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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김금희 金錦姬

200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소설집 『센티멘털도 하루 이틀』 『너무 한낮의 연애』 『오직 한 사람의 차지』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 장편소설 『경애의 마음』 『복자에게』, 연작소설 『크리스마스 타일』 등이 있음.

 

 

 

장편연재 4

대온실 수리 보고서

 

 

동궐관리청 사람들과 회식을 앞두고 소목이 직원들을 불렀다. 말이 회식이었지 사실은 어떻게든 지하 배양실을 발굴하려는 절박한 작전 회의였다. 소장은 일이 있어 먼저 나가면서 설계도서 납품 기간을 어기면 계약해지의 빌미를 주는 것이라고 상기시켰다. 어쩌면 장과장이 술수를 쓰는지 모른다고, 미적거리다가 골치 아프게 구는 우리와 선 긋고 싶을 수도 있다고. 계약해지가 되면 지금까지 헛일한 셈이니 상상만으로도 아찔했다.

우리가 내세울 수 있는 명분은 문화재청에서 작성한 수리공사 예규 정도였다. 문화재의 연혁, 가치, 특성 같은 고증조사와 문화재 주변 현황조사를 실시해야 한다는 것. 하지만 세상일이 그렇듯 그런 원론적인 얘기야 현실에서는 소용없기 마련 아닌가. 일단 무너진 지하 공간이 복원 대상인지부터 따지게 되리라고 소목은 내다봤다.

이번 공사에 반드시 필요한 발굴인지도 보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소장을 통해 의견을 전해도, 그 좋아하는 공문을 보내도 반응이 없던 장과장은 설계도서 납품일이 코앞까지 다가온 때에야 약속을 잡았다. 우리는 장과장을 설득할 마지막 기회라고 별렀다.

“그냥 속을 터놓고 얘기하면 되지 않겠어? 젊은 사람들 진심이 통하면 되겠지.”

소목이 사람 좋은 웃음을 짓자 제갈도희가 말도 안 된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절대 그런 순진한 분 아닙니다.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 언론에 알리겠다 이렇게 으름장을 놓아야 해요. 땅 밑 유물 쉬쉬한 동궐관리청, 우리 문화재 지킴이 맞나? 기사 나고 클릭수 올라가고 유튜버들 창경궁에 몰려들고 홈페이지 다운되고.”

은세창은 가능한 시나리오를 펼쳐나가는 제갈도희를 우려하는 얼굴이었다. 손가락으로 샤프를 초조하게 돌리며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되었을 때 아쉬워지는 건 당연히 바위건축사사무소였다. 계약 실행 중 발주처를 폭로한 설계사무소라니, 앞으로 입찰에 명함도 못 내밀 것이 뻔했다.

“다들 그냥 넘어갈 수는 없다는 거잖아. 내가 이해한 게 맞지?”

“그럴 수야 없죠. 매장문화재 발견 시 신고하는 거 공사 주체들 의무잖아요.”

은세창의 말을 나도 이어받았다.

“막상 만나서 얘기해보면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도 있어요. 예산이 가장 문제일 텐데 아랑씨가 귀띔해준 바로는 일단 시굴비는 과장 전결로 처리할 수 있는 변경사항이래요.”

“그나마 희소식이네요.”

제갈도희가 수첩에 뭔가를 끄적거리며 시들하게 말했다.

“소고기를 사야겠네. 일단 소고기가 구워지면 사람들 마음이 변하잖아?”

소목 말에 모두들 착잡한 가운데에서도 웃었다.

“변하죠. 없던 인류애도 생겨납니다.”

은세창이 답했다. 처음에는 보고서를 위한 관심이었지만 지금은 사명 같은 것이 생겨나고 있었다. 마리꼬라는 어린아이가 자기 아픔을 환상으로 처리하면서까지 이야기하고 싶어한 진실, 거기에 응답하고 싶었다.

“채식주의자라던데요.”

제갈도희가 아무도 예상 못하셨죠? 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떻게 알았느냐고 소목이 묻자 거래처 사람 카톡 프로필이랑 SNS 방문은 일종의 에티켓 아니냐고 했다. 소개팅 전에도 사전 리서치가 필수인 마당에 나한테 돈을 주거나 내 노동력 가져갈 사람에 대해 그 정도는 알아야 한다고. 소목은 난 카톡도 SNS도 안 해서 다행이네, 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며칠 전 대둔산 다녀오셨죠?”

방심하지 말라는 듯 제갈도희가 재잘거렸다.

“어떻게 알았어?”

“차 유리창에 공영주차장 영수증이 낙엽처럼 찰싹 달라붙어 있습니다. 사람은 흔적을 남기게 돼 있어요. 유령이라면 모를까.”

접선 장소는 쏘가리회를 파는 식당이었다. 은세창과 소목은 소장 차에, 제갈도희는 내 차에 타고 파주를 출발했다. 서울로 진입하는데 난지한강공원에 단풍이 와르르 물들어 있었다.

“아무리 봐도 빨간 맛이 최곤 거 같아요.” 제갈도희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음식 중에서요?”

“낙엽 중에 빨간 낙엽이 제일 예쁜 것 같다고요.”

나는 제갈도희의 독특한 표현 때문에 한바탕 웃었다. 저번에 삼우씨와 연락된 일을 전할 때도 “그분 뭔가 식어버린 만주 같은 느낌이었어요”라고 했기 때문이다. 주말에 삼우씨를 만나기로 했다고 하자 제갈도희는 낙원하숙에 대한 정보를 풀어냈다. 한옥이 너무 근사해 열심히 알아봤다고 했다. 낡고 사람이 살지 않아 더 흉흉해진 집 어디가 근사했을까. 나는 제갈도희에게 뼛속까지 건축가라고 말했다.

“그럴까요? 저 맞게 길을 가고 있는 걸까요?”

“맞고 틀리는 개념은 아닌 것 같아요. 저도 인생 잘 모르지만.”

“우리 영두님 역시, 언니라고 부르고 싶다.”

제갈도희는 그 집이 어째서 문화재청 산하에서 관리되지 않는지 궁금했다고 설명했다. 역사적 보존이 필요한 한옥들 상당수가 지정문화재는 아니더라도 등록문화재 정도의 푯말은 달고 있으니까. 흥신소 직원 같은 호기심에 등기를 열람하고 약간 놀랐는데 최초 소유자가 조선총독부였기 때문이었다. 일본인 관리 사택으로 쓰였을 것 같다고 제갈도희가 말했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여러번 주인이 바뀌었다가 1986년부터 안 씨가 소유하게 되었다고 했다. 문서에 공란으로 남은 이름은 ‘문자’일 거였다. 이름들을 안다는 건 서류가 말해주지 않는 빈 사건들을 채워넣을 수 있다는 뜻이구나 싶었다.

“최근 주인에게 명의이전된 때는 언제던가요?”

“재작년인가 그렇더라고요? 외국인이고. 근데 소송을 했나보더라고요. 사회복지법인으로 이전된 소유권을 소송으로 되찾아온 것 같던데.”

문자 할머니가 돌아가신 때는 불과 몇해 전이었다. 마지막으로 얼굴을 볼 수 있지 않았을까 후회스러웠다. 이런 가정은 소용없지만 한번 할머니를 찾아봤더라면, 대온실 수리가 몇해 먼저 시작되어 내가 원서동으로 일찍 돌아왔다면 아니, 그저 내가 좀더 용기를 내었다면.

식당에 도착해 앉아 있는데 장과장과 왕주무관 그리고 아랑씨가 방으로 들어왔다. 날씨 얘기나 하며 어색하게 앉아 있다 미리 예약해놓은 음식을 주문했다. 장과장이 방 안을 둘러보더니 “일반 횟집이 아닌가요?” 하고 물었다.

제갈도희가 무슨 트집을 또 잡으려나 싶은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장과장이 손바닥을 비비면서 뭔가를 찾더니 메뉴판을 확인했다.

“우리 뭐 쏘가리 먹는다고 했었죠? 가격이 싯가네.”

“쏘가리가 청정 1급수에만 살아서 구하는 게 아주 어려운 생선이에요. 서울에서도 회로 하는 건 몇집 안 되죠.”

소목이 말했고 은세창이 의욕적으로 거들었다.

“요즘은 그나마도 안 잡혀서 지난번 지자체에서 쏘가리축제를 했는데 한명이 딱 네마리 낚았답니다.”

“아니, 쏘가리축제를 하는데 쏘가리를 한명밖에 못 잡으면 어떡해. 그건 축제가 아니잖아.”

소장이 테이블 위에 스카프를 벗어놓으며 농담했다. 모두들 웃는데 장과장이 쏘가리 말고 다른 메뉴를 먹자고 말했다. 쏘가리만 파는 식당에서 쏘가리를 먹지 않으면 뭘 먹는단 말인가? 우리가 당황하자 정부기관이라 인당 허용되는 저녁값이 정해져 있다고 선을 그었다. 반찬을 놓으러 직접 들어온 사장은 토끼 눈이 되었다. 여덟명에 맞게 쏘가리를 마련해놨는데 대체 무슨 말인가. 회가 무슨 다른 재료처럼 내일 써도 되는 음식인가.

“장과장님 걱정 마세요. 밥 먹는 것 가지고 너무 그런다. 이거 그렇게 안 비싸요.”

소장 말에는 아랑곳없이 장과장 시선이 사장에게로 향했다.

“싯가가 얼맙니까?”

50대 정도의 사장은 미소가 싹 걷힌 얼굴로 “킬로당 이십……”이라고 하려다 소장과 눈을 마주치더니 “이거 한상 이십만원이요” 하고 말을 바꿨다. 거짓말이 분명했지만 말 그대로 싯가란 식당 사장 마음대로라는 얘기였으므로 장과장도 캐물을 수 없게 되었다.

“거봐요. 민물고기가 비싸면 얼마나 비싸다고. 독일은 생선 무지 비싸지, 바다가 없어서.”

소장이 화제를 돌리려는데 장과장이 자기 법인카드를 꺼내 삼만원만 결제해달라고 했다.

“그러면 제, 제 것도 계산을……”

왕주무관이 눈치 빠르게 상황을 알아챘다.

“왕주무관은 그냥 먹든가 개인카드를 쓰든가 하면 되지, 뭘 장급처럼 몸을 사려. 계속 승진해서 3, 4급까지 갈 거야? 아니잖아. 요즘 세대들 공무원직에 오래 안 붙어 있거든.”

왕주무관은 할 수 없이 자기 카드를 내밀었다. 아랑씨는 그냥 먹겠다고 했다.

“이 연구사는 상관없지. 어차피 기간제니까.”

“네, 저는 상관없어요. 두명 빠졌으니까 공금으로 쏘가리 실컷 잘 먹겠습니다.”

하지만 쏘가리에 대한 장과장의 탐닉이란 청정지역의 최상위 포식자 메기에 못지않았다. 그는 정말 그 싯가의 쏘가리회를 좋아했다. 같은 생각을 했는지 제갈도희도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나를 마주 보았다. 이윽고 타이밍을 잡아 시굴 얘기를 꺼내자 장과장이 두 손을 흔들며 중단시켰다. 설계도서에도 언급하지 말고 외부에 나가서 문제 삼지도 말라고 주의를 줬다.

“강영두 선생님이 보고서 주신 것처럼 창경원 곳곳에서 그런 뼈가 자주 발굴됐어요. 해방 때가 문제가 아니라 한국전쟁 때는 오죽했겠어요? 북한 애들이 그랬겠지만 낙타랑 사슴이랑 얼룩말들 발목이랑 머리통만 남아 있었다고요. 표본실도 털렸는데 호랑이 어금니를 빼 가려고 쑥대밭으로 만들어놨고. 그런 역사 이미 여러분이 나서지 않아도 다 아는 옛날얘깁니다.”

장과장은 더이상 말할 필요 없다는 듯 맥주잔을 들어 건배를 제안했다.

“지금은 잘 모르잖아요, 저도 그랬지만. 사람들에게 다시 기억시켜야죠.”

“그러니까 그 복원 지금 대온실 공사에서 안 해도 된다고요. 아니, 그리고 식물도 아니고 동물 일인데 신경을 써. 이봐요, 강영두씨. 그런 의욕은 임시고용 끝나고 진짜 본인 일 찾았을 때나 발휘하세요.”

“와 정말 너무하시네요.”

제갈도희가 깻잎을 쥐고 있던 손으로 테이블을 치며 정색했다.

“아니, 뭐 고용노동부장관이세요? 남 고용상태에 관심이 너무 많으신 것 같아요. 지금 갑질하시는 거 모르시죠?”

제갈도희는 더는 참을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미소한 부리이지만 어떻게든 쪼아서 장과장을 회개시키겠다는 투지가 느껴졌다.

“아이고, 우리 막내가 술이 너무 약해서 취했네. 이해 부탁드려요. 얘가 엠지라 그래, IMF 때 태어난 거잖아. 나 유학 갈 때야.”

소장이 팔을 내밀어 날갯짓하는 곤줄박이를 횃대로 주저앉혔다. 발주처 한마디면 피곤할 대로 피곤해지는 확실한 을의 자리로.

“자, 이렇게 정리하고 두번은 만나지 맙시다. 네? 지금 예산도 시간도 부족해요. 충분하지 않아. 바위건축에서는 설계도서 제때 납품하고 나중에 수리공사에서 문제가 되면 그때 자문회의 안건으로 올려서 처리할게. 뭣 하러 이 단계에서 일을 벌이려고 하냐고. 자기들도 일만 느는 것 아냐?”

“구트, 그러면 되겠네. 장과장님 역시 20년 공직생활 판세가 훤하십니다. 우리 의욕 넘치는 직원들도 이만하면 오케이지?”

식당에서 나온 뒤 아무도 2차를 가자고 하지 않아 헤어졌는데, 제갈도희가 휴대전화로 약도를 보내며 맥줏집에 잠깐 들르라고 했다. 그사이에 얼마나 마셨는지 아니면 원래 술이 약한지 완전히 취한 왕주무관과 그런 그를 약간은 흐뭇하게 지켜보는 제갈도희가 있었다. 둘은 공동의 적인 장과장을 안주로 놓고 마셔댄 모양이었다.

“우리가 회식을 하면은요, 에? 건배사만 사십분을 해요. 고기고 뭐고 다 타고 다 식어버려. 맛이 없어요. 맛은 뭐 죽을 맛만 있지.”

“직장생활 다 그렇죠 뭐. 그래도 직장이 기관이니까 계약서상에서라도 갑이잖아요. 갑.”

곤줄박이가 엄지를 치켜들고 왕주무관 얼굴 앞으로 내밀었다. 왕주무관은 그렇게 자기 눈앞까지 다가온 곤줄박이의 신체 일부분에 약간 당황하더니 “손가락이 예쁘시네요” 하고 말했다.

“왕주무관님은…… 목소리가 약간 엑소 디오 같은 게 딱 고막남친감이네요.”

나는 팝콘을 집어 먹다가 갑자기 뭔가 찾을 게 있는 것처럼 바닥으로 시선을 피해주었다.

“아무튼 건축가면 멋있잖아요. 자유롭고.”

“아유 제가 입사하고 통모짜렐라예요. 잠을 통 못 자는 과노동의 신데렐라.”

“그렇게 고생하시는데 이렇게 돼서 제가 죄송하네요.”

“일 덜하면 몸은 편한데 마음은 무겁죠, 그런 채로 둔다는 게. 동물이라도 사람들이랑 같이 지내던 동물이잖아요. 걔들을 그렇게 해놓고 꽃이 피네 지네 대온실에서 그런다는 게 얼마나 이상해. 동물이나 식물이나 사람이나 원소상으로 보면 다를 게 없거든요. 같은 물질이죠.”

제갈도희가 진지해지자 왕주무관도 표정이 무거워졌다.

“장과장이 공사 시작하면 얘기해보겠다니까.”

내가 상기시키자 왕주무관이 당나귀 울음소리를 내며 그러지 않을 거라고 장담했다. 하기는 모두가 그렇게 짐작하기는 했을 거였다.

“두분, 제가 알려드렸다고는 하지 마시고, 이렇게 해보세요. 내년 3월 공사가 시작하면 나타나시는 겁니다.”

왕주무관의 표정은 큰 결단을 내린 사람처럼 엄숙했고 어느 면에서는 거룩함까지 풍겼다. 텃새 중에 가장 작지만 벼랑에서 용감하게 먹이를 찾는 굴뚝새의 오라가 풍겼다.

“매장문화재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 시행규칙 제5조, 건설공사 사업 면적 중 2퍼센트 이하는 발굴허가 없이 표본조사가 가능!”

제갈도희의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노란 부리가 조그맣게 열렸다.

“수리 보고서 작성을 위한 표본이 필요하다고 하면 그런가보다 하고 파줄 겁니다.”

“장과장은 어떻게 하고요?”

“기러기 아빠거든요. 3월마다 휴가를 내고 캐나다를 간답니다. ‘마치 브레이크’라고 애들이 봄방학을 하거든요.”

맥줏집에서 나와 왕주무관을 택시 태워 보내고 제갈도희는 주차장까지 나를 따라왔다. 너무 기대에 차 오히려 말이 없어진 것 같았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언니, 우리 둘만 알고 봄을 기다려요. 얼지 말고 버티자고요.”

