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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공현진 孔賢珍

202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선자씨의 기적의 공부법

 

 

설마 얼었나, 이상하게도 순간 진아는 죽은 것을 맞닥뜨린 심정이었다. 고요했다. 진아는 물이 나오지 않는 수도가 얼어붙은 짐승이라도 되는 것처럼 바라보고 섰다.

준비를 한다고 했는데. 올겨울이 오기 전, 진아는 한파 준비와 관련한 정보들을 인터넷에서 찾아보았다. 다이소에서 단열 시트와 문풍지를 사서 창문과 현관문 틈새에 붙이곤 혼자 박수를 쳤다. 어렵지 않았지만 큰일을 해낸 기분이었다. 수도꼭지를 틀어도 잠잠하기만 한 싱크대 앞에 선 채, 진아는 시트를 붙인 창문을 보며 뿌듯해한 얼마 전을 떠올렸다. 아무도 보지 못했고 자기만 아는 일이었지만 괜히 창피했다.

진아는 핸드폰으로 인터넷 검색창부터 열었다. 수도가 얼었을 때. 언 수도 녹임. 수도 계량기 동파.

그게 어디 있지?

진아는 지금껏 수도 계량기에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새벽 두시였다. 이 시간에 집주인에게 연락할 수도 없었다. 진아는 인터넷 검색창에 ‘수도 계량기 위치’라고 검색했다. 현관문 옆에 있을 수 있다고 해서 복도에 나가 살펴봤지만 보이지 않았다. 진아는 ‘오래된 빌라’라는 단어를 추가해 다시 검색했다. 그리고 아예 건물 밖으로 나가 핸드폰 조명을 켜서 외벽을 비추었다. 빨간 벽돌 벽을 따라 천천히 건물을 돌았다.

벽이 아니라 바닥이었다. 건물 뒤쪽 바닥에 인터넷에서 발견한 이미지와 비슷하게 파란 뚜껑이 일렬로 놓여 있었다. 이건가. 그런데 네개의 파란 뚜껑 가운데 무엇이 자신의 집에 해당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수도 계량기가 깨졌는지 얼른 확인해야 한다는데, 하는 생각이 날벌레처럼 머릿속을 빙빙 헤집었지만 진아는 그저 서 있었다. 그 다음에 무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건물 벽과 벽 사이로 휘몰아치는 바람이 매서웠다. 거칠게 얼굴을 때리는 바람을 맞으며 진아는 일단 집 안으로 돌아가야 하는 건지 아닌 건지 느릿느릿 고민했다. 검색을 하면 할수록 더 큰일이 난 것 같고 당장 뭔가를 해결해야만 할 것 같은데, 그런 조바심과 달리 머리가 굼뜨게 돌아갔다. 온몸이 저렸다. 아픈 건가. 추웠다. 너무 추워서 뇌까지 얼어버린 기분이었다. 진아는 자기가 이런 일도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사실에 화가 났지만 그래도 모르는 건 모르는 거였다. 핸드폰으로 검색창을 다시 열었다. 손가락이 얼어 글자가 제대로 입력되지 않았다. ‘계’까지 입력했다가 멈췄다. 무얼 입력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인터넷 창 상단에는 설비업체 사이트가 줄줄이 이어져 있었다. 블로그와 웹사이트를 되는대로 살펴보다가 진아는 일단 수리비용이 얼마나 드는지 찾기 시작했다. 아무리 찾아봐도 원하는 답이 안 나왔다. 이럴 때 물어볼 수 있는 어른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자마자 선자씨가 떠올랐다.

날씨 박사 선자씨. 그건 진아가 선자씨에게 붙여준 별명이었다. 선자씨는 늘 기상청에 전화해서 직접 날씨를 확인했다. 그리고 아침마다 진아에게 오늘은 영상 몇도다, 오늘은 영하 몇도다, 알렸다. 선자씨는 오늘의 날씨만이 아니라 한주간의 날씨까지 줄줄 꿰고 있었다. 한번은 진아가 핸드폰으로 날씨를 검색해 선자씨에게 보여줬다. “이렇게 인터넷으로도 찾을 수 있어요. 검색하면 바로 나와서 편해요.” 그러자 선자씨는 이렇게 말했다. “나한텐 이게 더 쉽고, 이게 더 정확해.” 자기 핸드폰을 귀 가까이에 대고 흔들면서.

선자씨는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는 날이면 꼭 이렇게 덧붙였다. “영하 4도 아래로 내려가면 걸어다니기가 힘들어. 영하 3도까지는 괜찮은데 영하 4도부터 안 되더라고. 내가 딱 확인해봤어.” 어제 아침에도 이 말을 되풀이했다. 자주색 외투를 벗어 의자에 걸치며 선자씨는 말했다. “이런 날엔 밖에 못 있지. 위험해. 영하 4도 아래거든.”

진아는 선자씨가 꼭 기상청에 전화해서 직접 날씨를 알아보는 것도, 그걸 매일 알려주는 것도 신기했다.

“선자씨, 꼭 날씨 박사 같아요.”

선자씨는 별명이 마음에 들었는지 “내가 날씨는 박사지, 그럼” 하며 크게 웃었다. 진아는 그렇게 신기해만 할 게 아니라 영하 4도 아래면 위험하다는 선자씨의 말을 좀 더 새겨들었어야 했다고 후회했다.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두시 반이 넘은 때였다. 진아는 머뭇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동네는 어둡고 조용했다. 개 짖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모두가 평온하게 잠든 듯했고 그러자 울컥 서러웠다. 캄캄한 어둠을 할퀴고 지나가는 건 바람 소리뿐이었다. 이 시간에 연락을 하는 건 무례한 일이겠지.

하지만…… 선자씨는 시도 때도 없이 나한테 연락하잖아…… 연락을 해도 될까. 진아는 망설였다.

 

선자씨는 공부를 하는 중이었다.

