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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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이원기

이원기 李元基

서울과학기술대 문예창작학과 4학년. 1999년생.

dnjsrlduddnj@naver.com

 

 

 

시간의 틈을 넘는 목소리들

진은영의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읽기

 

 

1. 문학과 목소리, 목소리의 문학

 

1985년 작고한 이딸리아의 소설가이자 언론인인 이딸로 깔비노(Italo Calvino)는 자신의 SF 우화 단편집 『모든 우주만화』에서 “세상만사를 직접 보고 겪”으며 진화의 과정을 거쳤다는 ‘크프우프크’(QFWFQ)라는 “허풍스러운 이야기꾼”1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연체동물 상태에서 조개껍질을 만들어내고 그 이후로 이어지는 진화의 과정을 회상하는 장면에서 크프우프크는 “시각성에 대한 독특한 이론을 전개”하는데, 그에 따르면 “이미지는 수동적으로 지각되는 두께 없는 피막이 아니라 사물의 시각성이 능동적으로 발휘된 효과다. 먼저 껍질이라는 시선을 끄는 볼거리가 출현하고, 그에 이끌려 눈과 시신경이 발생한다”2는 것이다. 크프우프크는 말한다. “그 눈들을 있게 한 건 나였습니다. 내가 적극적인 역할을 했지요. 그것들에 최초의 재료, 즉 이미지를 제공했으니까요. 눈과 더불어 나머지 모든 것이 생겨났습니다.”3 이에 관해 윤원화는 “이미지가 눈을 만든다는 크프우프크의 주장은 언뜻 비논리적으로 들리지만, 실제로 눈에 보이는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역량으로 간주될 수 있다”고 쓴다. “가시적 세계와 그 거주자들의 시각적 역량은 상호적으로 형성되며, 여기에는 보는 힘만큼이나 보이는 힘이 작용한다”4는 것이다. 보기 원하는 욕구가 눈을 만든다는 이러한 SF-진화론적 상상력에 기대어보자면, 마찬가지로 부르기 원하는 욕구와 듣기 원하는 욕구는 각각 입과 귀의 출현을 촉진할 수 있겠다. 정보가 먼저 있고, 이후 그것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욕구가 정보를 입력할 수 있는 입력장치를 만들어낸다는 논리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해볼까. 타자를 인식하려는 욕구, 인식하기 원하는 마음이 문학을 만들어냈다고, 그러니 타자를 인식하는 글쓰기인 문학은 자연발생적이라고 말이다. 사실 문학을 타자의 목소리에 대한 주목의 작업으로 이해하는 관점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누군가가 쓴 것을 다른 누군가가 읽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쓰기와 읽기의 메커니즘은 이미 그 자체로 소통의 한가지 형태이기도 하거니와, 이에 더해 문학에는 이야기를 전달하는 장치로서 언제나 가상의 서사를 이끄는 가상의 목소리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문학은 저자의 목소리이며, 동시에 그 안에는 가상의 목소리가 등장한다. 그러므로 문학은 ‘타자로서의 저자의 목소리’와 ‘저자가 상정한 가상의 타자의 목소리’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문학을 읽는 일이란 그런 점에서 목소리에 대한 이중의 주목, 또는 이중의 목소리에 대한 주목이라고도 할 수 있을 텐데, 그러니 타자의 목소리에 주목하고 그것을 듣고 그것에 대해 말하는 모든 일이 그 자체로 문학이라고 말한다고 해도 무리는 아닐 것 같다.

그러한 흐름 가운데 최근 우리 문학에서 발견되는 것은 목소리라는 개념에 대한 한층 적극적인 주목이다. 이때의 목소리는 시간성과 결합해 정치성을 갖게 된다는 특징이 있다. 목소리를 내는 행동은 언제나 특정한 상황과 그것이 일어나는 순간을 전제로 수행된다는 점에서 시간이라는 개념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따라서 본질적으로 시간성과 긴밀하게 밀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시간성 위에서 과거의 목소리는 역사가 되고 현재의 목소리는 정치가 된다. 동시대 우리 문학은 그런 점에서 매우 ‘정치적’이라고 할 만한데, 여기서 말하는 정치성은 넓은 의미의 정치, 한 사회 내부에 존재하는 윤리의 작동방식을 우선 일컫는다. 최근 우리 문학이 주목하여 호명하는 목소리의 주체들은 여성, 퀴어 등 인간의 범주를 넘어 동물, 식물, 심지어 사물과 AI 등 비인간의 영역으로까지 점차 확장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주목이 이론적 축적에서뿐 아니라 창작적 실천의 측면에서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오늘의 우리 문학이 주목하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가 바로 다양한 목소리임은 부인하기 어려워 보인다.5

