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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갱신하는 말, 다시 쓰는 미래

세월호참사 10주년과 새로운 시적 시도들

 

 

최선교 崔宣敎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나’가 ‘그것을’ 말할 때」 등이 있음.

hello6250@gmail.com

 

 

1. 세월호참사 10주년을 앞두고

 

2014년 4월 16일, 304명의 목숨을 앗아간 참사가 일어난 후로 10년이 흘렀다. 슬픔을 돌보기에도 부족한 시간이지만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이야기가 남아 있다는 사실이 새삼 가혹하다. 참사의 진상규명 자체가 쟁점이 된 이후로 현재까지도 정확한 침몰 원인과 해경 및 청와대 등 주요 기관이 권한 내 조치를 취하지 않은 이유가 밝혀지지 않았다.1 세월호 피해자들이 겪은 혐오나 재발방지 대책의 부재는 이후 한국사회에서 발생한 사회적 재난으로 대물림되었다. 세월호는 한국에서 사회적 참사가 발생할 때마다 호출되어 모욕을 당하며,2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1월 30일 ‘10·29 이태원참사 피해자 권리보장과 진상규명 및 재발방지를 위한 특별법’을 끝내 거부했다.

재난의 반복, 무능한 국가, 혐오의 대물림을 지켜보는 일은 “여기에서 나와 내 가족과 친구 들의 삶을 지속할 수 있을 것인가?”3라는 질문을 동반한다. 참사 직후, 문학에 적을 두고 세월호를 생각하는 일 역시 사건을 재현해야 하는 자의 무력감이나 재현 수단인 언어의 근본적인 불안정성을 상기시켰다. 그러나 앞의 질문에 숨겨진 ‘어떻게’라는 말은 세월호를 기억하려는 다양한 문학적 방식들의 탐색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추모시집이나 낭독회 등의 형식을 갖춘 공동의 예술활동이 주로 이루어졌다. 양경언은 ‘304낭독회’를 예시로 들어 ‘이후’의 말을 구상하는 과정에서 “누군가와는 함께해야 한다는 요청이 작가들의 공동 행동을 부추겼”4으며, 과거부터 “공동체성의 환기를 위한 장(場)으로 자주 활용”5되었던 낭독회는 행위자와 관람자가 한 공간에 있음으로써 ‘낭독의 수행성’이 완성되는 자리이므로 역으로 현장에 ‘없는 사람’을 부각하는 효과를 발생시킨다고 보았다. 한편 시인들은 공동 추모시나 단원고 아이들의 목소리를 받아쓴 ‘생일시’를 묶어 발표했으며,6 4·16 기억저장소의 구술증언팀은 2015년 6월부터 4년에 걸쳐 세월호참사 피해자들에 대한 구술증언사업을 진행했다. 생일시나 구술기록은 ‘시적 주체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불식시키는 ‘받아쓰기’ 형식의 글쓰기로 “과거와 현재를 관통하며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통로”7가 되었다. 당사자의 목소리를 부각한 말하기 이외에도 르뽀나 논픽션이 “사실의 압도적인 힘에 의지해 사건을 기록”8하는 대안적 형식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재현 형식의 실험들은 참사 이후 문학의 언어가 응고되지 않는다는 믿음 아래에 이루어졌다. 이 글에서는 여전히 그 믿음이 유효하다는 전제하에 지금의 자리에서 세월호참사라는 정황을 직설적으로 다루지 않으면서 당사자성이나 재현 불가능한 것의 재현이라는 무능감, 애도할 수 없는 슬픔 등을 ‘품은 채로’ 그것을 초과하려는 새로운 시적 시도를 살펴보고자 한다.

 

 

2. 다시 쓰기의 역사: 주민현 『멀리 가는 느낌이 좋아』

 

