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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전춘화 全春花

1987년 중국 길림성 화룡시 출생. 2023년 소설집 『야버즈』로 국내 작품활동 시작.

chunhua611@gmail.com

 

 

 

여기는 서울

 

 

차이나타운 반지하 원룸에 짐을 풀었을 때 저는 막막했습니다. 아버지가 넘겨준 바통을 들고 이어달리기를 하는 것처럼 차오른 숨을 고르며 한참을 방문 앞에 서 있었습니다. 불확실한 미래에 불안과 두려움조차 느낄 수 없었고 그저 자포자기의 마음뿐이었습니다. 며칠 동안 구직공고를 들여다보며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한 앳된 교포 청년이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지요. 제가 받은 재외동포 비자로는 단순노무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대학원 첫 학기 등록금만 지원해주기로 하고 쫓아내듯 보낸 서울 생활의 처음 일주일 동안 저는 유학 온 몇명의 친구들을 만나 그들의 생존 스킬을 물으며 수다를 떠는 것 외에 어찌할 방도를 찾지 못했습니다. 대학교 시절부터 아르바이트를 시작한다는 한국청년들은 식당에서 길고 어려운 메뉴들을 자연스럽게 읊으며 주문을 척척 받고 남은 닭갈비에 밥과 김, 그리고 계란을 섞어 맛있는 볶음밥도 야무지게 뚝딱 만들어주더군요.

서울에 온 둘째날 저는 고향 친구와 만나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으며 외국어로 된 음식 이름이 어려워 투덜거렸습니다. 서울에서 생활한 지 2년이 된 그 친구가 그러더군요.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서 재즈 음악을 깔아놓고 ‘마늘 기름과 해물을 넣은 매운 볶음면’이라고 써놓으면 ‘있어빌리티’가 가능하겠냐고요. 친구는 스파이시 씨푸드 알리오올리오가 얼마나 깔끔하고 입에 착 달라붙는 이름이냐며 면을 포크로 돌돌 말아 앙증맞게 벌린 입으로 흡입했습니다. 저는 포크를 연길에서 뭐라고 불렀는지도 잠시 잊은 채 메뉴판 속 낯선 이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답니다.

“연길에서는 다 중국어였잖아. 서울에 왔으니 이젠 영어에 적응해야 돼. 꼭 기억해. 스파이시 씨푸드 알리오올리오.”

서울 말투를 쓰는 친구의 모습은 꽤 근사해 보였습니다. 긴 수다를 이어가다 단어가 생각나지 않을 때마다 불쑥 튀어나오는 연변 사투리나 중국어도 어색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친구에게 아르바이트를 소개해달라고 했지만 마땅히 추천할 자리가 없는지 난감해하더군요. 중국인 여행객들이 붐볐던 호시절에는 명동이나 동대문쇼핑거리에 화장품 판매원이 언제나 필요했고 24시간 운영하는 마라탕 가게에서도 직원모집 공고가 항상 떠 있었다네요. 하지만 코로나 이후에 경기가 한풀 꺾여서 사장이 직접 응대하는 가게가 많아졌다고 하더군요. 한국청년들과 경쟁할 필요가 없는 중국인 가게에서 일하고 싶었지만 아버지는 한국인들과 함께 일해야 배울 게 많다며 단호히 반대하셨지요. 아버지의 고집에 스파이시 씨푸드 알리오올리오에 대한 거부감과 두려움이 등골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나름 일리가 있는 말이었기에 서울 올 때 아버지가 손수 챙겨주신 북한 마른낙지에 고량주 한모금을 들이켜며 밤늦게까지 이력서를 넣어보았습니다. 이건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용기였답니다. 대학원 입학 날짜가 한달 정도 남은 시점에 한국인들과 함께 일할 수 있으며 시간 조율도 가능한 일을 찾을 수 있을지 의문이었습니다. 구직 사이트에 시간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는 곳만 선별해 검색했더니 스무곳 정도가 나오더군요. 일일이 클릭해서 확인하지 않고 스무곳 모두 이력서를 발송했지요. 제발 저 중에 한두개만이라도 걸렸으면 싶은 일말의 희망을 품고 말입니다. 하지만 다음 날 연락해온 곳은 교육비 100만원을 우선 입금하라는 정체 모를 업체와 ‘진상 손님 없고 근무시간 노터치, 분위기 좋은 우아한 바’에서 온 이상한 문자 몇통이 전부였습니다. 그 이후로도 며칠간 이상한 전화와 문자가 자꾸 오길래 저는 아예 핸드폰을 꺼버리고 말았지요.

연락이 닿지 않던 며칠 동안 아버지는 걱정이 많으셨나봅니다. 늦은 밤 북한 마른낙지를 잘근잘근 씹으며 전화했더니 아버지는 대뜸 화부터 내셨지요. 그러고는 서울의 한 시민단체 회장님과 안면이 있어 부탁을 해놨으니 내일 당장 방문해보라며 주소를 불러주셨어요. 친분이 있는 한국인 회장님이 계시다니 의아했습니다. 아버지는 고작 두주 동안 여행객으로 한국에 잠깐 다녀간 경험밖에 없을 텐데 말이지요.

“거봐라, 아버지는 여행만 해도 회장님과 친분을 쌓잖니. 너도 겁먹지 말고 서울 생활 잘해봐라. 건투를 빈다.”

아버지가 한껏 뿌듯해 보였기 때문에 저는 영문도 모른 채 서울에 올 때 연길에서 급하게 맞춘 상복 같은 검정 양복을 꺼내 툭툭 턴 뒤 옷장 손잡이에 반듯하게 걸어두었습니다.

버스를 타고 아버지가 직접 가보았노라 자랑하셨던 신촌 번화가에 내려서 손차양을 한 채 쉼 없이 달리는 도로변 차들과 아스라하게 높은 건물들을 번갈아 쳐다보았습니다. 주소대로 잘 찾아갈 수 있을지 약간 긴장되었답니다. 얼마 못 가 괜한 걱정이었음에 안도하게 된 건 지도 앱이 이내 번화가를 비켜난 작은 골목으로 제 걸음을 이끌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번화가를 거쳐 와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래된 빌라와 꼬마 빌딩들이 짜리몽땅해 보여서 저는 왠지 반갑고 안심이 되었습니다. 가파르다고 하기엔 애매한 오르막길을 넘은 뒤에야 5층짜리 근린생활시설 건물 맨 꼭대기 층에 쓰여 있는 시민단체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단체명을 정확히 몰라 얼버무리셨기 때문에 저는 1층에 있는 미나네미용실과 김밥집, 2층의 독립서점, 3층의 김○○뇌연구소와 같은 간판 이름들을 천천히 입속말로 읊으며 올라갔습니다.

열려 있는 문을 노크하며 이번이 스물다섯살 제 인생의 첫 면접이라는 사실을 상기하고는 긴장감에 심장박동수가 빨라졌습니다. 20평쯤 되어 보이는 사무실은 옆 건물에 가로막힌 탓인지 우중충한 느낌이었습니다. 4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한국인 남성이 다가오기에 깍듯하게 허리 굽혀 인사를 하며 회장님이라고 호칭했더니 그분은 웃으며 자신을 사무국장이라고 소개했습니다. 회의실로 안내받아 딱딱한 장의자에 앉자마자 믹스커피와 둥굴레차 중에 어떤 것을 선호하냐는 여자 직원의 건조한 질문을 받고 엉겁결에 “아무거나 다 됩니다”라고 대답을 했지요. 둥굴레차 티백을 우려낸 따뜻한 종이컵을 두 손으로 감싸 쥔 저와 마주 앉은 사무국장님 사이에 서울에는 언제 왔는지, 입학 예정인 대학원은 어딘지 등 가벼운 안부 몇마디가 먼지처럼 부유하다가 본격적인 질문이 이어졌습니다.

“혹시 증조부나 증조모의 이주사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고 있나요?”

