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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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최민우 崔旻宇

2012년 『자음과모음』 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소설집 『머리검은토끼와 그 밖의 이야기들』, 장편소설 『점선의 영역』 『발목 깊이의 바다』 등이 있음.

daftsounds@gmail.com

 

 

 

단순한 문제

 

 

고속도로 휴게소를 삼 킬로미터 남짓 앞두고 박경자는 운전 중 딴생각에 빠져들었다. 아직 녹색으로 울창한 나무들을 보며 가을이 한창인데 어째서 쟤들은 아직도 저런가, 하다가 문득 운전석 왼쪽을 보니 반대편 나무들은 노랗고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마치 도로에 가로막혀 단풍이 건너지 못한 듯했다. 이것도 기후변화 때문인가…… 그때 대형 트레일러트럭이 경자가 모는 하얀색 세단 옆을 무서운 속도로 스쳐 지나갔다. 어느새 차선 한쪽으로 차를 바짝 붙인 채 가고 있었던 것이다. 뺨을 때리는 듯한 경적 소리에 뒤이어 트럭이 일으킨 진동으로 차체가 흔들렸다. 경자는 기겁하여 브레이크 페달을 밟아 차를 세우려다 마지막 순간 간신히 판단력을 회복하고 발을 떼었다.

몇분 뒤 휴게소에 차를 세운 경자는 운전대를 붙잡은 채 숨을 골랐다. 떨림이 조금 가라앉자 시동을 끄고 차에서 나와 휴게소 야외 벤치에 앉아 신선하고 싸늘한 아침 공기를 마시며 심호흡을 했다. 집에서 일찍 나선 덕에 학술대회장에 도착하기까지는 시간 여유가 있었다.

만약 그대로 브레이크를 밟았다면 어떻게 됐을지 상상하자 경자는 오싹해졌다. 요즘 들어 이렇게 뭔가에 홀린 듯 멍해질 때가 있었다. 갑자기 떠오른 이상한 상념에 몰두하다가 돌연 마개가 퐁 빠지듯 넋이 나가고, 그러다 퍼뜩 정신을 차리곤 했다. 아니, 치매는 아니었다. 기억에는 문제가 없었다. 다만 강의 중에 말을 멈춘다거나, 대화의 맥락을 놓친다거나, 밑도 끝도 없는 생각 속에서 허우적대다 중요한 전화를 못 받는 일이 가끔 일어날 뿐이었다.

하지만 운전 중에 이런 건 처음이었다.

같은 과 장교수가 거봐요, 내가 진작 상담이든 검사든 받아보시라고 그랬지,라며 의기양양해할 모습이 눈에 선했다. 중증의 건강염려증자인 장교수는 병과 질환에 대해서라면 의사와 토론을 붙여도 될 정도였지만 소금과 설탕이라면 사족을 못 썼고, 그로 인한 죄책감을 온갖 영양제로 해소했다. 결국 눈에 보이지 않는 게 두려워서 그러는 것이라고, 경자는 장교수에 대해 생각하곤 했다. 나트륨도 당류도 영양제 성분도 사랑이나 미움과 마찬가지로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매달리는 삶이란 떨쳐지지 않는 의심과 불안을 지고 다니는 일이다…… 경자는 한숨을 크게 한번 쉬고는 벤치에서 일어나 주차장으로 돌아가서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었다.

 

지역 국립대학에서 열린 추계 학술대회에서 두번째 발표자로 나선 경자는 1970년대 중반에 활동했던 전화영이라는 소설가의 유일한 장편에 대해 준비 중인 논문을 요약하여 발표했다. 전화영은 반짝 인기를 누리다 금세 잊히고 만 작가로, 그녀의 작품 역시 통속소설로 분류되어 오랫동안 학술적으로 논외의 위치에 있었지만 최근 경자를 비롯한 일부 연구자들이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경자의 주장은 전화영의 작품이 통속소설이라는 명백한 한계가 있음에도 산업화와 도시화 속 인간의 정동을 멜로드라마의 플롯으로 추적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가치가 충분하다는 것이었다. 경청과 무관심 사이에서 토론과 질의응답이 어수선하게 진행되는 동안 경자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서 있다가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오전 세션이 끝나고 참석자들이 교수회관으로 이동했다. 식사를 주문하고 기다리는 동안 경자는 아는 사람들과 안부를 나누었고 아는 사람들이 소개하는 모르는 사람들과도 인사했다. 경자의 옆자리에 앉은 젊은 남자가 친근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전화영의 소설을 읽어보고 싶은데 어디서 구할 수 있는지 경자에게 물었다. 경자는 웬만한 도서관에는 없을 거라면서 이름과 메일주소를 알려주면 PDF 파일을 보내주겠다고 했다.

식사 중에는 주로 자리에 없는 사람들의 근황이 오갔다. 경자도 안면이 있는 모 사립대 영문과 교수가 최근 공분을 사고 있는 사이비 종교의 신도라는 사실이 탄로 나서 학교가 발칵 뒤집힌 모양이었다. 와인 사업에 투자했던 다른 모 교수는 막대한 빚을 졌고, 쇼핑몰 부지에 ‘알박기’를 시도했던 또다른 모 교수는 승소해서 쏠쏠한 보상금을 챙겼다고 했다.

