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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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9 이태원 참사 작가기록단 『우리 지금 이태원이야』, 창비 2023

멈춰진 시간, 나아가는 삶

 

 

신철규 愼哲圭

시인 1234015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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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지금 이태원이야 : 생존자와 유가족이 증언하는 10·29 이태원 참사』를 공교롭게도 10월 29일에 읽었다. 생존자와 유가족, 그리고 이태원이라는 공간을 사랑했던 시민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힘겹고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사건 현장에 대한 충실한 기록에서 오는 충격과 함께 희생자들을 기억하고 애도하는 마음이 담긴 문장들을 만날 때면 책장을 덮고 심호흡을 할 수밖에 없었다. 멈춰진 시간, 닫힌 기억 속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의 참담함과 슬픔이 온몸으로 전해졌다.

이 책은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는 사건의 현장을 직접 맞닥뜨렸거나 지켜봤던 생존자들의 이야기가, 2부에는 가족이나 연인, 친구를 찾기 위해 사건 후 수습과정을 몸소 겪어낸 유가족들의 이야기가 주로 담겨 있으며, 3부는 이태원을 사랑하고 그곳을 삶의 터전으로 삼는 시민들의 목소리를 전해준다. 이태원참사와의 직접적인 거리가 조금씩 멀어지는 이러한 구성은 참사의 외부자인 독자의 자리를 돌아보게 한다.

당사자들의 증언은 참담했다. 그들의 의문은 간단했다. 왜 159명은 죽을 수밖에 없었고 왜 나는 살아남았는가. 우연히 살아남았다는 것은 죽을 수도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문제는 누가 죽고 누가 살아남았느냐가 아니라 왜 그들이 죽을 수밖에 없었는가이다. 생존자들이 가장 답답해하고 분노하는 지점이 여기에 있다. 최소한의 질서 유지나 필수적인 치안을 위한 어떠한 안전조치도 없었으며, 이미 사람들이 실신하거나 죽음의 임계점을 넘어선 상태에서 뒤늦게 구조대가 도착했으며 그나마도 구조 인력은 턱없이 부족했다.

생존자들은 자신의 존재가 지워진 상황을 이겨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사랑하는 이들의 상실을 겪으며 믿음과 희망을 잃어버린 세계에서, 살기 위해 기억하고 기억하기 위해 살아간다. 희생자들은 ‘놀러 갔기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 ‘놀러 간 곳에서 죽은 것’이다. 그들의 죽음을 자발적인 ‘선택’ 탓이라고 매도하는 일은 얼마나 그릇된 것인가. 더없이 일상적인 곳이고 죽음이 일어나기 힘든 환경에서 대형참사가 일어난 것은 위기대응 시스템의 부재라는 구조적인 문제가 개입했기 때문이다. 위험을 모르고 간 사람들의 잘못이 아니라 위험을 방치한 정부의 잘못이다.

아감벤(G. Agamben)에 따르면 모든 언어에서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 사이의 관계들, 말의 가능성과 불가능성 사이의 관계들의 체계가 곧 ‘증언’인데, 생존자들은 그 사이를 가르는 휴지, 문턱, 구분선 사이에 생존자들은 놓이게 된다. 그들은 말할 수 없는 고통 때문에 괴로워하고 고통스러운 상황을 말할 수 있는 언어를 찾는 데 힘겨워했다. 참담함과 안타까움이 앞선다. 참사의 현장을 겪고 희생자들의 죽음을 목도한 데서 오는 참담함과 그들을 구하지 못하고 자신만 살아남았다는 죄책감. 그들은 그날 이태원에 간 사람들과 희생자/생존자를 비난하는 악플들에 고통받으면서 그날의 상황과 진실을 이야기하는 데 힘썼다. 그들은 살아 있기 때문에 기억하고 살기 위해서 기억한다.

생존자들과 유가족들은 ‘잘 이별할 권리’를 박탈당했다. 정부가 그것을 막았기 때문이다. 정부는 유가족이 희생자의 신분을 확인하는 데 시간을 끌었으며 시신이 어디에 안치되어 있는지조차 제대로 알려주지 않았다. 체계적인 재난총괄기구가 급작스럽게 꾸려지기는 힘들었다고 하나 서너시간 동안 국가 긴급대책회의가 진행되고 난 뒤의 시점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을 납득하기가 어렵다. 희생자와 생존자, 유가족을 분리하고 분산하는 데 힘썼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시신들은 말 그대로 ‘처리’되었다. 이러한 사후 대응을 지시하고 통제한 것은 누구 또는 무엇인가. 무질서한 듯 보이지만 일관된 방향성을 보이는 이러한 ‘처리’ 방식은 무엇의 의지이고, 그 책임자는 누구인가. 대통령실 국정상황실은 재난 시의 컨트롤타워가 아니라며 발뺌했기에 행정안전부 장관을 참사의 책임자로 규정할 수밖에 없었고 그 책임을 묻지 않는 대통령(실)의 미온적 태도에 유가족은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정부와 대통령실은 여전히 방관자의 자세를 보이고 심지어 참사에 정치적인 프레임을 씌워 피해자와 유가족들을 매도하기도 한다. 이것이야말로 2차가해가 아닌가.