최근 선자씨의 기상 시간은 새벽 두시였다. 교육원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저녁 일곱시였다. 저녁은 싱크대 앞에 서서 대충 먹고 접시를 싱크대 안에 쑤셔 박았다. 설거지가 되어 있는 날도 있고 전날부터의 설거짓거리가 그대로 쌓여 있는 날도 있었다. 어제 저녁은 되어 있지 않았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선자씨는 책상으로 갔다. 책상 같은 건 집에 따로 없었지만 선자씨는 나무 밥상을 책상으로 삼았다. 책을 펼쳐 교육원에서 배운 것들을 다시 들여다봤다. 잠들기 직전까지 선자씨는 꼼짝 않고 공부를 했다. 자정이 되기 직전에 잠들어 두시간만 자고 일어났다. 딱 두시간이었다. 다시 공부를 해야 했다.

기상 루틴이 있었다. 새벽 두시에 깨자마자 화장실로 곧장 가 옷을 홀딱 벗었다. 화장실 창문을 닫아놓아도 바깥 공기가 밀려들어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몸에 닭살이 돋고 이가 부딪힐 만큼 추웠다. 그래도 요 며칠의 경험으로 일어나자마자 옷을 홀딱 벗는 것이 제일이라는 걸 터득했다. 이불은 개지 않았다. 칠십이 넘도록 늘 일어나자마자 이불을 반듯하게 개고 하루를 시작했던 선자씨였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이불 먼지를 털어내며 위생 같은 걸 챙기는 건 지금 선자씨에게 마뜩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 여유 부릴 시간 없었다. 얼마 전 선자씨는 남편과 아들에게 선언했다. 나 한달은 공부만 할 거다, 공부해야 하니까 집안일은 일절 손 안 댈 거다, 밥도 청소도 안 한다, 그런 줄 알라. 남편과 아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선자씨는 찬물을 틀어 가차 없이 몸에 뿌렸다. 세수를 하고 머리까지 감으면 정신이 좀 들면서, 내 아직 안 미쳤네, 안 돌았네, 하는 생각이 들었다. 큰 머그컵에 믹스커피 두봉지를 쏟아붓고 포트에 끓인 물을 넣었다. 밥상에는 선자씨가 잠들기 직전까지 들여다보았던 교재가 그대로 펼쳐져 있었다. 선자씨는 돋보기안경을 끼고 커피를 한모금 마셨다.

“염병할. 대체 이게 뭔 말이냐.”

선자씨는 사전의 깨알 같은 글씨 속에서 단어를 찾았다. 정서. 인지. 방임. 선자씨가 평생 살면서 써본 적이 없는 단어들이었다. 입 밖으로 뱉을 일이 없었던 말들을 찾느라 선자씨는 정신이 없었다. 책 속의 문장을 이해하기는커녕 단어 하나하나 찾아보기에 바빴다. 사실 교육원 수업이 끝나고 집에 와서 밤새 몰두하는 건 사전에서 뜻을 베껴 적는 일이었다. 선자씨는 공책에 정서적 기능, 인지적 기능이라고 쓰고 뜻을 적었다.

교재에서 위쪽 귀퉁이가 크게 접혀 있는 페이지를 펼쳤다. 진아가 중요하다며 접어준 것이었다. 선자씨는 접힌 부분을 다시 펴면서 진아를 떠올렸다. 어제 교육원 수업이 끝나자마자 선자씨는 진아에게 푸념했다. 선생님이 뭐라 뭐라 말을 하면 책에서 그 부분을 찾다가 시간이 다 갔다. 익숙한 단어가 아니어서 찾는 데 시간이 더욱 걸렸다. 선생님이 말한 단어가 나온 부분을 기껏 찾아서, 선생님이 하는 말을 이제 좀 적어보자, 하며 선생님 얼굴을 쳐다보면 이미 다른 요지경 소리가 쏟아지는 중이었다. 필기를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

“아니, 내가 정서가 뭔 말인지, 인지가 뭔 말인지 알아야 말이지.” 선자씨는 진아에게 넋두리하듯 말했다. 그러자 진아는 입안에서 말을 굴리듯 천천히 물었다. “정서……라는 말 알지 않으세요?” 진아의 머뭇거리는 말투에서 조심스러움이 느껴졌다. 선자씨는 진아에게서 자신을 무시하지 않으려 하는 마음을 읽었다.

“아니, 그렇게 찬찬히 말하면야 무슨 말인진 알지. 그런데 너무 빨라. 내가 그런 말을 뭐 언제 쓰겄어. 안 그래도 안 와닿는데 정서적 기능이 어쩐다, 인지적 기능이 어쩐다 저쩐다 이래버리니까 정서가 뭔지 인지가 뭔지, 아이고 정신없어. 페이지도 몰라. 뭔 말인 줄도 몰라.”

속은 답답해 죽을 지경이었지만 웃음이 터져나왔다. 왜 이럴 때 염병할 웃음이 나오는지 모르겠다고 선자씨는 생각했다. 그런 선자씨를 보며 진아는 희미하게 따라 웃었다.

선자씨가 지금 공책에 뜻을 베껴 쓰고 있는 단어는 ‘잔존 능력’이었다. ‘남아 있는 능력’이라고 적고 “남은 능력, 남은 능력” 중얼거렸다. 그때 전화가 걸려왔다. 선자씨는 냉큼 전화를 받았다.

 

진아는 이 시간에 전화드려서 죄송하다는 말로 시작했다. 할 만하니까 했겠지, 선자씨가 아무렇지 않게 대꾸하자 진아는 울먹이며 말했다. 뭐가 뭔지 모르겠다고. 선자씨는 진아에게 당장 집주인을 깨우라고 말했다. “그런데 지금 시간이……” 진아가 말끝을 흐리자 선자씨는 다그치듯 호통쳤다. “시간이고 자시고. 지금 그게 문제야?” 걱정이 깃든 목소리로 선자씨는 말을 이었다.

“그거 터지면 어쩔 거야. 큰돈 들어. 난리 나.”

“아……”

“아이구, 답답스러워라.”