경자는 갈비탕에서 당면을 젓가락으로 집어 호로록 넘겼다. 이제 경자는 모모 교수들의 인생사 희로애락을 듣기만 했다. 사실 잘 듣지도 않았다. 남의 얘기는 질색이었다. 작년에 아들이 명예훼손 사건에 휘말리고 난 뒤로 경자는 뒷담화 자체에 정이 뚝 떨어졌다.

“박선생님께서는 이쪽이 처음이라 그러셨지요?”

경자의 맞은편에 앉은 윤교수가 물었다. 이번 학술대회를 주최한 국문과 학과장으로, 내년이 정년이었으며 운동으로 다진 체구는 군살 없이 탄탄했다. 다만 가는귀가 좀 먹어서 말하는 쪽이나 듣는 쪽이나 언성을 조금씩 높여야 대화가 순조로웠다. 경자가 처음이라고 대답하자 윤교수가 그렇다면 혹시 내일 특별한 스케줄이 있는지 물었다. 스케줄은 없었다. 수업이 있었지만 휴강 공지를 해두었다.

“잘됐네요. 그럼 뒤풀이 참석하신 다음에 하룻밤 주무시고 나서 이 부근 쭉 돌아본 다음 올라가시면 어떻습니까? 여기가 작긴 해도 볼 것이 아주 없지는 않습니다.” 경자가 선뜻 대답하지 못하자 윤교수가 말을 이었다. “제가 아는 숙소가 있는데, 전망이 끝내줍니다. 숙박비는 지원 못해드려도 좋은 방은 잡아드릴 수 있어요. 그런데 박경자 선생, 정말 그, 전화영이를 계속 연구할 생각이십니까?”

윤교수의 우렁찬 질문에 다른 식탁에 앉아 있던 사람들까지 고개를 돌려 경자 쪽을 바라보았다. 경자는 미소를 흐트러뜨리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하며 밝게 대답했다. “혹시 좋은 팁이라도 주시려고요? 그럼 저야 영광이죠!”

“아이고, 제가 뭘 아는 게 있다고 팁씩이나…… 팁은 식당 가서 주는 거지. 그냥 달랑 장편 하나로 연구할 거리가 많을까 싶어서 쓸데없이 우려 좀 했습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오후 세션에서 다른 사람들의 발표를 듣는 내내 경자의 귓가에 달랑,이라는 단어가 산사의 범종처럼 뎅뎅 울렸다. 그 말이 핵심을 찔렀기 때문에 더 속이 상했다. 전화영은 유명 작가도 다작 작가도 아니었으며, 문학 인생의 대부분을 신문과 잡지에 기고한 잡문으로 연명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달랑,이라니. 꼭두새벽부터 아등바등 차를 끌고 오다가 목숨까지 위협받은 사람이 들어야 할 말은 아니었다. 아침의 일이 아직까지도 경자의 머릿속에 맴돌았고, 죽음을 한끝 차로 모면했다고 생각하면 기분이 묘했다. 사실은 그때 사고가 나서 죽어버린 건데 그걸 모른 채 저세상으로 건너와서 여기 앉아 있는 건가 싶기도 했다. 저세상으로 건너오다. 모순되지만 정확한 표현 같았다. 저기 연단에 서서 문학이 혐오에 대처하는 양상을 논하고 있는 발표자도 실은 제가 죽은 줄 모르는 유령일 수 있는 것이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오늘 집에 돌아갈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졌다. 가다보면 밤이 되는데, 또 운전 중에 정신을 빼놓기라도 하면…… 차라리 하룻밤 자고 말짱한 정신으로 출발하는 편이 나을 듯했다.

학술대회가 끝난 뒤 경자는 윤교수에게 숙소 이름을 물어본 다음 몸이 좋지 않아 뒤풀이에는 참석하기 어렵겠다고, 감정을 슬쩍 얹어 큰 소리로 양해를 구했다. 윤교수는 다 이해한다는 듯 온화한 미소를 띠며 그런가요, 아쉽네요, 하고는 잘 쉬다 가시라고, 얘기를 해둘 테니 가서 자기 이름을 대라고 고래고래 대답했다.

 

경자가 내비게이션을 따라 도착한 숙소는 국도 갈림길에서 십여분쯤 들어가면 나오는 리조트 스타일의 호텔이었다. 지은 지 얼마 안 된 신축 건물로 조식 뷔페를 겸하는 레스토랑과 수영장, 헬스장에 편의점도 들어와 있었다. 체크인 때 윤교수의 이름을 대자 호텔 직원은 키보드를 다시 두드린 뒤 산 전망 객실로 바꿔드렸다며 경자에게 카드키를 건넸다.

산 전망이라지만 굽이굽이 실루엣만 보이는 산들은 멀리 떨어져 있었다. 창문 아래 보이는 작은 숲에 조성된 산책로를 투숙객 대여섯명이 느긋이 걸어 다녔다. 숲은 대체로 초록색이었고 시든 갈색이 군데군데 섞여 있었다. 시간이 지나자 수영장에 물이 차듯 하늘이 어두워져갔다. 산책로의 가로등이 하나둘 켜졌다.

경자는 남편에게 하루 자고 가겠다고 문자를 보낸 다음 욕실로 들어갔다. 샤워를 마치고 나와 휴대전화를 확인해보니 메시지가 와 있었다. 남편이 아니라 교환학생으로 캐나다에 가 있는 아들 진우가 보낸 메시지였다. 그냥 생각나서 보냈다는 짧은 문장 아래 밴쿠버에서 사귄 친구들과 찍은 사진이 첨부되어 있었다. 진우는 스웨터와 청바지 차림으로 친구들과 소파에 앉아 스톡이미지 모델처럼 가식적으로 웃고 있었다.

