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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30주년을 맞이하며
미지의 땅 유라시아에서 만난 유홍준
강인욱 姜仁旭
경희대 사학과 교수, 한국고대사고고학연구소 소장. 저서 『세상 모든 것의 기원』 『우리의 기원, 단일하든 다채롭든』 『테라 인코그니타』 『강인욱의 고고학 여행』 『유라시아 역사 기행』 등이 있음.
kanginuk@khu.ac.kr
내가 갓 대학원에 입학했을 때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1권 창작과비평사 1993)가 처음 나왔다. 그리고 지난 30년간 그의 답사기와 한결같이 함께했으니 나 스스로 ‘문화유산답사기 1세대’라고 불러도 지나친 말은 아닐 듯하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의 30주년을 맞아 20대, 30대, 그리고 40대 세번에 걸친 유홍준 선생과의 만남을 풀어볼까 한다.
연해주에서 만난 현장답사 전문가
유홍준 선생과 직접 인연이 된 것은 2005년 여름이었다. 선생이 문화재청장을 맡고 계셨고 나는 갓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강사로 여러 대학을 전전하던 시기였다. 중국 동북공정의 여파로 시끄러웠을 때라서 나는 러시아에서 유학한 인연으로 연해주의 발해 관련 유적 조사에 관여하고 있었다. 때마침 유선생이 3박 4일 일정으로 일곱명의 국회의원들을 이끌고 떠난 연해주 나호드까 근처의 옥저·발해 유적인 불로찌까 현장답사에 동행하게 되었다.
여야, 심지어 노동당 국회의원까지 합류한 대규모 방문단이었다. 하지만 러시아 사정은 녹록지 않아 블라지보스또끄 공항에 도착해서 덜덜거리는 국산 중고 버스에 국회의원들을 모셨다. 보좌관도 없는 상황에서 내가 통역과 안내를 전담해야 했기에 내심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기우였으니 덜컹거리는 비포장길에서 유홍준 선생이 마이크를 잡자 선생 특유의 호탕하고 유쾌한 유머가 빛을 발했고 국회의원들은 힘든 줄 모르고 빠진 배꼽을 찾느라 정신없었다.
블라지보스또끄에서 비포장길을 다섯시간 달려 나호드까 근처의 유적지 현장에 도착하자 의원들은 황당해했다. 근사한 황금 유물들이 기다리는 줄 알았는데, 정작 와보니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흙빛 얼굴로 구덩이에 들어가 있었다. 씻을 곳도 따로 없어서 교수와 대학원생들이 한데 모여 강가에서 빨래와 세수를 했고, 러시아 측 발굴단장은 도끼로 장작을 패고 있었다. 숙소도 없어서 텐트에서 생활했고 텐트 폴대에는 삽, 곡괭이, 그리고 더러운 작업복들이 널려 있었다. 러시아 고고학자들에게는 일상인 이런 풍경을 알 턱이 없는 한 국회의원이 기가 차다는 듯 한마디 뱉었다.
“아니, 발해 역사현장 가자고 해서 바쁜 일정 빼서 왔더니만 난민캠프가 웬 말이요?”
“여기가 난민캠프보다 못하지. 난민들이 삽질하는 거 봤소?”
국회의원들의 수난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모기떼가 들끓던 발굴현장을 보고 다시 블라지보스또끄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블라지보스또끄에 거의 다 와서 우리를 인도하던 현지 고고학자 막심 야꾸포브 선생이 귀가 솔깃한 제안을 했다. 바로 옆으로 보이는 산을 10분만 가로질러 들어가면 지금은 폐허가 된 고려인마을이 있다는 것이었다. 스딸린 시절 강제이주를 당한 아픈 역사의 현장이었다. 내가 추가 설명을 하기도 전에 차는 방향을 틀었다. 사실 막심 선생은 삼선 슬리퍼만 신고도 축지법 쓰는 도인처럼 산 몇개는 우습게 타는 현장조사의 귀재였다. 그러니 막심 선생이 말한 10분 거리란 다른 이들에게는 마을과 언덕을 두개나 넘어야 하는 한시간 거리였다. 국회의원들의 숨이 가빠왔고 얼굴은 붉어졌다.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린 막심 선생은 얼굴이 굳어지면서 걱정스러운 듯 나한테 다가와 물었다.
“강선생님, 괜히 저 때문에 일이 잘못된 거 아니에요? 죄송해서 어쩌지요?”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얘기했다.
“괜찮아요. 한국에서는 흔히 국회의원이 국민을 우롱한다고들 얘기해요. 그 국회의원들이 러시아에서 반대로 우롱당했으니 자업자득이죠, 뭐.”