선자씨는 한숨을 쉬며 날이 밝을 때까지 기다렸다가는 수도관이 더 꽝꽝 얼 수도 있다고 말했다.

“미안한데 좀 나와보쇼, 사정이 있응께, 해야지. 어쩔 수가 없잖아.”

“그런데……” 진아는 잠깐 말을 멈추었다가 물었다. “얼마나 들까요? 혹시 아세요?”

인터넷으로 아무리 봐도 못 찾겠어요. 얼마나 드는지 어디가 싼지 누구를 불러야 하는지. 진아는 선자씨에게 하소연했다. 안 되겠다, 싶은 마음이 들자마자 선자씨는 바로 일어나서 외투와 차 키를 챙겼다.

“기다려봐. 내 얼른 갈게.”

선자씨는 전화를 끊고 곧바로 알고 지내는 설비기사 장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 트럭에 올라탔다. 선자씨가 모는 트럭이 조용한 밤 골목을 빠져나갔다.

 

*

 

선자씨와 진아는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준비하는 교육원에서 만났다. 두 사람 모두 최근 요양보호사에 대한 정보를 접했고, 그 자격을 갖춰야만 할 사정들이 있었다.

선자씨는 날씨가 너무 추울 때는 장사를 하러 나갈 수 없었다. 선자씨는 시장 입구에서 나물이나 묵, 두부, 고춧가루 등을 팔았다. 여름에는 고소한 콩물도. 폭염이 극심한 여름날에도 장사를 접어야 하는 건 매한가지였지만 더욱 고역스러운 것은 겨울의 혹독한 추위였다. 올겨울은 예고도 없이 찾아왔다. 계절도 모르고 여름이 계속되는 듯 가을에도 습한 찜통 속이어서 “올해 겨울은 없는갑다” 할 때 갑자기 칼바람이 불고 폭설로 건물이 무너지고 양식장의 물고기들이 폐사하고 있다는 뉴스가 쏟아졌다. 영하의 날씨가 계속되었고 일하러 가지 못하는 날들이 하염없이 이어졌다. 하루 이틀이 아니라 일주일 넘게 장사를 가지 못하게 되자 불안해졌다.

안 되겠다.

선자씨는 직업소개소에 가서 아르바이트를 구했다. 식당에도 나가보고 청소를 하러도 가봤다. 문제는 선자씨의 나이였다. 칠십이 훌쩍 넘은 나이를 꺼리는 곳이 많았다. 소개받아 간 업장에서는 선자씨가 도착하면 탐탁지 않은 표정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이모님, 일은 정말 잘하시네요. 하루 일을 마치면 가게 사장이 선자씨에게 말했다. 하지만 다시 선자씨를 부르지는 않았다. 그래도 며칠은 일을 소개받을 수 있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소개가 뚝 끊겼다. 그러다 날씨 때문에 같이 쉬고 있던 시장 동생에게서 요양보호사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언니, 이건 나이 많은 우리도 할 수 있어요.” 곧 시험을 치르는 방식이 바뀌어서 자격증을 따기가 어려워질 거라는 이야기도. “젊은 애들이야 상관없지. 그치만 우리같이 나이 많은 사람들은 지금이 기회예요.”

선자씨의 남편은 심장 수술을 한 뒤 모습이 예전 같지 않았다. 활기라 이름 붙일 만한 모든 것들에서, 선자씨가 사랑하고 미워하던 모습에서 멀어져갔다. 하루는 남편이 꿈을 꾸었다고 했다. 사고가 나는 꿈. 나 이제 운전을 못할 것 같아…… 꿈 이야기를 하며 머뭇머뭇 말하는 남편에게 선자씨는 신경질이 났다. 운전하기 싫어서 별 지랄을 다 한다고 별 꾀를 다 부린다고 소리를 질렀다. 이후로 남편이 차 사고를 두번 냈다. 앞에 가만히 서 있는 차들을 뒤에서 박았다. 큰돈이 깨졌다. 안 되겠구나…… 그후로 선자씨는 혼자 트럭을 몰고 시장을 오갔는데 점점 힘에 부친다는 생각이 들었다. 걱정도 되었다. 아직까지 남편의 정신은 멀쩡했다. 다행이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그럴 거라고 장담할 수 없었다. 불러도 통 대답 없이 소파에 앉아 있는 남편을 볼 때 선자씨는 철렁했다. 멀지 않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지금이 기회예요. 기회라는 말이 선자씨의 가슴을 뛰게 했다.

진아는 지하철을 타고 가다 요양보호사라는 걸 알게 됐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세 여자의 대화를 우연찮게 들어서였다. 들으려고 들은 건 아니었다. 여자들의 목소리가 컸다. 진아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목소리가 컸어도 처음엔 그 내용을 알지 못했다. 아픈 가족, 간병인 비용 같은 단어들이 귀에 꽂히고 나서야 진아는 주의를 기울였다. 이따금 덜커덩덜커덩 쇳소리가 다른 모든 소리를 잡아먹었다. 진아는 몸을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거 따놓으면 가족 아플 때 좀 괜찮아, 어차피 내가 돌봐야 하잖아, 가족은 얼마 지원해준다더라. 진아는 여자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싶었다. 너무나 궁금했다.

“그거 저도 딸 수 있어요? 그게 뭐예요? 어떻게 해야 해요?”

진아는 갑자기 끼어들며 물었다.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에 스스로도 흠칫 놀랐다. 여자들도 당황스러운 얼굴로 진아를 보았다. 그렇게 알지도 못하는 다른 사람들의 대화에 불쑥 끼어들다니. 자신답지 않았다. 진아는 아는 이들과 대화를 할 때도 누군가의 말을 끊고 자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타이밍을 놓쳐 정말로 하고 싶었던 말을 집까지 가져가야 한다 하더라도.

하지만 진아는 출입문 쪽을 힐끗힐끗 쳐다보며 대화하는 세 여자가 금방이라도 내려버릴 것 같아서 불안했다. 그 불안이, 진아가 정말로 궁금한 것을 묻게 만들었다.

“젊은 아가씨가?”