일년 전 이맘때쯤 진우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한 사람은 ‘해빈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게임방송 전문 여성 스트리머였다. 이른바 훈수, 즉 시청자가 게임 진행에 간섭하는 행동을 제지하다가 진우를 비롯한 몇몇을 강퇴시켰는데, 그 과정에서 스트리머의 언사에 심사가 뒤틀린 사람들이 해빈이의 소셜미디어 계정에 악의적인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보내기 시작한 것이 사건의 발단이었다. 경자의 변호사 말로는 대여섯명 정도가 한꺼번에 고소를 당한 듯했다.

합의가 비교적 순조롭게 이뤄져서 진우는 올해 초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기소유예는 이런 종류의 사건에서 받을 수 있는 가장 관대한 처분으로, 전과기록이 남지 않기 때문에 진우가 앞으로의 인생에서 이번 일 때문에 받을 법적인 불이익은 없었다. 변호사는 재판까지 갔다면 위험할 뻔했다면서 합의에 이르지 못한 피고소인도 있었는데 그쪽은 아마 실형을 피하기 어려울 거라고 했다. 변호사가 자기 수완을 자랑하느라 좀 젠체하며 말하기는 했지만 위험할 뻔했다는 점에는 경자도 동의했다. 아들이 그 여자애에게 보낸 백수십여개의 메시지를 일일이 출력하여 읽고 난 뒤로는 그외에 다른 생각이 들 수가 없었다.

 

다음 날 아침 알람 대신 달랑,과 함께 눈을 뜬 경자는(아무래도 한동안 ‘달랑’이 무의식을 지배할 듯했다) 1층 레스토랑으로 내려갔다. 잠이 덜 깬 투숙객들이 뷔페 음식 앞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경자도 대열에 합류하여 바싹 구운 베이컨과 스크램블에그, 호밀식빵, 샐러드를 접시에 담았다. 마지막으로 커피머신에서 에스프레소를 큰 잔으로 두번 내려 받는데 뒤에서 누군가 말을 걸었다.

“혹시 박경자 선생님?”

경자가 돌아보자 큰 키에 호리호리한 체구의 젊은 남자가 친근한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아리송한 표정으로 남자를 보던 경자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전날 점심때 옆에 앉았던, 전화영의 소설을 읽어보고 싶다던 남자였다.

“아…… 안녕하세요. 잠깐만요, 성함이…… 어제 휴대폰에 적었는데……”

“권도훈입니다. 어디 앉아 계세요?”

잠시 뒤 권도훈이 자기 접시와 머그컵을 챙겨 들고 경자의 테이블로 왔다. 권도훈의 접시에는 빵과 햄과 계란과 치즈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박선생님께서는 어제 뒤풀이 자리에 안 계셨죠?” 권도훈이 모닝롤빵을 손으로 뜯은 다음 뜯겨나간 부분에 버터를 발랐다.

“네. 권선생님은요?”

“거기 있었던 덕에 여기 있는 거죠. 윤교수님이 저한테도 이 호텔 추천하셨거든요. 전망 좋다고. 하지만 호텔에 도착한 게 새벽 두시인데 전망이고 뭐고 있나요…… 박선생님께서는 따로 용무가 있어서 여기 묵으신 건가요?”

“그냥 하루 쉬고 가려고요. 그나저나 이 호텔 생각보다 규모가 있네요. 윤교수님 말씀대로 이쪽에 정말 볼 게 좀 있나봐요.” 경자가 화제를 돌렸다.

“볼 거라면…… 개 대신에 게 동상을 세운 공원이 있긴 하다던데요.”

“아아.”

둘은 잠시 조용히, 약간 어색하게 식사를 했다. 그러다 호기심에 굴복한 경자가 먼저 침묵을 깼다. “개 대신에 게요, 아니면 게 대신에 개요?”

“게요, 게.” 권도훈이 양손으로 집게발 흉내를 내며 저도 어제 들었는데요,라고 운을 떼고는 설명했다. 몇년 전 반려견 인기에 편승하여 이 지역의 명견을 기리는 동상을 세우기로 했더랬다. 못 먹고 못 입던 가난한 시절, 갓난아기였던 주인집 아들을 잡아먹으려던 커다란 쥐를 퇴치한 공로로 칭송을 받는 개였다.

“많이 들어본 이야기 같기는 하네요.” 경자가 말했다.

“그런 이야기들이 대개 비슷비슷한 데가 있으니까요.”

권도훈이 계속 설명했다. 지자체에서 예산을 편성하고 동상을 제작할 업체를 선정했는데, 납기일에 도착한 것은 늠름하게 사람을 지키는 진돗개가 아니라 씩씩하게 집게발을 치켜든 꽃게였다. 선정업체가 다른 업체에 재하청을 주는 과정에서 의사소통에 혼선이 일어났던 것이다. 제작업체는 폐업으로 이 사태에 대응했다. 그러던 중 이왕 만든 거 제작비를 환수하는 동안만이라도 세워두면 어떻겠냐는 의견이 나왔고, 그래서 제막식도 없이 꽃게를 공원 한가운데 조용히 놓아두었는데 그게 인터넷에서 ‘산동네에 있는 게 동상’이라고 화제가 되고 말았다. 그 바람에 동상과 동상에 얽힌 사연이 지상파 뉴스에까지 나와버려서 관련 공무원들이 크게 곤욕을 치렀다더라. 그런 얘기였다.

