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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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세계서사, 어떻게 쓸 것인가

 

지구화 이후의 세계 그리고 서사

 

 

서동진 徐東振

계원예술대 융합예술학과 교수. 저서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 『동시대 이후: 시간-경험-이미지』, 공편서 『비동맹 독본』 등이 있음.

homopop@kaywon.ac.kr

 

 

기후위기를 어떻게 서사화할 것인가

 

기후변화가 아니라 체제변화를 위해 싸워야 한다는 기후정의운동이 목소리를 높여가고 있다. 기후위기를 비단 자연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로 환원할 수 없음을 모두 뚜렷이 자각하게 된 탓일 것이다. 이제 기후위기가 사회적이면서도 역사적인 현상임을 부인하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주변에서 흔히 목청을 높이던 기후위기 부정론은 압도적인 과학적 증거와 논변으로 인해 주눅이 들거나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지난해 두바이에서 열린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8)는 모두를 실망스럽게 만들었다. 더는 지금 같은 상태로는 안 된다며 즉각적인 화석연료 퇴출(phase)을 외치는 이들의 요구를 저버린 채 화석연료로부터의 ‘전환’(transition)이라는 어물쩍한 목표를 채택하는 데 그치고 말았기 때문이다. 기후위기의 긴급성을 걱정하며 지연하거나 숙려할 틈이 없는 신속한 개입과 해결을 요구하는 이들의 노기등등한 주장이 먹히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기후위기에서 언급하는 기후가 그리 자명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기후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대기 중 이산화탄소의 농도를 줄인다거나 탄화수소를 기반으로 한 화석연료의 사용을 감축한다거나 대기의 온도를 1.5도 이상 낮춘다거나 하는 등의 서사는 기후위기가 놓인 세계를 좀더 분명히 이해하도록 돕는다. 그것은 과학적 증거를 통해 문제를 정의하고 해결을 위한 조치와 방책이 무엇이어야 할지 알려준다. 그러나 그것이 기후위기에 대처하는 데 요청되는 온전한 서사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노릇이다.

기후위기를 어떻게 상징화할 것인가, 즉 비판적으로 서사화할 것인가의 문제를 단지 기후위기에만 한정된 것으로 간주할 수는 없다. 기후위기의 재현이라는 문제가 직면한 곤란은 곧 자본주의의 재현이라는 문제를 거듭 떠올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기후위기가 시공간적으로 인간의 개인적 지각의 범위를 초과한다는 점, 즉 인간 척도(human scale)로는 도저히 파악될 수 없는 아득한 힘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음을 헤아려보거나, 기후위기를 생산하는 사회적 행위란 특정한 인물이나 장소로 국지화할 수 없는 체계 자체의 폭력임을 떠올려보아도, 이는 현재의 자본주의를 서사적으로 재현하고자 할 때 비롯되는 어려움과 멀리 있지 않다. 그러므로 기후위기와 서사의 관계를 짚어보는 일은 신자유주의적 지구화 이후의 자본주의를 어떻게 상징적으로 서사화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다룰 때도 도움이 된다.