한 여자가 진아에게 이상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진아는 머뭇거리다가 “아버지가……”라고 말했고 뒷말을 잇지는 못했다.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어디부터 어디까지 자기 이야기를 해야 할지 망설여졌다. 하지만 진아가 잇지 않은 말을 세 여자는 이해했다. “고생이 많네……” 진아를 보며 세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가족 돌보려고만 하기엔 자기같이 젊은 사람한텐 별로 안 좋을 텐데.” “돈도 얼마 안 되고.” 진아는 괜찮다고 했다. “괜찮으니 저 좀 알려주세요.” 진아는 말했다. 여자들은 진아에게 요양보호사에 대해 자세히 말해주기 시작했다. 어디에 가서 어떻게 하면 배울 수 있는지부터 국비 지원을 받으면 수강료가 얼마나 감면되는지까지도. 진아는 내리려던 역을 한참 지나쳐 덜컹덜컹 흔들리며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동네에 있는 요양보호사 양성 교육원에 등록했다. 한달하고도 열흘 좀 넘게, 주말만 빼고 오전 아홉시부터 저녁 다섯시 반까지 매일 수업을 들어야 했다. 이론 수업 80시간, 실기 수업 80시간, 현장실습 80시간을 이수해야만 시험을 치를 자격이 주어졌다. 매일같이 출석해서 오전부터 저녁까지 죽 앉아 수업을 듣는다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었다. 선자씨는 첫날 수업을 듣고 나니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다. 훈훈한 온풍기 바람을 맞으며 따듯한 교실에 편히 앉아서 선생님 말을 듣기만 하는 것이 이렇게 힘들 거라고는, 경험해본 적이 없기에 상상할 수도 없었다. 하루도 죽겠는데 한달 넘게 이러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아찔했지만 이게 앞으로 내가 살 길이라는 생각에 선자씨는 마음을 붙들어 맸다. 게다가 곧 계절이 지나면 법이 바뀌어 240시간이 아니라 320시간 수업을 들어야 한다는 교육원 원장의 말은, 지금이 마지막 기회일지 모른다는 선자씨의 생각을 확신으로 만들었다.

진아에게도 한달 넘게 아침부터 저녁까지 수업을 듣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처음 등록을 하러 갔을 때 교육원 원장은 진아를 말렸다. “어디서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모르겠는데 젊은 사람은 다른 직장을 구하는 게 나아요. 나 진짜 솔직한 말이야” 하며 손을 까딱까딱 젓는 원장에게 진아는 사정을 해서 겨우 수업을 들을 수 있었다. 진아가 자격증을 딸 때까지 한달간은 진아의 고모가 아버지를 돌봐주기로 했다. 때에 맞춰 식사와 약을 챙겨주는 것. 그것만 해달라고 진아는 부탁했다.

교육 이수 시간을 모두 채우면 필기시험과 실기시험을 치르는데 그것까지 포함된 커리큘럼이었다.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수강료가 80만원이었다. 다행히 국비 지원을 신청하면 절반 정도 지원받을 수 있었는데 그 절반의 금액 역시 두 사람에게는 적지 않은 액수였다. 선자씨의 경우엔 국비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연령의 끝에 해당하는 나이였다. 한해만 늦었어도 꼬박 80만원, 아니, 늘어난 이수 시간만큼 수업료도 오를 테니 100만원도 넘게 냈을 터였다. 선자씨는 안심하면서도 서러웠다. 올해 시험을 단번에 붙어야만 하는 이유가 여기에도 있었다.

강의실에는 두명씩 앉을 수 있는 책상이 세개 분단으로 다섯줄씩 놓여 있었다. 진아와 선자씨는 옆자리에 앉는 짝꿍이었다. 처음부터 두 사람이 같이 앉았던 것은 아니었다. 선자씨는 늘 강의실에 제일 먼저 와서 선생님 바로 앞에 앉았다. 진아는 뒤쪽 남는 자리에 앉았다. 진아는 출석 전에 맞춰 온다고 왔는데 다른 사람들은 훨씬 빨리 왔고, 강의실에 도착하면 앞쪽에는 자리가 없었다. 개강을 하고 3일 정도 지나자 가운데 분단 제일 앞자리, 그러니까 선자씨의 옆자리가 비었다. 선자씨의 옆에는 아무도 앉지 않았다. 바로 뒤에도 아무도 앉지 않았다. 선자씨의 뒷자리에 앉자마자 진아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수업 도중에 선자씨는 자주 뒤를 돌아보며 진아에게 물었다.

“아가씨, 지금 몇쪽이에요?”

“방금 몇쪽이에요?”

“몇쪽 하고 있어요?”

그럴 때마다 진아는 손가락으로 자기 책의 쪽수를 가리켜 짚어주거나 작은 목소리로 말해주었다. 41쪽이에요. 120쪽이에요. 아, 거기 아니에요. 그럼 선자씨는 다시 앞쪽으로 몸을 돌려 책에 고개를 파묻었다. 그리고 연필로 뭔가를 열심히 적었다.

개강 일주일 후 진아는 선자씨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두 사람은 선생님 바로 앞에 앉아서 수업을 들었다. 선자씨는 눈도 거의 깜빡이지 않고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선생님의 얼굴을 쳐다보았는데 선생님이 칠판에 필기를 하려고 등을 돌리거나 시청각 자료를 보여주기 위해 말을 잠깐 멈추면, 여지없이 진아에게 속삭이며 물었다.

“방금 뭐라 그런 거야?”

진아는 선자씨의 말에 모두 대답해주었다.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솔직히 가끔 귀찮을 때도 있었지만 이런 건 조금 귀찮을 뿐이지 결코 어려운 일은 아니라고, 진아는 생각했다.