이러한 현상을 방증하듯 『자음과모음』 2023년 봄호의 특집 코너는 “목, 소리”라는 주제 아래 일곱 필진의 이야기가 느슨히 엮였다. 게스트 에디터로 참여한 돌기민의 다음과 같은 문장은 목소리라는 키워드가 지금 우리 문단에서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 감을 잡는 데에 한가지 참조점을 제공할 수 있을 것 같다. “의미 부여해 귀 기울일 수 있는 음파의 대역폭은 어디부터 어디까지인가. (…) 적어도 들어야 할 때 듣고 말해야 할 때 말하길 바랄 뿐이다.”6 사회구성원으로서 들어야 할 때 듣고 말해야 할 때 말하는 태도는 얼마나 기본적이고, 그러나 또한 얼마나 갖추기 어려운 태도인가. 그러니 지금은 문학이 ‘목소리’를 매개로 우리 시대에 소통의 중요성을 환기하고 또한 그것을 꿈꾸게 하는 최소한의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다는 생각, 소통에 대한 문학-목소리의 가능성, 곧 소통에의 문학적 상상력이 우리 문학에 그 어느 때보다 요구되는 실정이라 할 만하다. 그리고 그러한 요구는 목소리의 문학, 문학의 목소리에 대한 관심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진은영의 첫 시집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문학과지성사 2003)7을 지금 다시 읽는 일은 그러한 맥락에서 자연스럽다. 이 시집의 시편들이 목소리라는 키워드로 서로 연결되며 읽히기 때문이다. 물론 시인의 이후 시들에서도 목소리는 동일하게 발견되는 키워드지만, 그것이 첫 시집에서만큼 집중적으로 다뤄지고 있지는 않다. 두번째 시집부터 나타나는 작업들은 그 목소리를 더욱 세공하여 첨예한 것으로 만들고 그렇게 얻은 목소리의 알레고리로 현실의 구체적 현상을 낱낱이 꿰뚫어 진열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지만, 첫 시집은 그러한 이후 작업들의 근원지 격으로서 보다 원초적이고 근본적인 시도, 곧 목소리 자체에 대한 일차적인 주목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특별히 다시금 검토해볼 만하다. 이에 더해 첫 시집에서는 다른 시집들에 비해 목소리라는 키워드가 유독 시간성과 결합된 개념으로서 다뤄지는 모습이 발견되는데, 이는 목소리가 제 역할로 기능하는(혹은 해야 하는) 자리로 시인이 지목하고 제시하는 곳이 다름 아닌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 위임이 드러나기에 이 사실은 또한 중요하다.

우리 문학의 담론과 의제 설정의 자리가 어느 때보다도 첨예한 정치성을 띠는 지금, 진은영의 첫 시집은 어쩌면 우리가 잊고 있었을 목소리의 근원적인 역할을 일깨우고, 특히 오늘의 시간 속에서 목소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지를 상기시킨다. 이때 목소리를 문학이라는 단어로 바꿔 읽어도 좋겠다. 문학이 언제나 목소리를 다루어왔고, 타인의 목소리를 주목하기 원하는 마음이 그것을 잉태시켰으며, 그러므로 문학이란 목소리의 글쓰기일 것이므로. 그리하여 이 글에서는 목소리와 시간성이라는 주제가 진은영의 첫 시집에서 한데 얽혀 그려지는 양상을 살피기로 한다. 먼저 시 속에서 과거를 배경으로 나타나는 목소리들을 살펴보고, 다음으로 현재의 목소리가 과거와의 관계 속에서 발화되는 지점을 톺아보며, 마지막으로 그러한 현재를 바탕으로 다시금 새로운 미래를 전망하는 곳으로 나아가는 목소리의 궤적을 추적한다. 이 읽기의 과정을 거쳐 우리는 진은영의 첫 시집이 오늘 우리 문학에 환기하는 문학-목소리의 가능성을 새삼스럽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2. 어제의 묘지를 뒤집기

 

제목부터 과거의 시간을 내걸고 있는 시 「어제」에서는 지워졌던 과거의 작은 목소리들을 복구하는 현재의 목소리가 등장함으로써 지배 담론이라고 할 만한 과거의 큰 목소리가 전복될 가능성이 제시된다.

 

강철 종이의 포크레인으로

어제들의 거대한 공동묘지를 뒤집을까?

오늘 혼자 부르는 노래는 지겹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을 명명한다, 베껴 쓰기의 시간이 돌아왔다고

—「어제」 부분

 

“공동묘지”는 앞서 등장한 “내/가 굶겨 죽인 수백만 마리”의 “귀여운 강아지”들로 비유된, “어릴 적” “데려다 키우고 싶었”던 “어제”들이 묻힌 장소다. 뒤이어 “오늘 혼자 부르는” 지겨운 “노래”가 언급되며 어제와 오늘이 대비되는데, 삶, 노래, 혼자가 오늘의 단어라면 어제는 죽음, 고요함, 공동 같은 단어들로 설명된다. 이때 화자는 “오늘을 명명한다, 베껴 쓰기의 시간이 돌아왔다고”. 그렇다면 ‘오늘’은 무엇에 대한 “베껴 쓰기”인가? 그것은 지난 세기의 철학과 이론, 즉 ‘어제’의 목소리다. “플라톤을 베낀다 마르크스를 베낀다 국가와 혁명을 베낀다/무엇을 할 것인가를 베낀다”. 이러한 어제의 목소리는 공동의 서사로서 “바위처럼 단단”하게 자리매김한 채 오늘의 문화/정치적 토대로 작동하는데, 그 단단한 목소리들을 어제 미처 깨뜨리지 못했기 때문에 오늘은 “메마른 곳”이 된다. 그 실패의 증거로서 제시되는 것이 바로 화자가 “데려다 키우”지 못해 굶어 죽게 만든 “수백만”의 어제들이 묻힌 “거대한 공동묘지”다.

이 지점에서 “바위에 떨어지는 빗물 같”은 두번째 “어떤 목소리”가 등장하는데, 이것은 “오늘의 메마른 곳에 떨어”지는 “어제라는 차가운 물방울”로서 바위 같은 어제의 목소리에 균열을 내고 “공동묘지를 뒤집”는 목소리다. 어제를 베껴 쓰는 방식으로 계승된 오늘은, 다시 어제부터 꾸준히 이어져온 “빗물” 같은 목소리를 통해 통각에 가까운 신선한 환기(“차가운 물방울”)를 경험하게 된다.

