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김수우 金守愚

1959년 부산 출생. 1995년 『시와시학』으로 등단.

시집 『붉은 사하라』 『젯밥과 화분』 『몰락경전』 『뿌리주의자』 등이 있음.

soowoo59@daum.net

 

 

 

최전선

 

 

바구미 한마리 모니터 앞을 기어간다 수상하다, 느릿느릿

 

오래된 만행인 듯 어린 척후병인 듯 돌아본다

 

다음 날 선풍기 옆에 또 한마리 서성인다 조심조심, 의아하다

 

부엌서 베란다서 자꾸 마주치는 여섯개 발목을 가진 점, 점들, 점들

 

밤을 새웠는지 큰 산을 넘었는지 비틀비틀, 어디서 출발했을까

 

나흘 만에 그 첫 길을 발견한 날 후두염이 시작됐다

 

묵은 쌀 봉지에서 새까맣게 기어나온 무수한 바구미의 무수한 이데아

 

그 치밀한 절망 그 꼬깃꼬깃한 혁명을 막을 수 있을까

 

모든 고독은, 모든 모순은 최전선을 가지고 있다

 

우끄라이나의 총알도 팔레스타인의 핏자국도 인디언 아이가 부는 자칼 호각도

 

걸어 걸어 구멍 많은 지평선을 꿰매는 중

 

귀신보다 더 귀신 같은 슬픔, 난민들의 찢어진 목록이 펄럭인다

 

점점이, 살아내라 살아내라, 닳은 발톱마다 화약 냄새 진한데

 

순간순간에 부지런히 목숨 걸었던 저 눈물화석들

 

그예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멀고 멀다

 

 

 

한잎의 무덤

 

 

꽃은 언제나 완벽한 예언체였다

 

해마다 사월이면 꽃가지마다 무덤들이 매달린다

한잎 무덤 옆에 두잎 무덤이 돋고, 그 아래 세잎 무덤이 솟는다

 

피를 먹은 안부들, 돌아오지 않는 이름들에 날개가 돋는다

 

풍경이 진화하는 이유는 황소 같은 통곡들이 도착하는 까닭이다

소유할 수 없는 여명을 매일 끌어올리는

죽음과 죽임은 서로 거울이 된다, 안녕하신가

 

환상의 파편을 삼킨 두루마리구름이 증인이다

 

비린내 나는 눈물로 푸른 징검다리를 낳는 사월

보따리 보따리 꽃잎 풀어헤치는 비명 앞에서

고향이 없는 자도 고향이 많은 자도 찬란한 젯밥이 된다

 

무덤이 붉다 무덤이 빛난다 무덤이 팔랑거린다

 

미래는 하루하루 과거를 낳고 있으니

송이송이 흔들릴 때마다 멈출 때마다 말씀이 반짝인다

 

바벨탑의 폐허를 날아오르는 바람이 증인이다

 

주검을 잊지 말라 한잎의 음성

가만있지 말라 한잎의 명령

영원이 되어 돌아오는 저, 한잎 한잎의 부탁들

 

꽃은 언제나 완벽한 예언체이다 제목 없는 시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