도식적인 주장처럼 들리겠지만, 이해의 편의를 위해 기후위기에서 말하는 기후를 세겹의 차원을 겹쳐놓은 것으로 생각해보면 어떨까.1 이를테면 과학적 사실로서의 ‘기상’, 사회·역사적 실재로서의 ‘기후’, 그리고 현상적인 주관적 경험(lived experience)으로서의 ‘날씨’로 분간해보도록 하자. 먼저 마지막인 경험으로서의 날씨부터 고려해보자. 우리는 하루 혹은 어느 순간의 날씨를 불현듯 느낀다. 무덥거나 오싹하게 추운 날, 우리는 이런 날씨가 기후위기의 여파이리라 짐작하며 근심 어린 낯을 짓는다. 그러나 여느 때와 같은 온건한 날씨 역시 기후위기 속의 날씨이다. 개인적 경험의 세계에 머무는 날씨는 일기예보 속 기온과 풍속, 습도가 지시하는 과학적 추상으로서의 날씨와는 다르다. 날씨는 공약 불가능한 개인의 경험 속에 수수께끼처럼 저만치 물러나 있다. 기후위기에 대처하려는 공공 캠페인은 대개 이러한 날씨 감각에 호소한다. 이는 기후위기에 대한 자각을 위해 끔찍하게 요동치는 이례적인 날씨와 그를 둘러싼 우리의 충격과 불안을 끝없이 상기시킨다. 그런 상징화가 공감과 감정을 효과적으로 이끌어내는 수사적 전략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만큼이나 개인이 겪는 날씨에 심리적으로 호소하는 접근은 기후위기를 온전히 ‘경험’하는 길을 막아선다. 부쩍 크게 관심이 더해가는 ‘기후 인문학’이 몰두하는 영역도 이것이다. 이를테면 이를 대표하는 학자 가운데 한명일 아미타브 고시(Amitav Ghosh)는 기후위기란 곧 문화의 위기이자 상상력의 위기라고 역설하며 인류세 시대의 기후위기를 재현하는 데 비롯되는 곤란을 근심한다. 그가 기후위기가 곧 문화위기라고 말하는 이유는 지금의 문화(그가 염두에 두는 것은 문학과 예술이다)가 기후위기를 재현하는 데 있어, 다시 말하면 상징적으로 서사화하는 데 있어 무능력하기 짝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근대의 서사시라고 할 만큼 근대문학의 주된 문학 형태로 자리 잡아왔던 소설이 과연 기후위기를 서사화할 수 있을까 하는 흥미로운 질문을 던진다. 그도 그럴 것이, 소설에 대한 기왕의 이해를 따르자면 기후위기는 결코 소설이 상대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고시는, 존 업다이크(John Updike)가 근대소설이란 ‘개인의 도덕적 모험’을 다루는 것일 뿐이라며 어느 소설가의 작품을 인색하게 평가한 것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석유 유정의 개발과 착취의 역사를 소설로 쓴 요르단 출신의 압델라흐만 무니프(Abdelrahman Munif)의 『소금 도시』(Cities of Salt)라는 소설은, 오늘날 하나의 장르처럼 부상한 ‘기후소설’(cli-fi)을 선구하는 역사소설이라 할 수 있다. 업다이크는 이 소설을 두고, 작품이 개인의 도덕적 모험을 보여주지 못하므로 제대로 된 소설의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고 비평한 바 있었다. 그런데 고시는 그러한 업다이크의 주장에 반박한다. 고시의 비판은 명쾌하다. 개인의 도덕적 모험을 서사화하는 것이 소설이라면, 그리고 소설이야말로 현실과 개인이 맺는 관계를 상징화하는 주된 문화적 형식이라면, 근대문화의 아이콘으로 군림해온 소설이 기후위기를 어찌 재현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이러한 재현의 위기는 인류세 시대에 있어 문화의 위기이자 상상력의 위기라는 것이, 고시의 통절한 진단이다.

고시는 “인류세의 지구는 바로 도무지 상상하기 힘들 만큼 광대한 힘이 좌우하는, 피할 수 없는 집요한 연속성(continuities)의 세계”이며 “시공에 걸친 방대한 간극을 더없이 긴밀하게 이어주는 ‘생각할 수 없는’ 규모의 힘들로 구성”된 세계라고 말한다.2 그렇다면 이를 어떻게 주관적인 경험과 연결할 것인가. 문화적 상징이자 재현으로서의 기후는,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집합적 주체를 형성해야 하는 정치적 프로그램에서 절대 간과해서는 안 될 층위임이 분명하다. 기후위기는 직접 경험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문화적 상징화를 통해, 즉 서사적 재현을 통해 경험 가능한 대상으로 만들어질 수 있고 또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 그런 점에서 고시의 발언은 기후위기에 개입하는 소설들을 모은 『곰과 함께』라는 책의 서문에서 빌 매키번(Bill McKibben)이 들려주는 이야기와 다르지 않다. 매키번은 이렇게 말한다. “지구 온난화는 당연히 상상하기 어렵기 때문에(어쨌든 전에 발생했던 적이 없으므로)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 변화가 일어날 때까지 우리는 곤경을 해소할 만한 행동을 하나도 취하지 않을 것이다. 과학이 이끌어 줄 수 있는 곳은 여기까지다. 과학자들은 그동안 할 일을 해 왔다. 가능한 모든 경고를 했고 비상등을 켰다. 이제 나머지 사람들, 즉 경제학자, 심리학자, 신학자 그리고 예술가 들이 나설 때다. 특히 예술가들은 막연한 느낌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줘야 한다.”3