말투가 비장해서 나는 웃다가 제갈도희에게 손을 내밀었다. 제갈도희가 내 손을 잡고 힘차게 흔들었다. 그러고 자기는 좀 걸을 겸 지하철을 타겠다며 역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다음 날 소장은 모두를 불러 지하 공간 건은 흔적도 없이 빼고 설계도서 납품을 끝내라고 지시했다.

“다른 일 안 할 거야? 안동, 남해 현장에서 줄줄이 기다리는데 무슨 추리소설 읽는 애들처럼 거기 매달릴 거야? 그만해, 그만.”

“네, 얼른 일하겠습니다.”

제갈도희가 순순히 대답하자 소목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다음으로 내게 남은 건 다분히 기계적이고 자료 기술에 가까운 작업이었다. 실측조사 결과를 각 부분으로 나눠 진단하고 수리 공사안을 기술했다.

대온실을 받치고 있는 계단과 기단 같은 기단부, 축부, 추녀 및 수평보에 해당하는 지붕가구부, 유리와 서까래로 이루어진 지붕부, 타일, 난간, 홈통, 지붕 장식, 개폐 장식 같은 기타 부위. 기단석은 오래되어 오염이 심각했고 지의류가 붙어 자라고 있었다. 나는 홈통에서 흘러나온 녹이 물든 기단석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그것은 마치 누군가 던진 붉은 과일처럼 방사형으로 번져나가 있었다. 철제 기둥을 지지하는 지대석은 심각하게 침하된 상황이었다. 백여년 동안 대온실을 채우고 있던 습기는 페인트칠을 벗기고 나무 기둥을 부후(腐朽)시키고 유리가 맞닿은 창에 곰팡이를 만들었다. 하지만 또 그 습기는 식물들을 감싸면서 이 유리 공간을 살아 있는 존재들의 공간으로 유지시켰다.

대온실의 아름다운 유리 창호들은 모양과 작동방식이 조금씩 다른 수십가지 타입이었다. 한짝은 고정된 채 다른 한짝은 개폐가 가능한 여닫이창, 아예 열 수 없는 고정창, 문과 상부 살 무늬가 조금씩 달라 각자 다른 번호로 분류된 상하부창 등.

나는 유일하게 남은 축조 당시 유리문을 살펴보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낙원하숙 대문 손잡이와 비슷해 보였다. 낙원하숙이 본래 총독부 소유였다는 제갈도희 말이 떠오르면서 어쩌면 그 당시 흔했던 형태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옥 대문에? 유리 손잡이를?”

소목은 의아해했다. 모두 현장으로 나가고 둘이서만 식사를 한 참이었다. 소목은 지금의 우리에게도 유리는 여전히 비싼 자재라고 했다. 옛날에는 어떠했겠냐고. 한때 영국에서는 집의 유리창 개수를 세어서 세금을 징수하기도 했다고 예를 들었다. 세금을 피하려고 창문을 없애는 바람에 사람들이 시름시름 앓고 우울증에 걸리기도 했다는 거였다.

“우리나라에서도 처음으로 유리창을 쓴 건 일본공사관 건물이었어요. 그뒤로 일본 상인들이 명동 거리에 쇼윈도우를 들여왔는데 그 덕분에 상권을 잡았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지. 유리에는 자기 모습도 비쳤으니까 눈이 휘둥그레졌지. 그런 거 보면 우리 조상들이 쓴 창호지야말로 정말 좋은 창문 재료죠. 빛과 통풍 모두를 잡고 자기 자신에 대한 나르시시즘보다는 흰 벽을 마주케 하는.”

소목의 말을 듣고 보니 손잡이는 할머니가 구해다 달았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소중히 여겼을 것이다. 늘 소박했던 할머니에게 그런 화려한 손잡이가 필요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나는 삼우씨가 혹시 알지도 모른다고 기대했다.

설계도서 데이터를 넘기고 금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내리 잠을 잤다. 몸에는 여름과 가을 동안의 피로가 남아 있었다. 긴장과 불안, 갈등과 두려움, 의욕과 낙담, 몰두와 보람의 시간들이 전체에 흐르는 듯했다. 몸살을 앓듯 진땀을 흘리며 자면서도 나는 잘 살았다, 고 생각했다. 살아 있는 듯 일했고 잘라내려 했던 기억들도 이어 붙이게 되었다.

꿈에는 얼굴도 모르는 마리꼬 히메가 나왔다. 그 아이는 일본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여느 일본 소녀처럼 맑고 또렷한 눈을 가지고 있었고, 내가 마리꼬, 하고 부르자 뒤돌아보며 “내 이름을 어떻게 알아?” 하고 물었다. 나도 내가 어떻게 알았는지 알 수 없어서 멈칫하고 있는데 마리꼬는 “다시 불러줄 수 있어?” 하고 청했다. 마리꼬 히메, 다시 불러주는 순간 아이 얼굴에 어리는 슬픔이 보였다. 나는 왜 슬픈지 알 수도 없으면서 실제로 울면서 꿈에서 깨어났다.

언제 들어왔는지 산아가 옆에서 자고 있었다. 산아 역시 우리 집 현관 비밀번호를 알고 있는 사람 중 하나였다. 나는 산아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주근깨가 두드러진 볼과 말랑하고 부드럽게 눈을 덮고 있는 눈두덩과 뭘 하다 잠들었는지 터치펜슬을 꼭 쥐고 있는 손을. 누구에게나 있는 시절이고 모두가 겪고 지났을 시간인데 왜 아이들을 보면 다른 차원의 존재처럼 느껴지는지 알 수 없었다. 조금 시간이 흐르자 산아가 기지개를 켜더니 벌떡 일어나 앉았다.

“이모, 주일에 약속 있어서 오늘 저녁 미사 온다고 하지 않았어요?”

시계를 확인하니 미사 시간은 지난 지 한참이었다.

“애고, 오늘 또 생각과 말과 행위로 죄를 지어버렸네.”

나는 참회기도 올리는 시늉을 잠깐 했다. 산아가 히죽 웃으며 자기가 내 몫까지 기도했으니 안심하라고 했다. 산아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스미가 산아 말대로 잘 따르고 있다고 전했다. 산아의 태블릿 피씨에는 스미의 소지품이 등교시간과 하교시간으로 나뉘어 저장되어 있었다. 해리 상태도 나아졌는지 처음에는 남의 물건이 어떻게 자기 가방에 들어 있는지 기억도 못했지만 나중에는 체육시간에 잠깐 가져왔던 것 같아, 하면서 도로 갖다준다고 했다.

“애들은 뭐라고 안 해?”

“내가 시키면 애들은 잘 따르잖아. 한 놈만 빼고.”

“누구?”

“누구겠어요. 걔는 만날 그러니까 포기해야 해.”

“좀 슬픈 말이다. 사람을 포기한다는 말.”

“이모, 그렇게 마음이 약하면 어른으로 살 수가 없어. 안 되는 애는 안 돼. 으이구, 그러니까 엄마가 만날 이모 걱정을 하지.”

산아가 정색을 했다. 그러면서 깃을 겹쳐 이불을 개기 시작했다.

“산아 엄마 은혜씨도 철없기는 마찬가지야. 이모는 은혜씨 걱정이 더 돼.”

“하긴 그렇지. 어른들이란 아주 걱정투성이들이야.”

말은 그랬지만 산아는 씩 웃었다. 나도 산아 나이 때는 아빠를 늘 걱정했다. 그것이 아빠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일인 것처럼. 하지만 표현하지 않았기에 아빠는 그런 잔소리와 짜증이 사랑인 줄 몰랐을 것 같다. 아니, 아빠는 어른이었으니까 훤히 알고 있었겠지. 그래서 암 진단을 받고 나서도 숨겼겠지. 집 안에만 은신하는 딸에게 뭘 제대로 알릴 수 있었을까. 나는 11월의 찬바람이 새어 들어오는 창에 커튼을 쳤다.

“우정 여기까지 오셨는데 죄송하게도 이제 영두는 제가 제 분수껏 키우려고요.”

강화로 문자 할머니가 찾아왔을 때 아빠는 할머니를 집이 아니라 동네 식당으로 모셨다. 할머니는 아빠와, 지금 할머니가 왜 여기 있는지조차도 오래 생각하고 있을 수 없는 위태로운 나를 그 특유의 먼눈으로 바라보았다. 식사가 끝나고 할머니는 나와 둘이서 산책해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아빠는 “아픈 애라…… 금방 보내주시겨” 하고 집으로 돌아가고 우리는 마른 갈대가 으스스 흔들리는 마을을 걸었다.

논 옆 방죽은 얼어 있었다. 할머니는 내내 들고 있던 종이가방에서 스케이트를 꺼냈다. 그걸 일부러 신발장에 놓고 온 건 나였고 다시 선물하기 위해 들고 온 건 할머니였다. 스케이트를 살펴보았다. 날은 반짝반짝 닦여 있고 가죽에도 부드러운 윤이 났다. 그때 내가 왜 그걸 신고 얼어붙은 방죽을 한바퀴 돌아보았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어떤 속도로 얼마나 얼음 위를 지쳤는지도. 할머니가 지켜보는 가운데 양발에 힘을 주어 달리는 동안에는 바람마저 내 동력에 합류하는 듯했다. 그리고 마음 저편에 밀어넣었던 의욕이 아프게, 마음이 깨어지듯 아프게 올라오는 걸 느꼈다. 할머니가 원하는 대로 나도 하고 싶은 욕심이. 그 생각이 들었을 때 갑자기 나는 스케이팅을 멈췄고 얼음 위에 콰당 넘어졌다. 할머니가 괜찮냐며 그 미끄러운 곳까지 몇걸음 걸어 들어왔다.

마지막으로 같이 걸었던 그 길에서 할머니는 조용조용한 목소리로 당신이 좋아했다는 옛날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할머니 역시 당신 어머니에게 들었다는 그 전래동화는 한 낚시꾼 청년이 거북이를 살려준 덕분에 용궁에서 환대를 받는, 어느 나라에나 하나씩 있는 설화였다. 나는 우리나라 얘기와 비슷하면서도 결말이 다르다고 생각했다. 흩날리는 지금의 입김 같은 슬픔이 서려 있었다.

“이모, 포도 과학자 얘기는 끝났어요?”

산아가 물었다. 유럽과 미주 여행을 끝내고 폭풍우를 겪으며 집으로 돌아간 데까지 얘기했다는 거였다. 내가 그뒤로 포도 과학자가 어떻게 되었을 것 같으냐고 묻자 산아는 포도를 아주 많이 심었을 것 같다고 대답했다. 넝쿨이 자기 집을 다 덮을 만큼 포도를 키워서 포도주의 신, 이를테면 로마 신화에 나오는 바쿠스처럼 되었을 거라고. 그리고 엄청나게 아름다운 정원을 만들어 사람들이 다 구경을 갔을 것 같다고.

 

산아 예상대로 후꾸바는 더 많이 심고 가꿨지만 한동안은 본인 집에서만 그랬다. 조국에는 유럽에서 배운 지식을 활용할 여건이 조성되어 있지 않았다. 능력이 없었던 게 아니라 직(職)이 없었다. 후꾸바는 외교관이었던 자가 국가의 기초에 해당하는 식산흥업을 맡고 있는 현실을 개탄하며 죽을 고비를 넘기며 배워 온 원예 지식을 자신의 자택에 지은 신식 식물원에서 고독하게 시험했다. 프랑스에서 보고 들은 것을 토대로 온실 건물의 축소판인 온실 상자를 만들었고 거기에 똥, 낙엽 같은 열원을 사용하여 채소의 속성재배를 개발했다. 바쿠스가 아니라 실질적 먹을거리를 고민하는 농업의 신 사투르누스가 되어 토마토, 오이, 상추, 배 등을 생산했지만 경제성과는 거리가 있어 지금은 모두 멸종되었다. 그런 인고의 세월이야 그의 인생에 옵션처럼 따라붙곤 했으므로 견딜 만했다.

유학 이후 그가 다시금 빠져든 대상은 국화였다. 물론 회고록에 따르면 후꾸바는 열살 때부터 국화에 관심을 보이며 사랑했다. 이웃이 매년 자기 집에 화려하게 핀 국화를 구경시켜주고 소년 후꾸바에게 재배법을 친절히 알려줬다고 추억했다. 하지만 일본 황실의 상징이기도 한 국화를 향한 관심은 국학자였던 양부의 뒤를 잇지 않고 전혀 다른 길을 가기로 결정한 즈음에 시들해졌다.

그러다 자신의 꿈을 제대로 펼쳐낼 수 없는 울분과 소외감 속에 그 열정이 되살아난 것이었다. 국화는 식물원이나 연구소 신설에 관심 없는 고위관리들을 식물에 빠져들게 하는 좋은 수단이 되기도 했다. 후꾸바는 백작이나 기사 같은 고위관리들의 집에 정원을 지어주며 그것이 새로운 마음을 불러일으키기를 기대했다. 회고록에도 적었듯 후꾸바는 국화가 원과 백제에서 전해졌지만 그 품격을 높인 것은 일본이라고 자부했다.

그가 행한 국화 원예는 행과 열에 대한 집요한 집중으로 요약될 수 있는데 관리들은 물론 서양인들까지 그 기이한 아름다움에 감탄했다. 집합체가 만드는 질서와 규모, 자연물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집체적 인공미. 궁핍한 시골 마을의 부흥을 꿈꾸며 반슈우포도원 온실에서 포도뿌리혹벌레와 싸우던 시절은 가고, 그의 조국은 러시아를 물리치고 한반도와 만주를 점령하며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한 줄기에서 돔 모양으로 피어난 천송이의 국화 화분은 그런 일본을 상징하는 기념탑 같은 것이었다.

이후 후꾸바는 황실 업무를 주관하는 궁내성으로 옮겨 간다. 황실 정원을 조성하고 황실에 공급하는 채소와 과일, 원예용 꽃과 식물을 가꾸며 황실 연회를 총괄하는 직을 맡았다. 외국 공사들을 황실 정원으로 불러 꽃놀이를 하며 개항 초기의 불리한 조약들을 조금씩 고쳐나가던 시절이었다. 시간의 변화에 순응하고 비처럼 떨어져내리는 꽃잎을 기리며 모두들 애조의 ‘아와레(哀れ)’를 외쳤다.

“이것의 이름은?”

천황은 사무라이를 대동하여 황실 정원을 산책하며 이따금 식물의 이름을 물었다. 천황이 물으면 사무라이가 관리들에게 다시 확인했다. 그때 일본어가 아닌 라틴어 학명이나 외국 명을 대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후꾸바를 비롯한 직원들은 머리를 쥐어짜 이국의 식물들을 일본어로 바꾸어 부르기 시작했다. 남미가 원산지인 난꽃 까뜰레야(Cattleya)는 히노데(日の出)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것은 해돋이, 욱일승천하는 기세를 뜻했다.

그후 일생일대 산업인 신주꾸교엔과 향초실이라는 온실을 완성시키며 후꾸바는 승승장구했다. 관과 백성과 황실이 조화롭게 근대의 ‘진보’를 이루고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진보는 누군가의 굶주림도 불러왔는데, 노면전차의 등장으로 인력거꾼들이 직업을 잃는다든가 식민지에서의 쌀 수입으로 쌀값이 폭락해 농민들이 아사한다든가 하는 일이 벌어졌다. 도시로 올라와 분진과 수증기로 꽉 찬 직물공장에서 일하던 수많은 여자아이들은 폐병을 얻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관동대지진 시기 조선인을 향해 분출된 폭력성이나 학살은 이러한 사회불안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후꾸바는 신주꾸교엔에 온실을 지은 자부심을 바탕으로 조선으로 건너와 창경궁 대온실을 건설했다. 조선으로 올 때도 후꾸바는 자기 저택에서 실험한 갖가지 식물들을 배에 실었다. 식물이 먼 나라에서 수입될 때면 몸이 아파도 얼음주머니를 든 채 항구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던 그이기에 그 과정 역시 유심히 살폈다. 그는 창경궁 대온실이야말로 철과 목재가 조화된, 동양에서는 유례없는 근대 건물이라고 자부했다.

일본의 한 연구자는 후꾸바가 창경원에서도 토오꾜오와 같은 역할과 ‘심득’이 일어나기를 바랐다고 서술했다. 황실 정원이면서 국제교류의 장이 되고 원예 문화가 퍼져나갈 기반이 되기를 바랐다는 얘기다. 식물을 전정하다 우접도(偶接刀)에 손가락을 다쳐도 굴복하지 않았던 메이지시대 소년에게서 시작된 미래의 풍경. 창경원에서도 순종이 일본 군인들에 둘러싸여 산책을 했다. 조선의 군중은 궁 안으로 직접 들어와 풍경 자체가 되었다. 경성과 토오꾜오, 두 도시의 상황은 같은 듯 전혀 달랐다.

“포도는 잊었나?”

산아가 뭔가를 조르듯 내 팔을 흔들었다. 나는 전에 너무 좋아하면 안 된다고 하지 않았느냐고 산아를 슬쩍 놀렸다. 산아는 그래도 포도 과학자에게서 포도가 사라지니 재미가 없어졌다고 아쉬워했다. 나는 지금 세상에 나온 회고록은 후꾸바가 남긴 글의 일부이고 나머지 부분은 아직 공개되지 않았다고 알려주었다. 어쩌면 비밀로 남은 부분에 포도 이야기가 남아 있을지 모른다고. 실제로 은퇴 후 후꾸바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었다. 사직하던 날 장래 계획을 물었을 때 자택 온실에서 하던 일을 계속하겠다고 한 말만 전해진다. 그리고 타이쇼오 시대가 열린 1915년, 후꾸바 하야또는 궁내성 대선두에 취임해 천황의 즉위식을 총지휘하게 된다.