말은 이렇게 했지만 나라고 걱정이 왜 안 되었겠는가. 믿을 구석은 아무리 힘든 여정이어도 특유의 유머와 임기응변으로 사람들을 안심시키는 유홍준 선생뿐이었다. 국회의원들의 불만이 극에 달할 무렵 유홍준 선생이 외딴 텃밭을 갈고 있는 러시아 노부부에게 다가가 마치 10년 지기라도 만난 양 반가운 척을 하는 게 아닌가. 선생과 금방 친해진 노부부는 텃밭에서 가꾼 오이와 토마토를 가져와서 우리와 나누어 먹었다. 힘든 등산이 러시아 교외에서의 즐거운 피크닉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어렵게 도달한 곳에서 우거진 수풀 사이로 주춧돌만 남은 고려인의 흔적을 마주했을 때 국회의원들은 깊은 감동을 받았으니, 오히려 전화위복이었다.
국회의원들은 모기에 뜯기고 현지 러시아 학자에게 속아서(?) 고생고생했음에도 연말에 힘을 합쳐 동북공정 대응사업 예산을 대폭 올려주었다. 그 덕분에 이후 10년 가까이 한국의 고고학자들은 연해주 일대의 발해 유적을 체계적으로 조사할 수 있었다. 당시 함께한 일곱명의 의원들은 다음 선거에서 모두 재선에 성공하는 기염을 토했다. 다들 발해의 음덕이라고 농담처럼 이야기하곤 했지만, 사실은 그 모든 여정을 주도했던 유홍준 선생의 덕이었다. 문화재청이라는 거대한 조직을 이끌기도 벅찼을 텐데 말도 안 통하는 러시아에서 국회의원들을 인솔하면서도 그의 내공은 유감없이 발휘되었으니 말이다.
이야기로 실크로드를 가로지르다
유홍준 선생과의 두번째 만남은 2019년 6월 신장에서 이루어졌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중국 실크로드편 완간 기념 답사였다. 비행기로 우루무치에 도착해서 다시 비행기로 쿠차로 간 뒤 키질석굴을 지나 투루판으로 향하는 5일간의 숨 가쁜 일정이었다. 가는 곳마다 이어지는 중국 공안의 삼엄한 검문과 무더운 날씨에 지쳐갈 법도 하건만, 유홍준 선생의 답사력은 어김없이 십분 발휘되었다. 사실 ‘실크로드’는 워낙 복잡해서 쉽게 이야기할 수 있는 주제가 결코 아니다. 하지만 각 답사의 현장에서 그는 적절한 키워드를 짚어가며 이야기를 풀었다. 키질석굴 앞에서 불경을 한문으로 옮긴 인도의 승려 쿠마라지바(鳩摩羅什)의 번역을 설명하고 석굴 안에서는 실크로드에서 활동한 조선족 화가 한락연으로 화제가 바뀌었다. 실크로드가 동서양을 연결하고 중국과 한반도로 이어진다는 상투적이고 장황한 해설은 필요 없었다. 쿠마라지바와 한락연 이야기와 함께 키질석굴의 신비로운 벽화가 눈앞에 생생하니, 답사객들에게 실크로드의 의미가 한층 쉽게 전달되는 듯했다.
유선생과의 답사에서는 강의만 내내 계속되는 것은 아니다. 차 안에서 갑자기 나에게 마이크를 주며 “국내에서 보기 드문 러시아 유학파입니다. 강교수, 러시아 노래 한곡 해요”라고 부탁을 하시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돌아가면서 한곡조씩 뽑아도 어색하지 않은 분위기이고, 그러다 또다시 강의를 잇는 식이다. 사실 답사라는 것이 지루한 시간을 견뎌야 하는 과정이다. 특히 신장은 땅덩어리가 너무 크다보니 바로 근처 유적이라도 가려면 몇시간이 걸린다. 하루에 잘해도 유적 두세개 보기 어렵고 대부분의 시간을 이동하는 차 안에서 보내야 한다. 실크로드 답사는 유적도 유적이지만 유홍준 선생과 즐긴 차 안에서의 소소한 재미가 인상적이었다.
유홍준 선생의 인상은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눈빛이 형형한 것이 마치 고구려 벽화의 무사나 씨름하는 역사(力士)를 연상시킨다. 그런 그의 모습을 신장에서 보고 있자니 실크로드를 가로지르는 고구려인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우즈베키스탄 아프라시압 벽화에도 고구려 사신이 확인되었다. 실크로드는 당시 그들이 몇년 동안 정처 없이 다니던 길이었다. 그 긴 여행의 시간에 서로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지루함을 견디었을 테니, 실크로드는 그야말로 답사와 이야기로 이어진 길이었다. 아마 고구려 사절단에도 유홍준 선생 같은 사람이 있었을 것이라는 상상에 빠지기도 했다.
하지만 신장 답사는 지는 석양의 찬란함 같은 아쉬움을 남겼다. 중국의 강화된 검문으로 지역간 이동도 쉽지 않았고, 곧바로 코로나19로 모든 답삿길이 막혔다. 이후 벌써 5년의 시간이 훌쩍 흘러버렸다. 해외 못 나가는 아쉬움을 작년 출간된 선생의 새 시리즈 『국토박물관 순례』(창비) 두권을 읽는 것으로 갈음해본다.