이제 유가족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유가족들은 피붙이를 잃었다는 데서 오는 상실감과 재난을 막을 수 없었다는 무력감으로 괴로워했다. 또한 감수성과 공감능력을 상실한 무지하고 몰인정한 대중의 폭언과 비난에 따른 고통도 있었다. 모르는 타인이라는 생각은 ‘거기에 왜 갔느냐’는 책망을 가능하게 한다. 생존자와 유가족은 참사가 일어난 과정의 불합리성과 미흡한 위기대응 능력을 알리는 한편, 쓸모있는 죽음과 쓸모없는 죽음으로 희생자들을 구분 짓는 것이 얼마나 큰 오류인지 이야기한다. 사람들이 많이 모일 수밖에 없는 상황을 미리 인지했음에도 대비책이 허술했고, 안전조치 인력과 구급대원들을 사태가 악화된 뒤에야 보냈으며, 희생자들에 대한 적절한 대우와 생존자 및 유가족들의 인권을 무시했다. 심지어 국정조사, 현장조사, 기관보고, 청문회 등에서 약속한 것들은 하나도 지켜지지 않았다.

친밀감이 책임감을 만든다. 참사의 당사자는 아니지만 참사와 무관하지 않은 시민들 또한 우리가 그들의 죽음에 연루되어 있음을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저는 보통 사람들을 믿는 거예요. 그들에게 올바른 정보가 주어지고 옳은 사실관계를 알려주면, 욕하고 비난하던 사람들도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시선이 바뀔 거고, 생각이 바뀔 거고, 반성을 할 테고. 아니면 반성까지는 몰라도 본인이 잘못 생각했다는 것쯤은 알게 되지 않을까, 고인에 대한 모욕만큼은 더이상 못하지 않을까.”(생존자 이주현, 39면) 우리는 그들이 보낸 희망과 믿음에 응답해야 하지 않을까. 올바른 사실관계와 사고의 진위를 정확하게 밝혀내고 그들에 대한 그릇된 시선과 생각을 바꾸어내는 것, 희생자들에 대한 진정한 애도가 가능하게 하고 책임자를 처벌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내는 것, 공동체의 무능을 다시 한번 일깨우고 ‘애도의 공동체’가 되어 상호신뢰와 상호구조가 가능한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

어둠 속에 갇혀 고립되어 있는 상태에서 조금씩 세상을 향해 나온 그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그들은 낫기 위해 나아가고 있다. 낫는다는 것은 참사의 기억으로부터 멀어지거나 기억이 희미해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참사의 원인을 정확하게 알아내고 그러한 참사가 반복되지 않는 세계에 살고 있다는 믿음의 회복을 말한다. 살아남았다는, 아니 살아 있다는 것이 죄가 되어서는 안 된다. “바닥도 보이지 않는 구덩이”(유가족 김혜인, 94면)에 빠진 사람들을 구하려면 우리가 그들과 함께한다는 믿음을 주는 길밖에 없다. 그날의 진실을 밝히는 ‘작은 변화’를 만들어 그들이 삶의 의미를 되찾고 ‘밝고 트인 곳’으로 나올 수 있게 해야 한다. 여전히 그들에게 절실한 것은 관심과 공감이다. “아직 끝난 게 아니라는 걸 사람들이 기억해주면 좋겠어요. 그냥 다른 거 없어요. 슬퍼할 시간을 줬으면 좋겠어요. 이제 끝나지 않았느냐, 괜찮지 않느냐, 이제 됐지 않느냐 이런 얘기 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유가족 양진아, 268면)

이태원을 상징하는 색은 주황빛이 섞인 보라색이다. 보라색은 추모와 애도의 상징이고, 주황색은 핼러윈 축제의 상징이다. 빛 속에서는 보랏빛이 선명해질 것이며, 어둠 속에서는 주황빛이 도드라질 것이다. 생존자와 유가족에게는 평범한 삶이, 아무렇지도 않은 삶이 가장 닿기 어려운 것이 되었다. 하지만 갑작스럽고 느닷없는 죽음은 그들을 알아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무엇보다 숫자로만 처리된 희생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들이었는지 우리는 그들의 기억을 통해 확인하게 된다.

신철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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