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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질문을 던지는 용기
전기화 田己和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황정은 다시」 「부풀어 오르는 모녀서사」 「(비)인간의 자리로부터」 등이 있음.
octobervoice@naver.com
지난 두 계절, 다양한 공간에서 비평에 관한 비평들을 마주했다. 특집 기획이나 정규 코너에 실린 글들은 물론 여러 논자들이 개별 비평과 자율적으로 얽히며 웹상에서 산개해나가는 비평적 대화에 이르기까지. 관심만 기울인다면 약간의 시차를 두고 불연속적으로 오가는 풍부한 대화를 목격하고 이야기를 이어볼 수 있었다. 각주와 인용을 통해 직접 말을 거는 방식 외에도 읽는 자의 관점에 따라 새롭게 구성되는 대화적 맥락까지, 실로 다양한 대화 형식이 전개되었다.
그 가운데에는 논자들이 상이한 앎에 근거해 설정한 각기 다른 입각점이 도드라지기도 했다. 메타비평적 기획에 의구심을 드러내며 그 정치적 효과를 심문하는 글들이 적지 않게 제출되는 사이, 누적되어 있는 말들을 섬세하게 갈라내며 조금이라도 더 정확하게 부딪쳐보려 시도하는 글들의 공력과 마음 씀에 눈길이 더 많이 갔던 것도 사실이다. 한편 작품에 대한 사랑과 비평의 결속성을 애써 되짚으며 치열한 대화의 필요성을 상기시키는 글들은 물론, 메타비평적 기획 아래 작품을 호명할 기회가 줄어드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에도 관심이 갔다. 다만 근래 메타비평에 관한 특집에 상당한 지면이 할당되었음은 사실이되, 메타비평과 작품에 관한 논의가 정말로 상호배타적인지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은 비평간 대화에의 열의와 열기란 ‘유행’이 흘러가며 이내 사그라들 일시적인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를 위한 지면이 계속 마련되어야만 한다는 식의 당위로 건너뛸 필요는 없다. 무엇이 어떻게 지속되어야 하는지, 그것이 진정 지속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질문하며 서로의 상이한 이해와 오해를 들추어보는 ‘과정’이야말로 중요할 테니 말이다. 이때 갖가지 방향으로 뻗어나가는 변화의 궤적을 역사화하고 의미화하는 작업이란 사후적으로만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가늠해보려는 시도 자체는 꾸준히 이루어질 수 있을 것 같다. 이를테면 동시대 문학비평장의 행위자들이 어디에 말을 걸고 있는지, 그 말 걸기가 어떠한 패턴을 형성하며 그 가운데 무엇이 조금씩 변동하고 있는지 데이터를 바탕으로 분석하는 시도 말이다.1 이는 자신이 선 자리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직관을 동원하는 일과는 다르다. 낯선 곳에서 바라보는 시선을 통과함으로써 각자가 이 장에, 서로에게 연루된 방식을 관조하며 저마다가 선 자리의 맹점을 멀리서 응시하는 일에 가까울 것이다.
이러한 견지에서라면 비평적 대화의 조건 자체를 되짚는 작업 또한 중요할 것인바, 우리가 읽고 쓰는 것과 관련한 조건에 나타난 변화들을 점검하는 일이 그러하다. 이는 물론 제도 비평을 포함하되 이에 국한되지 않는 ‘기술적·제도적 네트워크’로 확장되는 문제이다. 기실 문학을 둘러싸고 이루어지는 인간들의 다양한 행위가 기술환경의 변화와 매체적 조건의 변동을 비롯한 온갖 비인간적 요소들과 복잡하게 얽혀 있으며, 그러한 것들이 경우에 따라 인간의 사유와 행위성 자체를 틀 지우는 강력한 힘을 행사한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2 그러나 읽기와 쓰기라는 행위를 수행하는 인간이 의존하고 있는 무수한 비인간적 요소들, 말하자면 의사소통의 물질적 토대는 비평의 영역에서 괄호 쳐지곤 한다.