“근데 즉위식 음식에도 복병이 있었어.”

“그치, 복병이 없으면 포도 과학자가 아니지.”

산아가 기대에 차서 눈을 반짝였다.

“이번엔 뭐였을 것 같아? 힌트는 포도혹벌레만큼이나 다리가 많다. 미리 말하자면 바퀴벌레는 아니고.”

산아가 답을 맞히고 싶어 이리저리 고심했다. 어려서 산아는 수수께끼책을 나와 함께 풀곤 했는데, 늘 더 어려운 문제를 내달라고 부탁했다. 더, 더, 더, 어려운 문제를 내봐, 이모.

“달팽이.”

“어째서?”

“프랑스에서는 달팽이를 요리해서 먹잖아. 안 올렸을 리가 없지.”

“달팽이는 다리가 없잖니.”

“아, 맞다.” 산아가 박수까지 치며 자신의 실수를 안타까워했다. 나는 답을 말해주었다.

“가재. 포도 과학자는 가재수프가 꼭 올라야 한다고, 뜻을 꺾지 않았어. 그때 일본에서는 가재가 귀했는데도 말이야.”

“역시 고집이 장난 아니네. 근데 왜 가재가 복병이었어? 맛이 없었나?”

타이쇼오 천황의 즉위식은 열국 대립의 시대, 외국에 대한 일종의 선전포고이기도 했다. 러일전쟁의 승리로 세계무대에 등장한 일본이 자신들의 발전을 과시하고 서양문화와의 친연성을 내세우며 근대적 성취를 인정받으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천황이 왕위 계승 선언을 하며 칙어를 낭독할 때 러시아, 프랑스, 영국, 미국, 이딸리아, 중국, 네덜란드, 뽀르뚜갈, 타이의 옛 왕국인 시암, 스웨덴, 덴마크, 아르헨띠나의 대사 사절들이 열을 지어 서 있었다.

이제 후꾸바에게는 식물이 아니라 드글거리는 이천마리의 가재가 필요했다. 가재는 살아 있어야 했고 접대하기 직전 끓는 수프 속으로 투하되어야 했다. 군인들까지 동원해 홋까이도에서 가재를 잡아 왔지만 정작 즉위식 당일 이천마리의 가재가 수조에서 자취를 감췄다. 그것은 불길하고 신성모독적이며 참사에 가까운 사고였다. 만약 끝내 못 찾았을 경우 궁내성 요리사로 대선료 주사장이었던 아끼야마 토꾸조오는 바로 자결할 생각이었다는 이야기가 전할 정도였다.

다행히 가재들은 부엌 조리대와 수납장 밑에서 발견되었다. 빛을 피해 숨어든 것이었다. 수프가 되어 곧 죽을 운명임은 차치하고라도 가재들은 그 빛, 이천명의 귀빈들을 맞이하기 위해 켜놓은 그 빛부터가 견딜 수 없었다. 그 견딜 수 없었던 가재를 모두 다시 잡아 즉위식은 무사히 치러졌고, 온 대륙이 모인 지구본 같은 연회장 테이블은 완벽히 구성되었다. 신주꾸교엔에서 기른 60여종의 난꽃으로 홀 전체가 황홀하게 장식되었는데, 그것은 오로지 붉은색과 흰색으로 홍백분화(紅白分化)를 이루어 천황의 영광을 드러내었다. 그걸 바라보는 후꾸바의 표정에 안도와 황홀감이 번졌다. 하지만 그건 지는 꽃처럼 천천히 사그라들었는데, 몇년 전 창경원에서 열린 연회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1909년 11월 동식물원 완공을 기념해 열린 그 연회에 후꾸바는 순종에게 하사받은 팔괘장까지 달고 앉아 있었지만 침통했다. 초대 통감이자 식물원 건설을 명한 이또오 히로부미가 며칠 전 조선인에게 총격을 당해 유명을 달리했기 때문이었다. 수정처럼 황홀하게 빛나는 세계 유례없는 유리 건축물의 완성을 통감은 끝내 보지 못했다. 그런 그에게 일본인치고는 이례적으로 살이 찐 군의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처음 본 것이 아닌데도 후꾸바는 그의 비대한 몸과 꽉 끼는 연미복이 거슬렸다. 식기를 요란하게 긁는 시끄러운 탐식도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군의감은 정성 들여 심은 수목이나 고결한 분재에는 눈길도 주지도 않고 테이블 위 음식들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칼로 잘라 드시오.”

후꾸바는 맞은편에 앉아 조용히 한마디 했다.

“네, 맛있게 먹고 있습니다.”

연회장이 시끄러워서인지 군의감은 엉뚱한 대답을 했다. 그러고는 다시 고깃덩어리를 베어 물었다. 군인들은 으레 후꾸바를 견딜 수 없게 했다. 서양 포도를 모두 불태워버리라고 하던 오래전 관리도 사무라이 출신이었다. 그 창경원 연회가 기억에 남는 건 군의감 목에 고깃덩어리가 걸려 한바탕 소동이 일었기 때문이었다. 군의감은 얼굴이 새빨개지더니 거품을 물었고 누군가 숨통을 조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자기 목을 움켜잡고 괴로워했다.

그가 씹다 만 음식물들을 테이블보로 토해내는 순간 후꾸바는 일어나 오물들을 피했는데, 누군가 달려와 그의 명치를 압박해 숨통을 틔워놓았다. 우여곡절 끝에 의식을 되찾자 모두들 다행이라고 박수를 치는데도 후꾸바는 그가 불러일으킨 혐오감을 숨기지 못하고 자리를 떠나버렸다.

그런 기억에 휩쓸려 들어가던 후꾸바는 일사불란하게 디저트를 대접하는 직원들의 기척에 정신을 차렸다. 오렌지와 리큐어 셔벗이 흰 접시에 올려져 있었다. 오래전 장면을 복기하다 후꾸바는 그때처럼 속이 불편해졌으므로 복도로 나갔다. 바람을 쐬면 나아질 것 같았다. 몇발 나가다 뒤돌아보았을 때 한 파티객 하나가 테이블의 난꽃을 꺾어 해사하게 뺨에 대보고는 바닥에 버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파티 모자에 꽂은 긴 타조 깃털이 그가 웃을 때마다 현란하게 흔들리는 것이. 이윽고 빈 그릇을 들고 지나던 서빙 보이가 꽃송이를 테이블보 밑으로 재빠르게 차 넣었다.

후꾸바는 계속 걸어나가면서 무언가 불쾌한, 기묘하게 불편한 감정이 퍼져나간다고 느꼈다. 아주 불길한 긴장이. 어쩌면 연회장에서 연주되고 있는 음악 때문이리라고, 정원으로 나가면 나으리라고 그는 생각했다.

연회장에 울려 퍼지는 뿌찌니의 「마농 레스꼬」는 원작에 있던 사랑과 신성은 없고 비극과 정죄만 남은 작품이었다. 주인공 마농이 미시시피강 연안의 뉴올리언스에서 다른 것도 아닌 갈증으로 죽는다는 결말도 엉터리였다. 그런데도 이 오페라는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신대륙 미국에 대해 유럽인들이 얼마나 무지했는가를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다른 관료가 밀어붙여 마지못해 허락하기는 했지만 후꾸바는 못마땅했다. 하지만 미국을 실제로 횡단한 자기 자신이 아니라면 누가 그 사실에 주목할까. 후꾸바는 멀거니 뒤를 돌아보며 서 있다 정원으로 향했고 한기와 함께 몰려오는 기억들을 몸서리치며 털어냈다.

 

나는 산아에게 포도 과학자 얘기는 여기서 끝이라고 알려주었다. 산아는 한동안 선반의 책들을 바라보더니 “뭔가 슬픈데?” 하고 소감을 전했다. 영화 한편을 다 보고도 속편이 남아 있는 듯한 아쉬움이 든다고. 그리고 내가 쓰는 보고서에 이 이야기가 들어가 있느냐고 물었다. 아니라고, 이 이야기를 아는 건 산아 네가 유일할 거라고 나는 말했다.

“어째서? 나만 알기에는 아까워.”

“그래? 그 정도로 재밌어?”

“응, 스미한테도 좀 해줬는걸.”

“그러면 이야기를 아는 어린이가 두명이 되었네.”

“청소년이라고 몇번을 말해. 그리고 어른들도 알아야 할 것 같아. 글로 써봐, 이모, 우리 마마무 흰죽지수리 얘기처럼.”

나는 그냥 웃어넘겼다. 산아는 왜 옛날이야기들은 이렇게 슬프게 끝나는지 모르겠다고, 역사책 읽을 때마다 해피엔드인 적이 없다고 말했다. 너무 옳은 말이라서 또다시 대답할 수가 없었다. 역사가 슬픈 건 죽은 이들 때문일 수도 있고, 늘 미완으로 남는 소망 때문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우리는 좀 춥지만 달을 보러 나가기로 했다. 하늘에는 몇가닥의 밤구름이 서려 있고 달은 차고 노랗게 빛나고 있었다.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방죽까지 걸었다. 문자 할머니와 함께 서 있었던 겨울이 떠올랐다. 발을 디뎌보니 방죽 물은 다 얼지는 않은 채였다. 바싹 마른 갈색 수초들이 얼음과 물 사이에 시들어 있었다. 하지만 뿌리는 다음 봄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산아가 위를 가리키며 태양계 끝에 얼음덩어리들이 모여 있는 걸 아느냐고 물었다. 약간 자랑하는 투였다.

“이름이 ‘오르트구름’인데 그중 얼음덩어리 한개가 지구로 오는 게 혜성이래. 그러니까 얼음이 빛을 내는 거지, 이모.”

우리는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마주 보았다.

“산아 정말 똑똑하다. 천재다, 천재.”

“나 천재 아니야.”

산아가 선언하듯 크게 소리쳤다.

“그럼 뭐야?”

“난 그냥 평범한 애야. 평범한 게 가장 어려운 거라고 그렇게 되라고 자꾸 엄마가 그러거든. 엄마는 모르나봐, 난 이미 평범한 앤데.”

아이를 향한 은혜의 미안함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넌 엄마 없이 이럴 때 어땠어?” 하며 내게 자주 물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애들처럼, 다른 부모처럼, 다른 자식들처럼 선선히 평범한 단계를 밟아 살아내는 것의 어려움. 나는 산아의 머리를 잠깐 헝클어뜨렸다.

별자리를 찾기에 겨울만큼 좋은 때는 없었다. 나는 아빠가 가르쳐준 것처럼 일단 오리온과 큰개자리, 작은개자리가 이루는 거대한 삼각형을 찾았다. 아빠는 아무리 GPS와 레이더가 발달해도 어부는 물길을 알고 바람을 읽고 별자리를 헤아릴 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통발을 거두다 엄마가 사고를 당하지 않았다면 아빠는 계속 선장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육지에서 일을 찾아 헤매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빠는 바다에서 일할 수가 없었고 그럴 수 없었던 아빠를 나는 어려서도 이해했다. 이해했기에 밉지 않았다. 이해하면 미움만은 피할 수 있었다. 때론 슬픔도 농담으로 슬쩍 퉁치고 넘어갈 수 있었다. 산아와 나는 곧 별자리들을 찾았고 거기에 우리가 아는 이름들을 하나씩 붙여보았다.

 

*

 

“창덕궁 옆인데 상호가 일본어네.”

삼우씨는 오랜만에 만나 어색한지 매장 안을 자꾸 두리번거렸다. 내가 센노나쯔는 천개의 여름이라는 뜻이라고 말해주자 그래서 여름 사진들이 걸려 있구나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중 하나는 분명히 원서동 빨래터였다. 언제적 사진인지 사람들이 수로에 발을 담그고 더위를 식히고 있었다.

우리는 계동의 한 까페에서 드디어 만났다. 20대였던 삼우씨가 40대가 되어 앉아 있는데 이상하게 놀랍지도 부자연스럽지도 않았다. 삼우씨는 여전히 살집이 있고 안경을 쓰고 몸에 꼭 맞는 패딩점퍼를 입고 있었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우리는 이유 없이 같이 웃었다. 까페 손님은 주로 주민들인 듯 들어오는 사람들마다 서로를 알은체했다. 아주 큰 개가 주인과 함께 들어와 앉아 있었다. 나는 그 개의 두툼한 앞발과 믿음직스럽고 차분한 얼굴을 바라보며 지금의 내 표정이 저 큰 개와 같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영두씨, 기억나요? 우리 둘이서 이대 앞 사주까페에 사주 보러 간 거?”

나는 잠깐 당황했다가 이내 어렴풋이 떠올렸다.

“나 평생 살면서 그 사람 말 얼마나 생각했는지 모른다.”

“나는 생각이 잘 안 나는데. 사주풀이를 기억해요?”

머그잔을 들며 삼우씨가 그럼, 하고 힘주어 말했다. 되는 일도 안 되는 일도 없던 시절 마음이 답답할 때면 나에게 하소연했다고 삼우씨는 회상했다. 지금도 그렇겠지만 그때도 얼마나 속 깊은 중학생이었는지 인생 2회차인 줄 알았다고. 그날도 대화를 나누는데 내가 갑자기 사주를 보러 가자고 제안했고 위로나 받을 생각에 응했다가 완전히 한방 먹고 돌아왔다고 했다. 그제야 나는 명리학 책자를 소중히 들고 우리 테이블로 왔던 개량한복 차림의 예언가가 생각났다.

“아, 뭐라 그랬더라 그냥 아무것……”

삼우씨가 인상을 구기며 뒷말을 이었다.

“그래, 그냥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 있죠? 취업준비생도 아니고 그냥 집에서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 그럴 사주인데? 요렇게 폭탄선언을 했지.”

사실 그 당시 삼우씨 생활을 떠올려보면 틀린 말도 아니지만 사주 보러 가서 듣고 싶은 말이 아니긴 했다.

“내가 영두 앞에서 울 수도 없고 참았지만 얼마나 서럽던지. 사법시험 떨어질 때마다 이명처럼 들려오더라니까. 왜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 있죠? 그냥 아무것도 안 하는……”

여전히 불쾌해하는 얼굴이라서 나는 그때 그 사람 죄 나쁜 얘기만 했다고 편을 들어주었다. 내게도 방랑벽이 있다던가 하고 말했으니까. 하지만 나는 이사도 하지 않고 그 흔한 해외여행도 몇번 가보지 않은 채 얌전히 강화에 머물며 살고 있었다.

“아니, 너한테는 관운이 있다고 했어. 다만 늦을 뿐이지.”

“그랬으면 더 맞힐 줄 모르는 사짜였네요. 공무원시험도 본 적 없는데.”

삼우씨에게 묻고 싶은 게 많아서 오히려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냥 할머니에 관한 모든 것이 궁금했다. 그뒤로도 건강하셨는지 쉽게 삐치는 딩 아주머니를 잘 달래 오래오래 같이 일했는지, 행복하셨는지. 삼우씨는 할머니가 췌장암으로 돌아가셨다고 죽음의 경과부터 전하며 어두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중에는 폐에 물이 차셨어. 더는 손쓸 수 없었고 나도 임종은 못 지켰어.”

나는 그러면 리사가 지켰겠구나 싶었다.

“할머니가 돕던 보육원이 있었는데, 그 사람들이 양로원 관계자들과 함께 임종을 지켰지. 장례도 치르고.”

“리사는 뭐 하고요?”

“알잖아.”

삼우씨는 약간 애매한 표정을 지으며 그렇게 넘어갔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낙원하숙을 두고 보육원과 리사 사이에 법적 분쟁이 일었다고 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자기는 리사를 도왔다고. 나는 삼우씨가 왜 그런 수사를 붙여 자신을 변명해야 할까 의문이 들었다. 할 일을 해서 승소했다면 그렇게 자조할 필요가 있을까.

리사가 미국으로 간 뒤 리사와 할머니 사이에는 왕래가 없었다고 했다. 주소도 불명확해 상속 관련 서류도 반송되었고 낙원하숙은 할머니 유지에 따라 보육원으로 넘어갔다. 그러고 2년 정도 지났을 때 리사가 나타나 유언무효소송을 제기했다고 했다. 유언장에는 사소하다면 사소한 문제가 있었는데 날인된 도장이 ‘안문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리사는 유언장에 인감도장도 아니고 다른 곳에 사용한 이력도 없는 일본 도장이 찍힌 건 이해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양로원과 보육원이 판단력이 흐려진 할머니를 이용했다는 논리였다.

“리사의 논리이자 변호사의 논리였겠죠.”

“그렇지.” 삼우씨는 차분하게 인정했다.

한편 보육원에서는 할머니가 호적 정정을 준비하고 있었다고 반박했다. 안문자라는 이름을 한번도 자기 것이라 생각해본 적 없다 말했다고. 할머니가 일본 도장을 찍은 건 호적이 바뀌고 나서를 대비한 것이었다고.

“양녀로 리사네 집안과 맺어졌다는 건 저도 어렸을 때 들었어요.”

나는 그 말을 전할 때 어린 리사의 싸늘한 표정을 떠올렸다. 할머니가 환영받지 못한 존재였으리라는 것은 그 표정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아이마저 노골적으로 무시하며 자기 멋대로 어른을 대하는데 다른 이들은 오죽했을까.

