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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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희경 兪熙敬

1980년 서울 출생. 200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으로 『오늘 아침 단어』 『당신의 자리-나무로 자라는 방법』 『우리에게 잠시 신이었던』 『이다음 봄에 우리는』 『겨울밤 토끼 걱정』 등이 있음.

mortebleue@gmail.com

 

 

 

대화

체념

 

 

네가 두고 간 커피잔을 씻는다

그런데도

아직 네가 여기 있네

책장에 기대서서

책을 꺼내 읽고 있네

그 책은 안 되는데

안 되는 이유가 뭘까

손이 다 젖도록 나는

생각해본다

그 책은 옛일에서 왔고

누가 두고 간 것일 수도 있다

얼마나 옛일일까

두고 간 사람은 누구일까

그렇다 해서

네가 읽으면 안 될 이유는 무엇인가

나는 젖은 커피잔을 엎어두고

젖은 손을 닦으려 하는데

엎어둔 건 커피잔이 아니었고

곤란하게도

젖은 내 손이었다

커피잔 대신 손을 엎어두었다고

곤란할 이유는 또 무엇인가

젖은 내 손은 옛일과 무관하고

네가 꺼내 읽을 것도 아니다

성립하지 않는 변명처럼

오늘은 볕이 좋다 아직

네가 여기 있는 기분

네가 책에 푹 빠져 있는데

손은 금방 마를 것이며

네가 두고 간 커피잔은

어디 있을까 나는

체념한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대화

아랫입술을 물리다

 

 

재떨이를 끌어당기듯

대화를 시작한다.

 

내가 말했던가요 얼마 전

아랫입술을 물렸어요

나는 이야,

아야, 했어야 했는데

이야,

 

아랫입술을 물리면

도대체 말이 되질 않는다

따뜻했던 겨울 오후

길을 잃은 우편배달부

가방 속에는 아버지

그때 처음 알았지

처음 물려보았으니까

 

아랫입술을 물리면

이야, 하고

나는 생각했다

아랫입술을 물다니

물렸다니

상상력은 가난하네

아랫입술 물릴 줄도

꿈에도 모르고

그래서 물었을 테고

나는 물렸던 거지

아랫입술을 그때

이야, 하고

 

아팠나요 아니요

아야, 하지 않고

이야, 했다니까요

그러면 즐거웠나요

글쎄 상상력은

참 가난하다니까

말을 못하면 감탄이 아니라

비명을 이를테면

아버지가방에 오후!

잃어버린 우편배달부!

따뜻한 겨울 길!

가여운 상상력!

아랫입술을 물리면

아낀다 사랑한다

꼭 안아주고 싶은

마음이 된다

 

내가 말을 했던가요

며칠 전에 글쎄

아랫입술을 물렸어요

아닐걸요 그저

아랫입술을 물려서

이야, 했겠지

말은 하지 못하고

 

재떨이를 치우는 종업원처럼,

대화가 끝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