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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 | 내가 사는 곳 ⑨

 

담양산보(潭陽散步)

 

 

공선옥 孔善玉

소설가. 소설집 『피어라 수선화』 『내 생의 알리바이』 『멋진 한세상』 『명랑한 밤길』 『나는 죽지 않겠다』 『은주의 영화』, 장편소설 『유랑가족』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영란』 『꽃 같은 시절』 『그 노래는 어디서 왔을까』 『선재의 노래』 등이 있음.

soobook7@daum.net

 

 

군민으로서의 긍지

 

내가 사는 곳은 지명이 못 담(潭) 자, 볕 양(陽) 자, 담양. 병풍이라는 이름을 가진 병풍산이 정말로 병풍처럼 마을 뒤, 북쪽을 에워싸고 있고 그 앞으로는 또 담양 읍내에서 보면 완전히 삼각형으로 뾰족한, 사람 인 자 세개로 이루어졌다 하여 삼인이라는 이름을 가진 삼인산이 우뚝 솟아 있는 바로 아랫동네다. 삼인산은 우리 동네에서 보면 산의 뿌리부터 산꼭대기까지가 한눈에 보인다. 산의 처음부터 끝까지가 다 보이는 것이 처음엔 좀 이상했다. 어디서 시작되었는지도 모르고 또 어디가 최고봉인지 가늠하기 어려운 것이 산에 대한 내 관념이었는데, 내가 날마다 산책하는 길 바로 옆에서부터 솟기 시작한 삼인산은 조금만 뒤로 물러나면 꼭대기가 바로 보인다. 삼인산 꼭대기에 올랐다가 똑또구르 굴러내리면 처음의 자리 고대로 떨어질 것 같은 삼인산은 옛날에는 몽선산이라 했다 한다. 왜 몽선산이냐. 우리 앞집 백세가 가까운 할아버지가 삼인산은 원래 삼인산이 아니고 몽성산이여, 몽성산 하셔서 문헌을 찾아보니, 몽성산은 몽성산이 아니고 몽선산이었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말도 영 틀린 것은 아니다. 몽선산 옆에 용구산이라고도 불리는 몽성산이 있으니. 몽성산에는 조선 숙종 때 숙빈 최씨가 기도하여 영조를 낳았다는 용흥사라는 절이 있다.

하여간, 장차 조선의 태조가 될 고려사람 이성계가 흉중에 거사의 꿈을 품고 주유천하 중 광주 무등산의 한 사찰에서(원효사인지, 증심사인지) 불공을 드렸으나 왠지 모르게 기도발이 약하게 느껴져서 한탄하다가 잠이 들었다. 꿈속에 한 신선이 나타나 어딘가를 가리켰는데 꿈에서 깨어나 신선이 가리킨 곳이 어딘가를 가늠하니 바로 우리 동네, 삼인산이었던 모양이다. 무등산에서 삼인산이 어떻게 바로? 그건 조금 뒤 이야기하기로 하고…… 이성계는 한달음에 삼인산에 와서 신령님께 이제 곧 큰일을 도모할 것인바 굽어 살펴주십사, 기도를 했고 삼인산에서 올린 그 기도 덕에 그는 훗날 조선의 태조가 되었다더라…… 그리하여 삼인산은 삼인산이 아니고 몽성산, 아니, 몽선산인 것.