기후 인문학을 강력히 주장하는 롭 닉슨(Rob Nixon) 역시 생각이 다르지 않다. 그도 이렇게 말한다. “가장 중요한 과제는 재현(representation)과 관련이 있다. 즉 영향력이 더디게 나타나는, 만연하기는 하되 손에는 잘 잡히지 않는 폭력을 드러내기에 안성맞춤인 솔깃한 이야기·이미지·상징을 어떻게 찾아내느냐 하는 문제다.”4 문화적 상징화가 없다면, 정치적인 주체화 역시 요원한 일이다. 급진적 생태정치가 스스로를 정치적으로 조직화하려면 이에 유의해야 한다. 그러나 문제가 서사화에 달려 있다고 해서 아무런 서사나 용인되는 방만한 사변적 허구의 남발로 이어져서는 곤란할 것이다. 무한히 다양한 물질적 실재들로 이뤄진 세계의 일부로서 인간-자연이라는 종을 자리매김하며 인간중심주의나 인간종 예외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충고는 썩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그것이 기후위기를 둘러싼 상상을 촉성하기는커녕 그를 둘러싼 역사적·사회적 상상을 제한하는 힘이 될 공산이 크다. 그것은 인간이라는 초역사적인 개념에 의지함으로써 기후위기를 생산하는 역사적 사회현실로부터 달아난다.

기후의 첫번째 차원인 과학적 사실이자 실재로서의 기상이 무엇인지는 상대적으로 이해하기 쉽다. 기후위기와 관련된 현기증 나는 서사들은 대개 이를 통해 전달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기후과학이나 지질학 등 다양한 과학들이 분절하고 측정, 기록, 예측하는 추상적 자연의 일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사회·역사적 실재로서의 기후라는 두번째 차원의 기후에 있다. 사회·역사적 실재로서의 기후라는 개념은 생각보다 훨씬 까다롭다. 인류세라는 개념으로 지질학적 시대구분을 행할 때 인류세의 시작을 언제로 확정할 것인가를 둘러싼 널리 알려진 논쟁, 즉 불의 발명인가, 증기기관을 비롯한 화석연료의 사용을 개시한 산업혁명인가, 아니면 식민주의적 정복의 시작인가, 나아가 핵폭탄의 폭발인가를 둘러싼 논의는 이미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서 인간이라는 개념과 자연이라는 개념이 절대 명료하지 않은 것임을 거듭 일깨워준다. 어느 개념이든 사회와 역사라는 물질적 실천의 총체와 떼어놓은 채 규정될 수 있는 초월적인 범주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부터인가 한창 성행하는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은 생뚱맞게 들릴 수밖에 없다. 비록 인간이라고 호명되는 그 주체/대상이라는 것이 자본주의라는 역사적 사회관계 속의 주체일 부르주아지를 암묵적으로 가리킬지 모른다고 십분 양보한다 하더라도 그렇다. 그런 탓에 인류세를 대체하는 다양한 개념들(자본세, 툴루세, 대농장세, 금융세 등)을 둘러싼 논쟁은 그저 인류세의 기점을 확정하려는 데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자연 속의 사회, 사회 속의 자연이라는 자연과 사회의 변증법을 규정하고자 하는 완곡하면서도 잠재적인 시도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세계화인가 세계-없음인가

 

후기자본주의라고 명명한 현시대 자본주의를 비판적으로 재현할 수 있는 서사를 얻기 위해, 미국의 문화이론가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은 자신의 미학적 프로그램이자 동시에 리얼리즘의 위장된 별칭이라고도 할 ‘인식적 지도 그리기’(cognitive mapping)를 집요하게 제안하였다.5 인식적 지도 그리기의 미학이란, 얼추 말해 개인의 현상학적인 주관적 경험과 직접적으로 재현할 수 없는 자본주의의 추상적이면서 총체적인 질서를 연결하고 매개하는 상상을 가리킨다. 프랑스의 맑스주의 이론가 알뛰세르(L. Althusser)의 이데올로기에 관한 정의를 빌리자면, 이는 개인이 현실과 맺는 상상적 관계를 재현하는 것이자 그러한 상상을 ‘봉쇄’하는 현재의 이데올로기를 돌파하는 행위를 가리키는 이름이기도 하다. 우리는 현실과 관계를 맺지만, 그것과 직접적으로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상상을 통해 혹은 상징적 질서를 통해, 요즘은 인기 없는 개념이 되었지만 하나 더 추가하자면 ‘이데올로기’를 통해 관계한다.

