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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리처드 플래너건 『들끓는 꿈의 바다』, 창비 2023

우리는 아직도 기후위기를 모른다

 

 

최정화 崔正和

소설가 daysmar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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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들이 ‘어떻게 하면 독자가 허구를 진짜라고 믿게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사람들이라면 지금 시기의 소설가들에게는 고민이 하나 더 늘어났는데, 바로 ‘어떻게 하면 독자가 현실을 믿게 할 것인가’다. 기후위기 소설에 대한 이야기다. 『들끓는 꿈의 바다』(The Living Sea of Waking Dreams, 2020, 김승욱 옮김)는 치밀하고 섬세하게 직조된 클라이파이(cli-fi) 소설이다. 꺼지지 않는 산불로 많은 것을 잃은 오스트레일리아 테즈매니아주의 소설가 리처드 플래너건은 돈과 권력을 갖게 된 대신 자연과 삶과 죽음을 ‘모르는’ 인간이 처한 비극을 냉정하리만큼 침착한 시선으로 그린다.

이 소설은 애나, 토미, 터조 삼남매가 어머니 프랜시의 말년을 병원에 맡기면서 일어나는 비극을 중심축으로, 애나의 신체 일부가 사라지는 증상, 애나의 아들 거스의 게임중독과 그에 따른 사회적 고립을 번갈아 다룬다. 그러면서 사랑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채 생명에 무감해진 현대인의 모습을 잔인할 정도로 리얼하게 묘사한다. 애나와 터조는 죽음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모른다. 그저 어머니가 살아 있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자신들이 가진 모든 수단을 동원해 연명치료를 끝까지 밀어붙인다. 프랜시는 고문에 가까운 치료를 받으면서 고통스러운 마지막을 맞는다.

몇몇 클라이파이 소설들이 종말을 맞이한 지구의 모습을 묘사해 ‘기후위기’ 자체를 서사의 중심축에 놓는 것과는 반대로, 플래너건은 지금 여기의 현실을 그대로 가져온다. 산불이 꺼지지 않는데 실내는 서늘하리만큼 시원하다. 우리가 현실에서 도피해 몇초짜리 쾌락을 맛보려고 스마트폰을 꺼내들듯, 소설 속 인물들도 그렇게 한다. 애나는 스트레스가 극에 달한 상황에 처할 때마다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데, 애나가 도망쳐 다다른 스마트폰 속에는 기후위기 뉴스들이 가득하다. 그는 숲이 사라지고 동물들이 죽어가는 화면을 본다. 그 뉴스가, 그로 인해 “점점 커지는 두려움이 비뚤어진 위안이 되었”(117면)다고 고백한다.

소설가 정용준은 감각의 앎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소설이 관념적 앎을 감정으로 알게 하고 그래서 앎이 마음이 되고 결심과 행위를 추동하는 역할을 수행해내리라고 기대했다. 미국의 소설가 조너선 사프란 포어(Jonathan Safran Foer)는 사람들이 ‘기후위기를 알고 있을 뿐 믿지 못하고 있다’고 썼고, 작가 아미타브 고시(Amitav Ghosh)는 ‘알고 있지만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고시는 지식과 정보가 아닌 이야기와 노래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플래너건이 말하기를, 우리는 스마트폰 화면을 통해 매일 기후위기를 보긴 하는데, 보면서도 여전히 ‘알지는 못한다’. 우리가 그 참혹한 장면들을 일상으로부터 회피하고 위안 삼기 위한 콘텐츠로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기후위기는 언제나 지금 내 앞에 펼쳐진 일상보다 덜 중요한 일이거나, 적어도 내가 도맡아서 해결해야 할 일은 아니다. 기후위기 뉴스에 잠시 마음 한구석이 무거워지며 우울과 죄책감이 들지만 그로 인해 내 삶을 바꿀 도리는 없으니, 관련 게시물에 ‘좋아요’를 누르거나 슬픈 표정의 이모티콘을 클릭하면서 매순간 기후위기를 잊는다(나는 스마트폰이 아닌 다른 수단으로 우리가 지금 닥친 이 위기를 말하고 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손을 맞잡고 말이다).

소설에서 삼남매 중 유일하게 사랑을 실천할 능력이 있는 토미는 어머니의 임종을 충분히 돌볼 수 있는 인물이다. 그러나 애나와 터조는 가장 부족한 자식이었던 토미에게 어머니를 맡기지 못한다. 자신들의 무지와 무능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던 탓이다. 책장을 넘기면서 나는 몇번이나 ‘제발, 프랜시를 그냥 죽게 내버려두라’고 속으로 비명을 질러야 했다. ‘대체 누가 자기 어머니의 말년이 불행해지기를 바라겠어?’라고 질문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이 소설을 읽고 난 뒤에는 입을 다물게 될 것이다. 잘 납득이 되지 않는가? 지금 이 순간 현실에서 우리에게 똑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 대체 누가 지구가 멸망하기를, 다른 동식물들이 멸종하기를 바라겠는가?

『들끓는 꿈의 바다』는 인류에 닥친 이 엄청난 재난을 극복하는 것이 불가능해 보이는 무지하고 무능한 인간의 내면에 확대경을 들이댄다. 플래너건은 아마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우리는 기후위기를 보고 있지만 진짜로 알고 있지는 못한다. 심지어 아직 제대로 들여다보지도 못했다.’ 제대로 보지 않는다면 우리가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 대체 어떻게 알겠는가? 이 소설의 힘은 분명 ‘직시하게’ 하는 데 있다. 도망갈 데 없는 구석으로 독자를 밀어넣은 뒤 마침내 현실에 붙들어매고 우리에게 닥친 상황과 마주 서게 만든다. 이 소설은 아주 용감하고, 단단하고, 강력하다. 내가 읽은 것들 중 가장 뜨겁고 매서운 클라이파이다.

애나와 터조의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이 어리석고 잔인한 이들의 분량을 제발 좀 줄여달라고, 애나와 터조에 대해서는 이미 충분히 알고 있고, 내가 바로 현실에서 그들과 다를 바 없는 삶을 이미 살고 있으니 소설 속에서만이라도 토미의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작가에게 부탁하고 싶었다. 기대를 품었던 토미의 역할이 수동적이고 미미하게 전개된다는 점과, 갓난아이를 안은 희망의 상징으로 그쳐버린 결말만은 아쉬웠다. 끔찍한 현실을 리얼하게 보여주는 것만큼이나 이를 극복할 용기를 불러일으키는 것 또한 소설이 할 일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나 자신이 애나고 터조라고 고백하는 순간, 지금 내 삶의 방식이 실패했음을 직시했을 때, 비로소 내 안에서 토미가 깨어났다. 어쩌면 작가는 전략적으로 토미의 이야기를 숨겨둔 것이 아닐까? 독자가 스스로 토미를 깨우고 일으켜 살아 움직이게 하도록? 플래너건이 아껴둔 토미의 이야기를, 이제 우리가 현실에서 시작할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