 

오후 한시부터 한시 오십분까지는 점심시간이었다. 교육원에서 밥과 김치를 제공해주었고 각자 반찬을 하나씩 가져오면 된다고 했다. 식사는 수업을 듣던 강의실에서 했다. 사람들이 책상 몇개를 붙이곤 가져온 각종 나물, 생선조림, 장조림, 마늘이나 고추나 양파로 만든 장아찌들, 무생채, 동그랑땡, 감자채 볶음 같은 것들을 죽 늘어놓았다. 뷔페처럼 큰 접시에 반찬들을 골라 담아 삼삼오오 모여 앉으니 수업 시간에는 가물가물 시들던 강의실이 점심시간만큼은 생기가 넘치고 화기애애했다. 곳곳에서 괄괄한 목소리와 호탕한 웃음소리가 쏟아져나왔다. 선자씨와 진아가 앉은 자리만 빼고.

두 사람은 수업 시간에도 쉬는 시간에도 점심시간에도 함께 있었다. 옆으로 나란히 앉아 같이 점심을 먹었다. 두 사람이 서로와만 지내고 싶어서 그러는 건 아니었다. 둘은 교육원에서 다른 친구를 사귀지 못했다. 선자씨에게도 진아에게도 다른 수강생들이 말을 걸지 않았다. 교육원 수강생들은 대개 50대와 60대였고 나이가 비슷한 사람들끼리 친해졌다. 진아는 너무 어렸고 선자씨는 나이가 많았다. 금세 친해진 사람들은 빨리 점심을 먹고 건물 1층에 있는 까페로 갔다. 음식 냄새가 꽉 찬 강의실에는 선자씨와 진아만 남았다.

“어리다고 지들끼리만 말하고. 나는 나이 많다고 말 한마디를 안 걸어. 싸가지가 없어.” 말하며 선자씨는 책상에 흘린 반찬 양념을 물티슈로 닦았다. 그리고 책을 폈다. “근디 뭐 내가 공부해야 하는데 신경 써서 뭐 해.” 선자씨는 덧붙이며 수업 중 놓친 필기를 진아의 책에서 베껴 적었다.

 

*

 

늘 제일 먼저 교실에 오는 선자씨가 여태 보이지 않았다. 진아는 핸드폰 시계와 문 쪽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출석 체크 시간이 다 되어갔다. 얼른 와야 하는데. 진아는 자기 때문에 선자씨가 못 오고 있는 것일까봐 걱정되었다.

새벽에 선자씨는 빠르게 진아의 집으로 왔다. 설비기사와 동시에 도착했다. 선자씨가 오자 일은 순식간에 해결됐다. 선자씨는 곧바로 건물 1층에 살고 있는 주인집 현관문을 쾅쾅 두드렸다. 밤의 정적이 요란하게 부서지고 동네 사람들이 모두 깰 것 같았다. 진아가 걱정한 것이 무색하게 주인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황급히 밖으로 나와 계량기가 있는 쪽으로 사람들을 이끌었다. 다행히 수도관 안쪽이 얼진 않았네요. 금방 되겠어요. 설비기사가 말했고, 정말로 교체는 삼십분도 채 되지 않아서 끝났다. 설비기사는 선자씨와 인사를 나누고는 훌쩍 가버렸다. 진아는 선자씨에게 “저…… 얼마예요?” 물었고 그런 진아에게 선자씨는 씩 웃으며 말했다.

“싸게 했어. 이미 냈으니까 됐어.”

“네?” 진아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니에요. 제가 내야죠.”

“정말이야. 정말 싸게 했어. 다 방법이 있지.”

“그래도……”

선자씨는 어깨로 진아를 툭 치며 웃었다. “내가 이 정도는 갚아야지.”

선자씨는 껄껄 웃으며 그간 염치가 없었는데 잘됐다고 말했다. 트럭을 몰고 왔던 선자씨는 다시 씩씩하게 트럭에 올라타며 말했다. “이따 만나.” 진아는 트럭이 떠날 때까지 길에 서 있었다. 시동이 켜지고 트럭이 골목을 빠져나가는 소리가 경쾌하게 느껴졌다.

진아는 선자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음이 몇번 울리고 벌컥 문이 열리며 선자씨가 들어왔다. 진아는 자리로 다가오는 선자씨에게 손을 흔들었다.

“큰일 날 뻔했네. 나 깜빡 잠들었지 뭐야.”

“새벽에 정말 감사했어요.”

“어려운 일도 아닌데 뭘. 나한테 그런 건 별일도 아냐. 이런 게 죽을 맛이지” 하며 선자씨는 가방에서 책을 꺼냈다. 선자씨는 두꺼운 책 네권을 모두 들고 다녔다. 표준교재, 요약집, 기출문제집 두권.

“오늘 그 지랄로 춥다가 이따 밤에는 눈이 온다네.”

선자씨가 말했다. 곧 선생님이 강의실로 들어왔다. 두 사람은 앞을 보고 수업을 들었다.

 

“이거 중요해요. 중요 표시하세요”라고 선생님이 말할 때마다 선자씨가 바삐 뭔가를 적었다. 쉬는 시간 선자씨는 책상에 책을 펼쳐놓고 화장실에 갔고, 진아는 무심코 선자씨의 책을 자기 자리로 당겨와 책장을 넘겼다.

 

꼭 알아주

중요함

중요하

중ㅇ

중요ㅎ

 

선자씨가 일일이 써넣은 ‘중요함’이라는 글씨가 눈에 띄었다. 급하게 적느라 ‘중요함’을 다 적지 못한 부분이 더 많았다. 화장실에서 돌아온 선자씨가 손에 묻은 물기를 옷에 닦으며 의자에 앉았다. 진아는 선자씨가 ‘중요함’이라고 적은 곳 옆에 별표를 그려 넣었다.

“이거 이렇게 그냥 별표 표시하면 돼요.”

“세상에나.”

선자씨는 입을 벌리고 진아를 쳐다보았다. “내가 공부를 해봤어야 알지. 세상에나.” 선자씨는 싱글벙글 웃으며 ‘중요함’을 지우개로 지우고 별표를 크게 그려 넣었다.

“신기하네. 재밌네.”