“그런 일이 가능해요?”

“실화는 반박이 불가능하죠.”

“뒤풀이 재미있었겠네요.”

“재미있었어요. 오셨으면 좋았을 텐데.”

식사를 하는 동안 경자는 권도훈에 대해 몇가지 사실을 더 알게 되었다. 1960년대 번역소설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사이비 종교 신자라는 게 탄로 난 영문과 교수가 재직하는 모 사립대학을 비롯하여(“그분 연구실에 사퇴하라는 포스트잇이 막 붙었다던데요”) 수도권 대학 몇곳에서 강의를 하고 있었다. 아내는 모 가전제품 기업 산하의 연구소 연구원이었으며, 근무지 문제 때문에 현재는 주말에만 만날 수 있었다. 연구 분야는 이차전지였는데, 사실 그 이상은 잘 몰라요, 회사 기밀이라고 얘기를 잘 안 해주네요,라고 권도훈은 말했다.

삼십분 남짓 같이 앉아 있었을 뿐인데도 경자는 권도훈의 말을 듣는 게 즐거워졌다. 아마 학생들에게도 인기 많겠지. 키 크고 말주변 좋고 미소도 서글서글한 남자가 세상 어디서 푸대접을 받을까. 심지어 문학계인데. 오래 공부한 사람 특유의 쓸데없는 냉소와 자기비하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까 몇년생이라고 그랬더라? 유부남이라는 걸 알고 나서도 끌린 여자들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집에는 어떻게 가세요? 차 가지고 오셨어요?” 식사가 끝날 때쯤 경자가 물었다.

“아뇨. 아내가 차를 가져가 쓰고 있어서 버스 타고 왔습니다. 여기서 택시 타고 시외버스터미널 가면 돼요.”

“태워드릴까요?”

“그럼 감사하지만…… 터미널 들르면 괜히 돌아서 가시는 거 아닌가요.”

“그냥 제 차 타고 같이 올라가죠. 저랑 가는 방향 대충 같잖아요.”

“아, 그건 너무 폐 끼치는 건데……” 말은 그렇게 했지만 권도훈의 얼굴에 미소가 오래 머물렀고, 경자는 그 미소가 보기 좋았다.

“그럼 가는 동안 심심하지 않게 해주세요.”

두 사람은 한시간 뒤 로비에서 만나기로 했다. 경자는 엘리베이터로 걸어가는 권도훈의 호리호리한 뒷모습을 흘끗 바라보았다. 근육질 남자는 경자의 취향이 아니었다. 객실로 돌아간 경자가 가방을 챙기는데 휴대폰이 진동했다. 전화를 받자 남편이 말했다.

“어제 문자를 늦게 봤네. 자고 있을 것 같아서 전화 안 했다.” 골프장에서 공놀이하고 오느라 못 봤겠지. 경자는 모르는 척해주기로 했다.

“나 없는 동안 바람만 안 피웠으면 됐어.”

“바람? 갑자기 무슨 바람? 오늘 올라오는 거지?”

“오후에는 도착해.”

“오케이. 그리고 진우 이번달 생활비 거의 다 떨어졌대.”

“벌써? 또? 거기서 뭘 한다고 그 돈을 다 써?”

“모르지. 어제 나한테 그러던데. 애가 말 안 했어?”

“안 했는데.” 그때 퍼뜩 감이 왔다. 그래서 사진을 보냈구나. 작전을 바꾼 것이었다. 또 돈을 달라고 하는 게 제 딴에는 눈치가 보여서 경자에게는 사진을 보내고 본론은 남편에게 얘기한 것이었다. 경자는 전화를 끊고 나서 모바일은행 어플리케이션으로 진우에게 생활비를 송금했다. 메시지는 따로 보내지 않았다. 아쉬운 쪽이 확인하겠지.

계좌에서 빠져나간 건 돈이지 희망은 아닌데도, 아들에게 송금을 하고 나면 줄어든 액수만큼의 실망이 경자의 마음에 대신 적립되곤 했다. 평소 경자는 아들에게 기대하는 게 없다고 자부했지만(기대가 없다고 자부했다. 이것도 모순되지만 정확한 표현 같았다) 진우가 기소유예 처분이 나오자마자 힐링 여행이라도 떠나고 싶다는 듯 교환학생 얘기를 들먹였을 때는 정말로 맥이 탁 풀렸다. 합의 당시 변호사는 경자에게 절대 진우가 고소인과 개별적으로 접촉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를 했다. 놀랍게도 그걸 모르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었다. 특히 그 소비자의 권리인가 하는 말은 절대 하면 안 된다고 못을 박았다. 아들을 데리고 변호사 사무실을 찾아갔던 날 진우는 자기가 해빈이에게 쏜 ‘도네’가 많았다면서 자기 권리도 침해당했으니 맞고소가 가능하지 않느냐고 변호사에게 진지하게 문의했다. 무인매장에서 물건을 사고 나서 바닥에 오줌을 싸는 사람들이나 할 주장을 자기 아들이 자신만만하게 펼치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이번 일이 어쩌면 끝이 아니라 시작일지도 모른다는 막막한 기분을 슬프지만 받아들여야 했다.

