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의 목소리
‘진정한 공론장’에서의 대화를 꿈꾸며
▶ 촛불혁명 시대를 지나왔음에도 점점 퇴보하고 있는 정치적 현실을 보면서 과거와 지금이 어떻게 다른지, 얼마나 달라졌으며 앞으로는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 고민하게 된다. 그 고민의 윤곽을 지난호 대화 「위기의 한국, 전환의 과제」(서복경 양경수 이남주 이태호)를 통해 더 명확하게 그릴 수 있었다. 시민사회, 노동운동, 정치 영역에 몸담은 각 대화 참여자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한 점이 있는데, 바로 한국정치가 사회적 합의나 미래에 대한 구체적 전망 없이 서로 물어뜯기만 한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스스로 목표를 설정해본 경험”(266면)이 부족하며 그런 와중에 “이념이 다른 세력은 절멸시켜야 한다는 식”(272면)의 ‘전쟁정치’가 계속되고 있다는 지적이 인상적이었다. 촛불혁명기 때만 해도 변화와 개혁에 기대를 품고 있던 시민들이 최근 큰 좌절을 겪는 것을 지켜보았으며 나 역시 그러한 좌절을 느껴온 터라 이러한 비판을 뼈아프게 통감했다. 새로운 전망을 제시하기보다는 타인을 비난하며 큰 노력을 들이지 않고 내가 옳다 주장하는 이들이 많다. 그리고 그들은 너무도 손쉽게 이러한 방법을 선택하는 듯하다. 이런 때일수록 시민들의 구심점을 찾고 합의를 이끌어내야 한다. 합의를 위해서는 대화 참여자들이 제안한 것처럼 ‘진정한 공론장’을 마련하여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기후위기, 인구 감소 등 미래에 분명한 위협이 될 이슈들을 시작으로 꾸준히 문제제기를 해야 한다. 참으로 생각이 많아지는 계절이다.
홍신해 shinhae7346@naver.com
차가운 겨울일수록 더욱 품게 되는 ‘돌봄’
▶ 겨울호 특집 「존재의 염려와 산만한 돌봄의 제스처」(조혜영)는 첫 문장부터 흥미롭고 인상적이었다. “코로나19의 발발로 돌봄은 동시대의 가장 뜨거운 화두가 되었다.”(47면) 물론 팬데믹이라는 전세계적이고도 거대한 사건이 있었지만 1인가구의 증가, 저출생 문제라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돌봄’이라는 말은 이전보다 더 큰 의미와 고민을 담게 된 듯하다. 돌봄이라고 하면 으레 어린아이나 어르신들과 관련된 문제를 먼저 떠올리곤 했는데 이 글에서는 ‘자기돌봄’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하는 점이 신선했다. 자기돌봄이란 “유한한 시간 속에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지를 되돌아보고 질문하며 자기 자신으로 있으려고 노력하는 것”(50면)이라고. 자신을 알고 지켜감으로써 타인까지 껴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차가운 겨울일수록 더 아끼게 되는 ‘돌봄’이라는 단어를 다시금 돌이켜볼 수 있는 소중한 글이었다.
김소연 시인의 『촉진하는 밤』을 인상적으로 읽은 터라 이번 작가조명(장이지 「포물선, 끝을 지나치는 사랑의 운동」)이 더욱 반가웠다. 등단 30주년을 맞은 시인의 시들은 여전히 낡아 보이지 않고 앞으로 계속 나아가는 듯해 놀라우면서도 대단하다고 느꼈다. 김소연은 일상에서 길어올린 미묘하고 미세한 감정의 틈을 아름답지만 쓸쓸하게 그려내는데, “시 쓰는 일은 그림자와 마주하는 일이다. 빛은 어깨 뒤에 있고 그림자는 내 앞에 있을 때에 시 쓰는 일이 가능해진다”(323면)라는 구절을 읽으니 그의 작품들이 어떻게 탄생했는지 조금은 엿볼 수 있었다. 이 글에서 가장 돋보인 부분은 “우리는 ‘사랑’을 말하기 전에 먼저 ‘이해’에 대해 말해야 할 것이다”(330면)라는 문장이었는데, 이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쉽게 쓰이는 시대에 시가 존재하는 이유이자 시를 읽어야 하는 이유로 와닿아 밑줄을 긋게 되었다. “풍경이 되어가는 폭력들”(332면)에 쉽게 노출되는 요즘, 시집을 다시금 들고 싶게 만드는 글이었다.