후기자본주의, 오늘날 우리에게 더 익숙한 표현을 좇자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이후의 자본주의는 분명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규정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과 개인의 심리적 경험을 연결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세계화 이후의 자본주의란 초기 자본주의 단계의 가족기업 자본처럼 특정한 인격적 주체의 모습을 통해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주식회사나 카르텔, 트러스트처럼 추상적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동시에 구체적인 상징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는 것도 아닌, 새로운 형태의 자본의 지배를 만들어냈다. 그것을 다국적기업, 초국적기업으로 부르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그저 글로벌 공급망과 같은 개념으로 호명하고 있다. 글로벌 공급망이란 헤아리기 어려운 전문용어같이 들리지만 간단히 말해 세계적 규모의 생산과 유통 질서를 가리키는 이름일 것이다.

『먼슬리 리뷰』(Monthly Review) 편집장 존 벨라미 포스터(John Bellamy Foster)는 동일본대지진 이후 벌어진 사태를 두고 다음과 같이 흥미로운 일화를 전해준다. “후쿠시마 핵 사태가 발생했을 때 후쿠시마 지역에서 전 세계 필수 자동차 부품의 60퍼센트를 생산하고 전 세계 리튬 배터리 화합물의 큰 부분을 생산하며, 그리고 전 세계 300밀리미터 실리콘 웨이퍼의 22퍼센트를 생산하는 등 산업 생산에서 필수적인 것들이 생산된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 당시에 몇몇 독점-금융 기업들이 자신의 공급망의 지도를 그리려는 시도를 했다.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에 따르면 “일본의 반도체 생산 회사의 경영진이 2011년에 발생한 지진과 쓰나미 (그리고 후쿠시마 핵 사태) 이후 그 회사의 아주 낮은 하위 단계까지의 공급망의 지도를 그리는 데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달라붙어 1년 넘게 걸렸다고 이야기했다”라고 한다.6 여기에서 우리는 인식적 지도 그리기의 반면교사라고 할 만한 것을 일별하게 된다. 공급망이란 오늘날 세계 전체를 에워싼 자본의 생산과 유통 사슬을 가리킨다. 그것은 자본 스스로도 분명히 그려낼 수 없는 수수께끼로 나타난다. 그들은 그것을 투입과 산출의 경제적 과정에서 상품의 흐름이라는 추상으로서 인식할 뿐 그것에 대해 ‘알지 못한다’. 그러나 공급망 지도 그리기의 어려움과 인식적 지도 그리기의 어려움은 구별될 필요가 있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이후의 자본주의에 관한 흥미로운 철학적 사변을 제시한 장뤽 낭시(Jean-Luc Nancy)의 논변을 떠올려보면 더욱 그러하다. 인식적 지도 그리기가 개인의 주관적 경험과 전지구적 범위에서 전개되는 자본의 역사적 운동의 관계를 상상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어쨌든 세계적 차원에서 움직이는 자본주의라는 ‘현실’이 있음을 전제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현실이라는 개념을 세계라는 개념으로 대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흔히 글로벌라이제이션(globalization)을 세계화라고 번역한다. 세계화란 어떤 차이도 용인하지 않으면서 우리 모두의 삶을 하나로 통합하고 지배하는 자본주의의 압도적 보편성을 가리킬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세계화와 더불어 그 어느 때에도 볼 수 없었던 가공할 세계의 모습과 상대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낭시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를 가리키는 글로벌라이제이션을 역시 세계화라는 개념으로 번역할 수밖에 없을 몽디알리자씨옹(mondialisation/worldification)이라는 개념과 대립시킨다.7 낭시가 보기에 글로벌라이제이션은 몽디알리자씨옹의 폐지, 즉 세계-없음(worldless-ness) 혹은 무(無)세계성을 초래한다. 우리는 자본주의적 보편성이 지배하는 하나의 글로브(globe)에 살게 되었다. 그러나 글로브는 외적 현실을 경험하고 인식하는 지평으로서의 세계(world)와는 다르다. 글로벌라이제이션은 곧 세계화의 반대항인 무세계화를 뜻한다. 현상학적인 의미에서 우리가 세계 속에 있다는 것은, 무의미한 사실들로 가득한 혼란스러운 세계에서 벗어나 세계가 우리 앞에 어떤 식으로 나타나고 존재하는지를 이해하고 경험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전무후무한 보편적 지배는 우리의 삶에서 세계를 빼앗아간다. 우리는 주어진 실정적 사실들을 불가항력적인 자연처럼 여기며 살아간다. 그렇기에 낭시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와 더불어 무세계가 등장했다고 여긴다.