유홍준과 함께 시작된 문화유산의 시대
따지고 보면 나는 유홍준 선생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가 처음 나왔을 때에도 특별한 인연이 있었다. 당시 지도교수의 서평 작성을 돕게 되었는데, ‘군데군데 숨어 있는 문화재 사랑’이라는 제목의 그 서평이 서울대신문에 나갔고, 뒤이어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 대한 호평으로 대한민국이 떠들썩했다. 출판사에서 독자들의 서평을 모아서 책자로 만들어 배포할 정도였으니 오죽했겠는가. 돌아보면 1990년대 초반은 갓 자가용이 생기고 여가라는 것을 즐기기 시작하던 때였다. 그전까지 한국사회는 일밖에 몰랐고 남는 시간엔 모여서 술잔을 기울이거나 화투를 치는 게 전부였다. 여가에 무얼 할지 몰랐던 사람들에게 때마침 문화유산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소개한 유홍준의 등장에 대한민국은 환호했고, 감히 말하건대 그의 답사기와 함께 ‘문화유산의 시대’가 열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유홍준이 단순하게 시대를 잘 탔다고 오해하면 안 된다. 당시 학계는 대중과 함께하는 것을 엄격히 금기시했고, 학계 안에 유홍준에 대한 적지 않은 질시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 상황에서 흔들림 없이 지난 30년간 일관되게 자신만의 답사와 저술을 이어가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글은 화려한 유물에 미사여구를 쏟아내는 평론과는 거리가 멀다. 그 대신 지나치기 쉬운 우리 주변 문화재에 대한 애정을 쏟아낸다. 그렇게 유홍준은 그의 시대를 만들었다. 그 덕분에 소수의 ‘돈 못 버는’ 인문학자들만의 일이었던 문화재 연구는 우리나라의 주요한 정책이 되었고 지자체들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사업에 열광하며 문화유산은 전국민적인 관심을 받고 있다. 피라미드나 진시황릉 같은 거대한 유적은 없어도 한국의 문화재 사랑은 세계 어느 나라에도 뒤처지지 않는다. 지금 우리는 유홍준이 열어젖힌 문화유산의 시대에 살고 있는 셈이다.
여전히 그의 답사기가 필요한 이유
답사기의 화려한 성공과 달리 실제 답사의 길은 고되고 힘들다. 어떤 돌발상황이 닥칠지 모르는데다 개성 넘치는 답사 구성원들의 다양한 이해도 조정해야 한다. 그런데 답사보다 더 어려운 것은 그 이야기를 글로 풀어내는 작업이다. 답사로 정신과 육체가 크게 소모된 직후 다시 그 기억을 되살려 맛깔스러운 답사기를 쓰는 일은 답사보다도 더 힘들다. 답사와 조사가 일상인 고고학자들이 술자리에 가면 서로 자기 경험을 이야기한다고 바쁘지만 그런 술자리의 ‘이야기’가 하나의 완결된 글과 책으로 나오는 것이 드문 이유이다.
이제 세계 곳곳을 다니는 한국인이 많아졌고 답사기는 아예 하나의 장르가 되어서 대형서점의 한 코너를 장식한다. 하지만 그중 어떤 책도 유홍준의 답사기가 지닌 매력을 따라올 수 없다. 그만의 독특한 맛은 어디에 있을까. 이번에 출간된 『국토박물관 순례』에서 유홍준 선생은 연천 전곡리의 주먹도끼를 소개하면서 원시인을 등장시켰다가 주먹도끼를 처음 발견한 미군 그렉 보웬(Greg L. Bowen)과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를 세운 삼불 김원룡 선생과의 추억을 차근차근 회고한다. 그러고는 갑자기 겸재 정선이 연천을 그린 「연강임술첩」의 그림 한폭이 등장한다. 선생이 유물 하나를 보면 그것을 스쳐간 수많은 이야기가 단숨에 펼쳐진다.
유적이라는 것은 모르는 사람에겐 허허벌판의 돌 쪼가리 몇개에 불과해 보인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는 30년 동안 그 허허벌판에 생명력과 사람 냄새를 불어넣어 세상에 널리 알려왔다. 늘 다니는 길도 그의 답사기가 스쳐가면 수많은 역사의 비밀을 품은 불가사의한 장소가 되었다. 그의 마법은 한국을 넘어 동아시아로, 그리고 유라시아로 뻗어나갔다.
21세기, 코로나19를 거치고 세상은 급변하고 있다. 역사계와 문화계는 독서인구의 감소로 큰 곤란을 겪고 있다. 반면에 노령인구의 증가와 여행산업의 발달로 문화재 답사에 대한 수요는 늘어날 것이다. 산업화시대의 끝에서 등장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는 21세기가 고립사회로 이어지는 충격을 완화하는 클러치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에게 여전히 그의 문화유산답사기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코로나19에도 그는 쉬지 않고 『국토박물관 순례』를 썼다. 한 답사기의 출간은 또다른 답사기에 대한 기다림의 시작이다. 연해주, 유라시아, 그리고 중앙아시아로 이어지는 새로운 글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