아무도 저에게 던져본 적 없는 질문이었습니다. 구체적으로,라는 단어를 힘주어 말했기 때문에 저는 사무국장님이 성의있는 긴 답변을 원한다고 이해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조선 역사가 흙탕물 속 낡은 수레바퀴처럼 힘겹게 굴러가던 배경하에 증조부는 만주땅까지 어떤 연유로 어느 코스로 어떤 교통방식으로 도착했는지부터 얼마나 굴곡진 시대를 통화했으며 그것이 우리 가문에 궁극적으로 어떠한 정신으로 이어졌다는 식의 구구절절한 서사를 스파이시 씨푸드 알리오올리오처럼 깔끔하게 설명해야 할 것 같은 압박감이 몰려왔습니다. 머릿속으로 북한 마른낙지를 씹을 때의 여유를 떠올리며 힘껏 고민해봐도 마땅히 이야기할 서사가 없었습니다. 학교에서 민족 역사를 배운 적이 없고 집에서도 아버지는 우리가 그저 아픈 역사의 가장 약한 고리, 남부여대의 후손일 뿐이라고 일축했기 때문에 저는 초침이 재깍재깍 움직이는 동안 무력감마저 느끼고 말았습니다. 남부여대의 후손에게 무슨 그럴듯한 서사가 있을까요. 그 시절엔 다들 배고파서 만주땅으로 이주한 것이고 먹고살고자 순응해서 살았을 뿐일 텐데요.

“모르겠습니다”라고 대답하면 갓 세차장을 나온 듯 반짝반짝 광이 나던 제 자존심에 흠집이 생길 것 같아 저어되었고, 게다가 서울에서 만났던 친구들이 ‘진정성과 센스, 예의’를 서울에서의 생존 스킬이라며 반복해서 알려줬던 탓에 머릿속이 복잡해지고 말았습니다.

“이주사에 대해 궁금해한 적도, 부모님으로부터 세세하게 들어본 적도 없습니다. 아마 조선족들이 가장 약한 부분이 민족사나 가족 이주사에 대한 질문일 것입니다.”

“왜죠?”

입가에 미소를 띨 듯 말 듯한 사무국장님은 이미 정답을 알면서 공연히 궁금해하는 표정인 것 같아서 일순간 묘하게 불쾌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중국은 소수민족 동화정책을 펼치고 있잖아요. 민족 역사와 이주사를 언급하는 건 소수민족의 생존에 불리하지 않을까요.”

저도 모르게 조금 언짢은 투로 대답하자마자 부끄럽고 미안한 감정이 종종걸음으로 제 마음을 훑고 지나는 것 같아 이내 사무국장님의 시선을 피해 둥굴레차 한모금을 마셨습니다. 사무국장님은 흥미롭다는 듯이 웃으면서 또 묻더군요. 왜 우리 민족 서로 돕기의 오랜 역사를 가진 시민단체에서 일할 생각을 하게 되었냐고요. 여기가 어떤 시민단체인지도 모르고 아버지의 성화에 등 떠밀려 왔다고 솔직히 말하며 머저리 인증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스스로의 선택이라고 하기엔 이미 그와 모순되는 대답을 했기에 어떻게든 이 상황을 잘 모면해보고 싶었지만 뇌는 기발한 아이디어나 설득력있는 언어가 바닥이 난 듯 버그 상태에 빠졌습니다.

“여기는…… 서울이니깐요.”

제가 생각해도 맹랑하고 애매한 답변이었습니다. 얼결에 입에서 튀어나왔기 때문에 저 또한 제 뇌에서 어떤 맥락으로 흘러나온 말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사무국장님이 행여 이 무슨 엉뚱한 소리냐 싶어 바투 질문한다면 말문이 막힐 듯싶었는데 다행히 “아, 그래요?”하곤 넘어가셨습니다.

사무국장님과 옆에 앉아 있던 직원에게 인사는 제대로 하고 나왔는지 기억나지 않을 만큼 부랴부랴 건물을 빠져나왔습니다. 바깥 공기를 마시며 정신을 차렸을 즈음에야 5층 계단을 엎어질 듯 걸어 내려왔다는 것을 알아차렸답니다. 아버지는 면접이 어땠냐고 꼬치꼬치 캐물으셨지만 저는 코대답을 하곤 이제부터 서울 생활에서의 모든 결정은 스스로 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최소한 이런 상황을 또 직면하게 될 때 부끄럽든 겁이 나든 그것이 온전히 제 스스로의 선택과 결단에 의한 결과물이면 덜 억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

 

시민단체에서의 일을 재빨리 잊고 다시 아르바이트를 찾아 나섰지만 여전히 녹록지 않았습니다. 중국어 초벌 번역을 한다는 친구에게 도움을 요청해봤지만 아직 한국식 외래어나 맞춤법이 익숙하지 않으니 최소한 1년 정도는 학교를 다니며 한국어를 익힌 후 시도해보라는 답변을 들었습니다. 연길에서 호기롭게 장전하고 온 에너지가 거의 고갈된 것 같아 고심 끝에 첫 학기 생활비까지만 지원해달라 사정하려고 아버지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더랬지요. 발신음이 두번도 들리기 전에 전화를 받은 아버지는 시민단체의 회장님께 다시 장문의 메일을 보냈더니 흔쾌히 일하라고 하셨다고, 그러니 월요일부터 바로 사무실로 가도 된다며 한껏 들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서울에서 새 출발을 하는 교포 아이가 한달 넘도록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지 못해 대림동 차이나타운의 반지하방에서 울고 있다며 기회를 달라고 사정하듯 구구절절 쓰고는 회장님과 어디서 어떻게 몇분이나 마주했는지 그 기억마저 모조리 상기시킨 뒤 나중에 서울에 들르면 중국술을 들고 인사하러 찾아가겠다며 마무리하는 아버지 특유의 연변식 일처리를 구사했을 것이 분명해 보였습니다. 아버지는 오래전부터 그렇게 살아오셨겠지만 서울에 오고 나니 그런 아버지가 새삼스럽게 촌스럽고 창피하게 느껴졌어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아버지, 제발, 하고 뒷말을 이으려는 제 태도가 아버지 눈엔 그저 피 끓는 청춘인 철없는 어린 딸의 얄팍한 자존심과 아직도 세상 험한 줄 모르는 투정으로 느껴졌겠지요. 살다보면 똥 밭에서 구를 각오 정도는 해야 한다는 아버지의 설득에 전 이게 정말 마지막 개입이길 바란다고 못박아버리고 말았네요.

 

사무국장님과의 두번째 눈맞춤과 인사는 어색하기 그지없었지만, 사무국장님은 종이컵에 믹스커피를 직접 타주시면서 그날 면접을 마치고 연락을 해볼 마음이 있었던 참에 잘됐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저는 그 말의 의미가 한국인의 미덕이라는 배려와 진정성 중에 어느 쪽에 해당할까 잠깐 생각해봤습니다. 사무국장님은 저에게 굳이 진정성을 보여줘야 할 입장은 아니니 배려가 맞겠다 싶더군요. 첫날은 한아름 간사님과 인사를 나누고 스프링으로 분철된 책 세권을 전달받았습니다. 초창기부터 정리해온 활동기록지라고 짧은 설명을 듣긴 했지만 받아보니 기록지의 무게에 당황스럽더라고요. 아버지, 제가 첫 페이지 ‘단체의 발족 배경’에서 어떤 사진을 보았는지 아십니까? 1990년대 연변의 어느 시골 초가집 온돌방에 앉아 오열하는 40대 조선족 부부의 모습이었습니다. 한중수교 후 산업연수생 제도로 많은 조선족들이 한국에 건너왔던 시기에 국가의 제도를 악용해 비자를 해결해준다며 감당하기 어려운 수수료를 받고 도망간 사기꾼들이 있었나봅니다. 이상한 일입니다. 오래전 아버지가 얼핏 이 사건에 관해 들려주셨을 때 우리 가족의 일이 아니었기에 무수하게 많은 불운했던 지난날의 이슈 하나 정도로만 알고 흘렸는데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 몇장의 생생한 사진과 세세한 사건개요, 사기 금액과 피해자 인원수까지 명확하게 기록된 눈앞의 활자를 보니 가슴이 먹먹해질 정도로 아팠습니다. 구체적인 역사기록을 읽는 건 처음이었습니다. 모금활동으로 모은 돈을 전달하고 피해규모를 조사하기 위해 직접 연변에 방문했던 일이 이 단체의 발족 배경이었습니다. 뒤 페이지로 넘어가자 짧은 체류기간 동안 비싼 비자 수수료를 갚지 못해 어쩔 수 없이 불법체류자가 된 한국 거주 조선족들의 어려움을 해결하고자 함께 모여 시위를 하거나, 일본 교포들과의 생생한 현장 인터뷰를 전달함으로써 모국과의 이해 간극을 메우고자 노력한 흔적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또 고려인마을에 거주하는 고려인들에게 생필품을 제공하는 등 민족돕기활동은 2000년대 이후로도 활발히 이어진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때의 기록에 사무국장만 다섯명이었던 걸로 보아 큰 단체였었나봅니다. 두번째 책부터는 더이상 조선족이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고려인들 위주의 지원활동을 이어오다가 마지막 기록지를 훑었을 때는 새터민들의 교류 모임을 운영하고 그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자격증 취득을 지원하거나 한국 생활에서 겪는 어려움을 인터뷰한 내용들이 담겨 있었습니다.