삼우씨는 한국전쟁 때 할머니가 피난지 부산을 떠돌다가 그 집에 들어간 것 같다고 했다. 포목상을 했던 그 집안은 나중에 일본식 전통 염색기법인 이른바 ‘홀치기’ 공장을 운영했다. 농촌마다 홀치기 부업이 유행했고 그렇게 일일이 사람 손으로 실을 묶어 무늬를 만드는 까다롭고 번거로운 작업이었다. 거기서 생산한 키모노 원단은 그 당시 대통령까지 나서 장려한 한국의 주요 수출원이었다.

일본어가 가능한 할머니는 경리로 일하며 겨우 종잣돈을 모았고 원치 않았던 결혼을 했다가 정리하고 서울로 올라왔다. 그뒤 사기를 당해 전재산을 잃고 강화에 정착해 옷장사로 재기했다는 얘기를 삼우씨는 할머니에게 들었다고 했다. 은인을 만나 겨우 죽지 않고 살아남은 셈이라고.

“할머니는 늘 영두 얘기를 하셨어.”

생선 잇몸까지 시려 보이던 날, 몸의 허기로만 설명될 수 없는 굶주림과 허탈감 속에 서 있었을 할머니를 상상했다. 그런 할머니의 고난을 단숨에 알아봤던, 목장갑을 몇겹이나 끼고 겨울 시장에서 일했던 우리 할머니도. 나는 추운 날의 강화 부두로 잠깐 빨려 들어갔다가 나왔다. 따뜻했다.

“호적 정정은 무슨 얘기예요? 일본 국적을 회복하고 싶어하셨다는 거예요?”

“그것까지는 모르겠어. 리사 증조할머니 양딸로 들어가면서 죽은 그 집 딸 호적을 받아 썼는데 그걸 바로잡고 싶어하셨단 것 같아.”

“그런데도 리사를 도와 소송을 하셨어요?”

삼우씨 표정이 어두워졌고 자기는 할머니가 최종적으로는 리사에게 낙원하숙을 넘겨주고 싶어했으리라 생각했다고 변명했다. 명목상이라도 가족이니까. 유언장이 은행의 할머니 개인금고에서 발견된 것도 할머니의 최종 의지에 대해 확신할 수 없는 대목이었다고 했다.

어차피 법적으로 그렇게 정해진 바에야 낙원하숙은 리사의 의도대로 매매되어 사라질 것이었다. 등록문화재 예고가 뜨면 멀쩡히 있던 건물도 하루아침에 부수어버리는 것이 요즘 사람들이니까. 궁궐까지 조망할 수 있으니 상업시설이 들어서기 너무 좋은 위치 아닌가. 물을 말이 있다고 하지 않았느냐고 하자 삼우씨는 보육원에서 전화받은 이야기를 했다. 항소한다는 연락인가 싶었는데 그건 아니었고, 보육원을 도와준 일본인 할머니들에 관한 책자가 나와서 보내주고 싶다는 용건이었다. 자기가 소송 상대편이었던 건 신경 쓰지 않는다는 투였다.

“저희는 그 집 다 잊었어요, 할머니는 이미 충분히 많은 걸 주고 가셨거든요, 그러더라고.”

책자를 보내는 건 할머니를 기억하는 사람들과 나누고 싶은 마음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보육원 원장은 답했다.

“그리고 갈도희씨가 연락을 해온 거야.”

“갈도희 아니고 제갈도희요.”

“아, 미안하다. 그렇게 제갈도희씨 연락으로 너랑 인연이 닿으니까 솔직히 내가 뭔가를 잘못한 기분이었어. 잘못하는 줄 이미 알았는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그 사주쟁이 말처럼 이런 결과를 만들었나 싶기도 했고.”

삼우씨가 가방을 들더니 책자를 찾아 꺼냈다. ‘우리 집 할머니(我らのおばあさん)’라는 책 제목이 아이들 손글씨로 삐뚤빼뚤 쓰여 있고 양로원과 보육원이 결연 맺어온 이십여년간의 역사와 할머니들 인터뷰가 실려 있었다. 목차에 적힌 열일곱개의 일본어 이름을 눈으로 읽어 내려갔다. 여생을 보낸 양로원 방을 배경으로 자기가 가장 아끼는 물건과 함께 찍은 초상사진도 수록되어 있었다. 이윽고 삼우씨가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뭘요?”

“할머니 진심이 뭐였을 것 같아? 영두씨라면 알지 싶었어.”

“이미 아시잖아요.”

나는 죄책감이 들었다는 삼우씨에게 더한 짐을 주고 싶지는 않아서 그렇게만 말했다. 삼우씨는 고개를 숙였다. 낙원하숙에서의 하루하루가 말해주지 않는가. 우물마루 널 한장 한장에 기름칠하던 할머니, 미닫이문틀을 솔로 쓸고 모서리가 반들반들 닳은 2층 계단을 걸레로 훔쳐내던 할머니, 창덕궁 단풍나뭇가지와 맞닿은 기와지붕을 오래오래 응시하던 할머니. 그럴 때면 할머니와 그 오래된 집이 마치 얼굴을 쓰다듬으며 대화를 나누는 듯했다는 걸 알고 있지 않은가. 다락을 청소한 뒤 막 세수를 마친 어린애처럼 말개진 얼굴로 나오던 할머니를 정말 모른단 말인가. 할머니가 낙원하숙의 어떤 미래를 준비하고 싶었는지 헷갈린다는 말인가. 하지만 삼우씨를 책망할 수는 없었다. 나도 할머니의 진심을 못 본 척한 적이 있었으니까.

그 겨울 교실 창밖으로 베이지색 코트를 입은 할머니를 발견했을 때 나는 조용히 다가오는 빛 같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할머니가 다가오는 이유를 나는 완전히 이해하고 있었다. 나를 구해주고 싶어한다는 걸. 텅 빈 내 눈 안으로 들어와 정신을 차갑게 깨우는 사랑이라는 걸. 하지만 나는 할머니가 내민 손을 잡지 않았다. 사람을 믿을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마음을 추스르려고 까페 사진들로 시선을 돌렸다. 여름의 느릅나무가 마치 코끼리 귀처럼 널찍한 잎을 역동적으로 펄럭이고 있었다. 삼우씨가 책자를 가져가라고 했다.

“왜 저를 주세요?”

“그냥 운명 같아서.”

나는 그 말에 설핏 웃었다. 삼우씨는 자기 잘못을 고해하는 사람처럼 긴장해 있다가 내가 웃자 따라 웃었다.

“나 지금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하다.”

“저는 마음이 불편한데요.”

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어느새 책자를 가방에 넣고 있었다. 낙원하숙을 둘러보기로 하고 우리는 겉옷을 입으며 일어섰다.

“그래, 궁은 다 고쳤고?”

“고칠 방향은 다 정했고 봄 오면 본격적으로 공사한대요.”

“나는 거기 온실이 있는지도 몰랐다. 옆에 살면서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그때 정말 아무 생각이 없었나봐.”

“되게 유식한 젊은이였잖아요. 요즘으로 치면 힙스터랄까.”

“그냥 떠들어댄 거지. 우리 세대들이 그런 것 같아. 지적 편집증이 있어서 그런 과장을 해가며 뭐라도 된 기분에 취해 있었지. 뭐가 중요한지는 가려내지도 못하면서.”

까페에서 나오는데 삼우씨가 사진 하나를 가리키며 저거 순신이 아닌가? 했다. 손가락을 따라가보니 삼선슬리퍼를 신은 남자아이 하나가 두 손을 놓은 채 자전거를 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자전거를 타는 애들은 많았다. 아슬아슬한 위험을 무릅쓰며 위태롭게 내달리는 아이들은 어느 도시에나 있었다. 그 옆에는 그때의 나처럼 교복치마 아래 체육복 바지를 입은 채 한 여자아이가 자전거를 탔다. 그런 아이들 또한 도시의 경적만큼이나 흔했다.

“이 사진들 다 사장님이 찍으신 건가요?”

지적 호기심이 여전한 삼우씨가 물었다. 사장은 주민들에게 기증받은 거라고 했다. 동네 여름 사진으로 천장을 채우는 것이 목표라고.

“아, 그래서 까페 이름이 그렇구나. 나도 꽤 있는데 걸어놔야겠네.”

삼우씨가 말하자 원서동 토박이라는 사장은 얼마든지 가져오라고 반겨주었다. 우리는 우리가 살았던 시절보다 확실히 정비된 거리를 지나 낙원하숙 골목으로 들어섰다. 이미 예전에 집이 거기 있는 걸 확인했으면서도 마음이 또다시 들떴다. 삼우씨는 열쇠로 문을 열고 광고전단지들을 발로 치우며 들어갔다. 마당에는 겨울바람이 몰고 왔을 눈더미와 쓰레기가 쌓여 있고 다 깨어진 플라스틱 대야가 빗물 홈통 아래에 놓여 있었다.

하숙집 사람들이 복작대던 집은 너무 적막해서 마치 얼어붙은 듯했다. 침묵으로 무장하고 완강하게 우리를 밀어내는 것처럼 느껴졌다. 밤낮으로 사람들이 드나들며 먹고 자고 얘기하고 갈등하고 울고 서로에게 불평을 해대면서 보냈던 시간들은 아예 없었던 것처럼.

“딩 아주머니는 지금 어디 사세요?”

중문을 열고 들어가면서 물었다.

“중국으로 돌아가셨어. 가기 전에 할머니를 붙들고 많이 우셨지. 중간에 결혼도 한번 하셨었고.”

“유화 언니 소식도 아세요?”

“걔 지금 영화 기자 됐잖아. 이따금 걔가 별점 주는 거 읽어보는데, 그때 성격 그대로더라. 무슨 블록버스터 영화에 ‘이럴 돈 있으면 인류의 가난을 구해라’라고 썼더라고.”

나는 유화 언니는 언니답게 살아냈구나 싶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집 상태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삼우씨가 두꺼비집을 올리고 스위치를 눌렀지만 거실등은 켜지지 않았다. 닫혀 있는 할머니 방에서 용케 형광등 불빛이 새어 나왔다. 유화 언니 방은 아예 문을 떼어낸 상태였다. 언니 방 창으로 창덕궁 궐내의 감색 가로등 불이 흘러들어왔다. 내가 지내던 방은 마치 기다렸던 듯 반쯤 열려 있었다. 왜 그런지 침대는 하나만 남았고, 나는 거기서 웅크려 지금은 ‘상처’라고 간단하게 이름 붙일 수 있는 상태를 견디기 위해 애썼던 나를 떠올렸다.

“그 문손잡이 기억나요? 유리로 되어 있던. 대온실에 비슷한 손잡이가 있어서 그 생각이 났어요.”

“그래, 손잡이 기억난다. 지금은 없지만. 할머니가 궁에 자주 가셨더라고. 책자 보면 어려서 거기서 스케이트 타셨다는 얘기도 나와.”

2층으로 올라가니 다다미 평상이 나타났다. 머릿속으로 무언가를 맹렬히 탐하거나 밀쳐내면서 그 무게에 스스로 눌려 일어나지 못하던 리사가 떠올랐다. 다다미살에는 거스러미가 일어나고 검은 곰팡이까지 피어 있었다. 삼우씨가 창을 열면서 집이 낡고 있다고 다시 걱정했다. 그러면서 날 만날 생각을 한 건 집 상태가 궁금해서이기도 했다고 털어놓았다. 건축사무소에서 일하고 한옥을 다룬다고 하니 혹시 수리 비용이 얼마나 드는지 당장 급한 수리는 뭔지 알아봐달라는 것이었다.

“리사가 고치겠대요?”

“아니, 연락도 잘 안 돼.”

미국 생활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아니면 소송을 한 뒤라 한국에서 오는 연락에 예민해져 있는지 집 파는 얘기가 아니면 메시지를 읽고도 답도 잘 않는다고 했다. 나는 리사라면 그럴 필요성을 못 느끼기 때문이리라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다.

“저기도 다 치웠죠?”

2층을 둘러보고 내려가려다 다락으로 가는 바닥문을 가리켰다. 삼우씨는 아마 그럴 거라면서도 한번 내려가보라고 했다. 기억에는 할머니나 겨우 드나들 만큼 좁았던 듯한데 나도 어렵지 않게 들어갈 수 있었다. 휴대전화 조명을 켜보니 칸칸의 수납장이 둘러싼 공간이었다. 물건들은 다 치워지고 쓰레기봉투 하나만 남아 있어서 들고 나왔다.

우리는 열었던 창과 문을 닫고 계단에서 내려와 2003년의 낙원하숙에서 그만 빠져나왔다. 마당의 나무를 보고는 삼우씨가 벚나무인가 했고 나는 가지 끝을 한번 매만져보았다. 대문을 잠그고 쓰레기봉투를 밖에 내놓는데, 언뜻 일본어가 적힌 종이가 눈에 들어왔다. 봉투를 열어 뒤적여보니 종이들은 꽤 많았다. 삼우씨가 뭐냐고 물어서 나는 글자를 읽기 위해 그중 하나를 가로등 쪽으로 들어올렸다. 아주 오래된 우편 소인이 찍혀 있는 그 엽서는 토오꾜오의 시미즈 코하루(淸水小春)라는 사람이 보낸 것이었고 받는 사람은 키노시따 코쭈우였다.

 

 

6. 큰물새우리

 

3월의 춘당지에는 원앙들이 부지런히 먹이를 찾고 있었다. 왕주무관이 여기 원앙들은 겨울에도 궁을 떠나지 않는 텃새들이라고 알려주었다.

“사랑의 새잖아요.”

제갈도희가 말하자 왕주무관이 그렇죠,라고 동의했고 나는 사실 두마리가 함께 다녀서 그렇게 보일 뿐 일부종사하지는 않는다고 알려주었다.

“그렇지, 그게 자연스럽지.”

제갈도희가 바지주머니에서 손을 빼며 맞장구쳤다.

“그게 자연스럽다니요? 백년해로 상징인데 그러면 곤란하죠……”

왕주무관이 미약하게 저항하자 제갈도희가 말을 툭 끊었다.

“변해요, 만물이 다 변한다니까요. 멀쩡하게 지어놓은 집도 무너지는 판에 사람 마음이야 시시때때로 변하죠.”

그리고 둘은 한동안 사랑에 대해 논쟁했다. 그게 지금 서로에게 왜 중요한지는 모르지만 둘 다 결코 양보할 수 없다는 듯 진지했다. 걸어가는 쪽에서는 이제 대온실이 보이지 않았다. 공사를 위해 높이가 4미터나 되는 펜스를 설치했기 때문이었다. 펜스에는 “국가등록문화재 제83호 창경궁 대온실”이라는 문구가 커다랗게 적혀 있고 전경 사진도 붙어 있었다. 출입문의 폴딩 도어를 열면서 제갈도희가 공사 안내문에 적힌 ‘설계 바위건축사사무소’라는 문구를 자랑스레 두드렸다.

펜스 안 대온실은 다시 거대한 덧집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눈비를 피하고 지붕까지 공사하려면 덧집은 필수였다. 그렇게 집 안에 든 집이 되어 대온실은 보호받고 있었다. 설계도가 아니라 눈으로 직접 보니 안온한 느낌이었다.

제갈도희는 컨테이너에 마련된 현장사무소로 들어가 사 들고 온 에너지 드링크를 건네며 인사했다. 그리고 남은 건 냉장고를 직접 열어 넣어두며 고생이 많으시다고, 기초 가설공사가 아주 깔끔하게 됐다고 넉살을 떨었다.

“아이고 이게 참 까다로운 공사라.”

안전모를 쓴 현장소장은 간밤의 피로가 가시지 않았는지 얼굴이 불그스름했다. 그리고 제갈도희가 내미는 드링크를 한번에 마셨다.

“소장님, 바로 그냥 원샷을 하시네요.”

제갈도희는 곤줄박이답게 상대에게 단숨에 다가갔다.

“한모금이지 뭐, 요런 걸 빨대 꽂아 마실까?”

우리가 대화하는 동안에도 인부들이 컨테이너를 드나들며 모자나 장갑 따위를 챙겨 나갔다. 제갈도희가 벽에 걸린 공사 일정표를 살피더니 굴삭기는 언제언제 들어오나요? 하고 말을 꺼냈다.

“굴삭기? 굴삭기는 만날천날 여기 들어와 있지. 이 정도 공사하면서 우리가 쩨쩨하게 굴삭기를 요때 부르고 저때 부르고 안 하죠.”

“그러시구나, 그렇죠, 이게 보통 수리공사가 아니잖아요. 그래서 여기 동궐관리청에서도 신경을 쓰시고. 왕주무관님 그렇죠?”

제갈도희가 도움을 청하듯 왕주무관을 바라보았다. 그는 멍하니 눈길을 받고 있다가 허둥지둥 한마디 거들었다.

“대온실 창고 쪽 거기를 굴삭기로 파서, 보고서 내용을 보충해야 할 일이 있으시답니다.”

그러자 얼굴에 그득했던 현장소장의 호기로움이 사그라들었다.

“그런 건 수리 계획서에 없던데요?”

제갈도희는 표본 시굴이라 설계사무소 재량으로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라고 얼른 설명했다. 깊게도 안 들어가고 면적도 딱 세평이라고.