앞서 “어제들의 거대한 공동묘지를 뒤집”는 도구로 제시된 “강철 종이의 포크레인”은 “바위에 떨어지는 빗물”과 마찬가지로 그 자체로는 한없이 약하지만 축적되어 강해지는 힘이 있는 존재로서 종이를 통해 발화되는 목소리, 곧 글쓰기의 상징으로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오늘의 목소리는 지워졌던 어제의 ‘작은 목소리들’을 복구하고 그것의 맥을 다시 이어 붙임으로써 어제의 ‘큰 목소리’를 뒤늦게나마 전복한다. 어제는 오늘 다시 쓰이고, 비로소 “공동묘지”에서 살아 돌아온 “무수한 어제들의 브리콜라주”가 “오늘의 화판을 메”운다.

한편 과거라는 시공간을 주류적 목소리가 압력을 통해 비주류의 작은 목소리들을 폭력적으로 지웠던 자리로 인식하고 재현하는 양상은 「첨탑 끝에 매달린 포도송이」에서 한층 구체화된다. 이에 더해 이 시에서는 「어제」에서 “강철 종이의 포크레인”이라는 시어로 등장했던 저항적 목소리-쓰기의 가능성 역시 더욱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네가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사람들이 학살되었다 이곳에서

스무 살이 되었을 때 노동자들이 분신했다 이곳에서

(…)

철거촌 사람들은 깡패에게 맞아 죽고 이곳에서

라고 나는 쓴다 이곳은 조용하다

라고 쓰고 이곳에서 일어난 일을 잊지 않겠다

라고 쓴다 보랏빛 젖은 안개로 쓴다

—「첨탑 끝에 매달린 포도송이」 부분

 

화자는 “이곳에서”라는 표현을 반복적으로 사용하는데, 과거에의 기억(“맞아 죽고 이곳에서”)과 현재에의 진술(“이곳은 조용하다”)과 미래에의 다짐(“이곳에서 일어난 일을 잊지 않겠다”)이 모두 “이곳”이라는 공간으로 매개된다는 점으로 보아 “이곳”은 확장되는 과거의 침묵에 집어삼켜지는 현재의 공간이자 과거의 사건과 현재의 상태가 미래의 의지로 연결되는 자리라고 볼 수 있다. 이때 주목할 것은 “이곳”의 시간성 뒤에 “라고 쓴다”라는 화자의 목소리가 매번 따라붙고 있다는 사실이다. 세번의 ‘쓰기’는 각각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해 이루어지는데, 그것은 곧 과거의 사건과 현재의 상태에 대한 기억하기의 작업임과 동시에 미래에도 기억하는 일을 지속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말하자면 침묵의 과거 혹은 과거의 침묵에 반하는 오늘의 쓰기를 계속 수행하겠다는 일종의 문학-목소리적 다짐이라고나 할까.

또다른 시 「바깥 풍경」에서는 사회적 차원뿐 아니라 개인적 차원에서 그려지는 과거에 대한 인식을 엿볼 수 있다. 이때 이 시는 앞서 살핀 쓰기-기억하기의 작업이 실천된 사례로도 읽을 수 있는데, 이것이 화자가 구체적인 이미지와 단어들을 통해 “첫발부터 진창이었”던 자신의 유년을 촘촘하게 회상하는, 문자 그대로 기억으로 쓰인 기억으로서의 시이기 때문이다. 공장에서 일했던 아버지와 “나만 남기고” “일하러” 간 엄마가 만들어낸 유년의 외로운 공백기에, 화자는 할머니의 폭력성에 노출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당신이 던진 술병에/아침/산산이 빛나던 마당의 햇빛”). 4연에서 화자는 할머니가 “망할 년, 밤에 무슨 휘파람이야”라고 말했던 것을 기억하며 쓰고, 이에 대해 자신이 “뱀 나오라구요 뱀아 제발/나오렴 독 품은 이빨로 뒤꿈치 좀 물어줘”라고 반항적으로 대꾸했던 것을 떠올린다(혹은 대체역사로서 그것을 상상한다). 이 장면에서도 앞선 시들과 마찬가지로 과거라는 공간은 침묵을 강요하는 외부적 압력이 등장하는 자리이자 역설적으로 죽음을 요청해서라도 벗어나고 싶을 만큼 비관적인 자리로 그려진다.

 

 

3. 과거를 현재와 (다시) 연결하기

 

이 시집에 등장하는 목소리는 또한 과거에서 현재로 존재를 이동시킨다. 인지적 사고가 가능한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현재적 발화가 명확하고 정확한 대신 그 기능이 발화가 이루어지는 시공간에만 한정된다는 한계를 갖는다고 할 때, 그 시공간을 뛰어넘을 수 있는 것은 반대로 모호하고 착오적이며 부정확한 목소리다. 현재에 발을 붙이고 있지 않은 주체라야 현실로부터 자유로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연무(燃霧) 도시」에 등장하는 “잠꼬대”는 부정확한 목소리의 한 예가 될 수 있다. 불탈 연(燃)과 안개 무(霧)가 들어간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이 시는 우리가 알던 정의로운 세계의 무너져 내림을 “안개 속에서” 피어오르는 “살 타는 냄새”와 같은 이미지들로 선명하게 인쇄한다. 이때 “잠”이라는 시어는 작은 목소리들이 소거된 마취 상태의 시대를 은유하는데(“하루 종일 졸린 잠이야 그 잠 속엔/볼 만한 비디오도 되새길 경구도 없어”), 화자가 “그냥 안개 속 같은 잠이야”라는 목소리를 “잠꼬대”라고 일컫는 것은 그 목소리가 발화되는 순간 “안개 속”에서 “누군가 살해”되고 “실려가고” “취조당”하는 일들이 일어난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이 잠꼬대가 다름 아닌 현실을 착오적으로 이해하는 데서 나오는 목소리인 것이다.