홀린 듯 모든 기록을 훑어보고 두꺼운 하드커버를 쉬이 덮지 못한 채 만지작거리고 있자니 외근을 다녀온 사무국장님이 무심히 묻더군요. “어때?”라고요. 여전히 면접 후유증이 남아 있었던 탓에 우물쩍하다가 제게 질문할 때 가능하시다면 더 구체적으로 해달라고 말했답니다. 저는 아직까지 상대방이 궁금해하는 포인트만 골라서 말하는 센스를 미처 장착하지 못했기에 대답을 잘하고 싶어질수록 더 구구절절 늘어놓는다는 걸 서울 생활 한달 만에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날 자정이 지나 창밖에 청소차가 쓰레기를 담아 가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잠들지 못하고 뒤척였습니다. 기록지에서 봤던 내용과 사진들이 오래된 필름처럼 머릿속에서 자동 생성되면서 이 단체가 30년의 민족사가 이어질 수 있도록 잘 버텨준 굴길처럼 느껴져서 벅찬 감동을 느꼈다가 그날 하루 목도했던 단체의 이미지와의 괴리감을 해석할 힘이 없어 착잡해졌습니다. 게다가 왜 조선족의 중요한 역사기록을 이제야 서울의 시민단체에서 우연히 봐야만 했는지에 대한 당혹감과 혼란스러운 마음이 며칠이 지나도 쉬이 가시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제가 시민단체에서 근무하기 시작한 시점부터 서빙보다 훨씬 의미있는 일을 하고 있다고 자랑스러워하시면서 통화할 때마다 그날 한 일에 대해 몹시 궁금해하셨지요. 단체에서의 첫 한달은 일을 배우느라 분주했습니다. 면접을 보던 날 사무국장님 옆에 무표정하게 앉아 있던 아름 간사님은 멀티플레이어였습니다. 하필이면 저와 동갑에 대학원 휴학생인 간사님은 MS오피스를 능수능란하게 다루고 매달 후원자들에게 보내는 온라인 활동보고서도 야무지게 작성했으며, 회계 일과 인터뷰까지 소화하는 데다가 매주 회의 때마다 활동기획이나 모금계획까지 고안해내 사무국장님을 설득했으니 말입니다. 제가 입사하고 나서 아름 간사님은 더 바빠진 듯 보였습니다. 인사를 나눈 첫날 간사님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제게 무엇부터 하고 싶으냐고 묻더군요. 저는 시키는 건 뭐든 할 각오는 되어 있었지만 선택권이 주어지니 당황하고 말았더랬지요.

“글쎄요. 뭐부터 하면 좋을까요. 쉬운 것부터 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어떤 일이 쉬울지는 본인이 더 잘 아실 테니 글쓰기가 편하면 소식지나 활동보고서 작성부터 배우시면 되고요, 계산에 밝으시면 회계 일부터 배우셔도 돼요. 저희는 워낙 작은 단체라 전문성이 필요할 만큼 크게 어려운 건 없거든요.”

제가 뭘 잘하는지 모르겠다며 뚱해 있자 아름 간사님은 한숨을 내쉬곤 그렇다면 영수증 처리부터 배우라고 했지요.

아름 간사님은 무뚝뚝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만큼 일을 야무지게 했기 때문에 사무국장님마저 아름 간사님을 의지하고 눈치 본다는 것을 저는 첫날부터 알아챘답니다. 사무국장님이 외부에서 활동한 뒤 지출영수증을 챙기지 않자 아름 간사님이 아무렇지 않게 짜증을 내는 모습도 여러번 봤었고요.

첫 두주간 저는 가르쳐준 대로 반복 학습을 통해 익힐 수 있는 일들은 쉽게 소화했지만 이내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습니다. 자잘한 일들이 익숙해지자 사무국장님으로부터 이 사회에서는 시민단체든 일반 직장이든 주체적이고 자발적으로 일해야 성장할 수 있다는 생존 이치를 전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건 제가 연길에서 감각해온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였습니다. 농사꾼이었던 할아버지가 매일 아침 밭일을 나갔던 것도 굳이 따지자면 주체적이고 자발적이었던 것이고 10년째 전통시장에서 건어물을 판매하는 어머니에게도 주체성과 자발성은 필요했을 테지 말입니다. 정작 이 단어들과 매칭이 되지 않는 건 시청의 말단공무원이었던 아버지였습니다. 매번 빨간 도장이 찍힌 지시가 당에서 내려올 때마다 아버지는 그대로 실행하면 되었을 테니깐요. 제 머릿속의 주체성과 자발성은 매일 당연하게 반복되는 일상에 성실함 정도만 덧입힌 형태인데 사무국장님이 말씀하신 건 실체를 알 수도 없고 감을 잡을 수도 없었습니다. 아마도…… 아마도 그건 동물원에 갇혀 있던 호랑이를 정글에 풀어놓고 눈앞에 보이지 않는 사냥물을 잡아 오라고 주문할 때 해당하는 야생적인 주체성이 아닐까요. 한국은 경쟁이 너무 치열하니 정글이 맞을 거라며 아버지는 허허 웃으셨는데 저는 처음으로 그동안 제가 안일하게 살아왔던 게 아닐까 자책을 하고 말았답니다.

언젠가 제가 한국의 자본주의에 적응하기 어렵다고 말했더니 아름 간사님이 머리를 갸우뚱하며 “중국도 자본주의체제 아닌가요?”라고 묻더군요. “아유, 그거야 뭐 대도시에나 해당하는 거고요. 워낙 땅덩어리가 넓다보니 제 고향까지는 자본주의가 미처 착륙을 못했네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했던 대답인데 간사님은 흥미롭다는 듯이 그럼 연변에서는 뭐가 발달했냐고 또 묻더라고요.

“송금경제요.”

“네? 그게 뭐예요?”

