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평
엘리엇 페이지 『페이지보이』, 반비 2023
세상의 수많은 페이지보이들을 위해
캔디·다림 윤 尹多琳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사무국장 reheaven@gmail.com
재작년 5월, 친구가 인스타그램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상의 탈의해봄’이라는 글과 함께 사진을 올렸다. 트랜스젠더인 친구는 당시 오랜 고민 끝에 가슴절제수술을 진행했던 터였다. 얼마 후에 만난 우리는 트랜스젠더 배우인 엘리엇 페이지의 상의 탈의 사진을 함께 언급하며 한참을 이야기 나누었다. 해변에서 수영팬츠만 입고 사진을 찍는 그 별것 아닌 일을 꿈꾸는 이들이 있다. 오랜 고통과 고민의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찍을 수 있었던 그 사진은, 그에게도 페이지에게도 가장 자랑스럽고 행복한 사진일 것이다.
인스타그램에서 상의를 탈의한 채 환하게 웃고 있던 엘리엇 페이지가 『페이지보이』(Pageboy : A Memoir, 2023, 송섬별 옮김)라는 회고록을 출간했다. 그가 길고 힘든 여정을 거쳐 스스로를 사랑하기로 마음먹고 자신을 받아들이기까지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을 터이다. 특히나 그가 ‘작가의 말’에서 밝힌 것처럼 “퀴어 서사는 매번 꼬투리 잡히고, 그보다 더 심각하게는 일반화되어서 한 사람이 모두를 대표하는 격이 된다.” 그런데도 “퀴어와 트랜스로 살아가는 삶에 관한 꾸준한 오해를 없애 줄 또 하나의 먼지를 더할 수 있기를”(10면) 바라며 써내려간 그의 글은, 트랜스젠더의 삶을 함께 바라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소중하고 특별한 퀴어서사다.
한 사람이 자신을 트랜스젠더로 정체화하고 커밍아웃하고 자신의 성별대로 살아가기란 만만한 일이 아니다. 각각의 과정 하나하나가 단언컨대 수월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소수자 인권단체에서 활동하다보면 종종 ‘제가 트랜스젠더가 맞을까요?’라고 묻는 상담전화를 받는다. 질문에 대한 응답은 늘 ‘자신의 정체성은 전화해주신 분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계십니다’이다. 누구도 내가 누구인지를 ‘인정’해주고 ‘허락’해줄 수 없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너무나도 절박하게 누군가의 인정과 허락을 구하곤 한다. 자신을 똑바로 마주하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두렵기 때문이다.
엘리엇 페이지 또한 오랜 시간 친구들에게 자신이 ‘트랜스젠더’일지 묻고 또 물었다. 어린 시절부터 30대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성별 위화감(gender dysphoria)을 느꼈지만 스스로에게 ‘트랜스젠더’라는 이름을 붙이기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마침내 페이지는 자신을 마주한다. 나 자신으로 “존재할 수조차 없다”는 사실을 더는 견딜 수 없었던 그는, 자기 자신에게 “이런 기분으로 살지 않아도 돼”라고 이야기한다. 어렵고 무서운 길이겠으나 그 길을 가기로, “스스로를 사랑하기로 마음먹는”다(372면).
그가 트랜스젠더로 커밍아웃하고 성확정 수술을 하고 책을 쓰고 인스타그램에 상의 탈의 사진을 올리는 행위에 누군가는 살아갈 힘을 얻는다. 지난 수년 동안 트랜스젠더 혐오는 심화되었고, 어떤 이들은 이러한 혐오 사회에서 삶을 등지기도 했다. 그런 중에 출간된 『페이지보이』는 선배 트랜스젠더로서의 삶의 여정을 보여줌으로써 많은 이들에게 공감뿐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서 존재할 힘을 전해준다. 그의 존재함과 생존함이 어떤 이들에게는 ‘나도 할 수 있겠어! 해보자!’라는 용기와 희망이 되기도 한다. 『페이지보이』가 소중한 이유는 저자의 삶에서 우리의 삶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우리와 다른 삶을 살아온 그가 자기 삶을 넘어 모두의 삶을 함께 고민해야 한다고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삶을 함께 고민하는 것은 페이지뿐만이 아니다. 이 책에서 우리는 트랜스젠더의 주변인과 앨라이(ally, 성소수자 인권 지지자)의 역할 또한 확인할 수 있다. 그의 주변에는 고민을 함께 나누고 곁을 내어준 사람들이 존재했고, 힘든 순간마다 함께했던 이들 덕분에 그의 시간이 지속될 수 있었다.
하지만 『페이지보이』 밖 세상은 여전히 멈추어 있는 듯하다. 지난 몇년간 트랜스젠더 관련 기사들이 줄을 이었고, 최근에는 트랜스젠더 여성인 풍자가 MBC 방송연예대상 신인상을 수상하기도 하면서 대한민국에서 트랜스젠더라는 단어는 이제 더이상 낯설지 않다. 트랜스젠더를 주제로 하는 서적들도 꾸준히 출간되고 있다. 그럼에도 아직 많은 트랜스젠더들이 사회의 혐오와 차별 때문에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지 못한다. 지난 2021년 서울연구원에서는 서울시민 문화다양성 인식 시범조사(「서울시 문화다양성 시민인식지표 개발과 시범조사」)를 실시했는데 이 과정에서 서울시민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47.1%만이 성소수자를 존중한다고 응답했다. 이는 장애(72.7%)나 국적(71.6%) 등 다른 항목에 비해 가장 낮은 포용도를 보이는 결과다. 한편 지난 2023년 7월 한국리서치에서 진행한 성소수자 인식조사(「[2023 성소수자인식조사] 성소수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에 따르면 전체 응답자 10명 중 1명(12%)이 가족이나 친척, 친구 등 지인 가운데 성소수자가 있다고 답했다. 우리나라 성씨 인구분포와 비교해본다면 인구 수 3위인 박씨(8.43%) 이상의 숫자이다(통계청 2015). 하지만 트랜스젠더에 대해 적대적이라고 대답한 사람은 전체의 42%에 이른다. 또한 직장동료와 친한 친구의 커밍아웃을 받아들인다는 응답은 51%와 48%로 절반에 미치지 못하고 자녀와 부모의 커밍아웃을 받아들인다는 응답은 각 34%에 불과하다. 엘리엇 페이지의 커밍아웃, 트랜스젠더 여성의 지상파 방송 출연과 수상 소식은 분명 사회가 점점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며 트랜스젠더 당사자들에게 힘이 되는 소식이었지만, 그로 인해 트랜스젠더들의 인권 그 자체가 더 향상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트랜스젠더들이 나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사회는 그들 스스로가 아니라 모두 함께 만들어가야 한다.
엘리엇 페이지라는 한 사람의 퀴어서사를 따라가다보면 우리는 그의 삶을 함께 경험하고 그의 곁에 서 있게 된다. 그가 마주했던 편견과 혐오, 평생을 싸워온 수치심과 고통스럽게 겪어낸 성별 위화감은 그뿐 아니라 세상의 많은 트랜스젠더들이 현재 겪어나가고 있다. 세상의 모든 페이지들의 다르지만 같은, 같지만 다른 이야기에 더 많은 우리가 함께할 수 있기를,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기에 행복한 사진을 더욱 많이 볼 수 있기를 기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