“우리 다음주까지 비계 설치 완료해서 용마루까지 해체를 해야 해요. 바쁜데……”

“그래, 그러면 두평, 두평만 팔게요. 그러면 법에서 보장하는 유존 면적의 10퍼센트도 안 돼요. 매장문화재 보호는 공사 주체의 의무잖아요. 위반하면 10년 이하 징역이나 1억원 이하 벌금이니까 저희가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게 해드리겠다는 거잖아요. 소장님.”

“공사는 그런 규제들이 맨 문제라……”

현장소장은 마지못해 알았다더니 일정표를 보며 다음주 목요일이 좋겠다고 승낙했다. 시굴 이야기가 끝나고 나자 소장을 비롯한 직원들의 푸념이 이어졌다. 우리는 어떻게든 목요일에 땅을 파야 하니까 잠자코 다 들어주었다. 큰 나무들은 이전할 수도 없으니 온습도를 유지할 수 있는 보호실을 한 개체 한 개체 만들어줘야 했고 서까래 부분의 빗물받이는 일일이 사람 손으로 풀어 해체해야 했다는 것, 우리가 설계도서에 쓴 것처럼 타일을 복원해줄 제조업체를 찾느라 힘들었다는 것.

“이분이 그 얘기까지 다 해서 최종 보고서 책을 딱 만드실 분이세요.”

제갈도희가 눈짓했고 나는 명함을 주고받았다.

“잘 부탁합니다.”

현장소장은 자신들이 문화재 관련 공사는 베테랑이라 소화기 배치 상태까지 하나하나 다 기록하고 있다고 자랑했다. 뒤에 가서 수정하고 보충할 것도 별로 없을 거라고.

“감사합니다.”

공사 과정에서 발생한 기록물들은 최종적으로 내 책상에 놓일 것이었다. 대온실 공사는 온실 유리창을 다 떼어내고 기둥의 나사 하나까지 모두 풀었다 다시 조립하는 과정이었다. 무너뜨렸다가 다시 세우는, 중수와 중창과 재건 모든 차원의 일이었다. 우리는 현장사무소에서 나와 대온실 뒤편으로 향했다.

지난여름 은세창이 지표투과 레이더를 밀며 무심히 오갔던 공간이 지금은 너무 다르게 느껴졌다.

“어딜까요?”

제갈도희가 물었지만 나도 알 수는 없었다. 어디를 파야 시굴조사가 정식 발굴조사가 되어 여기에 뭐가 묻혀 있는지를 알아낼 수 있을까. 파편화되어 지층 속에 묻혀 있는 죽은 존재들을 어떻게 완결된 죽음으로 돌려보낼 수 있을까. 한번은 그런가 하고 파주겠지만 두번은 안 되겠지. 공문과 절차가 끼어들면서 흐지부지되기 십상일 것이다.

“두평이면 어느 정도 되죠?”

제갈도희가 운동화 뒤축으로 땅 위에 표시를 냈다. 아주 적당한 크기처럼 느껴졌다. 어린 남매가 숨어 있기에. 결과적으로 삼우씨가 건네준 책자는 대온실 지하 공간에 대한 결정적인 제보가 되어주었다. 할머니가 한국전쟁 때 대온실 지하가 방공호로 쓰였다고 회상했던 것이다. 거기서 ‘공무’를 수행하고 와야 한다는 아빠를 기다렸지만 오지 않았다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여기 밝혀놓고 싶다고. 대온실 본 건물에는 지하 공간이 없었고 방공호로 쓰였다면 이 영역밖에 없었다. 후꾸바의 지하 배양실은 실재했던 것이었다.

보육원 책자의 흑백사진으로 만난 할머니는 일본 치바현 시미즈 마리꼬라는 이름과 함께 모란꽃 무늬의 민소매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여름 사진인 모양이었다. 각지고 커다란 안경을 쓰고 카메라 렌즈를 아주 갸륵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짧게 자른 머리, 주름진 입술과 뺨, 하지만 할머니는 웃고 있었고 거기에는 이해와 담담한 응시가 있을 뿐 회한이나 두려움 같은 건 없었다. 할머니가 지냈던 양로원 방 사진도 수록되어 있었는데 누구인지는 몰라도 일곱살 정도 된 아이가 상 하나를 두고 할머니와 마주 앉아 있었다.

재봉틀, 벽걸이 달력 위의 파리채. 그리고 나를 가장 위로한 건 훌라후프, 펀치볼, 가정용 트램펄린 같은 운동기구들이었다. 방으로 찾아오는 아이들을 위한 것인지 할머니가 썼는지는 알 수 없어도 어떤 활기가 느껴졌다. 할머니는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물건이라며 누군가의 위패를 들고 있었다. “자장원하정천진동자(慈藏院夏貞天眞童子)”라는 죽은 이에게 붙이는 일본식 불교 계명(戒名)이 적혀 있고 ‘동자’라는 단어로 봐서는 그가 적어도 열다섯살이 되기 전에 죽었다는 뜻이었다.

겨울 동안 나는 낙원하숙에서 들고 온 종이 뭉치와, 보육원 책자와 모아둔 창경궁 자료들을 읽으며 과거를 맞춰보기 위해 애썼다. 하루하루가 바빴다.

 

“당신은 마리꼬에게 보게 해서는 안 되는 장면을 보게 했더군요.”

시미즈 코하루는 엽서 몇줄에도 아주 엄중한 경고를 담아 남편 키노시따 코쭈우에게 당부했다. 1945년 8월 17일 마리꼬는 문정전 서회랑 공터에서 조선인 관리가 천황의 사진과 초상화를 불태우는 것을 봤다고 시미즈 코하루에게 엽서를 적어 보냈다. 불길 속에서 몸을 비틀듯 타는 어진영(御眞影)을 구하지 않고 지켜본 자신은 죄를 지은 것이 아니냐고. 마리꼬는 『주간소국민』에 글을 보낸 그 어린이였고 문자 할머니의 일본 이름이었다.

종전이 되었을 때 할머니는 열한살이었다. 천황의 항복 선언과 조선의 해방 같은 것에 대해 정확히 알 수 없는 어린아이였다. 해방이 되고 거리마다 만세를 부르며 춤추는 사람들이 몰려나왔을 때 동생 손을 잡고 구경을 가기도 했지만 천황의 사진이 불태워지고 뻐드렁니와 주먹코로 일본인을 희화화한 그림과 함께 “기어서라도 일본으로 돌아가라”라는 벽보가 붙기 시작하자 충격을 받았다. 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엄마가 일본으로 돌아오지 말라고 신신당부한 것이었다. 무조건 양부인 키노시따와 동생과 함께 조선에 남으라고 했다.

마리꼬는 양부를 따라 조선으로 왔지만 한번도 자신이 키노시따의 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시미즈라는 엄마 성을 유지한 것으로 보였다. 마리꼬는 양부가 친아빠를 빼앗아갔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진실이야 어떻든 마리꼬는 양부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했다. 아픈 상처 앞에서 아이들이 으레 그러듯.

가을이 되자 일본으로 돌아가기 위해 북에서부터 수십만의 일본인들이 내려왔다. 그들은 마치 유령처럼 파리했고 눈에 보이지 않는 쇠사슬을 찬 듯 발걸음이 무거웠다. 한마디도 않는 침묵 속에 걷고 있는데도 마리꼬의 귀에는 달그랑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왜 여자들은 머리를 깎고 남자 옷을 입은 거야? 나베 그을음을 얼굴에 묻혔던데? 조선인들이 저렇게 한 거야?”

지금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변화를 이해하기 위해 마리꼬는 학교 대신 계동 언덕에 올라 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그날 본 것을 자기 집에서 일하는 조선인 네에야(姉や), 가정부에게 물었다.

‘두자’라는 이름의 그 가정부는 마리꼬가 엄마처럼 따르던 사람이었다. 조선에서도 여느 일본 여자애들처럼 커야 한다며 엄마는 다도와 코또 연주, 일본 전통춤인 사무(仕舞)까지 과외받게 했지만 마리꼬는 그런 일본 선생들에게는 별 흥미가 없었다. 그보다는 창경원을 뛰어다니는 걸 좋아했고 두자 앞에서만 깔깔거리며 이야기했다. 두자는 늘 당당했고 솔직했으며 감정이 단순하고 즉각적이었다. 엄마와도 다르고 여느 일본 어른들과도 다른 모습이었다. 두자는 콩 따위를 다듬으면서 여자들이 소련군에게 강간당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 머리를 밀고 왔다더라고 알려주었다. 강간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마리꼬는 속이 느글거렸다.

“나는 그런 놈이 있으면 싸우지, 소중한 내 머리를 밀지는 않을 거야.”

막상 밖에 나가면 일본인이라는 사실을 들킬까 조마조마했으면서도 마리꼬는 그렇게 소리쳤다.

“아이고 그러다 목숨까지 빼앗기게요. 여자들 좋은 세상은 없는 거예요. 양반 가니 일본놈 오고 그게 가니 미국놈이랑 소련놈이 오고, 그다음에는 뭐가 올지 나는 이제 궁금치도 않아요.”

두자는 심드렁했지만 해가 지면 절대 밖에 나가지 말라고 마리꼬에게 당부했다. 며칠 지나 양부가 마리꼬와 동생 유마를 불러 서로를 조선 이름으로 부르라고 했다. 유마는 박유진이었고 마리꼬는 박진리였다. 그리고 자기는 창씨개명 이전 이름인 박목주로 돌아갔다고, 한자로 써서 보여주었다. 마리꼬는 당장 울며 누가 자기를 조선인으로 만들라 했느냐고 화를 냈다. 이름을 바꾸면 일본으로 돌아가지도 못한다고. 마리꼬가 싫다고 하자 유진도 따라 자기도 조선인이 되기 싫다고 떼를 썼다.

“중요한 건 조선인이냐 일본인이냐 하는 게 아니야.” 양부는 아주 슬픈 얼굴로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우리가 가족이라는 건 변하지 않아.”

양부는 마리꼬가 일본으로 가는 건 힘들더라도 엄마가 머지않아 경성으로 올 수도 있다고 안심시켰다. 하지만 그때 키노시따, 박목주는 일본에서 조선으로 쉽게 들어올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동네 사람들이 물으러 올 정도로 그나마 나라 돌아가는 상황을 가까이에서 듣는 공무원이었으니까. 둘만 남았을 때 유진은 조선인이 나쁜 거냐고 누나에게 물었다. 둘은 다락에 숨어 있었고 그곳은 둘의 아지트였다. 마리꼬는 학교에서 일어났던 한 사건을 떠올렸다. 일본인 교사가 조선인 아이를 심하게 때려 학생과 학부모들이 수업 거부를 한 일이었다. 그는 발길질로 아이를 차서 복도까지 밀고는 조선놈 주제에, 하고 욕했다. 그러면 조선인은 나쁜 것인가. 하지만 그 내지인 교사는 마리꼬조차도 소름 돋게 싫었던 인물이었다. 양부의 상관인 카마야마 마사시만큼이나 혐오스러운 인간이었다.

“그래서 싫은 게 아니야, 유마. 너는 일본이 기억나지 않지?”

조선으로 와 어느덧 다섯살이 된 동생은 엄마 얼굴도 사진으로만 겨우 기억하고 있었다.

“그럼 일본인인 게 나빠서 우리 이름이 바뀐 거야?”

마리꼬는 어디 가서 절대 일본인이라 하지 말라던 두자의 말을 떠올렸다. 아가씨는 아버지 호적에 올랐으니 이제 조선인이라고. 두자까지 그렇게 말하자 마리꼬는 더이상 반항할 수가 없었다. 마리꼬는 두자를 신뢰했다. 두자가 정기적으로 숫돌 위에 놓고 썩썩 갈곤 하는 뭉툭한 조선칼, 한쪽을 기둥에 달아놓고 벌건 숯불을 넣어 주름을 펴는 무쇠다리미의 강퍅하고 완고한 생활감각을 믿었다.

“누나가 종종 말하던 쿠마 센세이 기억하지?”

“누나를 업어준 쿠마 센세이, 힘이 세서 군인들을 모두 물리친 쿠마 센세이.”

유진이 흥얼거렸다.

“맞아, 근데 그때 누나가 거짓말을 했어. 쿠마 센세이는 죽었어. 나쁜 약을 먹여도 죽지 않고 비틀거리자 심장을 찔렀어. 표범은 약을 먹고 굴에 들어가 숨어 있다가 해방 지나서야 죽었다고 하더라. 그렇게 만든 게 일본인이야.”

유진이 얼굴을 찡그리더니 훌쩍이기 시작했다. 마리꼬는 자기 미래가 녹록지 않으리라는 걸 실감했다. 지금은 어렵지만 중학생이 되는 모습은 조선에 가서 볼 수 있으리라는 엄마의 엽서는 거짓이라는 걸. 두자는 하루에 스무 문장씩 일본어를 적어 오면 조선어로 바꾸어줄 테니 죽을 듯이 노력해서 어서 조선어를 배워야 한다고 일렀다. 그간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마리꼬는 조선어를 한마디도 못했다.

1946년 새해가 밝자 혼란도 어느정도 자리를 잡았다. 혼란이 잠잠해진 게 아니라 혼란이 일상이 된 셈이었다. 어느 밤 두자가 부엌에서 쌀죽을 끓이더니 통에 담아 대문 밖으로 나갔다.

“어디 가?”

마리꼬가 부르자 두자는 “아이, 애 떨어질 뻔했네” 하고 놀랐다. 마리꼬는 두자를 따라붙었다. 두자가 집에 있으라고 해도 말을 듣지 않았다. 입김이 찬 공기를 조용히 어루만지고 지나가는 추운 밤이었다. 두자는 빨래터를 지나면서 조선어가 많이 늘었다고 칭찬했다. 아무래도 마리꼬는 천재인 것 같다고. 마리꼬는 두자의 팔짱을 끼고 응석 부리며 일본어는 더 잘하는데, 하고 아쉬워했다.

“나중에 다시 쓰면 되죠. 사람은요, 배우면 배울수록 좋은 거라.”

“두자는 일본어 어떻게 배웠어?”

“내가 처음으로 남의집살이한 게 일곱살 때예요. 부모가 가난해서 나를 팔았죠.”

마리꼬는 자기가 알지 못했던 게 너무 많다고 생각했다. 전쟁에 대해서도, 일본이 조선에 한 일에 대해서도, 이별에 대해서도, 오지 못하는 엄마에 대해서도 아는 게 없다. 두자는 중앙중학교를 지나 계동 언덕 끝까지 올랐다. 그리고 작은 한옥 문을 두드렸다. 안채에서 아주머니 한분이 나왔고 걸음걸이와 동작으로 보아 확실히 일본인이었다. 두자는 끓여 온 쌀죽과 식량을 내놓았고 아주머니는 고마워했다.

“아가씨, 지금 보는 건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돼요.”

두자가 당부했다. 마리꼬는 고개를 끄덕였다. 행랑채로 들어가자 눈처럼 하얀 얼굴의 여자가 벽에 기대 있고 그 옆에는 이불에 둘둘 말린 핏덩이 같은 아기가 있었다. 아기는 울지도 않고 눈을 꼭 감은 채 숨을 쌕쌕 쉬고 있었다.

“내일 떠나신다고요?” 두자는 일본어로 물었다.

“네, 그간 고마웠습니다.”

“젖이 안 나오면 쌀죽을 먹여요. 내가 끓여 왔어요.”

여자는 울었고 눈물방울이 턱 끝에 맺혔다.

“고향에 돌아가는 거니까, 힘을 내요. 아기도 있으니까.”

“내지에서는 저희를 전혀 안 반긴댔어요. ‘쵸오센카에리’라고 멸시가 이만저만이 아니래요.”

옆의 아주머니가 착잡한 표정으로 소곤거렸다. 쵸오센카에리(朝鮮帰り)는 조선에서 돌아온 일본인을 가리키는 멸칭이었다. 영양실조나 폐병에 걸려 돌아오는 귀환자들을 일본사회는 싸늘히 대했다. 원폭과 패전으로 국토의 30퍼센트가 파괴된 상황에서 그들은 본토가 겪은 수난에서 비껴난 열외자이자 어려운 조국에 폐를 끼치는 불청객이었다.

여자는 “하룻밤만 재워주세요” 하는 조선어만 외워 북쪽의 청진에서부터 내려오다 리어카 위에서 출산했고 아주머니 집에서 받아주어 겨우 산후조리를 한 것이었다. 여자가 이 집을 두드린 건 부엌에서 풍겨 나오던 미소된장 냄새 때문이었다.

“저희 집에도 조선인 네에야가 있었어요. 다정했죠.”

여자가 마리꼬와 두자를 번갈아 보더니 아련한 추억에 잠겨 말했다. 둘의 관계를 짐작하는 것 같았다. 두자가 용무를 다 끝냈다는 듯 두루마기를 챙겼다.

“사과드려요, 이런 몸으로 폐를 끼쳐서.” 여자가 다시 미안해했다.

“이런 몸이니까 꼭 일본으로 돌아가요. 아기를 죽게 하지 말아요. 그리고 조선인 네에야는 이제 잊어요. 더이상 조선인 종은 없으니까.”

마지막으로 두자는 내일 두시에 부산행 기차가 있다더라는 소식을 알려주었다.

