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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이은규 李恩奎
200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다정한 호칭』 『오래 속삭여도 좋을 이야기』 『무해한 복숭아』 등이 있음.
yudite23@hanmail.net
여름, 신림
제철
아낌없이 누리다
혹은 때를 놓치는 게 습관이 되어버린
과일의 씨앗을 씻어 볕 좋은 창가에 말리는 걸 좋아하던 한 사람
다 마른 씨앗을 조용히 만지작거리던
무섭도록 붉은 자두를 맛있게 나눠 먹은 그해 여름, 정성껏 씨앗을 닦고 있는 뒷모습을 보며
나는 무심코 물었고
너는 해맑게 답했다
씨앗은 뭐 하게
응, 그냥 예뻐서
예쁜 걸 좋아하던 사람과 신림동 언덕으로 이사를 하고
몇번의 계절이 오고 하는 사이
하루 종일 책상에 앉아 있던 나는 기지개를 켜며 말했었다 세상에서 가장 수다스러운 게 실패담인 것 같아 경우의 수가 너무 많지 응, 너는 가만히 웃었었나
취직하게 되면,이라는 말은
우리들 약속 대부분의 여는 말이 되었다
우선 원룸에서 탈출하자
한뼘 마당이라도 있는 집이 좋겠어
향기로운 열매들이
마구 열리는 나무를 심어
입술이 붉어지도록 나눠 먹자 오래오래
꿈에서 탈출하는 편이 더 빨랐을까
나무를 떠나는 열매처럼, 읽는 순간 몸이 부서질 것 같은 안부는 도착하지 않는 편이 좋았다 그렇게 한 사람은 돌아갔고
똑똑
그해 여름, 신림의 작은 방문을 노크하면
세 들어앉은 내가 깨알 같은 글씨들과 다투고 있을 것만 같다 자두 씨앗을 둥글리며 기도하는 네가 있고
나는 아직 신림— 하면 수풀 림 수풀 림 하고 울어대는 것 같다 발음할 때마다 내 혀는 파랗게 물든다1
그해 여름의 페이지를 펼치면
우리가 있을 텐데
있을 것만 같은데
문득 때를 놓친 약속들이
주렁주렁 열린
미친 나무그늘 아래
나는 오래오래
구름 팝업스토어
가을 파주의 LP감상실
넓은 창 아래 나란히 앉아 음악을 듣습니다
여기 구름 맛집이네 너는 말했고
구름에 대한 포착은 좋았지만 맛집이라니 순식간에 식어버린 한낮의 무드, 감정선은 이미 정해진 걸까 궁금했어요
랭보는 참을 수 없는 게 없다는 사실에 절망했습니다
그가 무기를 파는 상인이 되어
세계 곳곳을 떠돌다 죽었다는 한줄의 기록
나는 모든 게 인과론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사실에 고개를 끄덕이며, 끄덕이지 않으며 정성스럽게 삶을 탕진하는 중입니다
미시경제학 시간
세상에 사고팔 수 없는 게 없다고 학습했지만
그럼에도 구름만은 예외입니다
투명하게 피어오르는 뭉게구름
문득 떴다 사라지는 팝업창처럼
구름은 기억은 그렇게 침투합니다
우리였던 두 사람의 마음이 붐비던 한때
하늘 아래 구름 아래 어디든
그해 여름 한 사람은 먹구름을 보며 태풍은 진로가 있어서 좋겠다, 말하며 희미하게 웃었었습니다 모든 음악이 노동요처럼 들려 이번 일만 마치면 꼭 떠나자 약속
언제나 한발짝 늦게 도착한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일만 하다 돌아갔기 때문인데요 이제는 없는 한 사람에게 영원이라는 말을 쓰지 않기로, 함부로 쓰기로
해 질 녘 잠깐 열렸다 사라지는
구름 팝업스토어
―
- 김애란 「기도」, 『침이 고인다』, 문학과지성사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