본능적으로 튀어나온 당황스러움을 미처 감추지 못한 간사님은 실례라도 한 듯 급히 죄송하다고 사과했지만 저는 사과할 일은 아니라고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어요. 서울에 오고 나서야, 그리고 간사님께 ‘송금경제’라는 용어를 꺼내고 나서야 저도 비로소 이게 맞나 하는 성찰을 하게 되었답니다. 순응하고 안일했던 우리 삶에는 경쟁력있는 브랜드나 기업이나 세계적인 석학이나 예술작품 하나 없었으니 주체적이고 자발적이 되라는 그 말이 저에겐 요통에 맞은 한방 침처럼 뼛속 깊이 저릿하게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와서 삶의 방식을 바꾸자니 양계장 속 닭 같던 자아가 갑자기 날개를 만들어 비상이라도 해야 할 것처럼 막막하고 좌절스럽고 무기력한 기분에 빠져들었습니다. 이 시궁창 같은 기분을 딛고 저는 냉장고 자석 메모지에 ‘주체성’이라는 단어를 빨간 펜으로 적어두고 매일 한국 포털사이트에서 조선족 기사 다섯개씩을 검색해 꼼꼼히 읽고 민족사와 한국 근현대사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서울의 장점 중 하나는 어떤 정보든 쉽게 얻을 수 있다는 점이었는데 주체성을 획득하는 방법을 검색했더니 유명한 유튜버가 주체성은 또렷한 정체성에서 비롯된다는 어느 사상가의 말을 인용하더라고요. 저는 옳거니 하며 빠르게 수긍하고는 제 자신을 역사와 사회의 맥락 속에서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게 되었습니다.

사무국장님은 연변 출신 간사가 입사했는데 정작 이 단체는 10년 전부터 재한조선족을 위한 지원활동은 자연스럽게 사라졌다며 혹시 후원자들이 공감할 만한 지원 프로그램이 있으면 언제든 제안해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름 간사님은 “중국동포는 딱히 지원이…… 글쎄 뭐가 필요할까요?”라고 물었습니다. 저는 6·25전쟁 때 조선족들이 중국군의 앞잡이가 되어 같은 동족에 총부리를 겨눴다는 표면적인 관점이 바뀔 수 있도록 참전군인의 가족들을 인터뷰한 책자를 제작해 발급하거나 중국동포들을 대상으로 우리 민족의 역사를 가르치는 야학을 개설하는 건 어떠냐고 제안했더랬지요.

“6·25를 한국 단체가 나서서 조선족 입장으로 해석하는 건 예민한 문제야. 어떤 취지인지는 알겠지만 영화씨가 한국 생활을 더 경험해보면서 한국 입장에서 한국전쟁 때 어떤 사건들이 있었는지를 배우고 이해하는 게 우선인 것 같아. 꼭 필요하다 싶으면 이건 국내에 있는 조선족 단체가 주체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인 것 같기도 하고.”

“조선족은 한국전쟁을 항미원조라고 하잖아요. 자발적으로 그 용어를 바꿔야 저희도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사무국장님의 말에 덩달아 한마디를 거드는 간사님의 표정에 이미 많은 시도를 해보며 맛문함과 분노까지 겪은 뒤 해탈의 경지에 이른 듯한 덤덤함이 언뜻 비쳤습니다. 간사님은 중국동포라거나 교포라고 표현하다가 사무국장님이 한번씩 주의를 주면 금세 조선족이라는 지칭으로 자연스럽게 돌아섰습니다. 저는 이들이 평소와 다르게 감정적으로 반응하고 있음을 알고는 크게 당황했습니다. 공격을 당하고 있다는 섭섭한 느낌까지 받았을 정도였으니깐요. 한국 근현대사를 공부하며 제가 이해할 수 있었던 부분은 그들에게 6·25전쟁 하면 떠오르는 구체적인 사건들이 있으며 아픔과 분노, 연민 같은 감정들이 자연스럽게 느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반면에 제 머릿속에는 항미원조 하면 연상되는 구체적인 사건과 감정들이 결여되어 있었습니다. 그저 자발적인 참전이라는 공식적인 발표와 달리 할아버지 세대가 복잡한 형세에서 암묵적으로 차출당했고 강력한 이념교육하에 선출당한 과거가 기록도 미미한 마당에 부정까지 당하는 것 같아 내심 속상했을 뿐입니다. 그러고 보니 학교에서 중국역사와 세계역사를 배우는 동안 늘 덤덤하고 무감정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몇년 동안 암기하고 요약하며 배웠던 역사지식들은 대입시험과 함께 기억 속에서 먼지처럼 날아갔고 깊은 감정으로 남은 역사기록은 시민단체에 와서 처음 본 조선족 부부의 오열하는 사진뿐이었으니깐요.

처음 서울에 발을 디뎠을 때는 언제나 그랬듯 먹고사는 문제를 걱정했더랬지요. 지금은 세끼 걱정은 없지만 사무국장님과 간사님의 섭섭한 반응을 마주한 이후로 그동안 어떻게 쌓아올렸는지 알 수 없는 견고한 자아가 매일 요동치듯 흔들립니다. 마치 썩은 이가 때가 되어 신경을 긁으며 흔들리듯 말입니다. 그럴수록 역사적 맥락 속에서 자아를 이해해보고 싶은 갈증도 더 커지고요. 사춘기 때보다 더 격렬한 이 혼란을 저는 어떻게든 잠재우기 위해 퇴근길 지하철역까지 걷는 동안만큼은 일부러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고 도보 오른쪽에 줄느런히 서 있는 간판 이름들을 속삭이듯 읽었습니다. 하필이면 첫 사회생활을 낯선 서울에서 시작해서, 또 하필이면 첫 직장이 시민단체라서 그런 것뿐이라고 위로도 해봤지만 대학원 생활까지 겸하면서 자아가 믹서기에 사정없이 갈리는 듯한 느낌을 받고 말았답니다.

 

*

 

사무국장님의 배려로 이틀은 대학원 수업을 듣고 사흘만 근무하기로 스케줄을 조율한 데 안도한 것도 잠시, 첫 수업부터 강의 내용을 이해하고 과제를 작성하는 것이 저에겐 버거웠습니다. 선배나 동기들이 과제물을 발표할 때면 저는 머리를 숙인 채 숨죽여 들으면서 니체 사상을 비판적 관점으로 들여다보고 지그문트 바우만의 이론을 확대해석하는 것에 위압감을 느끼고 말았답니다. 첫 학기를 마칠 즈음 제가 발표할 차례가 왔고 저는 거의 울먹이듯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교수님은 연변에서 왔다는 교포 학생의 처우를 배려해 발표 순서를 가장 마지막에 넣어주신 것인데 정작 저는 한학기 내내 수업을 듣고 지그문트 바우만의 책을 곱씹어 읽고도 책 내용을 이해하고 과제물을 작성하기엔 어려움이 많다는 깊은 낙심과 마주했을 뿐입니다. 저는 그때껏 학교에서 읽었던 책들의 모든 문장과 글귀를 단 한번도 의심해보거나 질문을 가져본 적이 없었습니다. 두꺼운 책은 저에게 죄다 교과서였습니다. 교과서란 모름지기 진리이며 그대로 수용하고 암기하고 요약해야 하는 것인데 말입니다. 발표 며칠 전부터 저는 모지리 같고 멍청이 같은 자신을 통탄하며 어떻게든 비판적으로 사고하며 저만의 관점을 글로 적어보려고 했지만 다섯달의 시간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나봅니다. 교수님께 아직은 어렵다고 낮은 목소리로 이실직고하고 감상문을 쓰는 것으로 대체과제를 받았는데 그날 저녁 함께 밥을 먹은 한국인 선배들이 그러더군요. 우리도 쉽지는 않다고, 그냥 하는 거라고. 창피해할까봐 위로해주려 하는 말인 것 같아 내심 감사하면서도 저는 그냥 하는 것조차 어렵다고 대답했습니다. J선배가 연변의 교육 커리큘럼을 묻더군요. 노자 공자 맹자 순자와 같은 자 돌림의 고대 철학과 맑스 레닌주의 모택동사상 등소평이론을 거론했더니 선배는 말없이 머리를 숙이고 남은 라면 국물을 들이켰습니다. 어떻게 말해주는 것이 도움이 될지 생각해보고 언제나 한 템포 늦게 대답하는 배려 깊은 선배인지라 저는 그다음 말을 기다렸지요.

“여기서는 이승만사상 박정희이론 이런 식으로 배우진 않지. 그렇게 배우면 난리 나지.”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기에 제 안에 오랫동안 흔들림 없이 굳건히 버티던 벽에 균열이 생기고 있음을 느끼며 당황하던 참에 옆에 있던 다른 선배가 이내 말을 돌렸습니다.