여기까지는 청진에 머물렀던 한 일본 관리의 가족이 기록한 회고담이다. 쌀죽을 가져다준 계동의 조선인 가정부가 할머니네 두자였는지 그 도움으로 부산까지 가서 목숨을 건진 사람이 눈물을 방울방울 흘리던 행랑채의 그 아기 엄마였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보육원 책자에 몇줄로 남아 있는 할머니의 회상은 이렇게 다른 증언들로 사실의 두께를 얻어갔다. 수리를 통해 보강되어가는 대온실처럼. 기억은 시간과 공간으로 완성하는 하나의 건축물이나 마찬가지였다.

 

여기서 혹시 마리꼬 할머니나 박목주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까. 묻혀 있는 지하의 것들과 그 일가는 어느 정도 연관이 있을까. 나는 후꾸바의 설계도를 떠올리며 고민했다.

“언제까지 정하면 될까요?” 제갈도희에게 물었다.

“굴삭기로 파기 직전이면 되죠. 영두님, 우리 너무 부담 갖지는 말아요. 이번이 아니면 다음도 있겠죠. 이럴 수도 있잖아요. 공사 끝나면 영두님이 이 얘기를 책으로 쓰는 거예요. 그래서 알게 된 독자들이 동궐관리청에 발굴조사하라고 항의하고 홈페이지 다운되고 언론에서 취재 나오고……”

“아, 그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걸릴까요?” 왕주무관이 다급히 물었다.

“그걸 어떻게 알아요? 한 일년? 영두님 일년이면 책 한권 나와요?”

“나보고 책 쓰라는 사람 많아서 요즘 황송하네.”

나는 산아 말이 생각나서 웃었다. 처음 바위건축 면접 볼 때 소목이 또다른 수리 이야기를 쓰는 것 아니냐고 했던 말이 실현된 셈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되기 전에 귀띔은 해주셔야 합니다. 이직 준비해야 하니까. 제가 제일 싫은 게 민원이에요.”

우리는 대온실에서 나와 춘당지와 옥천을 따라 걸었다. 나무 수액을 먹으려는지 곤줄박이가 붙어 팥배나무 둥치를 쪼아대고 있었다. 저 새가 곤줄박이라고 알려주자 제갈도희는 아, 곤줄박이는 비건이었군요, 하며 자기와는 식성이 좀 다르다고 했다. “아니에요.” 나는 웃으며 정정했다. 말벌 애벌레도 잡아먹는 의욕있는 미식가라고.

함양문을 지나 창덕궁으로 넘어왔고 금천 옆 회화나무까지 다다랐다. 나무는 높이뛰기 바를 넘는 사람처럼 낮게 뒤틀려 자라고 있었는데, 사도세자의 비명을 들은 나무가 고통으로 비틀리고 속이 텅 비어버렸다고 안내판에 쓰여 있었다. 1762년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 속에 가두어 살해했을 당시에도 자리를 지켰던 나무였다. 할머니도 이 나무를 지나쳤겠지 생각하자 회화나무 풍경은 그냥 관상으로 그쳐지지가 않았다.

왕주무관과 제갈도희를 먼저 보내고 장서각으로 가서 아랑씨를 만났다. 『인사관계철』에서 카마야마 마사시에 대해 확인해보고 싶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해방 후 일본인 관리들이 귀환할 때 당연히 일본으로 건너갔어야 할 카마야마 마사시는 공직생활을 이어간 것으로 보였다. 키노시따는 아내에게 마사시상이 한번도 말하지 않았기에 그가 조선인이었을 줄은 전혀 몰랐다고 적었다. 정말 수수께끼 같은 사람이라고. 조선인이면서도 조선인 멸시에 열심이었다는 사실 때문이라도 할머니가 왜 그렇듯 싫어했는지 알 것 같았다. 아랑씨는 먼저 나와 봄볕을 쬐고 있었다. 오늘도 투어가 있는지 쪽빛 저고리의 생활한복 차림이었다. 내가 나타나자 반겨주었고 우리는 장서각 문을 열었다.

『인사관계철』은 동궐관리청 내 조직이 변할 때마다 표제를 달리해 남아 있었다. 아랑씨는 천천히 잘 찾아보라고 하더니 장서각 창을 조금 열어 밖을 바라보았다.

“오다가 회화나무 거쳐 왔어요.”

미군정 시기 자료를 꺼내며 말을 건넸다.

“아, 그 나무, 정말 슬픔이 눈에 보인다면 그런 형태일 거예요. 춘당지 쪽 월근문이 정조대왕이 보름마다 사도세자를 기리는 경모궁으로 거둥하던 문이거든요. 사도세자 사당이요. ‘이 문을 거쳐 가며 어버이를 그리워하는 내 슬픔을 풀 것이다’라고 한 말이 『승정원일기』에 나와요. 슬픔으로 열고 그리움으로 닫는 문인 거죠.”

리사와 나 그리고 할머니가 각자의 이유로 그 문을 드나들던 밤들을 생각했다. 시대는 달라도 문을 넘은 사람들은 모두 골똘히 자기 고통에 빠져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

해방 전 이왕직에 속해 있었던 식물원은 이후 미군정에 의해 구왕궁사무청 소속으로 바뀌었고 1948년에는 구왕궁재산관리위원회가 맡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무엇보다 돈과 얽혀 있었다. 동식물원이 있는 창경원 수입은 상당했고 경복궁에 일제가 지은 박물관에도 값나가는 유물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왕가가 소유한 땅과 궁궐, 그밖의 건물들도 막대했다. 이 재산들은 어떻게 될까. 국유화가 원칙이었지만 이미 적지 않은 재산이 횡령으로 새어 나가고 있었다.

“그런 일에는 관심 두지 말아요.”

시미즈의 엽서에는 애타는 당부가 적혀 있었다. 왕가의 것에 아무 참견하지 말아요. 주홍에 섞이면 스스로도 붉어지는 법이니까요. 신주꾸교엔도 폭격으로 사라졌어요, 온실은 흔적도 없고 정원은 불탔어요. 다만 당신이 독서로 사사했던 후꾸바 선생의 재배서들은 지하 보일러실에 피신시켜 구해냈다고 하더군요. 신문에서 봤어요. 지금은 모두 개간해서 식량 증산을 위한 고구마와 감자를 키우고 있다고요. 토오꾜오조차 식량난이 심각해요. 애들이 조선에 남은 건 조상신이 도운 거예요.

나는 의심되는 인물을 특정해 그가 언제까지 『인사관계철』에 등장하는지를 살폈다. 동식물원부 부장 겸 이왕직 촉탁사무관이었던 마사시는 해방 후 이창충이라는 조선 이름으로 돌아와 구왕궁사무청 서기관이 되었고 한국전쟁이 일어난 해에는 구왕궁재산관리위원회의 사무청장으로 승진했다. 이후 구왕궁재산처분법이 발효되고 한국전쟁 전까지 황실 재산 관련 업무를 맡았다. 문서 기록과 이창충의 증명사진을 휴대전화로 찍었다. 마른 체구의 그는 성마른 인상으로 턱을 들어 앞을 쏘아보고 있었다.

장서각을 나오며 이 건물은 전쟁 피해를 입지 않았느냐고 아랑씨에게 물었다. 아랑씨는 1·4후퇴 때 전소에 가깝게 탔다고 말해주었다. 그런데 그 화재가 방화라는 설이 아직도 돈다고.

“왕실 재산 국유화를 앞두고 정리한 재산 목록과 문서들이 싹 탔다고 해요. 우리 쪽에서 그랬다는 설이 파다하죠. 재산 빼돌려서 한몫 잡은 놈들이 공무원들 중에도 있었다니까요.”

“돈이 참 무서운 거예요.” 나는 씁쓸하게 말했다.

“사람이 돈을 무섭게 만들었죠.”

아랑씨는 후배에게서 자료가 도착했다며 건넸다. 그때 내 일을 도와준 계기로 후배는 1940년대 일본의 청소년잡지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주간소국민』을 발행한 출판사와 연락했다고 했다. 출판사는 전후에 다시 문을 열고 주로 사회과학 서적을 펴내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끝내 인쇄되지 못한 마지막 잡지 교정본과 함께 1992년 『주간소국민』 앞으로 도착한 그 초등학생의 원고를 구했다고 했다. 시미즈 마리꼬, 할머니가 마지막으로 쓴 글을 받아 들며 나는 심장이 뛰었다. 회색 테두리의 세로줄 종이에 “木魚と鳥”, 목어와 새라는 제목이 쓰여 있었다.

“모두들 놀랐다더라고요. 죽었다고 알려져 있었으니까요.”

“왜 죽었다고 생각했대요? 잡지가 없어져서 글을 보내지 않았을 수도 있잖아요.”

“아이 집안과 편집장네 집안이 아는 사이였다고 해요. 글도 그렇게 해서 실리게 된 것이고. 한국전쟁 이후 온 가족이 연락이 끊겨서 모두가 몰살된 슬픈 비극이라고 그쪽에서는 생각했대요. 그런데 어느날 출판사 앞에 원고가 놓여 있었으니 귀신이 토오꾜오까지 왔다 갔을까 싶어 모두 놀랐다고요.”

나는 머릿속을 정리하며 천천히 원서동으로 걸었다. 한국전쟁 때 할머니는 가족을 잃고 리사네 집으로 들어가 살면서 일본과는 연락을 끊었다. 아예 죽은 사람처럼. 왜 그래야 했을까. 일본과 국교가 정상화된 것은 1960년대, 자유롭게 오가지는 못하더라도 엄마에게 소식 정도는 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그리워했으면서 죽은 딸이 되기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해가 가지 않았다. 가회동성당에는 현수막이 걸리고 있었다. “당신 깃으로 너를 덮으시어 네가 그분 날개 밑으로 피신하리라”는 문장이 내가 서 있는 사이 팽팽하게 펼쳐졌다.

창경궁에 올 때마다 이제 자연스레 낙원하숙을 들렀다 가게 되었다. 삼우씨가 복사해주겠다는 집 열쇠는 받지 않았지만 집을 올려다보는 것만으로 누군가를 만나고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대개는 할머니였지만 가끔은 나 자신이었고 리사인 듯한 날도, 한번도 보지 못한 할머니의 어린 남동생 유진이기도 했다. 할머니가 이 집을 되찾기 위해 일생 돈을 악착같이 모아왔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해서 할머니는 꿈을 이룬 셈이었다. 마당의 작은 나무는 벚나무가 맞는 듯했고 꽃눈이 내려앉아 4월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방을 한번 추스르고 돌아서는데 누군가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전거를 탄 채로.

“어, 삼우 형 말이 맞았네.”

나는 갑자기 팔다리에 힘이 빠지는 걸 느꼈다. 아주 찬 것이 몸을 만지고 지나듯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무슨 말을 들었기에 그래?”

순신이 아무렇지 않은 듯 물었으므로 나도 다른 인사는 모두 생략하고 그렇게 답했다.

“네가 돌아왔다고.”

나는 그 말에 약간 어이가 없어 웃었다. 내가 집을 매수한 것도 아니고 동네로 이사 온 것도 아닌데 왜 그런 표현을 썼을까. 돌아옴, 귀환이란 이럴 때 쓰는 말이 아니지 않나. 내가 웃자 순신도 자전거에서 내려 따라 웃었다. 순신은 어려 보였다. 내가 알던 그 모습에서 조금도 성장하지 않은 채였다. 그렇게 어려웠던 조우가 쉽게 이루어지는 게 이상해서 나는 눈앞에 있는 사람이 순신이 맞는지 다시 확인했다.

“이순신 맞아? 단무지 죽어도 안 먹는 이순신?”

“무슨 소리야, 단무지 없이 어떻게 짜장면을 먹어. 다 지난 일이지.”

나는 그렇게 상상하다 실제로도 약간 웃어버렸지만 그런 재회는 일어나지 않을 거였다. 그럴 수 있다면 정말 낙원이겠지, 잃어버린 모두를 되찾는 곳이 바로 낙원일 테니까. 나는 문손잡이가 뜯겨나간 대문 앞에서 순신에 대해 생각하다가 최대한 온실 영역에 가깝게 파자고 결정했다. 유리 손잡이는 온실 출입문에 사용되었으니까. 할머니는 그걸 구해다 달아놓고 누군가 문을 열고 돌아와주기를 바랐을 것 같았다.

 

한국전쟁까지 박목주는 식물원 책임자로 성실히 일했다. 중학교에 진학하지 않은 마리꼬가 걱정이었지만 언젠가는 학교로 돌아가겠지 생각했다. 함께 살던 두자가 결혼해 떠난 뒤로 마리꼬는 눈에 띄게 침울해져 있었다. 쪽바리라며 돌을 던지는 애들도 있으니 밖으로 나다니기도 싫어했다. 어느새 팔 힘이 자란 유진만이 그런 녀석들을 끝까지 쫓아가 대들곤 했다. 이사를 고민했지만 관사를 떠나 집을 살 돈이 없었다. 관사에서 계속 살 수 있는 것도 이창충이 힘써준 덕분이었다.

얼마 안 되는 급여는 강화 본가에도 보내야 했고 생활비로도 써야 했으며 무엇보다 아내를 밀항시킬 돈을 모아야 했다. 국교가 끊겼다 해도 암암리에 사람을 데려오더라고 고무장화 박영출이 귀띔해주었다. 물론 마리꼬는 더이상 그를 고무장화라 부르지 않았다. 직원들이 하나둘 자기 살 길을 찾아 떠나 다른 직업을 가질 때 박영출만은 동물원을 지키고 있었다. 비원의 풀을 베고 열매들을 주워다 남아 있는 사슴사와 큰물새우리를 돌봤다.

1950년 6월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했을 때 피난 간 직원들은 거의 없었다. 정작 대통령은 떠나고 없는 서울에서 평소처럼 출근해서 어리둥절해하며 자기 일을 했다. 상황을 살피기 위해 종로로 나가자 누군가가 깃발을 주며 만세를 부르라고 했다. 박목주는 자기를 움켜쥔 그의 손을 얼른 떨쳐냈다. 경험상 만세는 위험한 것이었다.

며칠 지나자 붉은 완장을 두른 인민위원회 사람들이 나와 업무보고를 받았다. 최소한의 인원만 남고 무너진 교량과 도로를 복구하는 노력동원에 나가라고 했다. 젊은 직원들은 총 한번 들어보지도 못한 채 인민군으로 차출되기도 했다. 북한에서 일본인과 친일부역자들을 어떻게 처리했는지 잘 알았으므로 박목주는 마리꼬에게 외출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렇게 가을을 보내고 나자 서울이 수복되었고 일상이 되돌아온 듯했다. 하지만 1월이 되자 다시 국군이 후퇴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이번에 서울에 남으면 아주 곤혹을 치를 것이라며 모두들 짐을 쌌다.

박목주도 피난을 결심하고 대온실의 문을 걸어 잠갔다. 온실을 데우는 양열물은 천천히 식고 식물은 모두 죽을 것이었다. 착잡한 마음으로 돌아서는데 이창충이 서 있었다. 보자기에 싼 서류를 건네며 수원의 농업시험장에 다녀오라고 지시했다.

“지금 말씀입니까?” 박목주는 당황했다.

수원이라면 아무리 빨리 갔다 와도 이틀은 걸리는 거리였다. 박목주가 아이들 때문에 어렵다고 하자 이창충은 황실 서류라고 했다. 중요한 문건이라 소실되어서는 안 된다고, 농업시험장에서 수합해 경주로 이동시키기로 했으니 다녀와서 피난을 가라고.

“사무청장님은 피난 안 가십니까?”

“나도 떠날 거야.”

날이 찬데도 이창충은 홑겹으로 된 공무복만 달랑 입고 있었다. 추워서인지 얼굴이 파리했다. 할 수 없이 박목주는 서류를 받아들었다.

“키노시따!”

정원을 걸어나오는데 이창충이 그를 일본 이름으로 불렀다. 고드름이 맺힌 대온실 처마 밑에 서 있는 이창충은 그 순간만은 옛날의 마사시처럼 보였다. 나는 부모와 다른 오니 아이, 도깨비다 하던 마사시처럼.

“열어볼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그는 이유 없는 웃음과 함께 경고하고는 궁 안으로 사라졌다.

집으로 돌아온 박목주는 아이들을 어떻게 하고 가야 할지를 고민했다. 식량과 이불과 냄비를 챙겨 피난하고 있는 마당에 아이들을 맡길 사람은 없었다. 고민 끝에 두자를 떠올렸지만 벌써 떠났을지도 모르고 그의 집은 약현동으로 멀었다. 마리꼬는 집에서 기다리겠다고 했다.

“집에서?”

박목주는 갈등했다. 집은 위험했다. 박목주의 머릿속에 시미즈의 엽서가 떠올랐다. 그래도 온실 지하에 넣어둔 책자들은 무사했다는 말. 아이들을 지하 배양실에 숨겨두고 다녀오면 괜찮을 것 같았다. 겨우 이틀이니 북한군이 들어온다 해도 식물원까지 뒤지고 다니지는 않을 거였다. 찾아 먹을 게 별로 없는 시설이니까.