선자씨는 진아가 알려주는 방법들을 신기해했다. 진아는 연필로만 밑줄을 긋고 필기를 하는 선자씨에게 검정, 빨강, 파랑, 세가지 색이 나오는 삼색 볼펜을 건넸다.

“선생님이 중요하다고 말한 부분에는 이 빨간색으로 별표를 하거나 밑줄을 그으세요. 눈에 확 들어오니까요. 그리고 이해가 잘 안 되는 부분은 요 파란색으로 체크하면 좋아요. 질문을 써도 좋고요.”

진아는 선자씨에게 형광펜과 포스트잇도 주었다. 공책 왼쪽을 비워두고 핵심 내용을 정리하는 방법도 공유했다. 진아가 아주 사소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선자씨는 놀라워하며 역시 똑똑한 사람은 다르다고, 공부를 해본 사람은 다르다고 말했다.

“자기만의 공부법을 찾으면 더 좋아요. 나한테 맞는 게 따로 있을지도 몰라요.”

“그런 걸 찾다가 사람이 미치는 거구만.”

진아는 웃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말이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머리에 지진이 난다.

수업이 끝나면 선자씨는 번번이 그렇게 말했다. “선자씨는 제일 힘든 게 뭐예요?” 묻는 진아의 말에 선자씨는 단어가 어려운 것, 선생님 말이 빠른 것, 허리가 아픈 것, 좀이 쑤시는 것, 앱으로 출석 체크를 하는 것, 동영상으로 복습하는 것 등등을 줄줄 늘어놓았고 간간이 진아도 맞장구를 쳤다. 그건 저도 어려워요. 저도 헷갈려요. 그런 어려움 따위를 줄줄 늘어놓다가 선자씨는 문득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나 진짜 내 정신이 돌까봐 무서워. 머리에 막 지진이 나서.”

정말이었다. 그 두려움이 선자씨를 가장 걱정스럽게 했다. 읽어도 읽어도 들어도 들어도 뭔 말인지 도통 모르겠는 것을 붙잡고 앉아 있으면 갑자기, 이러다 내가 도는 거 아니야? 이러다 내가 미치는 거 아냐 정말? 같은 생각이 몰려왔다.

“그러니까 공부하는 사람들이 대단한 거 같아. 공부하는 게 보통 일이 아니야. 나 몰랐어. 박사님, 정말 대단해.”

선자씨는 진아의 어깨를 툭툭 손으로 쳤다. 정말 대단하다는 건 진아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선자씨는 진아가 대학원에 입학까지 했었다는 말을 듣고 대단하다는 말을 자주 하며 진아를 박사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저 박사 아니에요, 진아가 말해도 소용없었다. 수료도 못하고 박사과정 중에 휴학했다고 해도 그거나 그거나, 말하며 선자씨는 진아를 박사님이라고 불렀다.

진아는 자신을 똑똑하다고 자꾸 추켜올리는 선자씨의 말이 어색하고 불편하다가도 묘하게 아주 싫지만은 않았다.

똑똑한 애가 왜 그러고 있어.

아버지를 병간호하는 기간이 길어지자 진아는 여러 걱정의 말을 들어야 했다. 이런 말 실례인 것 아는데. 이런 말 어떨지 모르겠는데. 조심스럽게 시작된 말들은 정말로 진아를 걱정하는 말로 이어졌다.

너는 너의 삶을 살아야지.

그 말들에는 가족에 얽매여 자기 삶을 희생하고 있다는, 그러니까, 그런 건 주체적이지도 못하고 건강한 태도가 아니라는 책망이 깔려 있음을 진아는 모르지 않았다.

너의 삶을 무너뜨리면 안 돼.

그런 말을 들을 때면 진아는 의심했다.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자격이라는 게 따로 있는 것 아닐까. 네가 너무 착해서 그래,라는 말을 들으면 그 모욕을 되돌려주고 싶었다. 당신도 내 상황 속에 놓여보기를. 다정한 표정을 한 상대의 앞에 들끓는 마음으로 앉아 있었다. 엄마가 암으로 일찍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진아에게 하나 남은 가족이었다. 아버지가 뇌출혈로 쓰러진 후 진아는 아버지 옆에 있고 싶었다. 아버지를 잃어가는 시간을 온전히 감내하고 싶었다. 우울했고 슬펐다. 밤은 길고 아침은 오지 않았다. 닫힌 방문으로도 죽음의 냄새가 새어나왔고, 집 바깥을 걸어도 죽음의 냄새가 났다. 그러나 진아는 우울을 극복하고 싶지 않았다. 돌봄으로부터 탈출하라는 말도 헛되었다. 그런 말들을 짓이기고 부수며 진아는 밤을 보냈다.

머리에 지진이 난다고 심각하게 말했던 선자씨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오늘 선생님들에게 받은 자료를 반으로 반듯하게 접어 공책 사이에 끼워 넣었다. 진아는 그런 선자씨를 빤히 쳐다보았다. 선자씨는 자신이 국민학교밖에 안 나왔다는 말을 꽤 자주 했다. 공부랑은 평생 담을 쌓고 살았다는 말도. 그런데 가만히 듣다보면 진아는 선자씨가 평생 해온 것이 공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선자씨는 남편이 아프고 나서 육십이 넘은 나이에 운전면허 공부를 했고 필기를 여덟번 만에 붙었다고 했다. 하지만 실기는 단번에 붙었다고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선자씨가 트럭을 타고 나타났을 때, 그리고 트럭에서 내렸을 때 진아는 영화 속 히어로를 보는 것 같았다. 어떤 히어로의 등장보다도 웅장하고 멋있었다. 트럭이 오래되어 엔진 소리는 아주 요란했고 매캐한 매연 냄새가 금방 가시지 않았다. 문제를 해결하곤 “나 키가 작아서”라고 하며 선자씨는 트럭 앞쪽 바퀴를 밟고 자신의 키보다 높은 차체에 능숙하게 올라탔다.

“선자씨는…… 평생 해온 것 같아요.”

“무어를?”

“공부요.”

“공부?”

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해괴한 소리라며 선자씨는 웃었다.