새해 첫날마다 동네 사람들은 삼인산으로 올라가 해돋이를 하는데, 나는 잘못 올랐다가 굴러떨어질 것이 무서워 아직 올라가보지 못했다. 그렇게 삼인산에 올랐던 사람에게서 들은 이야기인데, 삼인산 어디쯤에 예전에 배를 묶었던 것 같은 구멍 뚫린 커다란 바위가 있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삼인산 중턱 어디쯤이 배가 정박한 포구였다는 것. 지금은 들판과 마을로 포위되어 있는 누가 봐도 명백한 산이 까마득한 예전에는 포구였다니. 그러고 보니, 우리 마을 이름에도 방(防) 자가 붙어 있고 아랫마을 이름이 포백인 것을 보면 이곳이 예전에는 바다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바다가 아니면 적어도 강이었을 수도. 아니면 바닷물과 강물이 합쳐진 곳이었을 수도. 우리 동네에서 남쪽으로 쭉 가다보면 면앙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송순 선생이 면앙정에서 주변 산수를 바라보며 지은 면앙정가에도 고기잡이하며 부는 피리도 흥을 이기지 못하여…… 하는 구절이 있는 것을 보면 또한 이곳이 물속이었음을 유추해볼 수 있지 않은가? 소설가 황정은의 어법으로 말하자면,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이성계가 그 먼 무등산에서 어떻게 삼인산을 곧바로 볼 수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은 풀리게 되었다. 그때 삼인산은 산이 아니라 섬이었던 것이다! 무등산과 삼인산 사이엔 들판과 강물뿐이었던 것이다!

 

동네에서 본 삼인산과 병풍산. (사진: 강경필)

동네에서 본 삼인산과 병풍산. (사진: 강경필)

 

산책 중에 삼인산과 병풍산 초입에 꽤 근사한 주차장이 만들어지고 있길래 다가가 인부에게 물었다.

무슨 돈으로 만드나요?

군비로 만들지요.

왜 만드나요?

마을 사람들 주차하기 좋으라고 만들지요.

자기 집에 주차하지 누가 여기까지 와서 하나요?

손님들 오면 여기다 대라고 하세요.

더이상 문답하는 것도 재미없어서 그냥 물러났다.

주차장 한편에 고급 화장실도 짓고 최신 운동기구도 설치되었다.

주차장 운동기구는 천변에 천막을 치고 불법 거주한다는 소문이 있는 어떤 아저씨의 전용 헬스장으로 쓰이는가 싶었는데 어느날 그 아저씨가 사라지고 나서부터는 한동안 쓰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언제부턴가 주차장은 도시 사람들의 캠핑장이 되었다. 고급 캠핑차를 주차해놓고 불을 피우고 고기를 굽는 사람들이 주차장에 살다 갔다. 그들이 떠난 자리에 소주병, 맥주 깡통, 나무젓가락, 플라스틱 접시, 라면 봉지가 남았고 노인일자리에서 나온 노인들이 그것을 치웠다.

주차장으로 산악회 이름을 붙인 대형 전세버스가 들어오고 고급 등산복, 등산화, 등산가방, 등산스틱, 등산안경을 쓴, 건강한 남녀들이 차에서 쏟아진다. 쓰레기를 치우던 노인들이 조그맣게 몰켜 앉아서 남녀들을 구경한다. 나도 한쪽에 서서 구경하다가,

저 사람들 좋으라고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고생하시네요.

나의 한마디에 돌아온 대답은 이런 것이었다.

 

—노인일자리는 일이 아니고 놀이다.

—우리는 사람 구경, 저 사람들은 산 구경.

—타지 사람들이 편해야 주차장 마련한 군민으로서 긍지가 선다.

—애써서 만들어놓고 아무도 안 쓰면 그것이 더 애 터진다.

 

등등.

 

 

일가

 