박목주는 아이들에게 짐을 싸라고 했다. 돌아와서 바로 피난을 떠날 수 있게 보리쌀과 통조림 같은 식량과 사계절 옷가지를 챙겼다. 수원을 다녀와서는 인천이나 평택으로 가서 배편을 이용해 부산으로 가면 되리라 생각했다. 얼마 안 되는 돈은 전대에 넣어 마리꼬에게 차게 했다. 마리꼬는 아예 치마 안으로 넣어서 감췄다. 그렇게 해서 짐을 이고 걷는 셋은 서울의 다른 피난민들과 구분되지 않았다. 모두들 다리를 건너기 위해 한강으로 가는데 셋만 그 흐름을 거스르고 있다는 점만 다를 뿐. 그러다 박목주는 거리에서 박영출과 마주쳤다. 박영출은 리어카에 짐을 싣고 식구들과 바삐 걷는 중이었다.

“사육사님!”

박영출은 황망한 얼굴로 돌아보았다. 박목주와 아이들을 알아보고는 허둥지둥 달려와 손을 잡았다.

“이제 떠나?”

박목주는 아이들을 박영출에게 맡길까 갈등했다. 하지만 그에게도 아이만 넷이었다. 박목주는 잠깐 공무를 보고 곧 출발할 거라고 말했다.

“아니, 이 사람아, 지금이 그럴 때야? 얼른 다리를 건너야지, 저번처럼 한강 다리가 폭파되면 다 죽네.”

“설마 그러려고요. 남쪽 어디로 가세요?”

“나는 일단 공주로 가네. 몸 성히 봄세.”

박영출은 더는 시간을 지체할 수 없어 돌아섰다가 다시 와서 유진의 주머니에 양갱을 넣어주었다.

“감사합니다!”

유진이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데 리어카에 놓인 새장에서 앵무새가 ‘바갓바갓’ 하고 소리쳤다.

“코노야로오.”

마리꼬는 앵무새가 일본어로 멍청이라고 욕하는 걸 알아듣고는 저게, 하며 발끈했다. 그 앵무새는 더이상 동물들을 먹이기 힘들어진 동물원장이 직원들에게 분양한 것이었다. 원하는 만큼 소동물을 가져가라고 했지만 사람도 먹고살기 힘든 마당에 동물을 거둔 사람은 몇 안 됐다. 박목주는 창경원으로 와서 지하 문을 열고 아이들을 데리고 내려갔다. 어둡고 따뜻했다.

“두루미야?” 유진이 물었다.

“방금 울었잖아.”

마리꼬는 자기들만 남겨진다는 사실이 두려웠지만 동생 앞에서 태를 낼 수는 없었다. 어금니를 꽉 물었고 이제야 모든 일본인들이 겪은 그것, 그 수난이 자신을 찾아왔다는 생각을 했다.

“아마 왜가리일 거야. 큰물새우리에서 들리는 소리야.”

박목주가 유진에게 답했다. 박목주는 집에서부터 쉬지 않고 당부를 해댔지만 지하에서는 말이 없었다. 괴로운 표정으로 다만 한구석에 이불을 깔아줄 뿐이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절대 아무것도 만지지 말라고 했다.

“보일러실에도 들어가지 말고, 수납장 용액은 다 위험한 것들이니까 건들지 말고. 하룻밤만 지나면 내가 오니까, 알았지?”

박목주는 일어나 둥지에 남은 새알들처럼 웅크린 아이들을 내려다보았고 이윽고 결심한 듯 걸어나가 문을 잠갔다. 잠시 후 마리꼬는 발딱 일어나 문고리를 돌려보았지만 잠김쇠가 단단하게 걸린 문은 열리지 않았다. 온실 식물들은 검은 그림자가 되어 어둠 속에 붙박였다.

 

차를 세우고 집으로 들어갔는데 내 방에 누군가가 쪼그리고 앉아 있어서 나는 깜짝 놀랐다. 운전하면서 내내 지하 배양실 생각을 했더니 헛것이 보이나 싶었다.

“불 켜지 마, 이모.”

무릎을 세우고 얼굴을 파묻은 채 있는 건 산아였다. 창에서 달빛이 들어와 산아의 새하얀 가르마를 비추고 있었다. 헤드폰을 써서 내 말이 들릴지 모르겠지만 나는 알았다고 답했다. 그리고 옆에 털썩 앉았다. 달빛이 내 목덜미까지 옮겨 왔을 때쯤 은혜에게서 ‘거기 갔지?’ 하는 메시지가 왔다.

‘아무 말도 안 하는데 무슨 일이야?’

‘서울 애가 도로 서울 가.’

‘갑자기 왜?’

‘걔 가야 해. 골칫거리야. 엄마들은 내심 다행이다 하는데 산아만 지랄지랄을, 내가 유별난 걸 낳았다 싶다. 섬 들어가는 중이니까 조금만 고생해라, 친구야.’

“엄마랑 카카오톡 하는 소리 다 들려. 엄마는 뭘 모르고 스미만 탓하지?”

산아의 말에 나는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얼른 넣었다. 그리고 아니라고, 이모 집에서 밥 잘 먹고 오라고 했다고 말했다. 산아는 내 귀에도 들릴 정도로 노래를 큰 볼륨으로 듣다가 갑자기 뚝 끊더니 “억울함은 어떻게 해야 해?” 하고 물었다. 길을 걷다가 불길 같은 노여움을 느끼면서 억울해,라고 소리 질렀던 시절이 떠올랐다. 억울함은 억척같이 대거리해야 한다고 가르치던 딩 아주머니도. 하지만 아주머니도 그렇게 해서 풀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한국을 떠나기 전 그렇게 울지 않았을까.

“잊는 건 불가능해.”

나는 엉덩이를 산아 쪽으로 밀며 말했다. 그러자 산아는 해안가까지 날아갈 듯한 깊은 한숨을 쉬었다.

“왜 억울했는데? 말할 수 있어?”

잘못은 산아의 앙숙인 오태양이라는 아이가 먼저 한 것 같았다. 방과후 수업으로 드론 조종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달려들어 리모컨을 빼앗으며 산아를 괴롭힌 것이었다. 산아도 화가 났지만 애걸하다시피 해서 돌려받았는데, 그 장면을 스미가 지켜보고 있었다. 스미는 산아의 표정에서 고통을 읽었고 태양이의 얼굴에서 누군가를 괴롭힐 때 이는 희열과 득의만만함을 읽었다. 언제라도 벌집 아래의 무대로 아이를 끌어당기는 상처의 반복적 환기였다.

자신을 괴롭힐 때는 가만히 당했지만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 곁을 어슬렁거리는 그 괴물을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을 것이었다. 스미는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용기를 냈고 가방을 가지러 교실로 올라가는 태양이를 뒤따라가 계단에서 밀어버렸다. 물론 밀었다를 두고 두 아이의 말은 달랐다. 우는 태양이를 버려두고 스미는 운동장으로 돌아와 산아에게 오늘도 자신이 아무것도 훔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는 조용히 귀가했다. 태양이는 8주 동안 다리에 깁스를 해야 하는 부상을 입었다. 당연히 태양이의 부모는 가만있지 않았다.

“스미는 자기가 밀지 않았다고 했어, 그거 거짓말 아니라고.”

상담치료를 받던 시절 나도 폭력성을 드러내곤 했다. 왜 우산으로 길 가는 사람을 때리면 안 되느냐고 상담사에게 물었던 기억도 있다. 스미가 태양이를 밀었는지 밀지 않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런 충동에 어떤 아이들이 확실히 취약한 건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건 공격이라기보다는 자학에 가까웠다.

상담사 앞에서 으르렁거리며 공격성을 드러내다가 상담시간이 끝나 빌딩 화장실을 간 날이었다. 한 엄마가 아이를 달래가며 옷을 갈아입히고 있었다. 화장실 칸으로 들어가 그 소리를 들으며 일을 보던 나는 그 순간 참을 수 없는 수치심을 느꼈다. 둘의 대화가 너무 따뜻하고 다정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들이 화장실에서 나갈 때까지 문을 열고 나가지 못했다. 나쁘고 더럽고 가치 없는 내가 그 사람들에게 가까이 가면 안 될 것 같아서였다.

“산아야, 더 억울해지는 건 그 억울한 일에 내가 갇혀버리는 것과 같아. 갇혀서 내가 나 자신을 해치는 것.”

산아는 고개를 들고 손바닥으로 눈물을 닦았다. 얼굴을 적신 눈물이 어둠 속에서도 눈길처럼 반짝였다.

“이모는 하루 마감하면서 가끔 이렇게 기도한다. 오늘 다행히 아무도 안 죽였습니다.”

산아가 어이가 없는지 약간 웃었다.

“그럼 하느님이 칭찬하셔?”

“침묵하시지, 기도는 답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다리기 위해 하는 거니까.”

산아는 한숨을 쉬면서 올해는 마마무를 보러 가지 못했다고 화제를 바꿨다. 그러고 보니 할머니와 대온실을 생각하느라 겨울을 다 보내고 말았다. 올해도 나타났다면 네살, 마마무는 더 늠름해졌을 거였다. 굵은 갈고리 같은 부리는 단단해지고 금빛 깃털은 목덜미와 등으로 가면서 잿빛과 혼합되고 어깨깃의 흰색은 뚜렷해졌을 것이다. 성조가 되었으니 더 빠르게 사냥하고 독수리 무리에도 절대 지지 않았을 거였다.

“마마무 잘 있다 갔겠지?”

“그럼. 쇠기러기 많이 잡아먹고 흰꼬리수리랑 다투고 귀찮게 하는 까마귀들 무시하면서 잘 지내다 시베리아나 몽골로 갔겠지.”

“정말 멋있어, 하늘에서 사냥할 때 화살처럼 꽂혀.”

“맞아, 하지만 그러기 전까지 마마무는 대체로 나무에서 뭘 했었지?”

“기다렸어.”

은혜가 산아를 데리러 왔고 산아는 엄마를 보자 다시 입이 나와서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사과하기 전까지는 안 가겠다고 버텼다.

“아니, 내가 뭘 사과해? 야, 걔가 사고 친 걸 내가 왜 사과해야 하니?”

오늘 하루도 바빴는지 피로로 눈 밑이 거뭇한 은혜가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산아는 은혜의 사과를 듣기 전까지는 가지 않겠다고 버텼다. 은혜의 하소연은 요즘 들어 툭하면 문을 걸어 잠그고 혼자서 자식 키우는 엄마의 수고에 관심도 없으며 차갑고 냉정하기만 한 딸에 대한 한탄으로 번져갔다.

“그래도 엄마, 사과해. 스미 보고 정신 나간 애라고 한 거 사과하란 말이야.”

나는 사과를 깎다가 잠시 멈추고 은혜에게 눈짓을 보냈다. 산아 말을 들어주라는 신호였다.

“그래, 엄마가 무식해서 그런 막말했다. 사과한다, 사과해.”

나는 포크로 사과를 집어 둘에게 내밀었고 표정이 좀 나아진 산아와 달리 이번에는 은혜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애들은 왜 이렇게 부모들 앞에서 자존심을 세우는지 모르겠어.”

은혜는 사과를 씹어 넘길 기운도 없어 보였다. 요즘 애들만 그런 건지 우리도 그랬던 건지 통 알 수가 없다고. 가장 중요한 사람이고 잘 보이고 싶은 사람이라 그렇겠지,라고 나는 답했다.

“그러면 잘할 생각을 해야지, 무조건 우기고 보니.”

산아는 그러거나 말거나 태블릿 피씨로 벌써 뭔가를 집중해서 읽고 있었다. 산아네가 돌아가고 나는 책상에 앉아 은혜가 푸념처럼 한 말에 대해 생각했다. 아주 조심스럽게 일던 의혹이 밀물처럼 힘차게 밀려들어왔다. 할머니는 왜 일본에 연락하지 않은 채 안문자로 살았을까. 거기에는 어떤 ‘사건’이 있었다. 그리운 엄마에게 차라리 죽은 것으로 해야 하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순간 두렵고 그것이 뭔지 알기도 전에 아주 차디찬 슬픔 속으로 빠져드는 느낌이었다.

낙원하숙에 머물렀던 2003년의 기록에서 뭔가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차마 펼쳐볼 엄두가 나지 않았던 그 시절 다이어리를 꺼내기 위해 할 수 없이 창고를 열었다. 아빠가 사용했던 어구들과 녹슨 자전거, 몇번 쓰지 않은 캠핑도구와 함께 학창시절 물건들이 있었다. 초등학생 때부터 쓰던 그 물건들을 보관한 건 아빠였고 창고로 몰아넣어버린 건 나였다. 그 당시 다이어리를 가져와 지금은 소식을 알 길 없는 아이돌과 배우들 사진을 지나 기록을 살폈다.

사춘기임을 감안해도 어쩔 수 없이 낯 뜨거워지는 감상적인 고백들을 지나 나는 색 바랜 종이 위에 낙엽처럼 찍혀 있는 붉은 원을 발견했다. 시험 삼아 찍어본 할머니 도장에는 ‘眞理子’, 마리꼬라는 한자가 새겨져 있었다. 나는 삼우씨에게 연락해 도장이 사용된 흔적을 찾았다고 말했다.

“그래? 그러면 항소도 가능한데 어디서 찾았니?”

다이어리라고 하자 공적 문서이면 더 확실할 텐데, 하고 아쉬워했다.

“일수 장부를 구할 수 있지 않을까요?”

나는 말하면서도 오해를 살까봐 필요하다면요, 하고 단서를 달았다.

 

시굴 작업이 있는 목요일, 차를 운전해 궁으로 갔다. 정확히 일년 전, 복잡한 마음으로 안국역에서 걸어나와 창경궁으로 향했던 게 생각났다. 지금은 달랐다. 가는 목적은 일하는 사람에 꼭 맞게 단순했고 감정의 결도 단정했다. 나는 간결한 내 마음이 마음에 들었다.

굴삭기와 파낸 흙을 모으는 스키드 로더가 현장에 준비되어 있었다. 기계가 들어오기 위해 덧집의 일부가 해체되어 있었고 그제야 현장소장이 왜 난색을 표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배양실 안쪽이 아니라 온실 쪽이 아무래도 낫겠어요? 하기는 데이터상으로도 거기에 유존물이 더 많이 보이기는 해요.”

나는 은세창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뭐 별게 안 나오더라도, 한번 트라이해본 거 그게 남는 거 아니겠어요.”

곤줄박이가 씩씩하게 말했다. 그러고는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삼각대에 카메라를 설치했다. 시굴에는 처음 참여해 가슴이 인디애나 존스처럼 웅장해진다고 했다. 소목이 소개해준 연구자도 곧 도착했다. 한 사립 문화재연구기관에서 일하는 백실장이었다. 우리는 계획을 숨기고 싶었지만 같은 팀인 은세창에게는 말할 수밖에 없었고 은세창은 소목에게 전할 수밖에 없었다. 소목은 우리의 무모함에 혀를 찼지만 곧 일이 틀어지지 않게 방향을 잡아주었다. 시굴이라고 해서 무작정 파면 되는 줄 아냐며 전문가를 붙여준 것이다.

백실장은 팔짱을 끼고 현장을 둘러보더니 그런데 정확히 뭘 기대하고 있는 거예요? 하고 물었다. 말문이 막혔는데 제갈도희가 “뭘 기대할 수 있을까 싶어 찾는 겁니다”라고 답했다. 그 모호한 답을 알아들은 백실장은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지하 배양실 설계도를 보여달라고 했다. 그러고는 내가 지목한 유리 온실 쪽을 파되, 일단 유적층이 나올 때까지 1미터쯤은 토층을 기계로 걷어내자고 제안했다.

“정말 좋은 계획이십니다.”

은세창이 재빨리 동의했다. 민들레와 쇠뜨기와 냉이 같은 식물들을 밀며 굴삭기가 작업을 시작했다. 붉은 흙이 파헤쳐지며 풀뿌리들이 엉켜 있는 땅 밑 공간이 드러났다. 30분 정도 진행했을까. 굴삭기에서 기사가 내리며 점심을 먹으러 가야 한다고 말을 툭 던졌다. 시계를 보니 열한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는데, 답도 기다리지 않고 기사는 휑하니 사라졌고 우리는 파다 만 구덩이 앞에 남겨졌다.

“현장에선 기계 모는 사람이 왕이에요.”

은세창이 그렇게 말하며 우리도 식사하러 가자고 앞장섰다. 중식당에서 백실장은 우리가 어수선하게 설명하는 시굴조사의 목적을 들었다. 기관과 공사업체를 난처하게 만들더라도 정식 발굴에 나설 수 있는 명분을 찾아야 한다는 말을 어떻게 좋게 좋게 전할까 고심했는데 백실장은 한방이 있어야겠구먼, 하고 간단히 정리했다. 혹시 괜한 일에 나서 기관에 밉보일까 몸을 빼면 어쩌나 싶었는데 기우였다.

“공사현장에서 제일 싫어하는 게 우리 같은 사람들이에요. 문화재 연구자들. 세상 중요하다는 발굴 업적, 대체로 도둑놈처럼 현장에 숨어들어가서 얻어낸 것들이거든요. 고고학자들이 반은 학자고 반은 도굴꾼이에요. 저기 풍납토성 있죠? 거기 백제 유물들도 한 교수가 설 연휴로 공사가 쉴 때 잠입해서 찾아낸 거거든요. 바로 공사 멈추고 발굴 들어갔는데 재건축 중단됐다고 주민들이 난리 나고 분위기 어마하게 살벌했어요. 어디든 그래요. 어디든 안 싸우면 일이 안 돼.”

“그래도 저희는 동궐관리청의 협조 아래 법령이 정한 만큼만 시굴하는 거니까 무단침입까지는 아니고 담당 과장 외유라는 약간의 행정 공백을 융통성있게 운용하는 셈이죠.”