주민현의 두번째 시집 『멀리 가는 느낌이 좋아』(창비 2023)에는 동시대를 살아가며 숨 쉬듯 들이마시게 되는 온갖 재난상황이 배면에 짙게 깔려 있다. 첫 시집 『킬트, 그리고 퀼트』(문학동네 2020)에서 가부장적 이데올로기 아래 파열하던 여성 주체의 목소리가 한층 보편적이고 확장된 말하기로 한걸음 더 나아간다. 두번째 시집이 탄생한 자리는 산업재해, 구조조정, 젠더폭력 등의 원리가 만연한 현실이며, 다수의 시편에서 구체적으로 언급되는 재난(가습기살균제 사망사건, 신당역 살인사건, 평택 SPL 제빵공장 사망사고, 우끄라이나전쟁 등)을 확인할 수 있다. “시인이 보여주는 것은 예외적인 것으로 보도되는 사건 자체가 아니라 우리의 일상에 스미고 새겨진 항상적 재난의 이야기들”9이라는 설명처럼, 재난은 개별적으로 두드러지는 사건이기도 하지만 언제나 동시대를 에워싼 강력한 전제이다. 이때 주민현의 시집은 이중의 부담을 안게 된다. 가령 「기억하는 빛」에는 이런 문장이 등장한다. “많은 사람들이 떠나면 언제부터 괜찮아지나”. 이 짧은 문장은 항상적 재난을 전제로 한 시세계의 까다로움을 담고 있다. ‘떠났다’라는 말이 암시하는 암울한 전제와 ‘괜찮아지다’라는 말에 내재한 회복의 의지 사이에서 균형을 섬세하게 조절해야 하기 때문이다. 치유나 재생으로의 방향전환을 시대적 당위로 발화하는 듯한 뉘앙스는 자칫 시집의 미학적 형식과 메시지를 단순하게 만들기 쉽다. 그런 점에서 동시대적 재난을 전제로 깔고 시작하는 이 시집의 말하기는 재난의 슬픔을 품은—넘어서는 것이 아닌—채로 당위성을 배제한 회복에 주목해야 하는 부담을 안게 되는데, 주민현은 다음과 같은 장면에 주목한다.

 

이사 온 집에서 내려다보이는

어깨가 동그란 사람들

브뤼헐의 그림 같은 풍경 속으로

 

서른다섯 마흔일곱 예순의 여자들이 걸어간다

흙 대파를 사느냐 깐 대파를 사느냐

 

물질과 생활을 토론하면서

 

작고 작아져 점으로 찍힐 때까지

바라보는 여자들의 사랑과 미래

—「다 먹은 옥수수와 말랑말랑한 마음 같은 것」 부분

 

화자의 시선이 닿는 거리에서 여자들이 걸어가며 나누는 대화 소리가 들린다. 그녀들은 “흙 대파를 사느냐 깐 대파를 사느냐”고 하는 지극히 일상적인 대화를 나눈다. 그리고 점점 화자의 시야에서 멀어지면서 “여자들의 사랑과 미래”는 점처럼 작게 찍힌다. 이 대목에서는 ‘사랑과 미래’라는 말이 어떻게, 얼마만큼의 크기로 그려지는지보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들을 수 있을 만큼 가까이 있던 여자들이 멀어져 점처럼 작아질 때까지 줄곧 응시하는 화자의 시선을 눈여겨보게 된다. 끊어지지 않는 시선은 ‘흙 대파와 깐 대파’라는 일상적 대화와 ‘사랑과 미래’라는 추상 사이를 서서히 짙어지는(혹은 옅어지는) 스펙트럼의 형태로 연결한다. 시의 중반부에 이르러 AI와 친구가 되는 법을 묻는 대목에서도 추상적 관념을 실체가 있는 경험과 물질에 잇대려는 시도가 엿보인다. 화자는 “무릎을 꿇고 심장도 내어놓고/이윽고 우정을 말하고 사랑을 말하”는 “그런 것이 인간이라고/말하고 싶”지만 바로 이어서 등장하는 행위는 이런 것이다. “밥 먹고 화장실 가고 춤추고 잠자고”. 사랑과 우정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의 특징이라면, “밥 먹고 화장실 가고 춤추고 잠자”는 것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지극히 현실에 밀착한 ‘흙 대파와 깐 대파’라는 소재는 ‘밥을 먹는다(혹은 먹인다)’는 행위를 의도하고 실현하는 출발점으로써 ‘사랑과 미래’를 가능하게 만드는 조건으로 읽힌다.

