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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한모니까 『DMZ의 역사』, 돌베개 2023
분단의 물질성과 수행성을 설명하기
전원근 全元根
사회학자 wonggui@gmail.com
분단이 하나의 체제일 때, 그것을 지탱하고 있는 물리적 기반은 무엇일까? 수많은 답변들 중 ‘비무장지대’(DMZ)는 아마도 가장 앞쪽에 위치할 것이다. 비무장지대는 인간과 정보, 사물의 이동을 형태화하고 통제하며 지속적으로 관리한다는 점에서 한반도에서 단일 규모로는 가장 큰 인프라스트럭처로 볼 수 있다.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이 거대한 인프라는 70년 이상 운영되어왔다. 따라서 미국의 국경장벽과 이스라엘의 분리장벽이 그렇듯이, 비무장지대는 수많은 생명과 삶의 형태에 영향을 주는 육중한 장치로서 우리에게 설명책임(accountability)을 부여한다. 비무장지대가 발산하는 자장 속에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우리 모두는 ‘그것이 무엇이었으며 무엇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해 해명할 책임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그리고 설명책임을 성실히 수행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역사적 분석이 요청된다.
비무장지대를 다룬 연구들은 주로 정책적 활용방안이나 각종 현황조사에 치우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설명’이 되기 어렵다. 의외로 역사적인 연구가 별로 없다. 비무장지대가 어떻게 지금의 모습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상세한 역사적 분석은 민북마을(민통선 북쪽에 위치한 마을)이나 인문경관 등 몇가지 연구를 제외하고는 찾아보기 어렵다. 오히려 비무장지대를 오랫동안 추적하여 촬영한 다큐사진 작가들의 사진집들이 힌트가 되곤 한다. 이에 반해 한모니까의 『DMZ의 역사: 한반도 정전체제와 비무장지대』는 비무장지대의 구상과 설치, 관리와 변화를 복합적인 시대적 맥락과 행위자들의 관계 속에서 추적하는 본격적인 비무장지대 역사서이다.
이 책은 단지 다양한 자료를 체계적으로 제시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비무장지대를 구성하는 구체적 요소들의 물질성과 행위자들의 수행성을 다루고, 그것을 개념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반(反)직관적인 통찰들을 제시하는 훌륭한 이론서이기도 하다. 설명 대상은 비무장지대를 ‘둘러싼’ 갑론을박에 머무르지 않으며, 복합적인 실천들을 통해 비무장지대의 물질성이 구축되는 과정에 대한 분석으로 이어진다. 우리가 비무장지대를 상상할 때 떠올리는 정형화된 경관들, 즉 철책과 초소, 초목의 식생과 같은 구체적인 사물들이 어떻게 분단이라는 체제와 수행에 연결되어 있는지를 흥미롭게 보여준다. 저자는 비무장지대가 전쟁이나 정전협정의 결과로 그냥 생겨나 그대로 있는 정적인 사물이 아니라 “끊임없는 변화를 거쳐서 (…) 적극적으로 만들어진(building)”(29면) 역동적인 과정임을 강조한다. 이 역동성을 그려낼 수 있는 밑바탕에는 역사학자로서 지난 20여년간 비무장지대에 대한 다양한 연구 프로젝트를 지속해온 경험과 꼼꼼한 자료 분석이 있다.
『DMZ의 역사』는 3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저자는 1장을 통해 비무장지대가 남과 북뿐만 아니라 국내외 여러 행위자 및 사건들과 관련하여 구상, 설치, 관리, 통제, 협상의 끊임없는 수행을 통해 만들어져왔음을 강조한다. 이는 ‘비무장지대’가 주어진 하나의 명사이기 이전에 동사의 형태를 가진 과정 혹은 현상이며, 다양한 관계망 속에서 그 성격이 계속 변화하는 ‘내부-작용’(intra-action)의 산물임을 함축한다. ‘누가 DMZ를 만들었는가’와 같은 익숙한 질문은 정전회담 당사국을 호명하는 낯익은 답변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반면에 ‘DMZ는 어떻게 지금의 모습이 되었는가’라는 질문은 특정 공간을 ‘(비)무장지대’로 만들기 위해 반복적으로 행해진 여러 실천들과 행위자들에 관심을 기울일 수 있도록 이끈다. 저자는 현황 파악조차 쉽지 않은 군사정전위원회 자료를 모아 이를 구성해낸다. “즉, 오늘날의 비무장지대는 처음부터 하나의 구상이나 조문으로 시작한 것이 아니라, 그 위치, 관리(기구 및 방식), 성격, 필요성 등에 관한 다양한 구상들로부터 시작하여 수많은 변화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47면)는 것이다.
2장에서는 1960년대 남북간 군사적 충돌과 갈등으로 인한 급격한 경관 변화과정에 주목한다. 이 시기 비무장지대는 오히려 “‘비’(非, de)가 빠진 무장지대(militarized zone)”가 되었다(209~10면). 저자는 이를 ‘비무장지대의 무장화’로 개념화한다. 냉전경관의 가장 상징적인 요소인 철책과 많은 초소들은 바로 이 시기에 형태를 갖추었다. 또한 비무장지대의 독특한 생태환경도 냉전정치에서 배태되어 구성되었음을 보여줌으로써 주로 인공적인 사물과 상징물에 주목해온 기존의 ‘냉전경관’ 연구에서 더 나아간다. 비무장지대의 자연경관조차 국제적 환경보호의 흐름과 군사적 대립의 강화 사이의 모순적 생산물이자, 냉전과 분단하에서 형성되어온 환경인 것이다. 저자는 이를 ‘군사 생태’(military ecology)로 개념화한다.
마지막으로 3장은 비무장지대에 대한 다른 상상이 이미 역사적으로 수차례 시도되어왔다는 점을 보여줌으로써 이곳이 딱딱한 대결의 공간이 아니라 다채로운 변화 가능성이 상존하는 가변적 공간임을 강조한다. 저자는 1970년대 초 데땅뜨 시기뿐만 아니라, ‘평화공세’로 치부되어 검토되지 않았던 1950년대 중후반 북한의 비무장지대에 대한 제안들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러한 대안적 구상들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짚고 넘어가야 하는 이유는, 비무장지대가 그렇게 확고부동한 갈등과 대립의 공간이 아니며 언제나 변화를 상상할 수 있는 공간이었음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비무장지대의 평화화와 냉전분단의 극복은 ‘대박’을 노리는 하나의 완결된 정책이나 전통적·지정학적 고려에 의해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저자 한모니까는 풍부한 역사적 경험과 다양한 행위자들의 실천에 근거한 “새로운 경계선”(505면)을 만들어가자고 이야기한다. 이 책은 비무장지대를 ‘장벽’ ‘생태의 보고’ ‘전시장’ 그리고 근대국가와 영토라는 감각에 다른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가능성의 공간으로 다채롭게 그려낸다. 1970년대 중반 이후 연이어 발견된 ‘남침땅굴’이 독재정부의 ‘총력안보’ 구호를 정당화하는 경관으로 일반 국민에 개방되기 시작하면서 비무장지대는 본격적인 안보관광화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2000년대 남북교류의 협력과 좌절, 아프리카돼지열병의 매개로 지목된 ‘탈북 멧돼지’에 이르기까지 비무장지대의 역동은 멈춘 적이 없다. 후속편이 필요한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