“고대 철학을 배우면서 비판적 사고방식을 키울 수도 있는 거잖아. 난 장자사상 좋던데.”

장자사상을 배워도 암기와 요약 위주라고, 비판적 사고방식을 제고하는 교육은 아니었다고 설명했더니 선배들은 이내 한국식 교육도 문제점이 많다며 이것저것 나열하더군요.

“그게 비판적 사고방식 아닌가요? 전 뭐가 문제인지도 몰랐던걸요.” 아, 그런가 하며 선배들은 뻘쭘한 듯 웃었습니다.

 

학교에서도 어떻게든 한국인 선배들과 어울리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아버지의 응원에 저는 학기 초부터 매번 선배들과의 식사 자리에 눈치껏 끼어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테이블 맨 끝 출입구 쪽에 가만히 앉아 있었답니다. 제가 어릴 적 아버지는 친구나 지인의 집을 방문할 때마다 저를 데리고 가셨지요. 그러곤 문 입구에서 과하다 싶을 정도로 매번 주의를 주셨어요. 우린 손님이라고, 주인이 아무리 편하게 대해줘도 신발 신고 다시 밖에 나올 때까지 우린 손님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경계를 늦추면 안 된다고. 그게 어느 집에 가서든 환대받는 첫번째 방법이라고 강조하셨지요. 처음엔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스스로를 내려놓으면서까지 타인의 감정을 너무 의식한다고 생각했으니깐요. 하지만 아버지는 커다란 두 손으로 제 어깨를 잡고 최대한 몸을 낮추어 제 눈을 똑바로 보면서 말씀하셨지요. 이건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라고요. 덕분에 전 손님 집 화장실을 사용할 때도 어렵게 양해를 구하고 볼일을 본 뒤에도 양변기 내림 버튼을 꼭 두번씩 누르고 사용한 슬리퍼도 다시 가지런히 놓았습니다. 주인이 말을 할 때는 그 내용이 이해할 수 없는 어른들의 관심사일지라도 얌전히 앉아 주인의 얼굴을 바라보며 경청하는 척을 하기도 했고요. 그 집을 나올 때는 쑥스러워도 환대에 감사하다는 인사를 또랑또랑하게 했기 때문에 주인들은 한결같이 자녀교육에 성공하셨다며 아버지를 칭찬했더랬지요. 저는 그때의 기억과 경험에 의존해 한국인 선배들과 함께 밥 먹는 테이블에서 손님이 되기로 마음먹었답니다.

처음에 그들은 점잖게 제 고향은 어딘지 물었어요. 연변이라고 하니 “만주?”라고 되묻는 사람도 있었고 윤동주 생가에 가봤다며 반색하는 분도 있었지요. 상하이와 베이징에 가봤냐며 제가 그 도시들에 대해 당연히 알 것이라 확신하고 더 자연스러운 대화가 이어지길 기대하는 선배도 있었고요. 전 상하이와 베이징에 가본 적이 없으며 해외에서 인권 이슈와 여행지로 유명한 티베트나 위구르에 대해서도 크게 관심이 없었어요. 접점을 찾지 못한 선배들은 멋쩍게 다시 그들의 수다로 돌아갔고 저는 한마디도 허투루 끼지 않았지만 그 대신 경청하며 열심히 리액션을 했답니다. 평소엔 말이든 태도든 늘 공손하던 분들이 취기가 돌면 흐트러지고 아무 말 대잔치를 벌이는 게 재미있어서 저도 술자리에 끝까지 남는 횟수가 늘게 되었고 그러다 자연스럽게 뒷정리 담당이 되었답니다. 어떤 선배는 제게 치킨 한조각을 건네주며 “넌 말은 거의 안 하면서 병아리처럼 졸래졸래 어쩜 이렇게 잘 따라다니냐?”라고 신기한 듯 묻기도 했고 서울 생활에 적응은 잘하고 있는지 따뜻하게 물어주는 선배도 있었지요.

어쩌다 한번씩 선배들의 이목이 제게 집중될 때면 준비하고 있던 질문들을 하나씩 풀었습니다. 이를테면 선배들은 언제부터 비판적 사고와 자기만의 관점을 배우게 되었는지를요. 농담을 정색하며 하는 습관이 있는 M선배가 대뜸 이 나라의 정치가 강제로 비판적 사고방식을 갖게 만든다면서 매일 밤 뉴스를 보다보면 비판적 사고방식이 저절로 생기게 될 것이라고 말했을 때 다른 선배들은 별 저항 없이 웃더군요. 전 선배들이 뉴스를 보며 비판적 사고방식을 배운다는 말이 내심 부러웠습니다. 제가 태어나 자란 곳에서는 매일 밤 일곱시면 거의 모든 채널에서 똑같은 공영 뉴스가 흘러나오는데 그걸 20년 이상을 보고 자랐다고 얘기했더니 갑자기 분위기가 숙연해지더군요. 평소와 다름없이 제 특유의 명랑한 목소리로 일상 수다를 떨듯 말했을 뿐인데 가라앉은 분위기에 몸 둘 바를 몰랐답니다. 같은 상황에도 제가 느끼는 감정의 결이 투박하거나 무디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저조차 문제의식을 갖지 못했던 성장배경에 선배들이 어슷비슷하게 느끼는 무언의 감정이 있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아챈 순간이었습니다.

 

선배들과 같은 식탁에 앉아 밥을 먹는 시간이 많아졌던 탓일까요. 어느 순간 저는 침묵하기보다 저에 대해 설명하고 싶은 욕심에 자주 입이 근질거렸습니다. 다행히 머릿속으로 스파이시 씨푸드 알리오올리오에 대한 긴장감을 늦추지 않았기 때문에 한학기가 거의 끝날 때까지 묵묵히 선배들의 대화를 듣고만 있었습니다. 선배들의 관심은 온통 미국이나 유럽 국가들의 정치와 교육, 그리고 무엇이든 더 성장하도록 이끄는 요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한국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을 많이 보이며 그다지 자랑스러워하지 않는 것 같아서 오히려 조국에 대해 근거 없는 자부심을 느끼는 제 모습이 바보스러워 곱씹어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J선배에게 왜 이토록 나라에 불만이 많냐고, 애국심은 없냐고 여쭤봤더니 선배가 제게 애국심이 뭐냐고 되묻더라고요. “국가를 사랑하는 마음”이라고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더니 국가란 무엇이냐고 끈질기게 묻더라고요. 떨떠름해 있는 제게 다른 선배들이 야유하며 연변에서 온 순수한 교포 후배에게 너의 저질스러운 사상을 물들이지 말라며 웃는데…… 그러게요, 국가란 무엇일까요. 나라에서 정의하는 국가의 개념과 스스로 생각하는 국가의 개념은 다를 수도 있고 달라도 된다는 걸 그제야 깨달은 저는 허망한 기분이 들었답니다. 한번쯤 해볼 수 있는 질문인데도 미처 거기까지 닿지 못한 저의 사고방식의 근원을 천천히 거슬러 올라가다가 저는 뒤늦게 그날 선배들에게서 느꼈던 숙연한 분위기가 무엇이었던지를 희미하게나마 알 것 같았습니다.