‘흙 대파와 깐 대파’에서 ‘사랑과 미래’로의 연결은 가까이 있던 여자들이 서서히 멀어지는 동안 이루어졌으므로 현재에서 미래로의 진행과도 무관하지 않다. 주민현의 시집에서 미래는 끊기지 않는 시선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그려진다. 시의 말미에 이르러서 “미래는 아직 심어본 적 없는 문장/꿈꾸어본 적 없는 장면”이라고 설명되지만, 이러한 서술은 비관이나 낙관의 자세로 미래를 열어두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삶에 현시된 미래를 믿는 태도를 반영한다. 현재에 현시된 미래를 믿는다면, 실제로 보거나 경험하지 않은 사건/현상을 다루는 ‘상상’은 현재를 대상으로도 유효해진다. 다시 말해 시인은 ‘아직 오지 않은 것’뿐만 아니라, ‘이미 있는 것’을 바라보고 상상함으로써 다가올 미래를 현재의 자리에 최대한 가깝게 붙여놓는다. 그에게 ‘흙 대파와 깐 대파’에 관해 이야기하는 여자들을 응시하는 행위는 미래를 상상하는 행위와 다르지 않다. 따라서 우리는 미래를 “늘 그려보았다는 듯이/너무 많이 상상해와서 꼭 맞는 옷처럼” 만나게 되는 것이다.

10년이 지난 시점에 진상규명의 미완을 지적하는 것은 과거의 진실을 밝히려는 일이자 미래를 어떻게 살아나갈지 묻는 일이다. 이때 과거의 진실과 안전한 미래는 무엇이 무엇을 위해 필요하다는 식의 선후관계를 넘어 동시적 관계가 된다. 미래는 언제나 과거와 연결된 현재에 현시된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로부터 이어져온 무능력과 혐오가 현재와 미래를 꼼짝없이 속박하는 하나의 서사처럼 느껴질 때, 우리에게는 반드시 ‘다시 쓰는 방법’이 필요해진다. 이 과정에서 과거와 현재를 잇대기 위한 고통스럽지만 존엄한 싸움은 다음과 같은 시에서 한편의 환상적인 이미지로 구현된다.

 

우리 뒤로 지나온 길이 다 지워지고

 

표지판도 사람도 모양만 남아서

보기에 좋구나

 

우리는 발이 푹푹 빠지기를 좋아하고

처음 보는 방향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를 따라

 

멀리 가는 느낌이 좋아

스키를 타고 점프

 

(…)

 

우리는 스스로의 갈비뼈를 부러뜨리며 탄생해

점점 더 커지고 있지

 

그레텔과 그레텔

큰 눈이 올 거야, 그래서 세상을 덮을 거야

마녀가 말하지

 

눈은 계속 새로운 풍경을 만들고

내리는 게 아니라 올라가는 눈을 본다

 

(…)

 

이브와 릴리트

그 사이 어딘가를 통과해 걸어가면서

우리는 흰 실로 새 이야기를 직조한다

 

텅 빈 자국을 따라 걸어도 이야기가 되는

그것은 퍽 서로의 분위기를 닮은

—「그레텔과 그레텔」 부분

 

『헨젤과 그레텔』을 모티프로 한 이 시는 이미 결정된 서사의 진행에서 이탈하는 “다시 쓰기의 역사”를 눈 내리는 풍경 속에서 그려낸다. 현재와 미래를 속박하는 과거는 말끔히 폐기되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 시에서 “우리 뒤로 지나온 길”은 좀더 섬세하게 사유된다. ‘우리’가 지나온 길은 눈이 쌓여 지워졌지만 “표지판도 사람도 모양만 남아” 있다. 하얗게 덮인 길은 무언가를 지웠지만, 표지판과 사람의 모양만큼은 남아 있다는 점에서 완전히 지워지지 않았다. 지나온 길에 존재했을 것들 위로 눈이 쌓이면서 마치 올록볼록한 모양의 하얀 종이가 만들어진 것 같다. 이 텅 빈 하얀 종이는 주민현의 시집에서 “다시 쓰기의 역사”가 탄생하는 장소이다. 이곳에서 ‘우리’는 ‘헨젤과 그레텔’ 서사를 만든 “가난한 시절/아이들을 버리던 풍습”이라는 맥락에서 벗어나 스스로 마녀를 향해 걸어간다. 기존 서사에서 악녀로 소비되던 마녀는 오히려 “큰 눈이 올 거야, 그래서 세상을 덮을 거야”라고 말하며 “새로운 풍경”을 예고하는 역할을 맡는다. 이 새로운 풍경에서 “우리는 스스로의 갈비뼈를 부러뜨리며 탄생해/점점 더 커지”면서 “이브를/아담의 갈비뼈로 만들었다고” 하는 “성경”의 맥락으로부터도 벗어난다. “풍습”과 “성경”이 과거로부터 계승된 의미라고 할 때, 다시 쓰기의 과정을 밟는 이야기는 과거의 맥락에 귀속되지 않고 계승된 의미를 ‘초과’하는 이미지를 만든다. ‘우리’가 “점점 더 커지”는 과정은 일방적으로 규정되고 상속된 여성의 이미지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이지만, 이때 기존의 여성(마녀, 이브, 릴리트)들은 여전히 호명되며 그녀들의 발자국(“텅 빈 자국”) 역시 남겨진다. 초과란 원래의 양에 추가분이 더해져야 가능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브와 릴리트/그 사이 어딘가를 통과해 걸어가면서 (…) 흰 실로 새 이야기를 직조”하기 위해서는 ‘그 사이’라는 공간을 만드는 ‘이브’와 ‘릴리트’의 존재가 기억될 필요가 있다. 이는 남성중심적 맥락에 귀속되었던 여성 주체들의 목소리를 기억하고 그들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으면서 그 자리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직조하려는 진정한 다시 쓰기의 과정이다.