이 동네에 살러 들어왔을 때, 해마다 중국 산둥성 지난시 취푸(曲阜)로 공자 제사를 지내러 가는 사촌 오빠가, 네가 들어간 동네가 바로 우리 조상이 담양으로 들어가 처음 발 디딘 동네다,라고 말해주어서야 중국 산둥성 살던 나의 조상이 영광 법성포구로 들어와 나주 영산포를 거쳐 이곳으로 배를 타고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곡부 공씨들 일부는 영광에 남고(어쩌면 영광에 살았던 예인 공옥진 선생 역시 그 조상들의 후손일지도) 일부는 담양에 이르고 또다른 일부는 서해바다를 타고 올라가 평택으로 갔다고 한다. 영광, 담양, 평택의 공씨들은 그러니까 다 산둥성 지난, 우리말로 하면 산동성 제남시 곡부현 사람들의 후손인 것. 어쩌면 그럴 수도. 물길은 담양을 거쳐 곡성으로도 흘렀고 나는 물길을 따라 곡성까지 들어간 사람들의 후손인 것. 어쩌면 그럴 수도. 이 대목에서 나는 느닷없이 심청이가 곡성 사람이라는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떠오른다. 내 조상이 그랬듯이 심청을 데려간 남경 뱃사람들도 영광 법성포구로 들어와서 물길을 타고 담양을 거쳐 곡성까지 간 사람들일지도. 어쩌면 그럴 수도. 나는 그러니까 돌아가지 않은 남경 뱃사람의 후예일지도. 어쩌면 그럴 수도.

하여간 산동성 제남에서 온 곡부 공씨의 후손인 나는 지금, 그들이 물길을 타고 들어와 둥지를 튼 동네에 산다. 참으로 우연히도.

 

에에, 알려드립니다. 민족 대명절 한가위를 맞아, 마을 대청소를 하려고 하니 한분도 빠짐없이……

빗자루를 들고 나간다.

내가 가져간 빗자루는 그리 쓸모가 없다.

예초기를 돌려 베어낸 풀은 송풍기로 밀어낸다. 그러니까, 마을 대청소는 참가하는 데 의의를 두는 행사.

별달리 할 일이 없어 ‘시생정’에 모여 앉은 할머니들 속에 끼어 앉았다.

 

할머니, 정자 이름이 왜 시생정이에요?

팽사나간, 그만낙찌, 만무리시상지지이.

무슨 주문도 아니고 뭔 말인가, 현판을 다시 보니 시생정(始生亭).

그러니까 할머니가 한 말을 풀어보자면, 정읍 평사낙안, 구례 금환낙지, 담양 만물시생지지. 우리 동네가 바로 호남의 3대 명당 중의 한 곳이라는 말씀.

그러나 이런 날, 마을 청소하는 날 빼고는 만물시생지지의 정자 시생정에서 쉬거나 노는 사람은 없다. 노인들은 마을회관에서 ‘산다’. 노인들은 여름에는 에어컨이, 겨울이면 보일러가 ‘애낄 것 없게 돌아가는’ 마을회관에서 밥도 먹고 ‘테레비’도 보고 ‘화토’도 치고 잠도 잔다. 에어컨도 보일러도 없는 정자는 이름만 멋지고 사시사철 혼자 외롭다.

할머니들이 나에게 물었다.

얼서 오깄소?(어디서 오셨소?)

애초에는 산동성 제남 곡부에서 왔지요.

한 할머니가 깜짝 반기며 물었다.

곡부? 나허고 같네. 공씨여?

예. 제 조상이 담양으로 오셨을 제 이 마을에다 터를 잡고…… (영문은 모르겠지만 갑자기 말투가 예스럽게……)

워메에, 우리 일가 왔네에, 우리 일가 왔어어.

이산가족 만난 듯이 반겼다.

나는 공자님 팔십대손인디, 집이는 및대손(몇대손)이여?

칠십구대손입니다.

할머니가 갑자기 나에게 절을 하며,

아이고 우리 일가가 오싰네에, 우리 고무님이 오싰어어.

 

 

황금리에서

 

물길의 흔적을 따라 포백, 진등(면 소재지)을 거쳐 봉산(면앙정이 있는 곳)을 가로질러 내려가다보니 황금리라는 동네가 있다. 왜 황금리냐고, 지나가는 노인한테 말을 붙이니, 황금리 어딘가에 황금 대들보가 묻혀 있어서 그렇다고 한다. 귀가 번쩍 띄어,

어, 어디다요?

내가 그걸 알면 갈쳐주간디? 몰라서 못 갈쳐주고 알면 안 갈쳐주제.

나는 황금이 묻힌 장소 알기는 포기하고,

황금 대들보를 누가 언제 묻었답니까?