이와 비슷하게 예술비평가 조너선 크레리(Jonathan Crary)는 역저 『24/7 잠의 종말』에서 동시대 자본주의의 “일반화된 무세계성”을 언급한다.8 그가 상세히 고발하듯 우리는 거의 한시도 쉴 틈 없는 지각의 충격 속에 놓여 있다. 손에서 떠나지 않는 휴대전화와 꺼질 줄 모르는 TV는 우리의 주목을 얻기 위해 발버둥 치는 이미지와 사운드를 24시간 내내 쏟아낸다. 그것이 생산하는 지각적 충격에 우리는 종일 얼이 빠져 허우적댄다. 이는 급기야 그러한 지각적 충격에 홀린 채 깨어 있는 상태를 부정할 최후의 보루일 ‘잠’이라는 세계마저 침범하고 박탈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세계로부터 자신을 숨기며 ‘세계 없음’에 빠져드는 일이라 할 수 있을 잠을, 크레리는 세계가 출현할 수 있도록 하는 힘으로 바라본다. 그렇지만 만연한 불면은 주목과 관심을 판매하려는 문화상품이 융단폭격처럼 쏟아붓는 끝없는 지각적 충격에 식민화되어버린 잠의 위기를 의미한다. 그렇기에 크레리는 “개인적 궁핍(privation)”으로서 “일반화된 무세계성”을 한탄할 수밖에 없게 된다.

현실을 경험하도록 이끄는 유의미한 지평이 부재함을 뜻하는 무세계성이라는 관념을 접할 때, 어쩐지 한때 유행했던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라는 정치적 캐치프레이즈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현실사회주의의 붕괴 이후 자본주의와 그의 정치적 형태인 자유민주주의가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최종적인 세계이며 더이상 다른 역사는 존재할 수 없다는 지배적 서사에 맞서 많은 이들이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라는 구호를 외치곤 했다. 이 구호 속 세계란 자본주의 너머의 세계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동시에 순전히 수동적으로 주어진 세계를 받아들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허무주의에 맞서 우리가 세계를 창설해야 한다는, 나아가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재현하는 서사를 생산해야 한다는 바람을 포함하고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무세계성에 대한 반전된 사고를 제시한 철학자 바디우(A. Badiou)의 생각을 참조해도 좋을 듯하다. 그는 침울한 회한에 빠지지 않고 무세계성이야말로 세계를 창설하는 행위인 ‘사건’을 가능케 하는 조건으로 사유한다. 그렇기에 바디우의 사건의 철학은 어쩌면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라는 정치적 프로그램의 철학적 표현일지도 모를 일이다. 바디우에게 순수한 다양태로 구성된 실정적 사실들의 무세계성이란 근심할 문제가 아니다. 바디우는 존재란 폐쇄된 세계의 형태를 지닌 외적 총체가 아니라 그 어떤 한계도 없는 무한한 다양태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규정한다. 무한히 다양한 실정적 사실들로 가득 찬 현실은 세계가 없음을 의미한다. 즉 처음부터 세계란 존재하지 않는 셈이다. 그가 말하는 세계란, 그의 유명한 표현처럼 ‘하나로 셈하기’(the count-as-one)를 통해 정립된다. 바디우에게 사건이란 단순히 현존하는 질서를 깨뜨리는 것이 아니다. 그가 말하는 세계 창설의 행위로서의 사건이란 진리를 성립시키는 것으로, 사실들의 다양태에 의미를 부과하는 것이다. 진리란 이미 주어진 사실들로부터 연역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정치적 행위의 장을 통해 더욱 분명해진다. 어제까지만 해도 전혀 불가능한 허구처럼 여겨졌던 것을 오늘의 현실을 이해하는 기준으로 둔갑시키는 혁명적 변화는, 진리 앞에 사실들이 복종하도록 만든다. 사실들의 세계로부터 진리를 도출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통해 사실들, 즉 무한한 다양태가 재정렬되는 것이다.