한편 잠꼬대가 잠을 잘 때 이루어지는 발화이며 잠은 어제와 오늘을 연결하는 행위라는 사실은 짚고 넘어갈 만하다. 나아가 잠꼬대는 어제의 잠에서 나를 깨워 오늘 여기의 현실을 살도록 하는 목소리이기도 한데, 그 점에서 잠꼬대의 형태로 나타나는 목소리는 발화 주체를 과거에서 현재로 이동시키는 목소리라 할 만하다. 현실에 대한 착오적 이해 위에 세워진 이 모호한 목소리가 역설적으로 그것이 발화됨으로써 발화자를 잠에서 깨우는 것이다. “그냥 안개 속 같은 잠이야, 라고 잠꼬대하는 순간” 잠에서 깨어나고, 현실은 나의 문제가 된다. “나는 아무것도 협조하지 않았어”. 이제 화자는 현실에 대해 질문한다. “그런데 왜//기계들은 피 흘리며 돌아가는가/착한 사람들의 국경선은 불타는가”. 잠꼬대를 통해 어제에서 오늘로 초점이 이동하며 비로소 오늘의 문제를 눈앞에 대면하게 되는 것이다. 시간의 틈을 넘는 목소리와 그것의 가능성이 진은영의 시에서 다시금 포착되는 지점이다.

그러나 그렇게 도달한 현재임에도 그곳은 과거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도 그럴 것이, 진은영의 시에서 현재란 과거의 침묵이 확장되는 공간(“이곳에서”, 「첨탑 끝에 매달린 포도송이」)이자 여전히 과거의 영향 아래 놓여 있는 자리(“이제 나는/숨을 곳도 없는 스물세 살/오래도록 보고 있으면 눈물났다/풍경, 내 마음의 바깥”, 「바깥 풍경」)이기 때문이다. 과거와 현재의 시간은 연결되지만 그 연결은 자연스럽지 못하며 일견 기형적이다. 표현하자면 위에 쌓여야 할 것이 도리어 아래에 깔려버린, 그래서 연결되어 있지만 단절된 상태와도 다르지 않은 모습인 셈이다. 과거 위에 세워지지 못한 채 그 영향 아래 놓인 오늘은 어제의 계승과 진보가 아닌 반복과 답습, 어제의 ‘이어 쓰기’가 아닌 “베껴 쓰기”(「어제」)가 될 뿐이다.

이러한 현상 앞에 목소리는 과거와 현재의 부자연스러운 연결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다시 쓴다.

 

내가 이름을 불러보기 전에

사라져버린 것들이여

내가 입을 열기 전에 숨어버린 모음들

손을 담그기 전에 흘러가버린 강물이여

—「詩」 부분

 

이 시에서 드러나는 것은 과거의 “사라져버린 것들”을 부르는 현재의 목소리다. 기호/언어학적으로 어떤 것을 부름으로써 그것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는 명제가 참이라면, 이 목소리가 하려는 것은 마찬가지로 과거의 것을 부름으로써 그것을 기억하고 그것이 존재했음을 증명하는 일인 것처럼 보인다. “너를/만나기도 전에//알 수 없는 폭풍 속에서” “그 많은 나뭇잎을 다 떨어뜨렸”을지라도 내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은 다만 부르는 일, 목소리를 내어 그것을 불러 기억하는 일이다. 무엇인가를 기억하는 일은 시간을 뛰어넘는 일임과 동시에 시간의 선형성을 회복하는 일이다.

목소리가 그것을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은 존재한다. 이를 단순히 선후관계의 도치적 표현으로 이해하는 수준을 넘어 언어의 창조적 힘과 연결해 이해하는 것은 무리일까. 태초에 신은 언어로 세상을 창조했고, 신의 형상을 닮은 인간이 동물들을 부르는 대로 그것은 그들의 이름이 되었다. 불러서 만들기. 따라서 과거의 것을 부르는 목소리는 그것을 기억하려는 의지의 표현일 뿐 아니라 실제로 그 기억을 생성해내는 힘을 갖는 목소리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맥락에서 이 시의 제목이 ‘詩’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이러한 목소리가 진은영이 생각하는 시의 역할이자 시 그 자체라는 의미일까. 시의 앞선 연들에서는 명사에 어미 ‘~이야’가 붙은 구조로 문장이 마무리돼 마치 시가 자기소개를 하는 듯한 흐름이 전개되는데, 그에 따르면 시는 풀잎, 비눗방울, 촛불이자(1연) 열기, 얼음, 저녁노을, 실루엣이다(2연). 하나같이 연약하고 쉽게 사라지는 성질의 것들이라 할 만하다. 발화되는 순간 공중에 흩어진다는 점에서 그것들은 목소리와도 닮았다. ‘~이야’라는 진술은 3, 4연에 접어들며 ‘~이여’라는 호명으로 바뀌어 등장하고, 시의 목소리는 과거의 것을 부르고 기억하게 된다. 그렇게 목소리는 다시 한번 벌어진 시간의 틈을 넘어서 작동한다.