전우치가 묻었제, 누가 묻어.

전우치전에 나오는 그 전우치요?

근당게.

말하며 노인이 씨익 웃는데 혹시 전우치의 후손인가? 실제 전우치는 영화 「전우치」의 주인공 강동원처럼 생겼을까? 그럴지도 모른다는,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뜬금없이 가슴이 뛴다. 잘생긴 전우치 생각에.

전우치는 도술을 부려 중국으로 날아가(도술을 못 부렸으면 나의 조상들처럼 물길을 타고 갔겠지) 각 나라의 왕들에게 ‘구라’를 친다.

나는 신관의 명을 받은 사람으로, 그대들에게 황금 대들보를 받으러 왔다.

왠지 거역하면 안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지 왕들은 순순히 황금 대들보를 내놓았고 담양 전씨 전우치는 고향 황금리로 돌아와(날아와) 황금 대들보 절반은 팔아서 쌀을 사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 주고 절반은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황금리 어딘가에 묻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전우치가 묻어놓은 황금을 찾기 위해 황금리를 뒤졌지만 오늘날까지 황금은 발견되지 않았고 가을이면 황금리 너른 들판에 황금빛 나락이 물결친다.

 

전우치의 동네 황금리 너른 들판이 물에 잠겼다. 산 아래 우리 동네 쪽에서 내려간 물이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다 황금리 쪽에서 ‘관방제’에 막혀 황금리 들판이 물바다가 되었다. 물을 막기도 하고 가두기도 하는 제방. 물바다가 된 들판 위에 뭔가가 반짝, 했다. 황금대들보인가, 아니면 대들보에서 떨어져 나온 금 조각일지도. 혹하는 마음에 다가가 보니, 비닐, 페트병, 깡통들이었다.

 

 

오래된 이파리

 

둑을 쌓기 전엔 벙벙한 물속이었을 들판을 가로지른 둑은 관에서 관비로 쌓은 제방이라 하여 관방제(官防提). 1648년 인조 26년부터 담양부사가 해마다 둑을 쌓아 수해를 막아왔으나 1717년 숙종 43년에 큰 홍수가 나서 관방제를 축조하기 시작했고 1854년 철종 5년에 끝났다 하니 130여년 이상이 걸려 완성된 제방인데, 정말 길고 정말 아름답다. 남산리에서 읍내 우시장까지 거의 이십리 되는 길을 자동차 한대 만나지 않고 왼쪽에 들판, 오른쪽에 영산강을 두고 걸을 수 있다. 누구 말로는 제방을 따라 자전거를 타고 담양에서 광주를 거쳐 목포까지도 갈 수 있다는데, 자전거를 못 타는 나는 아직 못 가봤다.

아름다운 제방을 걸어 목포까지는 갈 수 없고 나는 오늘 제방을 따라 장이 서는 읍내까지 걸어가기로 한다.

담양장은 바로 그 관방제 위에서 5일마다 선다. 여기 사람들은 담양을 대맹이라 한다. 오늘은 2·7 대맹장이다. 대맹장은…… 더 붙이고 말 것도 없이 그냥, 그저…… 아름답다. 제방을 축조할 때 나무도 같이 심었는데 한가지 나무만 심지 않고 여러 종류를 섞어 심었다. 팽나무 느티나무 이팝나무 엄나무 말채나무 벚나무…… 여름날 푸른 녹음이 우거진 장터를 보면 아름다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다. 가까운 예전에는 오일장 아래 천변에서 죽물(竹物)시장도 열렸지만 지금은 폐장되었다. 사진으로 보는 죽물시장 또한 명치가 아플 만큼 아름다운데 흰옷 입은 사람들이 노란 죽물 무더기 속에서 꼼지락거리는 모습이 하염없이 아련하다.