종강하던 날 선배들이 제가 식사 자리에 끼는 것을 자연스럽게 생각하고 장난스레 팔을 잡아당길 때 문득 우리 부모님 세대가 떠올랐습니다. 일찌감치 한국에 와서 3D산업에 종사했을 부모님들은 한국인들과 웃으며 수다를 떨고 같은 식탁에 앉아 밥을 먹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에 기분이 울적해지더군요. 부모님 세대는 한국인들의 식탁에 요리를 올려주고 그들이 먹고 마신 뒷자리를 깨끗하게 정리하거나 설거지를 했을 테니깐요. 그렇게 한국에서 늙어간 그들은 지금 똑같이 늙어갔을 한국인들의 간병인이 되어 있을 테고요. 조선족은 한국에 몇십년을 살아도 중화사상을 버리지 못하고 동화되지 않는다고 일갈했던 어떤 댓글이 생각나 저는 슬그머니 화가 났답니다. 지금의 저처럼 한국인 선배들의 꽁무니를 쫓아다니며 이야기를 듣고 마주 앉아 밥을 먹고 수다를 떠는 시간들이 쌓여야 마음이 열리고 뭐라도 바뀌지 않았겠냐고요. 떨쳐내지 못한 복잡한 기분은 맥주 한잔을 다 비우니 슬퍼지기까지 했습니다. 눈가가 촉촉해지길래 몰래 휴지로 닦아냈지만 그날따라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계속 흐르더군요. 옆에 앉아 있던 M선배가 “야, 너 울어?” 하며 깜짝 놀란 듯 큰 소리로 호들갑을 떨었기 때문에 일순간 정적이 흐르고 저는 그만 부끄러워지고 말았답니다. 마침 맞은편에 앉아 있던 P선배가 휴지 한장을 내밀면서 근데 왜 우는 거야? 궁금하긴 하다,라고 말했습니다. 다른 선배들이 ‘극 T’냐고 야유하는 사이 전 눈물을 뚝 멈추고 머리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여기는 서울”이라며 사무국장님께 맥락 없는 즉흥 답변을 했던 그날처럼 “고조할아버지가 만주에 건너갔으면 조선족, 러시아에 끌려갔으면 고려인, 일본에 강제징용당했으면 일본 교포, 남쪽에 남았으면 한국인, 북쪽에 건너갔다 돌아오면 새터민 아닙니까”라고 넋두리를 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세련된 스파이시 씨푸드 알리오올리오가 그동안 지켜주었던 절제가 술기운 탓인지 안드로메다로 멀리 도망간 뒤의 일이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이 일이 생각날 때마다 ‘이불 킥’을 합니다. 일찌감치 한국에 건너온 부모님 세대의 노고가 깃든 서사를 저의 알량한 연민에 가두려고 했던 것, 선조들이 겪었을 현대사의 질곡을 불평하듯 경솔하게 발언했던 건 제 내면의 방황이 밖으로 흘러넘쳐 추태로 변질된 탓인 듯해서요.

 

*

 

제가 시민단체에서 일한 지 여섯달이 흘러도 아름 간사님의 일은 줄지 않았습니다. 제가 보고서를 작성하면 아름 간사님은 한국에서 잘 사용하지 않는 문법이나 단어들을 일일이 표기하고 우리 단체의 성격과 맞지 않는 주장과 후원자들이 예민해할 만한 문구들에 모조리 빨간 펜으로 줄을 그었지요. 반복해서 수정을 받았지만 여전히 아름 간사님을 거치지 않고서는 보고서를 발행하기 어려울 정도로 저는 제자리걸음이었습니다. 간사님은 간혹 짜증을 내듯 언성을 높였다가 이내 배려심 넘치는 사람으로 돌아오기를 시계추처럼 반복했습니다. 영화 간사님께 짜증을 낸 건 아니고요, 그냥 상황이, 상황이 버거워서,라고 하며 슬며시 웃어주던 아름 간사님은 자신의 ‘본캐’는 상냥함으로 기억해달라며 농담도 했더랬지요. 그때 저는 한계를 느끼고 단체에 이토록 민폐가 될 거면 일을 그만두는 게 맞다는 결론에 닿았습니다. 아름 간사님이 두달만 더 근무하고 다음 학기에 복학할 거라 하셨을 때 결국 사무국장님께 제가 먼저 그만두겠다고 말해버리고 말았답니다. 제가 비운 자리에 한국인 신입 간사를 영입하면 두달이면 충분히 업무를 숙달할 수 있을 테니까요. 아버지와는 상의하지 않은 일입니다. 이 편지를 읽고 깜짝 놀라시거나 섭섭해하실지 모르겠지만, 아버지는 언제나 쉽게 포기하지 말고 버티라는 말씀을 해주시는 분이기 때문에 이 일에도 예외가 없을 것 같았습니다. 사무국장님은 두달 안에 더 성장할 수 있다는 의욕을 보여주면 될 일을 너무 쉽게 도망간다고 처음으로 저를 꾸중하셨습니다.

“이 정도에서 물러서면 나중엔 더 힘들어질 텐데.”

민폐를 끼쳐 죄송하다고 울먹이면서 어렵사리 한마디를 꺼내고 감정을 추스르고 있는데 양복 입은 노인이 손에 아메리카노 세잔을 들고 뜬금없이 나타나 막 입을 열려던 사무국장님의 말을 가로챘습니다.

“사람은 나서부터 허구한 날 똥오줌만 싸대니 원래 민폐야. 민폐 안 끼치고 어떻게 배우려 그래.”

사무사무국장님과 간사님이 이사장님이라며 인사를 하시길래 저도 허리를 폴더처럼 굽히는 동안 그분은 커피를 건네주셨습니다. 지나가는 길에 잠깐 들렀다가 단체가 잘 돌아가는 재미있는 꼴을 보게 됐다며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이 어려운 화법을 구사하시더군요.

“이 간사가 조선족 친구인가? 이 친구 아버지가 내게 장문의 메일을 썼던……?”

사무국장님이 그렇다며 맞장구를 치고 아름 간사님은 처음 듣는 얘기인지 눈치를 살피는 동안 저는 아버지가 말씀하셨던 회장님이 이사장님이었다는 사실에 어리둥절해졌습니다. 어렵사리 얻은 취직의 기회를 스스로 발로 차버리겠다는 발언을 하필 이사장님이 들으셨기에 슬그머니 두 손을 배 위에 모아 공손히 겹치고 벌 받듯 꼼짝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이사장님의 등장으로 사무실은 이내 어르신의 한 말씀을 듣는 차분한 분위기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이 친구 아버지가 말이야.”

이사장님은 분주한 오전에 아무렇지 않게 사적인 이야기를 술술 풀어놓기 시작하셨고 간사님은 “이사장님, 죄송한데 저는 오전에 마무리해야 할 업무가 있어서 타이핑하면서 들을게요!” 하곤 야무지게 자리에 착석했습니다. 저는 이사장님의 회상을 들으며 2년 전 그날 아버지와 이사장님의 만남을 머릿속에 그려볼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한국 여행을 마치기 이틀 전이었겠죠, 아마. 그때 제가 마침 방학이라 매일 집에서 책을 보고 있어서였는지 아버지는 하루에도 몇번씩 전화를 하셨지요. 영화야, 아버지가 지금 뭘 봤는 줄 아니? 첫 마디부터 숲속 탐험을 나온 개구쟁이 소년처럼 매번 들떠 있었던 아버지는 제게 그날의 날씨와 주위 풍경을 세세히 설명해주셨어요. 스스로 의식할 수 없을 만큼 자주 중국과 한국의 다른 점을 비교하시기도 했고요. 그날 정오 즈음에 아버지는 서울의 여름은 사면이 온통 빌딩으로 둘러싸인 탓인지 바람 한점 없이 찜통이라며 지친 목소리로 전화를 거셨어요. 점심 메뉴로 고기에 냉면을 드셨다며 연변 냉면과 한국 냉면의 차이점을 열거하시기도 했고요. 한국 냉면이 종류가 참 많다는 설명도 보태면서 10년 전 북쪽에 여행 갔을 때 먹어봤던 평양냉면 얘기까지 하던 중에 “어! 영화야. 잠깐 끊을게” 하곤 급작스럽게 전화를 끊으셨지요. 그리고 저녁 즈음에 다시 온 전화에서는 그날 오후에 있었던 일에 대해 아무 언급이 없으셨습니다. 그 이후에도 들은 적이 없어 기억 속 공백이었던 그 시간을 저는 회장님의 회상을 들으며 조심스럽게 상상해볼 수 있었습니다.