그런데 선자씨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 말이 생각났다. 집에서 책을 펼칠 때도 문득 그 말이 생각났다. 선자씨는 그 말이 잊히지 않았다. 아니, 그 말을 잊지 않고 싶었고 잊지 않기로 했다.

 

*

 

선자씨는 공부했다. 계속 공부했다.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공부했다. 방법이 없었다.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래서 무작정 외웠다.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외워도 외워도 글자들이 머리에서 줄줄 새어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나면 새어나가고, 물 한잔 마시려고 일어나면 새어나갔다. 그래도 꾸역꾸역 외웠다.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선자씨는 지금껏 살면서 노력해서 안 되는 게 이것뿐이었냐, 속으로 외쳤다. 그래서 뭐 어쩔 것이여, 되뇌며 노력해서 되나 마나 외워서 까먹으나 마나 오늘 하겠다고 한 거나 해야겠다 생각했다. 그렇게 선자씨가 매일 해온 것은 다음과 같았다.

 

선자씨의 공부법 1. 일단 외우기

무위=역할 상실. 하는 일 없음.

비가역적=주위 환경 변화에 따라 이리저리 쉽게 변하지 않음.

농흉=고름.

내향성=내성적.

선자씨는 교재에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이제 형광펜으로 표시했다. 모르는 단어만 따로 모아서 적어놓는 용도로 마련했던 공책은 없애고, 교재에 형광펜으로 바로 밑줄을 긋고 그 아래나 근처에 뜻을 써두었다. 파란색 펜으로. 그 편이 훨씬 효율적이었고 손도 덜 아팠다.

선자씨는 모르는 단어를 많이 익혔다. 노화는 막을 수 없는 ‘비가역적’ 진행이라는 것을 알게 됐고, 고름은 ‘농흉’이라고 한다는 것을, ‘내향성’과 내성적이라는 말이 비슷한 뜻이란 것을 알게 됐다. 더럽게도 안 외워지고 계속 까먹어버리는 말들도 있었는데, ‘잔존 능력’과 ‘저잔사 식이’라는 말이 그랬다. 형광펜으로 칠한 단어에 세개의 별을 그려 넣었다.

 

선자씨의 공부법 2. 몰라도 외우기

공부해야 하는 내용들이 만만하지 않았다. 소화기계 구조를 외워야 했고, 노인에게 주로 발병할 수 있는 질환의 종류와 증상, 치료 및 예방 방법을 외워야 했다. 선자씨는 소화기계 그림도 그려보고, 낙서도 해보고, 욕설도 써보고, 멜로디를 붙여 노래도 불러보았다. 각종 질병의 증상에 대해서 외울 때는 남편과 친구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그들이 앓았던 혹은 앓고 있는 병들을 헤아려보았다. 심혈관계 질환과 신경계 질환은 남편과 관련이 있어 더 집중이 되었고, 피부계 질환은 별표 세개 ‘아주 중요함’이었다.

표피가 얇아지고 머리카락 모근이 가늘어지고 멜라닌 세포가 사라지고…… 말도 더럽게 어렵네. 빈혈은 적혈구, 헤모글로빈 부족. 노인은 철분 부족해 빈혈 흔함. 빈혈은 철분제와 철분 흡수를 돕기 위해 비타민 C를 함께 복용해야 하고. 골다공증은 칼슘과 비타민 D를 섭취해야 하고……

그뿐인가. 국민건강보험법 제5조, 노인장기요양보험법 제7조를 외워서 노인장기요양보험 제도에서 명시하는 사업의 보험자와 가입자를 구분하고, 노인장기요양 등급의 점수와 기준, 노인장기요양보험 표준서비스 내용이 무엇인지 모두 알아야 했다.

각종 질병을 어떻게 처치하는지, 관련한 전문 용어들을 읊고 있다보면 머리에 지진이 나면서도 ‘전문적’인 내용을 외우고 있다는 생각이 점점 들었다. 전문가. 전문가였다. 외우는 내용들은 어렵지만 실로 전문적이었다.

 

선자씨의 공부법 3. 까먹어도 외우기

염병할.

 

선자씨는 한줄씩 공부 일기를 썼다. 수업 첫날 선생님이 매일 공부를 하고 나서 한줄씩 일기를 써보라고 했다. 그건 어떻게 쓰는 거예요? 물으니 선생님은 ‘마음대로’라고 했다. 오늘 공부하고 알게 된 내용이나 느낀 점을 써도 되고요. 기분을 써도 되고요. 마음대로예요.

3일 차까진 아무것도 적지 못했다. 분명 종일 수업을 듣고 집에 와서도 책을 붙들고 앉아 있었지만 책을 덮으면, 아니 책을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기억나는 것이 없으니 아무것도 공부한 것 같지 않았다.

4일 차부터는 정말 마음대로 일기를 썼다. 선자씨가 일기를 쓴 이유는 간단했다. 그거라도 해야 안 미칠 것 같아서였다. 본태성 일차성, 속발성 이차성, 본태성 일차성, 속발성 이차성 중얼거리다 잠깐 멈추면 딴 세상에 있는 것 같았다. 너무, 정말 너무 무서웠지만 선자씨는 그래도 공부했다. 5일 차. 8일 차. 12일 차. 13일 차. 19일 차……까지 선자씨는 무서웠다. 울고 싶었지만 울 시간도 없었다.

이게 기회가 맞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다가도 몸을 일으켜 기지개를 켰다. 외투도 입지 않고 밖으로 나가 캄캄한 골목에 잠깐 서 있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이렇게 빛 하나 없고 깜깜하니 별이 보이겠다 싶었다. 하지만 한참 까만 하늘을 바라보고 있어도 별은 보이지 않았다. 공기가 더러우니 밤에 별도 안 보이는가 하며 선자씨는 다시 집으로 들어가 공부했다.

그러다 20일 차. 딱 20일쯤 접어드니까, 선자씨는 이제 좀 알겠다, 하는 마음이 들었다. 선생님의 말이 들렸다.