 

황금리가 있는 봉산 들녘. 왼쪽 둑이 관방제림으로 이어지는 관방제이다. (사진: 강경필)

황금리가 있는 봉산 들녘. 왼쪽 둑이 관방제림으로 이어지는 관방제이다. (사진: 강경필)

 

장터가 아름다워서인지 여느 장과는 달리 대맹장은 왠지 고즈넉하다. 흔한 호객 소리, 흥정하는 소리, 엿장수의 트로트 메들리…… 같은 소리가 없다. 조용히 팔고 조용히 산다. 다만 장터의 하늘을 뒤덮은 고목나무 속에서 새가 울고 매미가 울고 가을에 낙엽이 우수수 쏟아지면 어물장수는 낙엽이 묻은 생선을 팔고 옷장수는 낙엽이 내려앉은 옷을 팔고 채소장수는 낙엽과 함께 채소를 판다. 팽나무 느티나무 이팝나무 엄나무 말채나무 벚나무 이파리들이, 1648년의 이파리가, 1717년의 이파리가, 1854년의 이파리가 2024년의 생선과 함께, 옷과 함께, 채소와 함께 장바구니에 담겨 온다.

파는 사람이나 사는 사람이나 낙엽을 떼어낼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은 그렇다는 것을 알기 때문일까. 그 나뭇잎들이 실은 아주 오래된 나뭇잎임을 알고 있어서. 오래되고 오래되어 또다시 새로운 나뭇잎이라는 걸 알고 있어서.

 

 

용화사의 파레이돌리아

 

“‘목탁 소리 때문에 못살겠다’ 담양 사찰서 40대 난동 (…) 경찰에 따르면 사찰에서 직선거리 300 m 떨어진 아파트에 거주하는 A씨는 새벽마다 들리는 목탁 소리가 시끄럽다는 이유로 지난 13일 새벽 담양군 담양읍 용화사에서 80대 승려에게 행패를 부리고 욕설을 한 것으로 조사됐다. 승려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언젠가, 바람에 날리는 리넨 커튼 속에서 뭔가를 발견한 사람이, 아이야야야야아, 감탄사를 내뱉었다. 바람에 날리는 커튼의 움직이는 강도에 따라, 그의 감탄사도 높낮이가 달라졌다. 커튼과 그가 완전히 일체가 된 듯했다.

한참이 지나 뭐였느냐고 물었다. 바람에 움직이는 커튼에서 무엇을 보았길래 그리 오묘한 소리를 냈느냐고.

우는, 미소 짓는, 찡그린, 화난, 자비로운…… 온갖 얼굴과 옷자락과 손과 발이 바람에 날리는 커튼 속에서 나왔다, 들어갔다 하더라고.

그리고 그는 나에게 그런 것, 그러니까 문득, 우연히 어떤 형상 속에서 뭔가가 보이는 것, 보는 것, 보려고 하는 것을 ‘파레이돌리아’(pareidolia)라고 부른다고 말해줬다.

 

목탁 소리 탓에 절 인근 주민과 시비가 붙었다는 기사 때문에 용화사에 가보고 싶어진 것은 아니었다. 누가, 담양 읍내 용화사에서 본 나한도에서 피리 소리를 들었다고 말해서였다.

옷자락이 바람에 날리는 소리도 나더라고.

그렇지만 피리 소리가 들리고 옷자락이 바람에 날리는 소리가 나는 나한도를 보려면 절에 미리 전화를 하고 가야 한다고 했다. 수십번의 시도 끝에 연결이 되었지만, 절에는 지금 사람이 없다고 했다.

절에 왜 사람이 없어요?

코로나 때 처사도 가불고 보살도 가부렀어.

스님은요?

나는 시방 아파서 빙원이여, 빙원.

 

언젠가 용화사에 가면 꼭 십팔나한도를 보리라. 거기서 나 또한 뭔가를 볼 수 있을까? 내게 파레이돌리아를 말해줬던 사람이 본 것 같은 것을 나도 용화사의 십팔나한도에서 볼 수 있을까? 나한도의 옷자락이 바람에 날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그랬으면 좋겠다. 스님, 속히 쾌차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