강수환 『다르게 보는 용기』(창비)
이러한 맥락에서 강수환 『다르게 보는 용기: 새로운 세기의 아동청소년문학』은 주목할 만한 평론집이다. 이는 저자의 문제의식이 오늘날 읽기와 쓰기가 수행되는 근본 조건의 변화를 감각하고 그 감각을 누실하지 않은 채로 문학비평을 수행하려는 데에서 비롯된다.
총 3부로 구성된 평론집에서는 특히 1부에 실린 글들이 눈에 띄는데, 그 가운데에는 「재현의 언어를 청소년에게」와 같이 ‘정치적 올바름’을 둘러싼 논쟁을 정면으로 다루며 재현의 윤리를 첨예하게 되짚는 글도 있다. 이 글에서 저자는 아동청소년문학에서 차마 재현하기 어려운 현실의 참혹함을 ‘재현 불가능성’에 기대어 회피하지 않고 ‘다르게 바라보는 용기’를 요청한다. 이와 같은 제언이 당위의 차원에만 머물지 않고 단요 장편소설 『마녀가 되는 주문』(책폴 2023)과 백온유 장편소설 『페퍼민트』(창비 2022) 등 매우 적절하고도 탁월한 텍스트에 관한 분석을 경유함으로써 이루어진다는 점이 미덥다. 특히 ‘있어야 할 현실’을 상상하고 재현하기를 요청한 한 평문의 문제의식에 의문을 제기하며, 오히려 ‘있어야 할 현실’을 말하지 않음으로써 급진적인 정치성이 발휘될 가능성을 되묻는 문제제기 또한 날카롭다. 다만 이 소설들이 재현하는 청소년들의 세계와 오늘날 청소년이 처한 현실을 더욱 적극적으로 겹쳐볼 필요가 있지는 않은지, 소설들이 던지는 질문을 고려했을 때 인물간의 관계와 정서에 초점을 맞춘 분석을 돌봄의 체계에 관한 논의로 확장할 필요가 있지 않은지 의문이 남기도 한다.
한편 「은하계를 여행하는 아동청소년문학평론들」의 경우 2021년 9월부터 2022년 10월까지 발표된 98편의 아동청소년문학 평론들에 인용된 저자 데이터를 모아 ‘인용 연결망 네트워크 모델’을 구축하고, 그 분석을 바탕으로 비평의 현재를 점검하면서 앞으로의 방향성을 제언한다. 이는 앞서도 거론한 ‘멀리서 읽기’가 아동청소년문학 비평장에 관하여 수행된 사례로서 참고가 된다. 그러나 기술과 매체 환경의 변화 등에 관한 비평적 시각과 관련해서라면 역시 「지금부터 로봇들과 대화해 보시지 그러세요?」와 「디스/리스펙트 시대의 비평」과 같은 글들에 주목하게 된다. 이 글들은 챗GPT로 위시되는 생성형 AI의 상용화나, 조회와 구독, 알고리즘의 원리로 감염의 커뮤니케이션을 확산하는 유튜브의 막대한 영향력 등을 문제의식의 거점으로 삼는다. 그리고 그러한 변화가 “우리의 글쓰기에 (이미) 개입하기 시작했다”(17면)는 전제 위에서 앞으로 우리의 의식이 어떻게 구성되어나갈 것인지, 거기에 우리가 개입할 여지는 없는지 등을 사유한다.