 

 

4. 현재에서 미래를 해방하기

 

한편 이렇게 현재가 여전히 과거의 자장 안에 머물러 있을 때, 그렇게 만들어진 과거-현재는 미래에 대해 분명한 단절을 경험한다. 「이전 詩들과 이번 詩 사이의 고요한 거리」는 어쩌면 각각 서정시, 모더니즘 시, 참여시를 가리키는지도 모를 “예쁜 여자, 통일성, 넓은 길이나 거짓말과 같은 것들”이 있던 이전의 시(앞선 추측대로라면 이 표현은 기성 시류를 가리키는 것이 될 테다)와 달리 “이 시에는 아무것도 없다”며 과거(의 시)와 현재(의 시)를 대조하며 시작한다. 화자에 따르면 이번 시에는 “다만” “쉽게 말할 수 있는 미래와/뭐라 규정할 수 없는 “지금 여기”/더듬거리는 혀들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뒤이어 “그것이 만들어낸/이전 詩들과/이번 詩 사이의 고요한 거리” 위로 “눈처럼 자꾸 내”린 “시간이” “아무것도 하얗게 덮지 않고 흩어져버렸다”고 진술되는 장면에 이르러서는 시간에조차 덮이지 못한 채 노출되어 있는 과거와 현재의 연결부가 다시금 가시적으로 드러나면서 ‘확장된 과거’라는 현재의 암울한 정체성이 재확인된다. 과거와의 연결을 매단 채 과거-현재의 시에서 오히려 더욱 두드러지는 것은 “뭐라 규정할 수 없는 “지금 여기””와 너무도 “쉽게 말할 수 있는 미래” 사이의 간극이다. 이렇게 과거-현재는 미래와 단절되고, 멀리 있는 혹은 멀어져가는 미래를 보며 과거-현재를 살아가는 화자는 목소리를 잃어버리기도 한다(“더듬거리는 혀들이 있고”).

과거의 영향 아래 놓인 현재에서 더이상 전처럼 이상화된 미래를 마주하는 일이 불가능해졌음을 깨달을 때 요청되는 것은 지금 이 자리에서 미래를 새롭게 바라보고 꿈꾸는 일이다. 진은영의 시에 등장하는 목소리가 최종적으로 도달하려는 자리도 바로 그곳인데, 이러한 읽기가 가능한 까닭은 현재의 자리에서 다시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고 쓰려는 목소리가 나타난 시편들이 이 시집에서 적지 않게 발견되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다음의 시가 그렇다.

 

한 알의 밀알로 썩어

거대한 밀밭을 꿈꾸는 사람들

 

나는 하나의 밀알로 썩어

세상의 모든 바람이 취기로 몰려오는

한 방울 향기

아득한 밀주

아무런 후일담도 준비하지 않는

—「하나의 밀알이 썩어」 전문

 

이 시에서 먼저 발견되는 목소리의 종류는 “후일담”으로, 그것은 과거를 현재에 재현하는 목소리, 곧 역사의 목소리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화자의 것이 아니다. 오히려 화자는 스스로를 “아무런 후일담도 준비하지 않는” 존재라고 이야기하는데, 이 자기진술의 목소리를 통해 우리는 화자가 그 재현의 목소리를 거부하며 과거와 현재를 철저하게 분리하려 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사람들”이 “꿈꾸는” “거대한 밀밭”이 공동의 역사, 공적 기억의 산물이라면 그에 반해 “아득한 밀주”인 ‘나’는 지금 이 순간 “취기”와 “향기”의 휘발적 속성으로만 존재하는 현재적인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아무런 후일담도 준비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다는 표현이라는 점에서 탈역사적이다.

화자의 이러한 자기인식은 모든 것을 남기는 역사의 축적성과 정확히 반대의 자리에 놓인다. 후일담을 남기지 않는 것이 화자에게 그렇게까지 중요한 이유는 과거를 현재에 재현함으로써 현재가 과거의 자장 아래 놓이게 하는 것이 바로 후일담이며, 미래 역시 후일담을 통해 똑같은 방식으로 현재의 자장 안에 갇히게 되기 때문이다. 역사는 시간을 연결하고 그렇게 연결된 시간은 서로 영향을 끼친다. 그러므로 화자가 후일담을 남기지 않음으로써 이루려는 일은 현재에 이어지는 과거의 그림자를 청산함과 동시에 미래를 현재로부터 해방하는 일인 셈이다.

그러나 이러한 화자의 목소리가 다소간 반역사주의적이라는 이유로 그것을 희생 없이 탁상공론만을 일삼는 개인/이기주의자의 목소리로 섣불리 재단하는 데엔 무리가 있다. “사람들”이 “한 알의 밀알로 썩”는 것처럼 ‘나’도 “하나의 밀알로 썩”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희생의 목적과 방향이다. “사람들”의 경우 역사의 축적과 그들이 남길 후일담을 기대하며 썩는 데 반해 ‘나’는 역사를 축적하지 않기 위해, 과거를 현재와 분리하기 위해, 후일담이 남지 않도록 하기 위해 썩는다. 이때 후일담은 과거를 현재에 재현하고 현재의 죽음을 미래로 이동시켜 역사화/신화화하는 목소리라는 점에서 영생의 도구이며, 따라서 숭고한 것처럼 보이나 무엇보다 속물적인 목소리다. 그러므로 가치를 따진다면 “거대한 밀밭”이라는 표면적 명분 아래 후일담을 통해 받게 될 자신들의 영광에 대한 기대를 숨긴 “사람들”의 희생보다는, 오히려 과거의 재현과 “베껴 쓰기”의 대물림을 자신의 대에 끊음으로써 미래를 온전히 미래의 것으로 남겨주기 위해 행해지는 ‘나’의 희생이 더 가치있을 것이다.

이렇게 자기희생을 거쳐 얻어낸,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진 현재에서 화자는 새로운 미래를 꿈꾼다. 앞서 화자가 끊어낸 과거의 것들에는 그 시간의 연속성 속에서 진작 감염돼버린 미래도 포함되어 있었고, 그러므로 새롭게 세워진 현재의 기반 위에서 미래를 다시 꿈꾸는 일이 요청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자는 그 미래의 정확한 모습을 제시하지 않는데, 우리가 함께 꿈꿀 미래의 구체적인 상을 제시하는 것이 그 자체로 과거에 했던 실수의 답습이 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과거의 “사람들”이 “거대한 밀밭”에 대해 꿨던 꿈을 다시 꾸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화자는 도리어 “아무런 후일담도 준비하지 않는” 모습으로 미래를 전망할 것을 제안한다. 비로소 진은영의 시가 도달하는 미래 전망의 새로운 경지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것이다.