김용희 p1p33j23@naver.com
아름다운 문장으로 깊어지는 감정
▶ 겨울호를 받고 먼저 펼쳐본 부분은 시란인데, 특히 전욱진 「전망 좋은 방」이 눈길을 멈추게 했다. 실제 겪은 일을 전달하는 것처럼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묘사에, 도대체 무슨 사건이 벌어진 건지 깨달을 겨를도 없이 문장 속으로 빠져들었다. 시 속에서 일어난 일만 놓고 보면 슬픔이나 무서움, 혹은 끔찍함까지 느낄 법한데도 화자의 감정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담담한 태도로 사건 이후를 고민하기도 하고 “바깥에서 말하던 그것을” “내 영혼이라 믿기”로 하는 다짐이 드러나기도 한다. 영혼이 없다는 말을 자주 듣던 화자가 창문에 부딪힌 새를 보며 그것을 내 영혼이라 믿기로 한다는 것이 과연 어떤 감정의 변화인지 선명하게 그려지지는 않았지만,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무디게 지내던 화자가 어느날 밤 불현듯 슬픔과 안타까움을 느끼고 잃어버린 줄 알았던 감정을 되찾아 그것을 다시 영혼이라 믿기로 한 것은 아닌가 하고 어렴풋이 짐작해본다. “이미 땅에 떨어진 새의 주검에게/봄노래를 부탁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아예 모르지 않았다”는 구절에서 유일하게 깊은 안타까움이 느껴졌고 봄노래를 불렀을 새의 아름다운 과거가 그려져 오래도록 마음속에 남을 듯하다. 이 시가 정말 좋아서 시인의 「피부와 마음」도 다시 읽었는데, 마찬가지로 담담한 감정과 ‘나’의 밖에 있는 “사소한 내 모습”을 생각하는 공허함이 짙게 풍겨 반복해서 음미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렇게나 작아지는 걸 보면/마치 사라지기를 바랐던 거 같은데/왜 아주 사라지지는 않을까/그게 나는 항상 의아하고”에서는 허무함마저 느껴지는데 마지막 문장인 “자주 나를 웃게 하고”를 통해 전체적인 분위기는 되레 따듯해지는 듯하다. 문장 하나하나의 아름다움과 담담하면서도 온기 어린 시각을 함께 경험할 수 있는 시편들이었다.
이해원 weasley5@naver.com
재난 이후의 삶,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 재난은 더이상 한 국가만의 문제가 아니다. 특히 환경문제가 발생하는 경우 주변국들에까지 영향을 미치기에 더더욱 관심이 쏠리는데, 일본에서는 동일본대지진 이후 지난 몇년간 후꾸시마 원자력발전소 관련 문제가 끊임없이 발생했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에서도 온갖 우려와 불안감이 팽배해졌으며, 특히 과거사가 제대로 청산되지 않은 상황에서 일본에 무조건적인 반감을 표현하는 경우도 빈번하다. 그런데 지난호 현장글 「오끼나와, 토오꾜오 그리고 후꾸시마」(사끼하마 사나)를 읽으며 나 역시 그간 주변국에서 발생한 재난을 피상적으로만 여겼고, 그곳에 사는 주민들에까지 미처 생각이 미치지 못했음을 느꼈다. 재난을 피부로 직접 겪고 재난 이후를 이어가는 삶들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던 것이다. 토오꾜오에서 살아가는 필자는 동일본대지진이 발생하자 피난을 떠났던 일에 죄책감을 느끼고, 특히 자신이 오끼나와 출신이라는 사실에서 자기모순을 발견하기도 한다. 이러한 복잡한 감정을 따라가며 나 또한 ‘오염된 환경에서 살아가는 이들’을 타자화하기 바빴던 건 아닌가 부끄러워졌다. 재난은 우리에게도 언제든 발생할 수 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라면 한국사회가 재난에 제대로 대처하기를 기대하기 어려워 보인다. 좀더 나은 미래를 상상하기 위해서라도 서로를 헐뜯기보다는 재난 이후의 삶을 더불어 살아나갈 수 있도록, 희망을 북돋울 수 있도록 모두가 인식을 바꿔야 하지 않을까.
유수정 산문 「부안, 시골 살 결심」도 인상적이었다. 사람들이 일자리가 많은 서울에 살기를 원하면서, 그외 지역들은 점점 쇠퇴하고 있다. 각 지역들은 어떻게든 인구를 유지하기 위해 저마다의 생존전략을 펼치고 있는데, 청년을 불러 모으고 출생률을 높이는 것이 특히 중요한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유수정이 설명하는 부안의 고유한 문화와 생활, 특히 청년들이 지역사회와 어울려 함께 꾸려나가는 삶은 그 지역과 그곳의 사람들을 고루 성장시키는 듯 보인다. 산문의 배경이 된 전북 부안은 들어보기는 했으나 가본 적 없는 곳이다. 사실 가봐야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는데, 글을 읽고 나니 한번 방문해보고 싶다는 호기심이 든다.
김인화 lovea37@nat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