그러나 무한한 다양태로서의 무세계와 해방적 정치를 통해 세계를 수립하는 행위로서의 사건을 대립시키는 바디우의 사유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이후의 자본주의가 봉착한 난관을 돌파하기 위한 철학적 돌파구로서 매력적일지 몰라도, 썩 설득력있는 대안을 구성하는 데 도움을 주지는 않는다. 지젝(S. Žižek)은 그같은 바디우의 접근이 지닌 한계를 매우 신랄하게 비판한다.9 비판의 논점은 분명하다. 세계를 창립하는 사건의 영역을 모조리 ‘정치적인 장’으로 환원함으로써 경제라는 영역을 진부하고 평범한 다양태적 존재로 격하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맑스 없는 공산주의’ 혹은 ‘정치경제학 비판 없는 공산주의’는 경제로부터 존재론적 위엄을 박탈하고 세계를 형성하는 유일한 힘을 오직 정치에 부여한다는 것이 지젝의 진단이다.

지젝이 보건대 바디우의 해방적 정치의 한계는 “경제적 영역의 혁명적 잠재력”을 고찰하기를 거부하는 데서 비롯된다. 하이데거(M. Heidegger) 식 표현을 좇자면 바디우는 존재론적 질서와는 다른 “존재의 질서에 속하는 것이며 잠재적인 사건적 장소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연유로 경제를 배제한다. 경제적 영역은 다양태의 사실들로 구성된 무세계의 차원에 속한다. 반면 진리를 부과하며(prescription) 세계를 구성하는 일은 정치의 영역에 속한다. 따라서 바디우에게 가능한 정치의 경로는 “국가의 경계 밖에서 작동하며 기본적으로 스스로를 동원의 선언에 한정하는 ‘순수한’ 정치적 조직의 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난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지젝은 이렇게 단언한다. “이 교착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경제적’인 영역에 진리의 위엄과 사건을 위한 잠재력을 재건하는 것뿐이다.”10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이후를 상상하며

 

오늘날의 현실을 무세계성의 시대로 진단하는 것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만들어낸 역사적 자본주의를 밝히려는 철학적 사변이라면,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은 무세계성이라는 개념을 거쳐 새로운 세계를 구성하는 변혁의 서사가 절박하게 요청됨을 알리고 있다. 그러나 무세계성을 경제적 사실의 지평으로 규정하고 오직 사건이라는 정치적 행위를 통해서만 ‘세계’가 형성될 수 있다는 바디우의 생각은 썩 만족스럽지 못하다. 그의 주장은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을 우회한 채 자본주의 너머로 나아가는 길을 궁리한다는 점에서 치명적인 한계를 품고 있다. 그러나 우리를 더욱 조바심치게 하는 것은 지난 수십년간 맹위를 떨쳤던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위기에 직면하며 자기부정의 국면에 이르렀다는 점이다. 우리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이후의 자본주의가 과연 어떤 것일지에 관해 아직 뚜렷한 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 단지 신냉전체제의 형성이나 탈세계화 같은 모호한 개념을 빌려 그 흐릿한 윤곽을 그려보고자 애쓰고 있을 뿐이다.