따라서 후일담을 준비하지 않겠다는 화자의 목소리는 더럽혀진 시간의 연결을 청산함과 동시에 그 시간의 연속성을 새롭게 회복할 가능성을 내비치는 자리에 가닿게 된다. 이제 내일을 향해 가는 이 중간의 시간에 들려오는 미래를 꿈꾸는 예언적 목소리 앞에 반응하는 일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몫으로 남겨진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 이런 예언을 듣고,

모든 표정이 사라지는 한밤중에

—「모두 사라졌다」 부분

 

 

5. 문학의 목소리, 목소리의 시

 

지금까지의 독해가 틀리지 않았다면 건축물처럼 견고한 진은영의 첫 시집이 축조의 주축으로 삼는 것이 다름 아닌 목소리라는 키워드임은 부인하기 어려워 보인다. 그리고 그 목소리들은 과거와 현재, 미래를 각각의 화두로 삼아 시간성과 얽히며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는 주체로서 시 속에 가시화된다. 그 역할이란 과거를 배경으로 나타나는 지배 담론의 폭력적 구심력을 거스르거나(「어제」) 현재로까지 번져와 침묵을 강요하는 과거의 폭력성에 맞서는 것이기도 하고(「첨탑 끝에 매달린 포도송이」), 때로 발화의 주체로 하여금 마취 상태를 벗어나 현실을 마주하게 하는 것이었다(「연무(燃霧) 도시」). 또 사라진 것들을 불러 기억하고 그렇게 과거와 현재를 다시 바르게 연결해(「詩」) 궁극적으로는 단절된 과거-현재와 미래 사이에서(「이전 詩들과 이번 詩 사이의 고요한 거리」) 후일담적 목소리의 유혹을 떨쳐냄으로써 과거로부터 현재를, 다시 현재로부터 미래를 해방시켜 새로운 미래를 꿈꾸도록 하는 것이기도 했다(「하나의 밀알이 썩어」).

이때 ‘쓰기’라는 행위는 목소리가 시도하는 기억하기의 작업과 결부되어 수행의 실천적 형상으로 시에 담기기도 한다(“잊지 않겠다/라고 쓴다”, 「첨탑 끝에 매달린 포도송이」). 이 글에서 자세히 다루지 못했으나 이는 곧 진은영의 시론이라 할 만한 것으로 읽힐 여지도 있는 듯하다. 그 시론은 마찬가지로 시가 일종의 기억하려는 목소리, 목소리가 수행하는 쓰기로서의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내포한다. 앞서 살펴본 「詩」가 대표적인 경우로, 시의 본질을 즉물적으로 설명하는 1, 2연의 자기소개에 더해 3, 4연의 호명은 보는 방식에 따라 그 자체로 시의 일이란 무엇인지를 제시하는 장면처럼 보이기도 한다. 말하자면 시란 “아이의 울음” “너의 희고 고른 이” “내가 오린 종잇조각” “사라져버린 것들” “흘러가버린 강물”을 ‘부르는 일’, 즉 기억하기인 것이다.

그런가 하면 「나의 일」에서는 그러한 시론에 대한 단서들이 더욱 직접적으로 등장한다. 시인으로 추정되는 화자는 “풀리는 시간 속에서” 꽃의 “중얼거림”과 “새들의” 날갯짓, “벌들의 몸짓을/번역하는” 것이 “나의 일”이라고 말한다. 이 시가 이후 도시성 비판으로 이어지며 생태시의 면모를 보인다는 점과 그것이 필요에 의해 가상의 ‘시인 자의식’을 도구로서 상정했을 가능성은 차치하고서라도, 여기서 시인이 말하려는 시(인)의 소명은 다름 아닌 “번역하는 일”이다. 번역이라는 것이 언어를 언어로 ‘다시 부름’으로써 언어 뒤편에 놓인 본질적 기억을 복제하고 재생산하는 작업임을 떠올릴 때, 쓰기와 기억하기가 언어를 매개로 결합할 여지는 다시금 생겨난다. 표제작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다. 사전의 구조를 흉내 낸 이 시에 등장하는 마지막 일곱번째 단어는 “시”이며, 화자는 시를 “일부러 뜯어본 주소 불명의 아름다운 편지/너는 그곳에 살지 않는다”라고 정의한다. 잃어버린, 그러나 아름다운 쓰기가 시인이 정의하는 시임이 분명해지는 지점이다. 진은영의 시에 등장하는 ‘기억하는 목소리’가 쓰기 행위와 연결되고 있음이 시론 차원에서도 나타나는 것이다.

글을 마치며 언급할 만한 또다른 한편에는 진은영의 이후 시들이 착실히 쌓아 올리고 있는 현장의 목소리와 시쓰기 작업이라는 영역이 있다. 시인의 첫 시집에서부터 감지되기 시작한 이러한 목소리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영토를 넓혀가고, 그것이 소환하는 이미지 역시 첨예하게 다듬어져간다. 그 시들은 때로 노동시의 형태로,8 때로는 추모시의 형태로9 쓰이고 있으며 이와 동시에 절망의 시대에 시를 쓴다는 것이 무엇인지 자문하는 시인의 시적 자의식10 또한 개개의 시편 안팎에서 끊임없이 요동하는 양상을 보이며 풍요로운 시세계를 이룩하고 있다.