경자는 씁쓸한 심정으로 침대 가에 걸터앉았다. 일어날 때 아무렇게나 걷은 이불이 침대 한쪽에 구겨진 채 뭉쳐 있었고, 그 위에 축축하게 젖은 수건이 덮여 있었다. 바꿔준 객실이 트윈룸이어서 침대 하나는 쓰지 않은 채 방치되어 있었다. 협탁 옆에 일회용 슬리퍼 한짝이 달랑, 내팽개쳐져 있었는데 원래 거기 있던 건지 경자가 신다가 벗어 던진 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화장대에는 뜯겨진 과자 봉지 두어개가 널브러져 있었다. 저녁 생각이 없어서 배나 채울 요량으로 학회장에서 집어 왔던 간식이었다.

언제부터 박경자의 인생이 실망으로 방향을 틀었을까? 정하기 어려웠다. 몇년 전 최종면접에서 탈락한 뒤 이제 비정년 트랙을 벗어나는 건 불가능할지 모르겠다는 자각이 어렴풋이 들었을 때부터였을지도 모른다. 온라인 법률상담 서비스에서 조언받은 대로 경찰에 잘 대답하고 왔으니 아무 문제 없을 거라며 남의 일인 양 태평한 소리를 늘어놓는 아들 앞에서 망연자실하여 앉아 있다가 제대로 된 변호사를 수소문하러 뛰쳐나갔을 때부터였을 수도 있다. 남편이 처가 돈까지 끌어다 구입한 건물에 하나둘 공실이 늘고 대출금리까지 천정부지로 뛰었을 때부터라면 어떨까. 하나같이 쟁쟁한 후보였지만 경자는 어쩐지 좀더 깊고 근본적인, 단순하고 명확하며 선택도 변경도 불가능한 하나의 궁극적인 지점이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논문 준비 중에 읽었던 누군가의 이론에 따르면 인생이 바뀌는 결정적인 원인이나 계기 같은 건 없다고, 삶이란 그저 하나의 공백에서 다른 공백으로 건너가는 공허한 시도에 불과하다고 했다…… 달랑, 그런 헛된 노력만이 있을 뿐이었다.

권도훈을 만나려면 아직 삼십분이 더 남아 있었는데 여기 이렇게 앉아 시간을 썩히고 싶지는 않았다. 숲 산책로에서 걷기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한 경자는 객실을 나와 로비로 내려갔다. 객실에서는 어디 있는지 알 것 같던 숲이 막상 로비에 와서 보니 알 수가 없어서 경자는 카운터에서 체크아웃을 할 때 숲으로 가는 길을 물었다. 호텔 직원은 여자화장실 옆에 산책로라는 푯말이 붙어 있다며 손으로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화장실 앞을 지나가던 경자는 안에서 나오던 젊은 여자와 부딪힐 뻔했다. 사과하려고 했지만 여자는 경자를 짜증스럽게 째려보고는 가버렸다.

하늘은 잿빛이었고 분위기는 스산했으며 나무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은 쌀쌀했다. 한쪽에는 맨발로 걸을 수 있는 자갈밭이 마련되어 있었고 산책로에서는 가끔씩 마른 낙엽이 발에 밟혀 부스럭거렸다. 그런데 사람을 그렇게 다짜고짜 노려보면 어쩌자는 건가. 아직도 경자의 뺨에 그 여자의 눈빛이 묻어 있는 것 같았다. 경자는 바람에 날리는 머리칼을 매만졌다. 염색을 새로 해야 하는 머리칼이 자꾸 눈을 가렸다.

합의금 얘기가 오가던 중 경자는 교수 연구실에 앉아 있다가 충동적으로 해빈이의 방송을 본 적이 있었다. 변호사도 이것까지 개별적인 접촉이라고는 못할 것이었다. 아들을 이런 꼴로 만든 애가 도대체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이라도 하고 싶었다. 모니터에서는 메이드복 차림에 앞머리를 눈썹까지 내리고 뿔테안경과 헤드폰을 쓴 해사한 얼굴의 여자애가 종알거리고 있었다. 경자가 게임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냥 재미없는 방송이었다. 요란한 컴퓨터 그래픽 화면이 어지럽게 움직이는 와중에 캐릭터를 조작하며 입에서 나오는 대로 떠드는 게 다였다. 방송 중 해빈이의 머리 위에 ‘오에오에님이 만원 후원!’이라고 적힌 자막이 떴다. 그 아래 ‘변호사 비용 보태 쓰세요!’라는 메시지도 같이 적혀 있었다. 해빈이가 오에오에님 정말 감사하구요, 꼭 좋은 소식 전할게요,라며 웃었다. 경자는 해빈이가 불쌍하다고 생각했고, 곧이어 바로 자기가 그런 생각을 하고 싶어서 이 방송을 염탐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고작 이런 인생이면서…… 경자는 스스로에게 잠깐 혐오감을 느꼈지만 이내 그 기분을 뒤로 밀어냈다. 이렇게 속을 끓이며 사는데 혼자 조용히 이 정도 생각도 못하는 건 너무 불공평했다.

 

권도훈은 커피와 과자 등 간식거리로 가득한 편의점 비닐봉지를 들고 조수석에 앉고는 안전벨트를 매며 입이 심심하면 안 되니까요,라고 말했다.