서울의 어느 길거리에서 구매한 검정 미니 선풍기를 목에 건 아버지는 최대한 여행객 티를 내려고 챙이 넓은 휴양지 모자를 눌러쓰고 썬글라스까지 착용한 채 저와 통화하며 동료들과 광장까지 걸어갔을 테지요. 연길의 여름은 건조하게 덥지만 송골송골 땀이 난 이마를 이따금씩 여름 바람이 시원하게 훑고 갈 때가 있어 견딜 만했습니다. 아버지는 고향의 여름과 달리 찌물쿠기만 한 그날의 날씨에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광장에서 앉을 곳을 찾아 쉬고 가기로 마음을 먹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러다 우연히 넓은 광장의 반 이상을 차지한 채 현수막을 내걸고 홍보 전단지를 나눠주는 여러 시민단체들을 보았을 것이고요. 연길에서는 한번도 본 적 없는 광경이기에 아버지는 홀리듯 걸어가 자라목을 빼고 여러 부스를 돌며 책과 영상으로 제작된 단체 활동자료들을 구경했을 테지요. 십시일반의 마음으로 후원자가 되어달라며 내미는 후원신청서에 슬그머니 다른 부스로 걸음을 옮기지 않았을까요.

그러다 아버지는 별다른 홍보 없이 나이 많은 어르신 한명과 젊은 남자만 태연하게 앉아 있는 맨 끝 부스를 발견했겠지요. 어르신은 아버지처럼 썬글라스를 착용하고 휴양지에서나 볼 법한, 한껏 뒤로 젖힌 스윙체어에 몸을 기대고 부채질을 하고 계셨고 지금의 사무국장님으로 유추되는 젊은 남자도 다른 부스들을 응시하며 구경을 하고 있었겠지요. 젊은 남자는 먼저 다가온 아버지에게 깍듯이 인사하곤 단체를 간단히 소개하면서 활동책자를 내밀었을 테고요. 그 책자 마지막에는 후원신청서가 반듯하고 자연스럽게 끼어 있었을 겁니다. 이사장님은 아버지가 첫 페이지를 펼치자마자 낯선 부부가 오열하는 사진을 보고는 깜짝 놀란 듯 썬글라스를 벗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곤 젊은 남자에게 이 사람들 조선족이냐고 물었다지요. 젊은 남자는 아무 경계심 없이 튀어나온 아버지의 당황한 말투에 감을 잡고는 그 사건에 대해 세세히 설명을 했고 아버지는 머리를 끄덕이며 열심히 듣다가 스스로를 ‘연길에서 온 조선족 공무원’이라고 자랑스럽게 소개하셨고요. 뒤늦게 손을 내밀어 젊은 남자에게 악수를 청하고 이사장님과도 축축한 손바닥으로 끈적한 악수를 나눈 아버지는 작은 부스를 둘러싼 활동 사진들을 발견하고는 쪼그리고 앉아 한장 한장 유심히 살펴보았지요. 땡볕에 땀이 뺨을 타고 흘러내려서 이사장님이 손수건을 내밀었지만 아버지는 괜찮다며 손으로 대충 땀을 닦아내셨다네요. 마지막 사진까지 다 보고 난 뒤 아버지는 모자를 벗고 납작하게 붙은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여 성기게 하고는 지갑에 있는 한화를 모조리 꺼내 두 손으로 공손히 젊은 남자에게 드렸다지요. “동포들을 위해 노고가 많으십니다”라는 한마디와 함께 말이죠.

제가 봤던 그 사진을 아버지도 봤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습니다. 뒤늦게 기억을 돌려보니 아버지는 한국 여행을 다녀온 뒤 제게 서울의 골목서점에서 우연히 문화대혁명 때 조선족들이 핍박당하는 사진을 담은 책을 발견했다며 빨간 표지의 책을 몰래 보여준 적이 있었네요. 얼마 뒤 아버지가 제게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에서 사는 건 어때,라고 말했을 때 저는 온 가족이 이민이라도 가겠다는 줄 알았습니다. 딱히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아서 부모님도 같이 가느냐고 되물었더니 아버지는 우리야 여기서 살다 죽어야지, 우리 말고 너만,이라고 단호하게 선을 그으셨지요. 아버지가 바깥세상으로 저를 힘껏 밀쳐내려는 듯한 느낌을 받았지만 왜냐고 더 묻지 않았습니다. 당장 코앞의 미래도 아니었고 아버지가 한국에 여행을 다녀온 뒤라 즉흥적으로 한 말이기를 내심 바랐으니깐요.

“내일이면 연길에 돌아간다며 나중에 연락하겠다고 하길래 내 명함을 줬더니 딸내미 구직 때문에 연락 올 줄은 꿈에도 몰랐지. 가만있자…… 한데 공무원이면 당원 아니여? 사회주의자인가?”

잠깐 아버지의 서울행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며 눈앞의 긴장감을 잊었던 저는 사회주의자라는 말에 움찔 놀라 헛기침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 동네야 뭐 워낙 다들 사회주의자니까 아버지의 사상이 어떤지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대답하기 곤란하면 안 해도 돼.”

이사장님이 안심을 시켜주셨지만 제가 당황한 이유는 아버지가 한번도 사회주의자라고 생각해본 적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회주의 이론을 달달 암기하고 필기시험과 면접에 합격해 당원이 된 아버지는 사회주의자가 맞을까요. 당원이어야만 정부기관이든 기업체에서든 근무할 수 있기 때문에 무늬만 사회주의자라고 이사장님께 설명드리려고 했습니다만, 아버지는 매일 일곱시 뉴스를 열혈 시청하시기 때문에 사회주의자가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아버지의 일상은 사회주의자와 무관하기 때문에 또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무엇보다 아버지는 사회주의 이론은 그저 통치 수단임을 자각하고 공산주의의 도래는 방귀처럼 썩은 냄새만 진동하는 허상이라고 비판했기 때문에 도저히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단 한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면 아버지도 저도 국가의 역사에 일말의 감정이입을 하지 않고 방관만 하며 주체적이지 않은 인민의 삶을 성실히 영위해나가는 사람들이라는 점일 것입니다. 저는 결국 이사장님께 아버지가 ‘무늬만 사회주의자’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아버지의 입장을 직접 들어보지 않고 제멋대로 해석을 한 데 대해 뭐라 하실지 모르겠지만 이건 그동안 옆에서 아버지의 삶을 지켜본 딸의 평가랍니다.

연길에 살고 계시는 아버지는 누군가에게 “사회주의자인가?”라는 정치적 질문을 들어본 적이 있었으려나 모르겠습니다. 서울에선 누군가 어떤 식의 질문을 하든 연길에서 들을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입니다. 그 질문들 때문에 저는 의도치 않게 고향에서의 삶을 재해석하게 되고 저의 ‘저 됨’에 대해 반추해보게 됩니다.

이사장님은 그날 점심식사를 하고 가셨습니다. 사무국장님은 이미 n번 들은 얘기들인지 초반에는 적당히 추임새를 넣으시다가 핸드폰을 들여다보셨고 처음 들어보는 저만 연신 머리를 끄덕이며 계속 듣게 되었지요. 많은 노인이 그러하듯 내 인생 얘기는 책 한권으로는 부족하다는 말씀으로 시작해 1950년대에 태어나 만주 명동촌에서 자랐고 간신히 고향으로 돌아온 이야기부터 이전 날 동포들이 겪은 참상을 생생하게 증언하는 이사장님의 얘기를 노곤하게 듣다보니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이사장님은 격변했던 시대와 사회의 흐름을 개인사와 자연스럽게 엮어서 그분의 관점으로 말씀하시는 분이라는 걸요. 이런 이야기를 저는 할아버지에게서든 아버지에게서든 어떤 어르신에게서도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시대정신과 정치가 우리와 무관한 것처럼 굴어야만 했고 겨우 개인인 우리가 국가에 얼마나 영향을 줄 수 있는지를 감히 캐물을 수도 없었고 주어진 삶을 침묵하며 묵묵히 사는 일이 도덕인 줄로 알았으니까요.