진은영의 이후 시집들을 따라 읽다보면 시인이 꾸준하게 천착하는 주제가 다름 아닌 국가권력에 의해 희생된 존재들(과 그들의 목소리, 또는 그들을 부르는 목소리)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가령 두번째 시집 『우리는 매일매일』과 세번째 시집 『훔쳐가는 노래』(창비 2012)에서는 5·18로, 네번째 시집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에서는 4·16으로 대표되는 일련의 국가적 사건이 각각의 핵심적인 화두로 다루어지며 시집의 주된 정서를 이루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에 더해 세상의 부조리함에 대한 분노가 종종 절대적 존재에 대한 탐구와 질문의 목소리로 이어지기도 하는데, 이는 진은영 시를 관통하는 또 하나의 주요한 특징이기도 하다. 진은영의 이후 시들을 탄탄한 증거자료로 삼아 이러한 징후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작업은 별도의 지면에서 섬세하게 이루어져야 하겠으므로 지금으로서는 추후의 과제로 남겨두기로 한다.

진은영의 첫 시집을 다시 읽고 나서 우리 손에 남는 것은 결국 문학-목소리의 한가지 가능성이다. 이 시집에는 시간의 틈을 넘어 그 관계를 재설정하며 다시 쓰고 말하기를 멈추지 않는 목소리들이 있다. 진은영은 “잊지 않겠다/라고 쓴다”고 말하는 결연한 문학의 목소리, 목소리의 시를 쓰고 있고, 그 시들은 그것이 무슨 일을 할 수 있다고, 다시 문학의 이름으로 지금 여기서 우리가 뭔가를 만들어내거나 변화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진은영의 시는 다음과 같은 다짐 혹은 새로운 전망의 목소리를 내기에 이른다.

 

그래도 나는 오늘, 한 그루 말〔言〕의 복숭아나무를 심으리라

—「견습생 마법사」 부분

 

 

심사평

 

제22회 대산대학문학상 평론 부문에는 모두 24편이 응모되었다. 웹 서사와 SF소설, 스릴러 서사, 영화 등 다양한 장르적 글쓰기에 대한 관심을 포함해 페미니즘 서사와 비인간, 노년, 장애 등의 키워드들에 대한 비평적 관심이 꾸준히 두드러져 주목되었다. 사회적 이슈와 문학작품이 연결되는 방식에 관심을 두고 연대와 공감의 지향성을 드러내는 글들도 많았다. 비평 담론 전반에 대한 관심이 높은 점도 반가웠는데 때로는 충분히 정리되지 않은 개념이 앞서 실제 작품을 읽는 데는 잘 결합되지 않는 아쉬움도 있었다.

본심에서 집중적으로 토론한 작품은 다음 네편이다. 「연년세세 이어지는 에이프릴 마치의 사랑 : 황정은과 이장욱의 소설 속 노년 여성 불러 읽기」는 등장인물의 이름에 담긴 사회적 의미와 이데올로기적 구조의 효과를 비교 분석한 평문이다. 두 작가의 작품을 맞세우는 방식이 신선하게 여겨졌으며 언어의 사회적 효과에 집중하는 부분도 흥미로웠다. 그러나 본론에서 두 작품의 공통항을 연결하는 구체적 해석 지점이 부족하며, 이에 따라 이름의 호명에 대한 논의가 아이디어의 표층에 머무는 한계가 보였다.

「웹 속 말 없는 사물들의 민주주의—랑시에르를 통해 본 웹소설의 가능성: 『데뷔 못하면 죽는 병 걸림』을 중심으로」는 달라진 문학 미디어의 지평에서 본격적인 웹소설 비평을 시도한 글이다. 작품 해석의 세부에서도 캐릭터 구성의 변별을 논하면서 웹소설 비평의 실제적 필요성을 논한 점이 주목되었지만 장르적 위계와 소외를 겪는 웹소설이라는 범주 자체를 강조하느라 이론적 배경이 협소한 틀거리로 작동한 점이나, 정작 개별 작품의 사회적 맥락을 규명할 때는 일반적 웹소설 특징이나 플랫폼 매체의 특성에 대한 해설 인용으로 떨어지는 점이 아쉬웠다.

「감은 눈의 센티언트(sentient): 김복희론」은 김복희 시의 변화 과정을 찬찬히 따라 읽는 글이다. 기존의 비평적 관점들을 논의하며 ‘센티언트’라는 키워드를 제시하고 감각이 태도로 확장되는 방식을 시 속에서 읽어내려는 시도가 눈에 띄었다. 그러나 서로 다른 배경의 이론적 논의들이 분명한 구분 없이 수사적으로만 인용 나열되어 정작 필자의 고유한 목소리와 출발점을 찾기 쉽지 않았다. 개별 시들에 대한 공감적 해석들이 힘을 얻으려면 자신의 언어로 풀어 비평적 위치를 드러내려는 문제 설정의 시작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오랜 토론 끝에 당선작으로 정한 「시간의 틈을 넘는 목소리들: 진은영의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읽기」는 목소리와 시간성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탐색한 평문이다. 다양한 존재와의 소통을 강조하는 최근 문학현장의 흐름을 의식하며 작품의 섬세한 읽기를 통해 자신의 해석을 세워나가는 끈질긴 시도가 돋보인다. 물론 대상작에 직핍하는 열정에 비해 선행 비평들이 환기하는 시사적 쟁점을 고찰하고 분별하는 과정이 부족한 점은 아쉬운 대목으로 논의되었다. 그럼에도 주제의 집중성과 유려한 필력을 통해 자기만의 이야기성을 드러내는 것은 신인의 중요한 덕목이다. 무엇보다도 비평이란 이렇듯 좋아하는 작품을 붙잡고 정성스럽고 끈질기게 해석하려는 의욕에서 시작한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글로 기쁘게 읽었다.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드리며, 함께 응모해주신 모든 분들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김미정 백지연

 

 

당선소감

 

상을 받으니 내 지난 걸음들에 의미가 달라붙는구나. 모든 의미는 사후적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흘러가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므로 과거가 현재를 만드는 것이 아니며 사실은 그 반대다. 현재가 과거를 만든다. 같은 논리로, 미래가 현재를 만든다. 따라서 우리가 뭔가를 반드시 쟁취해야 한다면 그건 미래여야 한다. 시간은 어떤 점에서 선형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결코 순차적이지 않다. 말하자면 시간은 시간순이 아니다.