내비게이션에 따르면 교통상황은 원활했고, 이 페이스대로 갈 경우 집까지 두시간 반 정도면 도착할 수 있을 듯했다. 경자의 하얀색 세단이 고속도로를 순조롭게 달렸다. 산과 나무들이 재빨리 멀어졌다. 방호벽 아래 구릉지의 작은 마을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권도훈이 페트병에 든 커피를 홀짝이면서 어제 경자의 발표 내용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았다. 자기가 요즘 1970년대 소설 속 도시와 농촌의 관계라는 주제에 관심이 있는데 전화영의 작품이 정말 중요한 참고 텍스트가 될 것 같다고, 도대체 이런 귀한 작품은 어떻게 찾아내는지 궁금하다고도 했다. 경자는 권도훈의 재롱을 웃으며 받아주었다. 속이 빤히 보이는 칭찬이었지만 속 보이는 짓이라는 걸 알고 봐도 귀여웠다. 돌아가서 메일로 PDF 파일을 보낼 때 혹시 관심이 있다면 전화영과 1970년대를 주제로 세미나를 조직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할 수도 있을 것이다. 둘이는 말고. 몇명 모아서. 재미있을 것이다…… 그때 어딘가에서 휴대폰이 진동했다.

“권선생님, 지금 전화 온 거 아닌가요?”

“네? 아, 그러네요.” 권도훈이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네, 권도훈입니다. 네, 전화받았습니다, 윤교수님!”

경자는 통화 내용을 들을 생각이 없었지만 윤교수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휴대폰 스피커의 한계를 뛰어넘어 전화기에서 줄줄 새어나왔다. 윤교수는 어제 술자리에서 권선생이 가르쳐준 번호로 전화를 걸어보니 손교수가 아니라 엉뚱한 사람이 받았다면서, 번호를 한번 더 알려주면 좋겠다고 했다. 권도훈은 지금 바로 주소록을 확인해보겠다고, 문자로 다시 번호를 찍어 보내드리겠다고 말하며 번거롭게 해드려 죄송하다고 사과했다.

“번거롭게는 무슨…… 애초에 내가 몰라서 부탁한 건데. 지금 올라가고 있나?”

“네, 올라가고 있습니다!”

“버스 타고 올라가고 있나? 마누라한테 차 빼앗겼다며?”

“아닙니다, 호텔에서 박경자 선생님 만나서 선생님 차로 올라가고 있습니다!”

“박경자 선생?” 윤교수가 호탕하게 웃었다. “자네가 박경자 선생 차는 왜 타고 가? 어제 그런 말까지 해놓고.”

“네? 제가 무슨……”

“그래, 그래, 아무튼 알겠네. 잘 올라가시고, 박경자 선생께도 인사 전해주시고, 전화번호 찾으면 문자 줘!”

권도훈이 전화를 끊은 뒤 경자에게 말했다. “윤교수님 전화인데요, 박경자 선생님 조심히 올라가시라고 안부 전해주셨어요.”

“들었어요.” 경자가 말했다.

터널에 진입하자 무지개처럼 반짝이는 반원형 표시등 여러개가 터널 벽을 따라 죽 늘어서 있는 모습이 저 멀리 보였다. 안전운전! 안전운전! 하고 카랑카랑하게 부르짖는 여자 목소리가 처음에는 희미하게 들리다가 표시등 아래를 통과할 때쯤에는 거슬릴 정도로 빽빽거렸다. 안전운전! 안전운전! 빨간색 페라리 한대가 실선을 가로지르며 경자의 세단을 빠르게 추월했다.

“무슨 우주선 발사대라도 통과한 것 같네요.” 터널을 빠져나오자 권도훈이 말했다. 경자는 대답 대신 라디오를 켰다. 평소 채널을 고정해두는 클래식 방송에서 나긋나긋한 바이올린 독주곡이 흘러나왔다.

“어제 무슨 말씀 하셨어요?” 경자가 물었다.

“네?”

“어제 뒤풀이 자리에서요. 혹시 제 얘기가 많이 나왔어요?”

“아…… 그러니까…… 그냥, 누가 그러는데 박선생님께서 작년에 집안에 좀 힘든 일이 생겼던 것 같더라, 정확히는 모르겠고 무슨 명예훼손 문제인가 그렇다고……”

“다른 얘기는요?”

“다른 얘기는…… 윤교수님께서 어제 박선생님께 하신 말씀을 또 하셨어요. 그냥 그 작품 하나 가지고는 깊은 연구가 어렵지 않은가, 하는……”

“그런데 그건 다른 분들이 하신 말씀이고, 권선생님은요? 무슨 말씀 하셨어요?”

“저요? 저는 별말 안 했고요, 그냥 호응만 좀 했습니다. 아무래도 자리가 자리다보니까…… 네, 호응만 좀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무슨 죄송이야. 그런 자리에서 어르신들 비위 맞추다보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나도 예전에는 여기저기 따라다니면서 많이 그랬어요. 자리에 없는 사람 씹는 게 술자리에서 제일 맛있는 안주잖아, 안 그래요?”

권도훈이 경계하듯 어색하게 웃었다. 하지만 경자는 진심이었다. 경자가 그러고 다녔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 시끄럽고 쓸데없던 술자리들은 이제 더께가 쌓인 채 경자의 기억 밑바닥에 난파선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그래서 경자는 정말로 권도훈이 밉지 않았다. 다시 보니 눈가에 다크서클이 심하게 내려앉아 있고 손가락에 돋아난 길고 굵고 수북한 털도 눈에 확 띄었지만 원래 자연광 아래서 뜯어보면 사람 외모는 다 변변찮아진다.