일본의 사진가 카와우찌 린꼬는 동일본대지진과 쓰나미로 파괴된 지역을 촬영한 사진을 모아 사진집 『빛과 그림자』를 펴내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파멸 뒤에는 창조해 나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니, 이 풍경도 모든 것의 시작처럼 생각되었습니다.”10 모든 것이 파괴된 장소가 창조의 시작점이 되기 위해서는 항상적 재난이라는 지금까지의 전제를 ‘0’으로 만드는 대신, 그 장소에서 발생한 일의 흔적을 남기고 기억할 수밖에 없다. “표지판도 사람도 모양만 남”은 풍경처럼 말이다. 현재와 미래를 다시 쓰기 위한 노력은 과거의 흔적이 올록볼록 남은 하얀 종이 위에서 가능하다. 그럴 때 비로소 과거의 불행이 현재와 미래로 은폐된 채 대물림되지 않을 수 있고, 현재와 미래는 과거를 품은 상태로 다시 쓰일 수 있다. 그러니 ‘잊지 않겠다’라는 다짐은 슬프고 불행한 과거에 매여 있겠다는 뜻이 아니며, ‘현재를 살아내고 미래로 나아가겠다’라는 선언으로 읽혀야 한다.

 

 

3. 말들이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할 때: 변윤제 『저는 내년에도 사랑스러울 예정입니다』

 

 

주민현의 시집이 항상적 재난을 전제한 자리에서 미래를 진정으로 다시 쓴다는 것이 무엇인지 말한다면 변윤제의 첫 시집 『저는 내년에도 사랑스러울 예정입니다』(문학동네 2023)는 단일한 맥락에 예속된 말과 이미지가 풀려나는 과정에 주목한다. 특히 「가만히 있을 수 없는 가만히 동호회」라는 시는 진정한 다시 쓰기의 구체적 방법을 제시한다. 그 방법이 언어를 권력에 저항하는 수단으로 치환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세월호참사와 연결된 최근의 시적 발화 중에서 유독 눈에 띈다. 변윤제는 권력에 균열을 내는 방법으로 ‘말’을 선택한다. 권력에 대한 저항을 선언적으로 표출하지 않고 ‘가만히’라는 단어가 예속된 상태에서 탈출하는 과정을 형상화함으로써 새로운 시적 말하기의 한가지 사례를 제시한다.

 

가만히에게 편지를 씁니다.

가만히야.

나는 한 번도 너 같은 종류의 가만히는 원한 적 없어. 나 혼자만으로 충분한 가만히 동호회.

 

(…)

 

코끼리가 없는 코끼리 유치원이나 마찬가지예요.

코끼리가 들어오는 순간 알게 되는 거죠.

우리가 무엇을 동경했는지.

육중한 네 다리와.

유치원을 기둥째 뿌리 뽑는 압도적인 코.

우리 귀여움이 바라왔던 파괴적이고 절대적인 힘.

 

그대여.

가만히 멈추라고요?

가만히야.

나는 나의 가만히를 끌어안습니다.

가만히의 기다란 코가 내 목을 살며시 조릅니다.

아, 가만히.