은세창이 군만두를 집으며 줄줄이 변명하자 백실장이 그렇게 될 것 같으냐고 놀렸다. 정말 법령이 정하는 만큼만 시굴할 생각이냐고.

“한번 파봐요, 마음이 그렇게 되나. 삽 들면 끝장을 보게 돼 있어요.”

제갈도희와 나는 밥을 먹다가 서로 눈을 마주치며 어색하게 웃었다. 일이 잘되어가는 건지 부담스러워져가는 건지 애매했다. 점심을 먹고 현장으로 돌아가니 굴삭기 기사는 그늘 아래서 눈을 붙이고 있었다. 백실장이 구덩이로 들어가 깊이를 재고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모종삽처럼 생긴 도구로 땅을 긁더니 일부 흙을 비닐팩에 담았다.

“저게 트라울이에요. 고고학자의 심벌 같은 거라서 서로 빌려 쓰지도 않는대요.”

제갈도희가 알려주었다. 여기까지는 별게 없다고, 백실장이 밖으로 빠져나오며 말했다. 오수에서 깨어난 굴삭기 기사가 기계에 오르고 삽날로 다시 흙을 퍼 올렸다. 얼마 파지도 않은 것 같은데 스키드 로더의 짐칸이 제법 차 있었다. 생각보다 큰 작업이라서 마음에 긴장이 일었다. 그때 굴삭기가 멈췄다.

“뭐가 걸렸어요.”

기사가 운전석에서 얼굴을 빼꼼히 내밀며 말했다. 백실장이 구덩이 안으로 들어가 살펴보았다. 그리고 은세창에게 이제 인부들을 부르라고 했다. 여기서부터는 수작업으로 해야 할 것 같다고. 굴삭기 삽날에 부딪힌 건 목재 벽면이었다. 후꾸바가 설계한 지하 공간이 정말 있었구나 싶어 나는 놀랐다. 대온실을 보면서도, 회고록을 산아에게 얘기해주면서도 실감하지 못한 그의 얼굴이 드러난 기분이었다.

“저기, 백실장님, 저희가 팔 겁니다.”

은세창이 나와 제갈도희를 가리키며 웃었다. 백실장은 대온실을 드나들고 있는 인부들을 가리키며 저분들 중에는 아무도 없냐고 확인했다.

“없어요. 아시다시피 저희가 알아서 해야 한답니다.”

“아니 그런데 그런 차림으로 오셨어요?”

백실장이 우리의 별것 없는 옷차림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청바지와 티셔츠, 그리고 점퍼를 입은 우리에 비해 백실장은 벙거지 모자에 각종 도구가 든 조끼, 장갑과 중요하게는 장화를 신고 있었다. 백실장은 유적 다 밟아놓을 일 있느냐고 신발이라도 바꿔 신으라고 했다.

“어떤 걸로 바꿀까요?”

은세창이 난처하게 묻자 백실장은 고무신이 가장 좋다고 했다. 제갈도희가 은세창과 내 발 사이즈를 확인하더니 기념품 가게로 달려갔다.

“정말 아무도 안 와요?”

“네……”

은세창이 미안한 표정을 짓자 백실장은 소목 선생님은 그런 말씀까진 없으시던데, 하면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랬을 것이다, 그랬다면 백실장은 오지 않았을 테니까. 그는 잠시 도망갈까 생각하는 듯했지만 포기하고 우리에게 업무를 배정했다. 제갈도희는 여기서도 도면 작업을 맡아야 했다. 발견되는 모든 것의 위치를 정확하게 표시하고 함척과 레벨로 측정한 수치를 기록했다. 함척은 깊이를 재는 긴 자였고 레벨은 그것을 읽는 기계였다.

“저기 저희는 트라울이 없는데 괜찮을까요?”

은세창이 두리번거리며 묻자 백실장이 그건 자기만 있으면 된다고 했다.

“여러분, 꽃삽이라고 하는 요건 아무나 잡는 게 아니에요. 저도 이거 잡을 때까지 현장에서 삽질만 한 5년 했거든요. 제 지시대로 잘 파시기만 하면 됩니다.”

나와 은세창은 삽을 쥐고 구덩이로 내려갔다. 수리 보고서 담당이 여기서 왜 삽질을 하고 있을까요, 내가 은세창에게 농담하자 은세창이 영두님 아이디어잖아요, 하고 짓궂게 받았다. 그래도 신기루 같았던 지하 공간이 실재하는 걸 알게 되자 기쁘다는 위로의 말을 했다.

“이거 파도 조선시대나 그때 유물이 나오는 건 아니죠?” 백실장이 물었다.

아마 그럴 거였다. 창경궁의 다른 건물 위에 지은 것은 아니니까. 그 말을 듣자 백실장이 “그래서 청에서 영 관심이 없구먼” 하고 혼잣말했다.

그때 은세창이 꽥 하고 소리를 질렀다.

“아 놀래라, 황소개구리가 왜 여기 앉아 있어?”

“그거 두꺼비예요.” 내가 말했다. 3월인데도 아직 겨울잠을 자고 있던 두꺼비를 은세창이 깨운 셈이었다. 땅속이 습한가보다고 백실장이 말했다. 삽질을 할 때마다 은세창의 나지막한 탄식이 흘러나왔다. 당연히 땅 밑에는 산 것들이 우글대고 있었다. 두꺼비를 근처 수풀로 옮겨다놓고 돌아왔을 때는 지렁이와 땅강아지가 문제였다. 미래에 뭐가 될지는 알 수 없지만 희고 통통한 몸으로 때를 기다리는 굼벵이들, 거미들, 심지어 달팽이까지 은세창은 꺼림칙해했다.

“뭐예요, 재벌집 막내아들도 아니면서.”

제갈도희가 지친 은세창과 교대하면서 핀잔을 주었다. 얼마나 파 내려갔을까. 문틀이 드러났다. 우리는 벽이 나타났을 때보다 더 크게 환호했다. 백실장은 “뭐가 보이는데?” 하더니 구덩이로 내려와 트라울로 흙을 걷어냈다. 뼈였다.

“또 있어요!”

백실장을 눈여겨보고 있던 제갈도희가 소리 지르며 거무스름한 조각을 집어 올렸다. 백실장이 “아니, 기록도 안 하고 들어올리면 어떻게 해요?” 하고 소리쳤다. 제갈도희가 놀라 다시 내려놓았다. 마침 대온실에서 나던 공사 소음이 뚝 그치면서 주변이 고요해졌다. 백실장이 뼈 길이를 재고 사진을 찍은 다음 조심스레 폴리백에 넣었다.

“동물일까요?”

“육안으로는 정확히는 알지 못하고요. 연구소에 보내봐야 해요. 사람이나 동물이나 뼈는 뭐 다를 게 없잖아요.”

뼈가 발견됐다는 소식은 대온실을 수리하고 있던 인부들을 통해 현장사무소까지 전해졌다. 현장소장이 허둥지둥 달려와 사람이 나온 거냐고 물었다.

“아니요, 그건 검사를 해봐야 안답니다.”

“아니, 이 사람들아 그냥 뭐 좀 알아본다더니 시체를 파놓으면 어떡해?”

현장소장이 은세창에게 소리쳤다. 괜한 일을 도왔다는 후회를 하는 것 같았다. 공사현장에 문화재가 나타나면 조용히 덮으라고 하는 건축주도 많으니 소장만 탓할 수도 없었다. 마치 케이크처럼 몇겹의 레이어를 쌓으며 도시를 만들고 부수고 하다보면 언젠가 선택의 순간이 오게 되니까. 서로 다른 이해관계 사이에서 다투다 건축물은 남거나 허물어지거나 했다.

“시체는 살이 좀이라도 붙어 있는 거고. 뼈예요, 뼈. 아직은 무슨 뼈인지는 모르고요.”

은세창이 현장소장을 안심시켰다.

“이런 건 새 뼈네요. 차골.”

백실장이 내가 막 발굴한 ‘V’자 모양의 뼈를 가리키며 말했다. 사람으로 치면 쇄골에 해당하는 그 뼈는 인간과 다르게 하나로 붙어 있는 게 특징이어서 한눈에 알 수 있다고 했다. 백실장이 “삼계탕 먹을 때 우리 자주 보잖아요”라고 말해서 우리는 얼굴을 찌푸렸다.

“여기 원래 새 우리였나요?”

차단막 아래 펼쳐놓은 뼈들을 살펴보며 백실장이 물었다.

“원래는 온실이 있었어요.”

“온실, 그런 건 토질 분석해보면 나올 테고. 근데 뼈들이 대부분 새 뼈 같긴 하네?”

현장소장은 사색이 되어 있다가 새 뼈가 많다고 하자 별일 아니다 싶은지 “시체 치우는 줄 알고 놀랐잖아, 새 우리를 파면 판다고 말을 해야지” 하고는 돌아갔다. 네시쯤 되었을 때 이제 슬슬 정리하자고 은세창이 말했다. 우리가 모은 뼈들은 꽤 많았다. 반나절 정도 모았다고 하기에는, 식물 관련 시설이 있었다고 하기에는 이상할 정도로.

“정말 어느 시절에 여기를 새 우리로 쓴 거 아닐까요? 아니면 화초랑 새를 같이 길렀나?”

은세창이 물었지만 나는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답했다. 일단 그런 기록이 없고 할머니도 피신한 이야기를 하며 지하 배양실이라고 똑똑히 언급했기 때문이었다. 만약 새 우리가 있었다면 그 언급을 했었을 텐데 할머니는 남동생이 멀리서 나는 새소리를 들었고 박목주가 왜가리라고 설명했다고 했으니까.

백실장은 당연하다는 듯이 “내일도 할 거죠?” 하고 확인했다. 우리는 백실장의 예상처럼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다. 장과장이 돌아오기까지 이틀만이라도 작업을 더 하고 싶었다. 백실장은 자기 차에서 파란 덮개를 가져와 현장을 덮었다. 구덩이 위에 펼치고 모래주머니를 두어 날려가지 않게 했다. 그러자 현장 간부인 듯한 사람이 여기를 파놓으면 공사가 힘들어진다고 불평을 했다.

“여기도 엄연히 수리공사 현장이에요. 정말 너무 양해를 안 해주신다. 보고서 완성하면 덮지 말라고 해도 저희가 와서 다 덮어드릴게요.”

삽질을 하느라 흙투성이가 된 곤줄박이가 못 참겠다는 듯 한마디 했다.

“다시 오기는, 그냥 연락이나 줘요. 우리가 후딱 덮을 테니까.”

우여곡절 끝에 하루가 끝나고 우리는 근처 설렁탕집에서 저녁을 먹었다. 백실장은 유구를 정리해 가져가면서 내일은 오후에나 올 수 있다고 전했다. 종일 삽질을 했더니 모두 기진맥진했다. 식당 창문으로는 불 밝힌 동궐이 보였고 은은한 저녁 하늘 아래 그곳은 평화롭고 안온해 보였다.

“사람들의 하루하루가 정말 다 달라요. 누구는 소장 말대로 시체 파다 하루가 가고 누구는 궁궐에 놀러가고 누군가는 오늘 실연당한 사람도 있겠지.”

“왜 그런 나쁜 생각만 해요? 오늘 청혼받은 사람도 있을 텐데.”

“시체 되는 거랑 뭐 그리 다르지 않네요.”

제갈도희가 설렁탕 소면을 젓가락으로 말며 말했다. 왕주무관은 진지한 얼굴로 제갈도희의 말을 반박했는데, 그의 말주변으로는 완고한 곤줄박이를 설득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때 모르는 번호로 보이스콜이 떴다. 받지 말까 하다가 혹시 일과 관련한 것일 수 있어서 통화를 눌렀는데, 연결 상태가 좋지 않았다. 여보세요,를 반복하다가 끊으려는 순간 “안 들려?” 하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데 받자마자 반말일까. 내 표정이 변했는지 제갈도희가 무슨 일이냐고 눈으로 물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식당 밖으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

“누구시죠?”

“나야, 리사.”

그 이름은 여기와는 완전히 매질이 다른, 이를테면 물속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이해할 수 없고 비현실적이며 듣기를 기대하지 않은 이름이었다. 내게 리사는.

“끊어졌나, 왜 말이 없어.”

리사의 중얼거림에서 오래전 말투가 묻어났다. 혼잣말로 포장되어 있지만 사실은 타인에게 던지듯 내놓는 불만이 담긴 말, 그래서 주변에 긴장을 일으키는 얼음 같은 어조였다.

“듣고 있어, 말해도 돼.”

나는 담담하게 답했다. 그리고 그동안 잘 지냈느냐고 의례적인 인사를 겨우 했다. 리사와 다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래, 오랜만이다. 근데 며칠 전에 삼우씨가 메시지를 길게 남겼더라고? 아주 길게. 뭘 찾았다며?”

나는 삼우씨가 왜 얘기를 전했을까 화가 났다. 그런 증거들을 모아 정말 다시 한번 소송을 하자는 차원에서 했던 말은 아니었다. 그저 할머니의 진심을 확인하기 위해 필요하면 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아이디어를 냈을 뿐이었다. 나는 그래도 가족이니까 리사에게 집을 넘겼으리라는 삼우씨 말에 전혀 동의하지 않았다. 할머니가 힘들게 그 집으로 돌아왔다는 생각을 하면 할수록 그런 미래를 조금도 원하지 않았으리라는 것은 분명했다. 과거의 원한을 되갚으려거나 리사를 곤혹스럽게 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다. 내가 그렇게 설명했지만 리사는 듣지 않았다.

“넌 늘 그래. 착한 척, 밝은 척, 사려 깊은 척. 항소에서 이기기 진짜 어렵다. 네가 모를 거라고 생각 안 해. 그냥 너는 너대로 뭐랄까, 뭐든 하고 있어야 감정이 풀리니까 그러고 있겠지. 너 좋아했던 스케이트 탈 때처럼 열심히 밀고 나가보는 거겠지.”

속이 울렁댔다. 슬픔은 차고 분노는 뜨거워서 언제나 나를 몽롱한 상태로 몰아넣고는 했다. 그런 극단의 마음과 싸우다보면 아주 간단한 일상의 일도 못하곤 했다. 길을 못 찾거나 버스 번호를 잊어버리거나, 걸어다니거나 물건을 사는 평소의 동작에도 서툴러졌다. 그게 상처로 부스러진 이들이 감내해야 하는 일상이었다. 트라우마는 그렇게 기본적인 것부터 스위치를 끄며 사람을 막막하게 만들었다.

“전화는 왜 한 거니? 지금 좀 상식에 어긋난 행동하고 있는데.”

“아, 기분 나쁘게 하려던 건 아닌데, 미국에서 살다보니까 말투가 많이 직설적이지. 근데 넌 목소리도 안 변했다. 애를 안 낳아서 그런가?”

리사는 자기는 아이를 하나 낳아 지금 열살이고 이혼하고 양육비를 받지 못해 경제적으로 어렵다고 얘기했다. 너 같은 싱글들은 상상도 못할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낙원하숙을 빨리 팔아야 하는 이유를 리사는 그렇게 변명했다.

전화를 끊고 돌아와 다시 자리에 앉았는데 입맛이 없었다. 마치 혀가 사라져버린 듯했다.

“영두님, 오늘 땅 파느라 힘들었죠? 좀 먹어요.”

제갈도희가 깍두기 국물을 설렁탕에 넣어보라고 했다. 자기도 소목님에게 배운 건데 야근 죽도록 하고 나와서 피로 푸는 데 최고라고. 나는 제갈도희가 말한 대로 깍두기 국물을 넣어서 숟가락으로 한입 떠먹었다. 시큼한 깍두기 맛이 돌면서 그런대로 밥이 들어갔다. 놀라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변하지 않아도 놀라지 말아야지, 괜찮다 싶었던 상처가 건드려졌어도 놀라지 말아야지, 정신을 차려야지. 리사보다 더 실망스러운 건 삼우씨였다. 내 말을 왜 전했을까. 하기는 그렇게 말 많은 사람이 비밀을 견디기는 어려웠을 거였다.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삼우씨에게 전화를 걸어 항의하자 자기는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고 펄쩍 뛰었다.

“매수자가 나타났어. 그래서 한번쯤 다시 생각해보라는 의미로 말한 거야.”

그러자 전화 끊을 때 리사가 한국 가면 한번 보자고 한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돈이 리사를 움직이게 한 거였다. 두통이 일어서 나는 차창을 끝까지 내렸다.

“나 보육원 원장님 좀 만나게 해줘요.”

나는 전부터 망설이던 말, 내가 왜 이렇게까지 할머니의 과거를 맞춰보려 하는지 알 수 없어 참고 있었던 말을 꺼냈다.

“알았어.” 삼우씨는 금세 답했다.

“이것도 리사한테 알릴 거예요?”

아직 화가 다 풀리지 않아서 그렇게 물었다.

“아니, 걔는 네가 그럴 거라고 예상하더라고. 멈추지 않을 거라고, 영두 너는 할머니를 좋아했으니까 뭐든 하고 싶어할 거고 최선을 다할 거라고.”

전화를 끊고 섬으로 돌아가면서 어쩌면 리사와 나의 어긋남은 서로를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누구보다 상대를 이해하고 더 나아가 그런 점에서 슬프게도 서로를 믿고 있는 사이였다. (연재를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