만의 통찰적 시선이 담겨 있어, 그의 그림체처럼 힘주어 말하고 있지는 않으나 힘이 셌다.

『똑같이 다르다』 역시 그렇다. 작품 소개를 보면 ‘작가가 임시 계약직으로 장애아동 통합 보조교사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쓴 만화’라고 적혀 있다. 고백하건대 처음 이 소개글을 접했을 때 나는 괜스레 안도감이 들었다. 그간 매번 핍진성 짙은 작품을 내놓는 작가에게 난데없는 열등감을 지니고 있었는데, 이 작품은 단지 취재력에만 의존한 것이 아닌 작가가 실제로 경험한, 자신의 몸을 통과하고 난 후에 누적되고 여과된 사유들이 발화된 창작물이라는 것, 다시 말해 작가가 그저 타고난 천재가 아니라는 사실이 책상머리에 앉아 글감만 찾고 있던 내게 자극과 위로가 되었다는 얘기다.

각설하고,

‘세상은 나를 원하지 않는다’며 취업난에 고민하던 주인공 지현이 친구에게 일자리를 소개받으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갑작스레 ‘새날반’ 장애아동들의 보조교사 일을 맡게 된 지현은 의욕과는 다르게 매일 이곳에서 자신이 얼마나 ‘무쓸모’의 인간인지를 확인할 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장애라는 수식어가 없어도 아동을 돌보는 일은 때때로 곤혹스럽고 짜증이 불쑥불쑥 솟아나는 일임이 틀림없을 테니까. 하지만 지현은 애쓴다. 친구의 부탁대로 아이들을 편견 없이 대한다. 그러나 여전히 자신의 ‘쓸모 있음’을 증명하기란 쉽지가 않아 학교 교사에게 묻는다. 아이들이 어떤 장애를 가졌는지 알려달라고. 마치 그걸 알고 나면 모든 게 다 잘될 것 같다는 듯이.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그냥 겪어보세요. 선입견은 안 좋아요.”(20면)

지현은 실망한다. 선입견이 타인을 멀리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정보 없음’이 두려움을 키우는 것 아니냐고 마음속 외침을 할 뿐이다. 다행히도 새날반 아이들 석태, 예은, 지은, 지웅의 개별 특성이 차츰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지현의 시행착오는 줄어든다. 그렇지만 그것이 꼭 장애의 개별적 특성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이들이 각자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를 아는 것 또한 중요했을 것이다.

이 만화의 제목처럼, 우린 모두 똑같이 다르다. 그러나 세상은 우리가 모두 똑같기를 기대하고, 또 그렇게 만든다고 작가는 말한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만화가 비장애인들을 각성시키기 위한 교조적인 의도가 두드러진 작품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저 존재하지만 잘 드러나지 않았던 이들이 여기 있음을, 함께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줄 뿐이다.

“우리나라가 어떤 나라예요? 밖에서 장애인 본 적 있어요?” “그래서 이렇게 통합교육 하잖아요. 지금 함께 있어야, 나가서도 함께 있을 수 있지 않겠어요?”(39면)

이는 지현과 그의 선임이 나누는 대화다. 몇년 전 장애인특수학교 설립에 반대하는 주민들 앞에서 장애학생의 부모들이 무릎을 꿇었던 사건이 겹쳐져 씁쓸했다. 세상이 나를 원하지 않는다던 지현의 말이 공명하는 대목이다.

공교롭게도 내가 후반작업 중인 차기작 영화 「세기말의 사랑」의 주인공도 장애인 여성이다. 가까운 친척 중에 근육병 장애를 가진 이가 있다. 그는 20대 초반부터 서서히 몸이 무너지기 시작해 현재는 남의 도움 없이는 일상생활이 어려운 처지가 됐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패션에 관심이 많고, 홈쇼핑에서 예쁜 접시를 주문하고, 수십가지의 다육식물을 키운다. 즉, 장애는 그를 수식하는 수많은 단어 중 하나일 뿐이지 그 자체가 될 수 없다는 것. 그것이 이야기의 씨앗이 되었다. 그 때문인지 이 만화에서도 근육장애를 가진 지웅의 이야기가 마음에 오래 남았다. 평소 책도 잘 읽고 글씨도 반듯하게 쓰는 지웅이 몸을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하는 체육시간에만큼은 쉽게 포기하는 모습을 보이자 지현이 화를 내는 장면이 있다. 세상은 너희한테 관심이 없는데, 너희는 왜 더 애쓰지 않느냐고. 아마도 그 ‘화’가 향한 곳은 바로 자신이었을 것이다. 꿈적도 않는 세상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무력감 때문에……

장애 혹은 장애인의 삶을 이야기의 소재로 삼을 때, 주로 장애를 ‘극복’한 성공담이나 누군가의 희생과 연민, 혹은 부와 가난, 계급 차 같은 것들을 부각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이러한 설정은 극적 전개를 위해 때때로 필요한 조건일 수 있겠으나 나는 언제나 그것들을 뺀 나머지의 삶이 궁금했다. 비단 장애인의 삶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은 아니다. 모두 각자 똑같이 다른 삶을 사는 이웃들의 보통의 일상을 꾸밈도 과장도 없이 평등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작품이 절실했다. 그걸 김성희 작가는 해낸다. 언제나 그 최전선에서 세상을 바로 보려고 애쓴다. 삼성 반도체공장의 백혈병 문제를 그린 『먼지 없는 방』(보리 2012), 1980년대 탄광촌을 배경으로 한 『너는 검정』(창비 2018), 용산참사와 철거민 문제를 다룬 『떠날 수 없는 사람들』(김성희 외 지음, 보리 2012) 등의 작품 역시 그랬다. 우리가 김성희 만화를 더 주목해야 하는 이유를 『똑같이 다르다』 마지막 면의 글로 대신해 옮겨둔다.

“이제 세상이 우리를 볼 때 아냐? 우리는 상상할 수 있다. 그렇게 말할 수 있을 때, 그건 분명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일 것이라고. 더 나은 세상은 개개인들의 특성이 자신만의 형태를 갖출 수 있도록 허용될 때 다가올 것이다.”(121면)

임선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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