숨 막히는 침묵이 가득한 차 안을 섬세하게 흐르던 낭만적인 독주곡이 태양을 찬양하는 경쾌한 성악곡으로 바뀌었다. 스따안 프론 떼아 떼, 스따안 프론 떼아 떼…… 권도훈이 비굴하게 입을 열었다.

“저기, 박선생님, 정말 죄송한데, 괜찮으시다면 휴게소에 잠시 들를 수 있을까요? 아까 커피를 마셔서 그런가, 화장실이 좀……”

경자는 가타부타 말이 없이 운전을 계속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화장실을 향해 전속력으로 뛰어가는 권도훈의 허술한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데 경자도 어째서인지 커피가 당겼다. 편의점 커피 말고 따뜻한, 방금 내린 커피. 싸구려라도 좋으니 그런 커피가 마시고 싶었다. 목적지까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잠깐 앉아서 마시고 가는 건 괜찮을 것이다. 시동을 끄고 내리는데 권도훈이 그사이 돌아오면 어쩌나 싶다가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아쉬운 사람이 알아서 하겠지.

휴게소 건물 뒤로 산 하나가 우뚝 서 있었다. 정상은 낮게 깔린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나란히 늘어서 있는 관광버스 앞에 파란색 와이셔츠를 단체로 맞춰 입은 버스기사들이 모여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군복을 입은 남자 둘이 경자의 옆을 지나갔다. 한명이 다른 한명에게 하는 말이 경자의 귀에 언뜻 들렸다. 그렇긴 해도 좋은 사람이긴 합니다.

경자는 키오스크 커피숍에서 더블샷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커피를 받은 다음 실내 푸드코트로 들어가 가장 먼저 눈에 띈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경자가 앉은 테이블 가까이에 놓인 선반 위에서는 전자레인지가 웅웅거리며 돌아가고 있었다. 편의점에서 도시락이나 즉석식품을 구입하는 사람들을 위해 마련해둔 것이었다. 조리가 끝나고 땡 하는 소리가 울리자 어딘가에서 등산복을 입은 노인이 나타나 전자레인지 문을 열고 레토르트 전복죽 용기 테두리를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받치듯 잡아서 꺼내 갔다.

마음 같아서는 권도훈을 내팽개치고 혼자 떠나고 싶었지만 애초에 차 문을 열고 들어오라 했던 건 경자였다. 하긴 박경자가 평생 해온 일이라는 게 늘 이런 식이었다.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맹물이 소금물로 바뀌듯, 뭐든 손대는 것마다 겉모습만 비슷하고 속은 본질적으로 다른 게 되어버린다. 연구도 가족도 인간관계도 다 똑같았다. 지금까지는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었다. 오십을 넘어 육십으로 향해 가는 인생 내내 응석을 부리면 들어줄 사람이 항상 있었던 것뿐이었다. 하지만 이제 경자의 응석을 받아주던 사람들은 모두 늙거나 정신이 나가거나 죽어버렸고, 이제 자기 차례가 터널 저 멀리서 안전운전! 안전운전! 하고 빽빽 외쳐대던 경고방송처럼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경자는 어렴풋이 예감하고 있었다. 예감을 넘어 확신에 이르고, 확신에 적응하여 망각에 이르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도 알았으며, 그때가 되면 그나마 잔존하던 두려움마저 죄다 사라지리라는 것도 알았다. 그러다 어느날 고통 속에서 달랑, 끝나는 인생. 고작 이런 인생이면서…… 그건 그 여자애에게 했어야 했던 말이 아니었다…… 경자는 멀거니 앉아 두 손으로 종이컵을 감싸 쥔 채 정처 없는 상념에 빠져들었다. 이런 순간을 즐기는 것도 실은 나쁘지 않았다…… 멍청한 학생들에게 애써 설명을 하지 않아도 되고, 무의미한 대화를 못 들은 척해도 되고, 자기를 괴롭히는 전화를 안 받아도 되니 괜찮았다…… 그때 뭔가 동그랗고 부드러운 것이 자기 무릎을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게 누르는 느낌에 경자는 어렴풋이 정신이 들었고, 고개를 숙여 아래를 보았다.

쥐 한마리가 경자의 무릎에 앉아 있었다.

그 이후의 일은 조금 흐릿하고 어렴풋하게, 그리고 슬로우모션으로 촬영한 영상을 보듯 느릿하게 진행되었다. 공황 상태에 빠지기 직전 한순간 경자의 눈에 쥐의 전체 모습이 세세히 들어왔다. 몸통을 빼곡히 뒤덮은 갈색과 회색이 섞인 어두운 빛깔의 털, 길고 매끈한 꼬리, 동그란 두 눈, 살짝 분홍빛이 감도는 작은 코, 오물거리는 주둥이, 주둥이 옆에 돋아난 수염, 어쩐지 원숭이의 손가락과 닮은 듯도 한 다섯개의 발가락. 마음만 먹으면 타원 하나와 곡선 하나로도 그릴 수 있는 단순한 생물. 어디서 나타났는지도 모르고 어느 틈에 경자의 다리를 타고 올라왔는지도 알 수 없는 작고 더러운 생물이 상반신을 일으키고 주둥이를 치켜들어 새까만 눈동자로 경자를 보았다.

적어도 경자는 그런 것 같다고 생각했다.