그리하여 우리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는 가만히 동호회

—「가만히 있을 수 없는 가만히 동호회」 부분

 

세월호참사 당일 선내에 방송되었던 ‘가만히 있으라’는 말은 국민을 보호할 의무가 있는 주체들의 직무유기와 무능해서 악하기까지 한 행정편의주의로부터 태어났으며,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장해야 하는 국가와 시스템이 붕괴하였음을 증명한 문장이다. 이 시는 바로 그 문장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울분이나 좌절 혹은 작위적인 풍자의 뉘앙스조차 좀처럼 드러내지 않고 ‘가만히’라는 말을 지독하게 반복한다. 심지어 유머가 가미된 문체로 ‘가만히’라는 말을 되풀이하고 변주함으로써 ‘가만히’의 의미를 자동반사적으로 연결되는 부정성의 맥락으로부터 자유롭게 만들고자 한다. 이러한 말하기는 ‘가만히 있으라’라는 말을 단순히 탈정치화하려는 시도일까? 그것만은 아니다. 이 시의 반복적 말하기는 권력 주체에 의해 발화되고, 의미가 부여되고, 맥락이 고정된 말을 다성적으로 전유하면서 결론적으로 발화 주체의 권력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첨예하고 영리한 투쟁이다.

“가만히 멈춰라”라는 말을 들은 순간부터 동호회가 ‘시작’되었다는 능청스러운 첫 문장에서 이미 이 시의 말하기가 울분, 좌절, 분노를 넘어선 지점에서 전개될 것임을 예감할 수 있다. “가만히 멈춘다는 건 무엇인가요. 멈추는 것과 가만히 멈춤은 무슨 차이일까요. (…) 가만히 멈추면 가만히가 무엇이 되지요?”처럼 집요하게 반복되는 질문 속에서 역설적으로 우리가 알던 ‘가만히 있으라’의 의미가 점차 흐릿해진다. 대체 ‘가만히’란 어떤 뜻인지를 고민하게 되는 혼몽한 상태에 빠지는데, 이와 동시에 반대의 상황이 발생한다. 참사 이후로 언제나 ‘가만히 있으라’라는 말은 우리를 세월호로 돌려보냈으며, 결과적으로 누가 ‘가만히’라는 말을 세월호에 붙여버렸는지, 그 말이 어떤 은폐된 권력의 작용을 담고 있었는지 등의 기억이 선명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깨닫는다. 우리는 누군가에 의해서 ‘가만히’라는 말을 빼앗긴 것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화자가 ‘가만히’에게 편지를 쓸 때, ‘가만히’는 청자이자 동시에 행위자처럼 그려진다. “가만히야./나는 한 번도 너 같은 종류의 가만히는 원한 적 없어”라고 쓰자마자 오히려 “그림자가 떨어져나가고” “먼지떨이가 부서져버리고” “제 등이 척추에서 떨어져나가”면서 평소 ‘가만히’ 있다고 생각하던 사물들이 일탈적으로 움직인다. 사물들의 일탈적 움직임은 맥락에 복속되거나 의미에 종속된 상태에서 벗어나려는 의지의 시적 재현이며 이때 ‘가만히’라는 말의 의미는 ‘원래 그런 것’이라고 전제되던 맥락에서 이탈한다. ‘가만히’의 의미를 다성적으로 확장하는 행위는 말의 의미를 규정하는 암묵적 전제로서의 권력에 저항하는 일이다. 사과를 ‘사과’라고 부르자는 규범을 의도적으로 해체하면서 예속된 상태에 저항하려는 시도이다. 따라서 이 시가 ‘가만히’의 의미를 의도적으로 헷갈리게 만들 때, 그날 ‘가만히 있으라’라던 명령이 가지고 있던 힘은 점점 약해지고 ‘가만히’라는 말이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코끼리가 등장하는 이 시의 후반부는 수없이 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갈 만큼 압도적이지만, 엄청난 슬픔 앞에서 왜소해지는 ‘말’에게 제 몫의 권리를 찾아주려는 시도이다. “코끼리 유치원”이라는 명칭은 작고 어린 아이들이 모여 있는 평범하고 일상적이며 평화로운 공간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실제 “코끼리가 들어오는 순간”, 코끼리는 거대한 실체를 가진 존재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우리 귀여움이 바라왔던 파괴적이고 절대적인 힘”은 유치원을 송두리째 부수고도 남을 만큼 굉장하다. 변윤제가 이 시에서 그리고자 하는 ‘말’의 힘이 이러하다. ‘코끼리 유치원’이라는 말이 연상시키는 이미지에 익숙해져서 잊고 있던 실제 코끼리의 압도적인 힘처럼, ‘말’은 거대한 슬픔을 담기에 무력하다고 믿어지기 전에 스스로 움직여 커다란 힘을 증명할 수 있다. 시의 마지막 대목에서 ‘나’가 ‘나의 가만히’를 끌어안는 장면은 그날 이후로 굳어버린 말을 움직이게 만들겠다는 선언이자 이미 말은 스스로 움직일 수 있다는 증명이다. ‘나의’라는 표현에서 말이 ‘나’의 소유이며 ‘나’가 그것을 다룰 수 있다는 듯 암시되지만, “가만히의 기다란 코가 내 목을 살며시 조”르는 순간의 압력을 느끼며 ‘나’는 그것이 ‘나’의 의지를 능가할 힘을 가지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그러므로 ‘가만히’라는 표현과 상반되게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말’의 힘을 깨달은 이 시는 참사 이후 문학적 언어를 잠식했던 무능감을 딛고 일어선다.

