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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김태호 『한글과 타자기』, 역사비평사 2023
타자기로 톺아보는 한글 기계화라는 문제
전은기 全恩基
서울과학기술대학교 IT정책전문대학원 강사 eunki000@gmail.com
오늘날 연필이나 펜으로 종이에 글을 쓰는 경험은 쉽지 않은 일이 되었다. 이제 글은 ‘쓰는 것’이라기보다 ‘치는 것’으로 변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단순히 기록물을 생산하는 도구가 바뀌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의사소통 방식 자체가 변화했음을 뜻한다. “매체가 우리의 상황을 결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렇기 때문에) 그 상황을 자세히 설명할 필요가 있다.”(프리드리히 키틀러 『축음기, 영화, 타자기』, 유현주·김남시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9, 7면) 어쩌면 기술결정론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이 선언적 문장을 인간의 삶이 어떻게 매체에 의해 조건화되었는지 보여주어야 함을 강조하는 뜻으로 읽는다면 김태호의 『한글과 타자기: 한글 기계화의 기술, 미학, 역사』는 어떨까? 이 책은 현재 지배적 전자매체인 컴퓨터와 휴대전화보다 이전의 매체인 타자기라는 사물의 생태계를 보여줌으로써 오늘날 우리 삶의 조건들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적절히 그려내고 있다.
다른 자판이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떠올려볼 기회조차 없이 두벌식 자판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1980년대 이후 세대들에게 이 책은 조금은 불친절해 보일 수 있다. 특히 타자기를 직접 사용해본 적 없는 사람들은 각종 기계 장치의 작동원리에 관한 이야기나 이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된 도면들을 봐도 각각의 타자기가 작동하는 원리를 쉽게 이해 못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이 불친절이 약점으로 작용하지는 않는다.
저자는 마치 고고학자처럼 현재를 이해하기 위해 과거를 파헤치는 일종의 발굴 작업을 수행한다. 이를 통해 독자들은 표준화 이전 한글 타자기 생태계의 ‘종 다양성’을 마주하게 된다. 저자의 고고학적 탐구는 타자기의 역사라고 부를 만한 전체(whole)를 보여주지 않는다. 타자기의 기원에서부터 현재의 지배적 자판 형태까지 이어지는 하나의 서사를 구현하지도 않는다. 책의 목표가 당시 상황을 재현하는 데 있지도 않다. 저자는 독자들에게 자신이 발굴해낸 과거의 편린들과 마주치게 할 뿐이다. 이 책의 추천사를 쓴 타이포그래피 연구자 유지원의 말을 빌리자면, 저자 김태호는 “한글 타자기의 과학기술사를 씨실, 공병우라는 입체적인 인물을 날실 삼아” 한글 기계화의 굴곡과 분기점을 기워낸다.
익숙지 않은 타자기들을 둘러싼 기술문화적 맥락들을 살피며 이종(異種)성으로 가득했던 역동적 순간들과 마주치면서 독자들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현재의 기술환경을 도리어 상대화할 수 있게 된다. 이처럼 저자가 독자에게 제공하는 것은 일종의 횡단적 여행이다. 기술사라는 방법을 통해 제공되는 이 여행은 오늘날 지배적인 두벌식 자판 형식의 타당성에 외부가 존재할 수 있다는 미학적 감각을 선사한다.
저자도 언급하지만, 사실 타자기는 매체를 연구하는 다양한 학문 영역에서 주요하게 다뤄져온 대상이다. 하지만 비서구, 특히 한국에서도 주요하게 여겨져왔냐고 묻는다면 그렇지 않다. 서구에서 무수히 연구되어온 타자기라는 사물을 왜 한국에서도 다뤄야 하냐고 질문할 수 있을 것이다. 당연하게도 한글 타자기에 대한 연구는 중요하다.
기계는 특정한 사회문화적·기술적 조건이라는 여러 제약 안에서 만들어진다. 상이한 사회문화적·기술적 토대를 보유한 사회에서 같은 기능을 수행하는 기계를 만들어도 그 설계 속에 서로 다른 맥락들이 들어가게 된다는 말이다. 따라서 타자기의 수입과 변용 과정을 살피면 한국의 토착적·사회문화적·기술적 맥락들이 기계에 어떻게 투영되는지 확인할 수 있다. 우선 가장 과학적인 문자라는 한글이 타자기라는 기술과 그다지 궁합이 맞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단적으로 자모의 음성학적 역할을 알려주는 모아쓰기는 한글 과학성의 한 예로 거론된다. 하지만 모아쓰기를 타자기에서 구현하려면 한자리에 한 글쇠만 찍어내면 되는 영문 타자기와는 달리 한 장소에 자음과 모음을 찍어야 하기에 자판 배열, 타자 메커니즘 등 여러가지를 변형시켜야만 했다. 근대와 동일시되었던 타자기라는 기술과 가장 과학적이라고 믿던 한글이 조우하면서 만들어낸 여러 한글 타자기들은 우리에게 근대란, 과학이란, 또 기술이란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든다.
이 책에 아쉬운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선 공병우라는 개인이 한글 기계화의 역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으나 하나의 장(3장) 대부분이 그의 생애에 대한 서술로 채워진 것은 자칫 특출 난 발명가의 능력과 노력이 기술의 역사와 등치되는 듯 보일 수 있다. 책에서 언급한 것처럼 한글 기계화의 역사에서 ‘공병우타자기’만이 생태계를 독점적으로 구성했던 것이 아니고 ‘김동훈타자기’와 과점체제를 형성했다고 할 때(168면), 그 과점의 형태에 집중해볼 필요도 있다. 과점의 형태였다고는 하지만 정부 부처별로 보면 한 종류의 타자기가 한 부처 안을 독점했다는 사실, 즉 국방부 등은 신속한 의사소통을 중시하는 공병우타자기를 선호하고, 문교부 등에서는 반듯한 글씨를 제공하는 김동훈타자기를 선호했다는 사실(172면)은 두개의 타자기로 대표되는 이질적인 관료문화가 어떻게 경합했고, 자판 표준화를 통해 어떻게 통합되었는가 하는 질문에 답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1960년대 이미 민간기업이 구매한 타자기의 수가 관공서의 세배에 이르렀음에도(165면) 타자기 이용을 군과 정부 같은 공적 영역에서만 주로 서술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각각의 타자기들이 각기 다른 과학기술적 상상을 바탕으로 생산되어 유통되었음을 반추해볼 때 타자기 이용자이자 소비자인 민간의 생활문화가 어떻게 타자기에 의해 구성되었는지, 또 민간은 어떻게 타자기의 생태계를 조절하려 했는지 살펴보는 것에는 조금 소홀했다.
물론 이런 아쉬운 점들을 저자가 모두 짊어지고 해결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저자의 말대로 한국인이 한국어를 쓰고 한글로 그것을 표기하는 한 한글을 어떻게 기계화할 것인가의 문제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318면). 저자는 앞으로 계속될 한글 기계화의 문제를 진지하게 바라보고 논의에 함께할 것을 요청한다. 이 책은 그 논쟁으로 독자들을 초대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가치를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