이를테면 「디스/리스펙트 시대의 비평」에서 저자는 오늘날 학생들이 비평적 글쓰기에서 수행하는 ‘비판’이 대개 유튜브의 리뷰를 통해 학습한 형태라는 점을 짚으며 글을 시작한다. 이때 유튜브라는 매체에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접속하는가에 따라 가치가 창출되는데, 학생들의 비판과 칭찬이 수행되는 역학도 이러한 원리하에 이루어진다. 이에 저자는 매체이론가 키틀러(F. Kittler)를 경유하여 이런 질문을 던진다. 유튜브를 통해 비평을 학습하는 이들에게 공유되는 “비판이나 비판의식이라는 것도 이제는 새롭게 정의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119면) 이어서 저자는 학생들이 수행하는 ‘비평’이 사실상 힙합 경연 프로그램 「쇼미더머니」의 래퍼들이 수행하는 ‘샤라웃’(shout out)과 ‘디스’(diss)의 형태와 유사함을 지적한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가사의 내용이 진실인지가 아니라 정서적인 표출을 통해 상대방을 감염시키는 데 성공하는지 여부이며, 이때 활용되는 ‘리스펙트냐 디스냐’ 식의 양분된 언어는 감염에 효율적인 매개라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저자는 좋아요/싫어요, 디스/리스펙트적 언어에 친연성을 가진 세대에게 오늘날 문학이 과연 어떠한 의미를 지닐 수 있는지를 묻는다. 그럼에도 출판 매체를 바탕으로 한 비평과, 모방과 감염의 체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비평이 포개어지는 지점이 분명 존재함을 상기하며 글을 맺는다.
이 평론이 재미있게 읽히는 까닭은 구체적인 문제상황, 즉 글쓰기 수업에서 많은 학생들이 개연성 운운하며 작품을 혹독하게 비판하는 현상에서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하는 데에서부터 출발하여, 평론가가 지닌 솔직한 의문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논리를 전개해나가기 때문이다. 저자는 유튜브의 영화 리뷰 조회수가 138만회에 달한다는 점을 지적하며, 과연 오늘날 “출판 매체를 전제로 한 비평 가운데 어떤 글이 1년 만에 대중 사이에서 이만큼 읽힐 수 있을까?”라고 회의한다. 이어 “아니, 전통적인 관점에서 1년 사이에 138만 회 이상 읽히는 비평이 과연 좋은 비평으로 평가될 수 있기는 할까?”(124면)라고 되묻는데, 이처럼 전통적 매체와 새로운 매체를 대별해나가는 글의 흐름 또한 흥미롭다. 한편 자유자재로 경계를 가로지르고 필요에 따라 맞붙이며 저자만의 이론을 펼치는 방식에서 쾌감도 느껴진다. 가령 유튜브 리뷰에서 이루어지는 비판과 래퍼들 간에 이루어지는 비판의 유사성을 발견하며 이를 정서적 감염으로 의미화하는 지점은, 유튜브라는 매체나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생리를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이들은 물론 소셜미디어의 생태학에 친연한 이들에게도 설득력있게 다가갈 것이다.
다만 이 글의 논리적 추진력이 대개 일반론과 직관에 의지하여 마련되기에 하나씩 되짚어보자면 의문이 남는 지점도 적지는 않다. 예컨대 저자는 출판 매체를 전제로 한 비평이 ‘동일시’를 요구하며, 이때 비판이란 문단의 폐쇄성에 대한 비판, 즉 “폐쇄적인 권력을 생산하는 어떤 동일시의 구조에 틈을 내려는 시도”(126면)라고 논한다. 그러나 이는 문학장에서 수행되는 비평과 비판 모두를 지나치게 협소화하는 시각이다. 한편 글 전체에 걸쳐 상정되는 엄격한 대립과 단절의 구도가 글의 말미에 이르러서는 병존과 의존의 관계로 급히 뒤집힌다는 점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과연 이러한 구성은 이른바 ‘전통적 매체’와 ‘새로운 매체’의 경계를 이미 수도 없이 가로지르는 행위자들에 관해서는 무엇을 새롭게 발견하게끔 해주는가? ‘두 세계’가 양분되고 있다는 진단은 비평가의 기획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전략적으로 과장된 것은 아닌가? 또한 문학비평과 유튜브에 올라오는 리뷰 영상이 과연 저자가 제시하는 것처럼 그토록 다르게 읽혀왔는지도 따져볼 만한 문제다. ‘감염자들을 추수하는’ 원리가 문학비평장에서 나타나는 양상도 심심치 않게 떠올릴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렇듯 저자와는 다른 독자 자신만의 경험과 판단을 덧붙여 여러 질문들을 던지게끔 추동한다는 점이야말로 이 글의 매력이다. 이는 저자의 비평적 태도와도 관련되어 있다. 인간의 지식체계를 뛰어넘는 광대하고도 복잡한 문제를 장악하고 내려다보는 듯한 포즈를 취하는 대신, 자신이 마주한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문제의 실마리를 잡아 비평적 화두로 건져올리고 거듭 질문을 던지면서, 그 문제를 다루는 나름의 틀을 구성해내는 ‘과정’이야말로 이 평론집에서 가장 힘주어 읽고 싶은 지점이기도 하다.