경자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와 거의 동시에 쥐가 경자의 허벅지를 지나 경자의 몸통을 후다닥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경자가 의자를 뒤로 넘어뜨리며 허리를 쭉 펴자 쥐는 그 반동으로 튕겨나가 공중에 붕 뜨더니 테이블 위 종이컵으로 대가리부터 떨어졌다. 커피가 테이블에 튀었다. 대가리를 처박은 쥐는 뒷다리를 버둥거리고 꼬리를 채찍처럼 휘둘렀다. 공포와 혐오에 휩싸인 경자는 감히 입도 벙긋 못한 채 머릿속으로만 더러워! 무서워! 나가!라고 비명을 지르며 팔을 휘젓다가 컵을 탁 쳤다. 날아간 종이컵이 선반에 떨어졌고, 컵에서 튕겨져나온 쥐가 젖은 눈을 껌벅이며 제자리를 잠깐 빙빙 돌다가 등산복 노인이 문을 열어놓고 간 전자레인지 안으로, 마치 거기가 제집인 양 뛰어들었다. 경자는 전자레인지로 달려갔다. 그러고는 생각이고 뭐고 할 새도 없이 전자레인지 문을 닫아버렸다. 그냥 내버려뒀으면 될 일이었다는 깨달음은 그다음에 찾아왔다. 올바른 판단은 늘 나중에 떠오른다. 다들 그걸 알지만 나중까지 기다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거기 무슨 일이에요? 저기요, 고객님, 거기 무슨 일이에요?”

앞치마를 걸치고 조리모를 쓴 여성 직원이 경자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빈 식기를 치우러 오던 모양이었는지 양손에 고무장갑을 끼고 있었다. 경자가 전자레인지를 가리켰다. 저기, 안에, 안에요,라고 경자가 간신히 더듬거리자 영문을 모르는 직원이 저기 안이 왜요, 하면서 전자레인지 문을 열어 내부를 확인했다.

 

화장실에서 나온 뒤 경자를 찾아 헤매던 권도훈이 푸드코트로 들어갔을 때는 직원들이 바닥에 널브러진 음식들을 치우고 쓰러진 의자들을 일으키느라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아직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사람들이 휴대폰을 보며 방금 찍은 동영상이 인터넷에 올라가도 될 만큼 제대로 나왔는지 확인하고 있었다. 비니를 쓴 남자가 친구에게 자기 휴대폰을 보여주며 봐봐, 보라고, 여기, 여기, 너 바싹 쫄아가지고 의자에 튀어 올라가는 거 보이냐, 겁쟁이 새끼,라고 놀렸다.

경자는 휴게소 관리팀 팀장과 이야기 중이었다. 팀장은 휴게소 뒤에 큰 산이 위치해 있다보니 설치류나 그밖의 야생동물이 내려올 때가 있다면서, 최선을 다해 방지하고자 애쓰고는 있지만 사람이 하는 일이다보니 가끔 이렇게 빈틈이 생기곤 한다고 해명했다. 그러면서 몇번이고 너른 양해를 부탁드린다고 굽실거렸다. 경자는 알겠다고, 괜찮다고, 그럴 수 있다는 거 이해한다고, 자기는 다친 데도 없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라고 팀장에게 말했다.

돌아가는 동안 권도훈의 눈에는 어쩐지 경자가 휴게소에 들르기 전보다 사람이 조금 온화해진 듯 보였다. 경자는 커피를 마시는데 푸드코트에 갑자기 쥐가 나타나서 난리가 났다며 그러고 보니 아침에도 쥐 얘기가 나왔었죠,라며 웃었다. 시내에 들어가고 나서 경자는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지하철역 앞에 권도훈을 내려주었다. 헤어지면서 곧 PDF 파일을 보내주겠다고는 했지만 그 말투에는 약속이니까 어쩔 수 없이 지키는 거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권도훈은 꾸벅 인사하고는 역사 계단을 터덜터덜 내려갔다.

시내 한복판에서 벌어진 자동차 사고 현장을 지나는 바람에 경자는 예상보다 삼십분 정도 늦게 집에 도착했다. 아파트 단지 지하주차장에 들어가 주차를 하고 시동을 끈 뒤에도 경자는 한동안 운전석에 앉아 등받이에 허리를 편안히 기대어 자기 배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숨을 쉬고 있다는 자각이 전혀 없는데도 배는 천천히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그 작고 더러운 짐승의 더 작고 더러운 발 네개가 이 배를 밟고 올라오려고 했고, 그때 느꼈던 압력이 찰흙에 찍힌 발자국처럼 경자의 피부에 아직까지도 고스란히 남아 있는 듯했다. 만약 그 발이 계속 그렇게 힘차게 올라왔다면. 마치 남의 눈으로 보는 듯한 장면이 경자의 눈앞에 펼쳐졌다. 경자의 배를 타고 가슴을 넘어 무서운 기세로 올라가는 쥐가 마치 발사된 총알처럼 경자의 턱을 파고들고, 날카로운 이빨로 피부와 근육을 파헤치고 신경을 절단하여 주둥이를 들이밀고, 굴을 파듯 경자의 얼굴을 뚫고 들어가다가 안구를 밀어내고, 마침내 뇌까지 올라간 다음 경자의 몸을 안쪽부터 야금야금 파먹어치우는 장면이. 경자가 가진 모든 것이 이내 아무 쓸모없게 되어버리고 마는 그런 순간이. 그 상상에 경자는 오싹했지만 무섭지는 않았다. 상상은 존재하지 않지만 눈에 보이는 것이며, 그런 것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이론의 여지가 없는 단순한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