 

언젠가 진은영의 시집을 읽는데 목소리와 시간에 관한 한두개의 키워드가 눈에 밟혔고, 그것들을 만지작거리다보면 글을 한편쯤 쓸 수 있을 것 같다고 막연히 생각했다. 그렇게 이 평론을 쓰게 됐다. 나의 읽기가 틀리지 않았다면 진은영의 첫 시집에 나타난 목소리들은 여전히 문학이 할 수 있는 일과 해야 하는 일을 한 호흡에 발음하기를 우리에게 요청한다. 문학이 위기라는 말도 이젠 귀에 익어버린 경고음처럼 들리는 오늘날이지만 여전히 문학의 이름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있을 것이다. 조금은 더 그렇게 믿어보기로 한다.

 

끝내 평론가가 되었다. 우선은 그렇다. 어떤 평론가가 될지는 이제부터 내가 하기에 달렸겠다. “시도하기 위해 희망할 필요도 없고, 지속하기 위해 성공할 필요도 없다.” 평론을 쓸 때마다 되뇌던 바르뜨의 말이다. 문장의 앞부분은 시작에 대해, 뒷부분은 시작 이후의 시간에 대해 각각 말하고 있는 걸까? 그렇게 생각해도 좋다면, 다행스럽게도 나는 내가 희망하던 것을 통해 시도할 수 있었다고 해야겠다. 이제 나에게 중요한 건 뒷부분, 지속하기 위해 성공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지속하기 위해서 성공하지 않아도 된다. 실패해도 지속할 수 있다. 그러므로 차라리 실패를 지속하기. 진정한 실패는 지속하지 않는 것이다. 지속하지 않으면 실패고, 지속하면 그건 성공이다. 지속하기만 한다면……

 

이제 나는 나의 평론이 우리 문단의 어느 자리에 놓일 수 있을지 또한 고민해야 할 것이다. 다른 비본질적인 가치들을 따라 글을 쓰지 않을 수 있길, 정말 내가 좋아하고 관심있고 이야기하고 싶은 영역에 대해 자유롭게, 명확하게, 그러나 겸손하게, 때로는 고독하게 글을 쓸 수 있게 되길 바란다. 고독. 그렇다. 나는 고독해질 준비를 해야 하겠다. 그렇게 내가 싸우듯이 쓴 글들로 나의 문학사를 새롭게 쓸 수 있다면 좋겠다. 서두르지 않고 우직하게 나의 영역을 깊이 뿌리내릴 수 있다면 좋겠다. 산처럼 커다란 나무 같은 평론가, 그런 연구자가 되고 싶다.

 

부족한 글에 기회를 주신 심사위원 김미정, 백지연 선생님께 깊이 감사드린다.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서 문학과 그 너머를 가르쳐주신 모든 선생님들께도 인사를 전한다. 애정 속에 함께 서로의 글을 읽고 써온 과기대 문창과 동기들과 선후배들, 언제나 신앙을 가진 삶의 즐거움을 느끼게 해주는 온누리교회 하늘 대학부 식구들과도 이 기쁨을 나누고 싶다. 늘 커다란 사랑으로 나의 걸음을 지지해주시는 부모님과 동생에게 감사드리며, 내 인생의 영원한 화두가 되시는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린다.

 

후장사실주의자들의 문장을 인용하며 글을 마친다. “우리는 왜인지 모르겠는데 어느 날부터 글을 읽고 쓰는 게 너무 좋았고 그래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는 더이상 갈 곳이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금정연은 메일에서 우리는 어디로 가나요라고 물었다. 나는 to the future라고 답했고 금정연은 다시 we are the future라고 답했다. 그렇다. 미래가 예전 같지 않다.”11

이원기

 

 

  1. 윤원화 『껍질 이야기, 또는 미술의 불완전함에 관하여』, 미디어버스 2022, 19면.
  2. 같은 책 24면.
  3. 같은 책 25면. 이 글에서는 윤원화가 인용한 「나선」(이탈로 칼비노 『모든 우주만화』, 이현경 옮김, 민음사 2018)의 일부분을 재인용했다.
  4. 같은 책 27면.
  5. 관련하여 요즘비평포럼이 SNS를 통해 “최근 비인간론의 문학적 경향성”이라는 주제를 첫번째로 내세워 기획, 진행한 <비평-대화>는 좋은 참고자료가 된다. 송현지, 황사랑 문학평론가는 이 프로젝트에서 주목할 만한 비인간 시로 신이인, 여세실, 조시현, 성다영, 정다연 등의 시적 작업들과 AI가 지은 시집 『시를 쓰는 이유』(리멘워커 2022), AI와 시인들이 공동집필한 시집 『9+i』(블루버튼 2022) 등을 언급한다.
  6. 돌기민 「목구멍에선 소리가 난다」, 『자음과모음』 2023년 봄호 11~12면.
  7. 이하 인용은 본문에 작품 제목만 표기.
  8. 「Quo Vadis?」 등, 『우리는 매일매일』, 문학과지성사 2008.
  9. 「그날 이후」를 비롯한 2부의 시들,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문학과지성사 2022.
  10. “도대체 어쩌자고 내가 시를 쓰는지”, 「어쩌자고」, 『우리는 매일매일』.
  11. 금정연·정지돈 『문학의 기쁨』, 루페 2017, 237면.

이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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