이는 「지금부터 로봇들과 대화해 보시지 그러세요?」에서도 발견된다. 저자는 학생이 챗 GPT로 과제물을 제출한 이른바 ‘문제’상황에서 글을 시작한다. 그러한 상황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거나 혹은 익숙한 ‘정답’으로 덮어버리지 않고 그 자체를 ‘질문’으로서 진지하게 대면하는 것, 여기에서 글의 출발점이 마련된다. 이 글에서 저자는 생성형 AI의 출력물이 진정으로 무엇인가를 생성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묻는다. 이 질문은 종전의 휴머니즘적인 창의성 관념을 고수하는 데로 돌아오기 위해 미끼로써 던지는 ‘답이 정해진 질문’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읽기와 쓰기가 거대언어 모델의 계산처리방식의 영향하에 놓이리라는 전망을 수용하면서도, “그럼에도 세계를 새롭게 읽고 쓰는 방안을 마련하려면 어떤 접근이 필요한지를 묻”(26면)기 위해 애써 디뎌보는 징검돌 같은 질문이다. 몇개의 징검돌을 스스로 놓고 건너가며 저자는 인간과 기계 사이의 상호 대화에 있어서는 “이미 답을 알고 있다며 젠체하는 이가 아닌, 알고 싶은 것이나 묻고 싶은 것이 더 많은 쪽”(28면)이야말로 생성형 AI를 더욱 독창적으로 활용할 수 있으리라고 논한다. 그리고 생성형 AI가 안착하는 시기에 이르러서는 우리의 생각과 지식, 기억 등이 ‘무지를 생성의 원천 삼는’ 방식으로 구성될 것이라고 전망하며 김이환의 단편소설 「구름이는 어디로 갔나」(김동식 외 『일상 탈출 구역』, 책담 2022)에 대한 소개로 글을 맺는다.
이제 이 소설을 경유하면서 강수환의 평론집에 관한 리뷰를 마무리해볼 수 있을 것 같다. 「구름이는 어디로 갔나」는 인공지능이 로봇들과 대화하며 ‘구름이’라는 로봇의 비밀을 밝혀내는 한편 자신이 잘 이해할 수 없었던 감정을 새롭게 발견하고 깨닫는 과정을 그리는데, 소설은 전체가 대화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형식을 통해 중요한 것은 결과값이 아니라 누적되어가며 맥락을 형성하고 풍부해져가는 대화의 ‘과정’ 그 자체임을 보여주는 가운데, ‘무지’야말로 대화를 통한 꾸준한 관계 맺기를 추동하는 동력임을 드러낸다. 그런데 이는 비평적 대화와도 그리 멀지 않은 이야기인 듯하다. 텍스트에 관한 무지야말로 비평을 추동하거니와, 비평적 대화란 내가 믿는 정답을 확인하는 작업이 아니라 대화를 통해 텍스트와 더욱 엉키는 과정이자 무지에서 또다른 무지로 건너가는 작업에 가까우니 말이다. 무지를 생성의 원천 삼는 대화의 과정으로서의 비평, 이 원칙에 비추어 강수환의 평론집을 읽어보는 것 또한 이 책을 향한 하나의 말걸기 방식이 될 수 있겠다. 이러한 원칙에 얼마나 충실한지, 혹은 이 원칙을 어떻게 흥미롭게 배반하는지를 가늠해보는 과정이 또다른 비평적 대화의 물꼬를 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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