사무국장님의 손에서 주문서를 기어코 빼앗아 계산을 마친 이사장님은 김밥집을 나서면서 제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한국에 온 걸 환영한다. 사무국장님 말씀 잘 듣고 뒤로 뺄 생각 마라.”

이사장님이 국회의원처럼 제 손을 꽉 잡고 요란하게 흔들었기 때문에 저는 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가 피식 웃고 말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저는 서울에 와서 단 한번도 누군가에게 환대받을 거라는 기대를 해본 적이 없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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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의 생활도 어언 1년을 맞았습니다. 처음엔 매일 아버지와 통화하며 투명하게 일상을 재잘재잘 말하던 딸이 서서히 연락이 뜸해지고 어느 순간부터 자주 코대답을 하는 것에 아버지는 이해한다고 하시면서도 어쩔 수 없이 섭섭했을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아름 간사님의 부재가 커서 첫 한달 동안 저는 매일 불안함을 친구 삼아 홀로 사무실에 앉아 있었습니다. 주체적으로, 자발적으로 뭔가를 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초조해지는 날도 있었고요. 한국인 고등학생들이 학교 과제라며 찾아와 시민단체의 방향성이나 저의 업무에 대해, 그리고 조선족이라는 아이덴티티에 대해 질문했던 날에는 제가 간사로서 적절한 답변을 하고 있는지 몰라 몰려드는 의구심을 손에 땀을 쥐고 떨쳐내야만 했답니다. 대학원 동기가 넌 졸업하면 최종학력이 서울 소재 대학원에 중국어도 유창하고 아르바이트도 사무직이니 이 정도면 한국청년들이 오히려 부러워할 것 같다고 웃으며 뼈있는 말을 한 이후로 저는 누구 앞에서도 힘들다는 내색을 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중입니다. 각자의 힘듦은 다르겠지만 동기의 말 한마디에 정신이 번쩍 들면서 이 서울에서 손님이어야 하는 제 위치를 다시 한번 되새김하게 되었습니다.

선배들의 권유로 매일 밤 아홉시 뉴스를 시청하기 시작한 지도 벌써 반년이 흘렀습니다. 선배들의 말이 맞았던 것 같습니다. 나만의 관점과 비판의식은 반년 만에 큰 노력 없이도 의식 속에 자리 잡더군요. 적나라하고 비극적인 내용조차 아무렇지 않게 경쟁하듯 자극적으로 쏟아내는 뉴스 화면을 쳐다보며 저는 한국에 계신 삼촌이 왜 한국 뉴스와 중국 뉴스 모두 과유불급이라 말씀하셨는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체감상 서울의 일상은 살아볼 만한 것인데 뉴스를 보면 아주 많이 불안하게 느껴지고, 연길에서의 일상은 대단히 풍족하지 않은데도 뉴스를 보면 직접 경험해본 적 없는 중국의 부강함을 확신하며 안도하게 되니까요.

선배들은 그날의 일을 까맣게 잊은 듯 예전과 다름없이 수업이 끝난 후 “어이, 영화! 같이 밥 먹을 거야?” 하며 저를 찾았습니다. 호프집에 몇번 따라다니자 선배들은 삐쩍 마른 제가 주량이 세다고 깜짝 놀라더군요. 동북의 겨울은 몹시 추운데 백주를 마시면 몸이 이내 따뜻해지니 추운 겨울이면 아버지와 마주 앉아 도수 높은 고량주 한두잔에 북한 마른낙지를 뜯어 먹었다는 얘기를 선배들에게 들려주었습니다. 그들은 이내 눈이 동그래지면서 묻더라고요. 왜 북한 마른낙지를 먹냐고요. 그거야 연변은 접경지역이라 북한과 가까운데다 중국과는 무역 교류를 하니 싸고 질 좋은 북한 마른낙지가 술안주로 인기가 좋아서 그렇다고 대답했지요. 아버지에게 인편으로 북한 마른낙지를 부탁한 것도 이 때문이었습니다. 고량주는 차이나타운의 중국 마트에서 살 수 있으니 선배들에게 연변식 술과 안주를 맛보게 하고 싶었습니다. 구구절절 자꾸 설명하는 쪽이 아쉬운 쪽이라는데 현재로서 저는 그래야만 할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는 이를 ‘셀프 어필’이라고 고급지게 표현하기도 한답니다. 구질구질하다고 느끼던 감정에 ‘셀프 어필’이라는 외래어를 코팅하니 어쩐지 괜찮아진 것 같기도 합니다. 사람과 사람이 얼굴을 맞대고 밥을 먹는 것만으로 서로를 기분 좋게 알아갈 수 있다는 사실이 저로서는 안도할 만하고 감사한 일입니다.

요즘의 전 일찌감치 한국에 나온 친구들과 지인에게 지나가는 말처럼 처음 마주한 서울은 어땠냐고 묻게 됩니다. 그들도 저처럼 지나온 날들과 연결점을 찾을 수 없는 낯선 서울에서의 삶이 불빛 한점 없는 어두운 골목을 걷듯 혼란스러웠는지 궁금했거든요. 그들의 입에서 들은 각자의 서울은 모두 달라서 마치 만화경 같았습니다. 서울의 한 모퉁이에 고정된 듯 오래 머문 사람에게는 그 자리에서만 보이는 불변하는 서울의 기하학적인 무늬가 있나봅니다. 누군가는 연변에서 살아왔던 모습 그대로를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는 듯했고 또 누군가는 조국과 모국의 상이한 모습을 시소의 양쪽 끝에 올려놓고 그 격차 앞에 분열되지도, 그것을 외면하지도 않기 위해 모질음을 쓰고 있었고요, 또 누군가는 이전의 삶을 힘껏 부인하며 서울의 모습을 배워가고 닮아가고 있었습니다. 친구들이 서울 생활 중에 그들을 차별하거나 아프게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줄 때 저는 제 주위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씩 떠올려보다가 이들은 저를 선대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에 새삼 놀랐습니다. 이들은 제가 옆에 머물도록 자리를 내어줬고 얼굴을 마주하고 같이 밥을 먹으며 잠깐이지만 제 이야기에 깊이 귀를 기울이기도 했고요. 무엇보다 서울에서 살아가는 법을 무심한 듯 디테일하게 알려주는 사람들이었으니까요. 제가 지금 괴로워하며 겪어내고 있는 자아와의 싸움을 같은 고향 친구들이 이해 못하는 것에 어리둥절해한 적도 있었는데 어느 한 친구가 그러더군요.

“부러워. 에너지가 남아돌아야 그런 고민이라도 해보지.”

 

저는 서울에서 잘 지내고 있습니다. 배고프지 않고 따뜻하게 누울 곳이 있으며 선대하는 사람들이 주위에 있고 자아성찰을 할 수 있는 에너지와 저를 둘러싼 환경을 탐색할 의욕이 아직 남아 있으니까요. 서울이 만화경처럼 복잡한 세상이라면 저는 아주 천천히 셔터를 계속 눌러 기하학적인 그 무늬들을 남김없이 오래도록 응시할 것입니다. 서울이 회전무대처럼 느껴져서 멀미를 느끼는 날도 있지만 줄을 꼭 잡고 그 속도를 견뎌보려 합니다. 연변에서 민족교육이 곧 사라진다는 소식을 공문으로 확인하고 제게 알려주던 아버지의 무덤덤한 목소리를 전화기 너머로 들으며 아버지는 이미 몇해 전부터 낌새를 채고 저를 힘껏 이곳으로 등 떠밀어 보낸 게 아닐까 싶었습니다.

며칠 전 아버지에게 장문의 편지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 들어 타이핑을 시작했는데 이렇게 길어질 줄은 몰랐습니다. 1년 사이에 아버지에게 요즘의 저를 설명하기 위해 장문의 편지가 필요해질 줄은 예상도 못한 일입니다만, 이곳에서 저는 혼란 속에서 과거와 연결되기도 하고 주위에 감응하여 확장되기도 하며, 가끔은 볼품없이 축소되고 부정당하는 자아를 견디며 살아가는 중입니다.

아버지, 여기는 서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