한편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이후의 ‘세계’에 관한 기대와 비전 역시 불명확하다. 우리가 처한 역사적 시간을 포착하는 가장 설득력있는 표현인 ‘낡은 것은 가고 새것은 아직 오지 않은’만 보아도 이를 짐작할 수 있다.11 그런 점에서 문화연구자 빠올로 제르바우도(Paolo Gerbaudo) 같은 이는 “현재의 이데올로기적 궐위 시대” 즉 낡은 것은 가고 새것은 아직 오지 않은 시대를 “메타 이데올로기적 이행국면”이라 묘사하며, “정치적 공통감각의 변화가 진보적 모멘텀이 될지 반동적 모멘텀이 될지에 관해서는 아직 우리가 조금이라도 확실히 이야기할 수 없다”라고 진단한다.12 그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위기에 대한 반응을 신자유주의 자체의 논리를 거꾸로 세우는 것, 혹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외향적 논리를 부인하는 내향화의 경로로 파악한다. 그러면서 그는 이러한 내향화의 경로에 따라 우파는 ‘유산자 보호주의’(proprietarian protectionism)를, 그리고 좌파는 ‘사회보호주의’(social protectivism)를 각각 제시한다고 본다.13 즉 현재의 보호주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초래한 외향성을 반사적으로 굴절시킨 내향성의 정치로서, 각기 금융자본을 위시한 자산계급을 보호하는 방향과 노동자계급 및 대다수 사회계층의 사회경제적 빈곤과 생존 조건의 위기를 보호하는 방향이라는, 어쩌면 서로를 반영하는 듯한 정치 경로에 처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훨씬 복잡한 자본주의의 역사적 변증법 속에 놓여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한편 “헤게모니의 위기는 객관적인(objective) 체계 위기의 주체적(subjective) 대응물”이라고 규정하는 낸시 프레이저(Nancy Fraser)의 주장 역시 경청할 필요가 있다.14 앞서 제르바우도가 이데올로기적 궐위 시대라 칭했던 것과 다르지 않은 ‘헤게모니의 위기’를 언급하며 그녀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시대 정치를 추동했던 두가지 정치적 방향, 진보적 신자유주의와 초반동적 신자유주의라는 두 흐름 어느 쪽도 가까운 미래에 정치적 헤게모니를 감당할 적합한 후보가 될 수 없으리라 분석한다. 그녀는 “둘 중 어느 쪽도 사회적 현실의 권위 있는 전체상, 즉 광범위한 스펙트럼을 가진 사회적 행위자가 소속감을 느낄 만한 하나의 서사를 제공할 수 없다”라고 단언한다.15 진보적 신자유주의란 신자유주의의 경제·사회적 질서에 기꺼이 침묵하면서 다양성과 차이 등에 근거한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적극 동원하는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가리킨다. 즉 다원적 인정의 정치를 옹호하되 노동계급과 민중을 위한 분배의 정치를 포기한 것이 진보적 신자유주의였다. 반면 역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를 적극 옹호하되 반민족주의적·반이민자적·친기독교적 지위 질서를 또한 두둔했던 것은 초반동적 신자유주의이다. 그들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를 이끈 계급과 민족의 정치를 주도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그런 점에서 반동적 신자유주의든 진보적 신자유주의든 모두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질서를 옹호한다는 점에서 똑같은 분배의 정치를 지지하였지만, 둘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바로 인정의 정치라는 차원에서의 대립일 뿐이다.

이렇듯 신자유주의적 헤게모니가 위기에 처한 지금, 그를 대신할 새로운 정치적 서사의 출발점으로서 낸시 프레이저는 ‘진보적 포퓰리즘’을 제안한다. 그리고 “진보적 포퓰리즘이라는 선택지를 추구하지 않으면 현재의 헤게모니 공백 사태가 연장될 것”이라고 충고한다. 그녀가 말하는 진보적 포퓰리즘이란 “배제적인 종족 민족주의뿐만 아니라 자유주의적 능력주의적 개인주의도” 거부하는 것, 그 대신에 “오로지 탄탄한 평등주의적 분배 정치와 실질적으로 포괄적인 계급 문제에 민감한 인정 정치를 결합”하는 것이다. 그녀는 이렇게 할 때에만 우리가 “대항 헤게모니 블록”을 구축할 수 있다고 확언한다.16 물론 이에 대하여 다양한 이견을 제출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앞서 인용했던 제르바우도는 “21세기 포퓰리즘 담론은 본질적으로 신자유주의의 안티테제이자 전도(inversion)에 해당하며, 다시 말해 포퓰리즘은 곧 반(反)신자유주의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프레이저와 의견을 같이하면서도, 포퓰리즘은 진정한 대항 헤게모니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고작해야 “대항문화 주장의 수준”에 멈추는 경향이 있다고 비난한다.17 포퓰리즘의 한계를 지적하며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계급정치 프로그램을 마련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에 주저 없이 동의할 수 있지만, 포퓰리즘을 “대항문화”로 격하하는 생각을 수긍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대항문화란 앞서 언급했던 심리적인 개인의 주관적 경험과 추상적인 자본주의의 역사적 지배를 매개하는 것을 가리킨다. 우리는 그것을 제임슨의 표현대로 “인식적 지도 그리기”라 부를 수도 있고, 우리 시대의 리얼리즘이라고 지칭할 수도 있고, 아니면 대항 이데올로기라고 호명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을 무엇이라 지칭하든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이후의 급진적 대안정치가 개인의 경험과 자본주의적 총체성을 매개하는 상징적 서사 없이 실현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문제는 이러한 서사를 생산하는 장소가 전처럼 문학이나 영화와 같은 장(場)이기는 어렵겠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문학과 정치라는 조합이 더없이 당연해 보이던 역사적 시대가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한다. 좋았던 시절, 문학 속의 인물과 상징은 곧 사회의 알레고리인 것처럼 보였다. 개인의 경험을 드러내고 표현하는 문장들이 곧 시대적 현실을 증언하는 것처럼 여겨지던 때가 사라지고 말았다는 회한이, 문학과 예술을 둘러싼 비평에 만연했던 것 역시 우리는 잊지 않고 있다. 그렇지만 개인의 경험을 사회적 총체성과 연결하여야 한다는 요구로부터 달아나는 일은 불가능하다. 누군가의 개인적 경험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려는 시도는 그의 공약 불가능한 온전한 차이에 눈뜨려는 것이 아니라 외려 우리를 가로지르는 공약된 세계에 대한 이미지를 얻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당장 정치를 개인적 경험과 접합시키는 서사를 생산하는 곳이 어디일지 예보할 수 없다고 해도, 그를 불운한 일이라고 여길 필요는 없다. 브레히트(B. Brecht)의 말처럼 좋았던 옛날을 떠올리는 대신 ‘형편없는 새로운 날들’(bad new days)을 택한다면, 우리는 언제 끝날지 모를 어두운 터널과도 같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이후 자본주의의 시효 종말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물론 새로운 문화적·정치적 실천이라 할 만한 것이 등장한다면 그것이 우리가 처한 세계의 윤곽을 그려내고 그를 감당하는 개인의 경험을 밝혀야 하리라는 사실 역시 잊지 않아야 하겠지만 말이다.