예속의 상태가 앞을 향해 나아가려는 추동의 의지에 의해 타파되지 않는다는 점이 흥미롭다. ‘가만히’라는 말을 곱씹고 또 곱씹는 반복적 행위 끝에 ‘가만히’의 움직임이 포착된 것처럼, ‘멈춤’의 상태에 ‘도달’하려는 상태를 거쳐 역설적으로 이 시집은 움직인다. 가령 「그 자체로 완전한 맛소금」이라는 시는 어제도 오늘도 몇십년 혹은 몇백년 후에도 그 맛이 변하지 않는 “맛소금을 찍어 먹는 모임”을 그린다. 하지만 시의 말미에 이르러 ‘나’가 “조개처럼 입을 꽉 다물어보”자 “맛소금을 씹고 씹어 은빛 알갱이를 만드는 어패류처럼” 그 안에 품은 진주의 가능성이 보인다. 영구불변한 것 같은 맛소금의 맛처럼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순환 속에서 변화의 가능성은 희박해 보이나, 어제의 것과 오늘의 것이 포개어질 때 만들어지는 은빛 알갱이가 있다. 이것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있다는 사실을 사랑”(「양자역학적인, 겹장」)할 수밖에 까닭이다.

시집의 2부를 구성하는 ‘알파카’ 연작시에서 알파카는 일종의 기표로 등장한다. 그러나 알파카는 단일한 의미로 해석될 수 없을 만큼 다종한 방식으로 행동하면서 한가지 맥락에만 귀속되지 않는 기표에서 발생하는 힘을 강조한다. “우리 숫자는 정말 많다고요. 상상 초월”(「알파카 공동체」). 2부의 부제이기도 한 ‘알파카 공동체’가 한마리의 알파카로 완성될 수 없듯이 알파카는 한가지 맥락에서만 묘사되지 않으므로 그만큼 다양한 방향에서의 독해를 요청하고, 복수의 독해가 개입될 때 비로소 완성된다. ‘알파카’나 ‘가만히’ 같은 말은 계속해서 반복되지만 결코 같은 궤적을 그리지 않는다. 그리고 이 궤적을 독해하는 과정은 ‘공동체’라는 말이 암시하는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연대가 완성되는 방식과 연결된다. “반드시 한 명분 이상의 몫이 개입될 때만 비로소 완성되는 시적인 정치성, 정치적인 시성(詩性)”11을 의도하는 변윤제의 시집은 언어에 관한 사유가 현실의 동력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필연성의 원리를 담고 있다. 세월호참사 이후 시민들의 추모와 연대의 행렬이 전국적으로 이어졌다. 세월호는 촛불광장을 구성하는 중요한 단어였고 참사의 기억은 광장을 움직이는 거대한 동력이 되었다. 시집을 여는 ‘시인의 말’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적혀 있다. “누군가의 죽음은 공동이 함께 살아내고 마는 삶의 끊임없는 장소가 되는군요.” 응고된 언어를 버려두지 않고, 죽음을 죽음으로 버려두지 않으려는 시도는 결국 죽음을 삶의 장소로 바꾸어놓았다. 누군가의 죽음은 공동의 삶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공동의 삶이 펼쳐지는 장소가 되었다. “죽음은 무언가가 되어가고 있군요. 긍정인지 부정인지 모를 이 끊임없음 앞에서./나는 기어코 사랑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4. 나가며

 