 

 

  1. 이하 기후의 세겹의 차원 논의와 관련해서는 2023년 12월 28일 성균 국제문화연구 연례포럼 ‘동아시아 SF, 세계관의 확장과 파열’의 발표 「태양광 코뮤니즘」을 바탕으로 보완·변용하였다.
  2. 아미타브 고시 『대혼란의 시대』, 김홍옥 옮김, 에코리브르 2021, 86~88면.
  3. 마거릿 애트우드 외 『곰과 함께』, 정해영 옮김, 민음사 2017, 12~13면.
  4. 롭 닉슨 『느린 폭력과 빈자의 환경주의』. 김홍옥 옮김, 에코리브르 2020, 19면.
  5.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후기자본주의의 문화 형태에 대한 분석을 시도하며 제출된 인식적 지도 그리기라는 개념은 1980년대 출간된 『정치적 무의식』에서 이미 리얼리즘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제임슨은 리얼리즘이 “인식적인, 구도 짓는(cognitive, mapping), 또는 거의 ‘과학적’인 전망을 일상생활의 경험과 결합하는 서사 담론으로서, 전통적으로 다양한 형태로 마르크스주의 미학의 중심 모델이 되어왔다”라고 서술한다. 프레드릭 제임슨 『정치적 무의식』, 이경덕·서강목 옮김, 민음사 2015, 130면. 강조는 인용자.
  6. 존 벨러미 포스터·인탄 수완디 「코로나19와 재앙 자본주의」, 김요욱·장대업 옮김, 『마르크스주의 연구』 2021년 여름호, 60면.
  7. Jean-Luc Nancy, The Creation of the World or Globalization, translated by François Raffoul and David Pettigrew,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2007.
  8. 조너선 크레리 『24/7 잠의 종말』, 김성호 옮김, 문학동네 2014, 37면.
  9. 슬라보예 지젝 「우리는 여전히 세계 속에 살고 있는가?」, 『시차적 관점』, 김서영 옮김, 마티 2009.
  10. 같은 책 645면. 강조는 인용자.
  11. 이는 안또니오 그람시가 그의 『옥중수고』에서 헤게모니의 위기를 두고 했던 말이다. 이를 동시대를 분석하는 지침으로 삼은 낸시 프레이저는 그 문구를 자신의 책의 제목으로 삼는다. 낸시 프레이저 『낡은 것은 가고 새것은 아직 오지 않은』, 김성준 옮김, 책세상 2021.
  12. 파올로 제르바우도 『거대한 반격』, 남상백 옮김, 다른백년 2022, 71면.
  13. 같은 책 26~27면.
  14. 낸시 프레이저, 앞의 책 47면.
  15. 같은 책 38면. 강조는 인용자.
  16. 같은 책 51면.
  17. 파올로 제르바우도, 앞의 책 66면.

서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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