주민현의 시집이 재난을 전제로 한 시세계에서 보이고 들리는 현재 상황에 시선을 유지함으로써 그곳에서 이어질 미래를 그렸다면, 변윤제의 시집은 재난의 원인이기도 했던 문장(말)을 갱신하면서 권력에 저항한다. 2014년 6월에 발표된 「문학인 시국선언」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다. “그러나 우리는 포기할 수 없는 사랑의 힘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피폐를 응시하고자 합니다. 이미 우리 것이 아닌 국가가 아니라, 함께 사는 이웃들의 박해받는 슬픔이 가진 생명력을 믿고자 합니다. 여전히 말은 무력하고 인간을 위한 세상은 멀어 보입니다. 하지만 그 먼 곳이 반드시 가야 할 길임을 알기에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포기하지 않으려 합니다.”12 10년이 흐른 이 자리에서 몇가지 문장을 다시 써볼 수 있을 것이다. 말은 무력하지 않고 인간을 위한 세상은 멀지 않다고. 말은 스스로 움직일 수 있으며, 인간을 위한 세상은 인간이 살고 있는 지금에 이미 현시되고 있다고. 뚫어지게 바라보고 지독하게 질문을 반복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만이 ‘잊지 않겠다’라는 말을 아무것도 아닌 소리로 남겨두지 않는 방법이다. 2021년 광화문광장 재구조화 공사로 인해 세월호기억공간이 서울시의회 앞으로 이전했지만, 이듬해 서울시의회 사무처는 부지 사용기간 연장을 거부했고 이를 불법 가설건축물로 규정하고 자진 철거를 압박하고 있다. 세월호기억공간 앞에서는 공간의 존치를 요구하는 시민들의 1인시위가 계속되고 있다.

 

 

  1. 세월호참사의 원인 분석은 선체 자체의 결함을 분석하는 ‘과학적 과정’과 참사 당일 주요 기관들이 자원과 인력을 효과적으로 동원하지 못한 구조적 원인을 밝히는 ‘사회적 과정’을 동반한다. 전자의 경우는 해운 안전기준을 확립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볼 수도 있으나 침몰 원인의 과학적 규명이 세월호참사 진상규명에서 지니는 구체적 의미를 확보할 필요가 있다. 후자의 경우 참사 당일 주요 기관들의 권한이나 행동 근거규정이 부재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단순히 제도적 공백을 원인으로 볼 수 없으며, 개인의 무능이나 조직의 습성이라는 요소까지도 고려해야 한다는 어려움을 안고 있다. 사회적참사 특별조사위원회 『4·16세월호참사 종합보고서 분석 TF 자료집』, 4·16연대 2023 참조.
  2. 한 국회의원은 10·29 이태원참사 이후 출범한 유가족협의회가 “세월호와 같은 길을 가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권성동 “이태원, 세월호와 같은 길 안 돼”… “유족 왜 욕보이나” 반발」 한겨레 2022.12.11.
  3. 하재연 『내게 와 어두워진 빛들에게』, 문학과지성사 2023, 105면.
  4. 양경언 「눈먼 자들의 귀 열기」, 『창작과비평』 2015년 봄호, 280면.
  5. 같은 글 281면.
  6. 곽수인 외 『엄마. 나야』, 난다 2015.
  7. 장은영 「기록, 증언, 정동의 글쓰기: 세월호 이후의 문학」, 『슬픔의 연대와 비평의 몫』, 푸른사상 2020, 81면.
  8. 김형중 「문학과 증언: 세월호 이후의 한국 문학」, 『후르비네크의 혀』, 문학과지성사 2016, 116면.
  9. 오연경 해설 「‘나’의 시대, 그리고 멀리 가는 이야기」, 『멀리 가는 느낌이 좋아』, 170면.
  10. 시노하라 마사타케 『인류세의 철학』, 조성환 외 옮김, 모시는사람들 2022, 64면에서 재인용.
  11. 졸고 「예속된 언어를 구출하기」, 『저는 내년에도 사랑스러울 예정입니다』, 128~29면.
  12. 2014년 6월 2일 문학인 754명이 세월호참사와 관련한 정부의 대응을 비판하고 진상규명을 촉구하며 ‘우리는 이런 권력에게 국가개조를 맡기지 않았다’ 제하의 시국선언을 발표했다. 전문은 2014년 6월 3일자 한겨레 온라인 기사 「문학인 시국선언」에서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