 

내가 어떻게 공부했는지 좀 들어보겠느냐고 묻지 않고 선자씨는 말했다. 물어보지 않았지만 꼭 진아의 물음에 대답하듯이 선자씨는 말했다. 어제 내가 어떻게 공부했냐면…… 선자씨는 자기가 공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좋아했고, 진아는 선자씨의 공부 이야기를 듣는 것이 좋았다. 선자씨는 공부 이야기를 하다가 다른 이야기로 샜다가 다시 공부 이야기를 했다. 그 이야기들을 듣다보면 왠지 힘이 났다.

진아는 좀처럼 공부할 시간이 없었다. 아버지를 한달간 돌봐주겠다던 고모는 매일 진아에게 푸념을 했고, 그런 고모를 달래느라 진땀을 뺐다. 집에 돌아가면 할 일이 많았다. 아버지를 씻기고 청소를 했다. 내일 아버지가 먹어야 할 약과 음식을 챙겨두었다. 그리고 책상에 앉아 일을 했다. 진아가 재택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은 주로 교정 교열 아르바이트였다.

“진아는 이런 거 무슨 말인지 그냥 이해되잖아. 얼마나 부러워.” 선자씨는 진아에게 말했었다. 확실히 교육원에서 배우는 내용들이 진아에게 아주 어렵지는 않았다. 하지만 시험을 치르기 위해서는 공부할 시간이 필요했다. 진아는 공부를 미룰 수밖에 없었다.

한달은 금세 지나갔다.

 

*

 

이론과 실기 수업이 모두 끝나자 현장 실습이 진행됐다. 요양원, 주간보호센터, 재가시설을 각각 며칠씩 총 열흘 정도 방문해야 했고, 수강생들은 조를 나누어 실습에 나섰다. 수강생들은 시설과 센터에서 근무하는 요양보호사의 지시에 따라 일을 돕거나 요양보호사가 하는 일을 뒤에서 관찰했다. 선자씨와 진아는 지난주에는 노인들의 유치원이라 불리는 주간보호센터와 어르신의 집으로 찾아가는 방문 요양 실습을 마쳤고, 마지막으로 요양원으로 실습을 나갔다.

요양원 근처에 천이 있었다. 실습을 마치고 선자씨와 진아는 천변을 따라 걸었다.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오늘은 좀 걸어도 돼. 기온이 갑자기 올랐어.”

역까지는 어차피 걸어야 했는데 마치 어제는 우리가 안 걸었던 것처럼 말하는 선자씨에게 진아는 웃음이 나왔다. 이맘때 하천이 얼었던 것 같은데, 물이 안 얼었네요, 어제 칼바람이다가 왜 갑자기 봄 날씨야, 같은 대화를 하며 선자씨와 진아는 천천히 걸었다. 진아는 물 위에 떠 있는 물새들과 오리들을 보며 “정말 큰일이에요, 공부할 시간이 없어요”라고 말했다. 진아는 녹초가 되어 걸었는데 선자씨는 아니었다. 선자씨의 씩씩한 걸음과 총총한 눈을 보며 진아는 참 대단하다 싶었다. 진아는 오늘 있었던 일을 생각했다.

수업을 들을 때는 제일 이해도 느리고 힘들어 죽겠다던 선자씨였지만 실습을 나가서는 단연 우등생이었다. 어르신들의 식사와 목욕을 능숙하게 도왔고, 침대에 누워 있는 어르신의 체위를 변경할 때 다른 실습생들은 힘이 없어 쩔쩔맨 반면 선자씨는 힘이 장사였다. 하루는 탬버린을 짤랑짤랑 흔들며 음악에 맞춰 춤을 춘 선자씨 덕분에 춤판이 벌어졌다. 어르신들과 함께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는 선자씨의 모습을 보고 진아는 놀랐다.

진아는 실습 기간 동안 요양보호사 일이 얼마나 힘든지, 노동환경이 얼마나 열악한지를 실감했다. 수업에서 요양보호사가 허드렛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했지만 실습 기간 동안 진아는 청소와 빨래만 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코에서 락스 냄새가 가시지 않았고 손이 얼얼했다. 점심시간이면 다들 모여서 앓는 소리를 했다. 요양보호사들과 실습생들은 점심을 먹으며 어느 병원으로 가면 좀더 나아요, 그 병원은 보호자들이 좀 괜찮아, 그 병원은 보호자들이 지랄 맞고요, 같은 이야기들을 주고받았다.

진아는 평생 이 일을 할 생각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지금 진아에게 필요한 일이었고, 그래서 견딜 만했다. 오가는 대화들을 듣다보면 슬프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다. 그런 처연한 마음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은 자신이 이 상황으로부터, 그들로부터 거리를 두고 있다는 뜻이었다. 진아는 그것을 모르지 않았고, 그래서 씁쓸했다.

점심시간은 금세 지나갔다. 오늘은 선자씨와 한 조가 되어 요양보호사를 따라 치매를 앓는 할머니에게로 향했다. 늘 원을 그리며 요양원 거실을 맴도는 할머니여서 눈에 익었다. 선자씨가 춤을 출 때 깔깔 웃으면서 더 큰 원을 그렸던 모습도 떠올랐다. 할머니는 요양보호사가 들어서자 바닥에 파란 수건 하나를 던졌다.

“아줌마, 이거 좀 빨아와.”

요양보호사는 선자씨와 진아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웃는 얼굴을 했다. 치매, 치매,라고 입모양으로 말했다. 요양보호사는 바닥에 떨어진 수건을 집어들고 화장실로 향했다. 진아는 착잡한 마음으로 요양보호사를 기다렸다. 선자씨가 침대에 앉아 있는 할머니에게 다가가 그 옆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줌마가 아니에요. 선생님이세요. 요양보호사 선생님이요.”

진아는 등짝을 얻어맞은 듯 서서 선자씨가 할머니에게 하는 말을 들었다. 예전에도 선자씨는 수업 도중 선생님이 했던 말을 진아에게 반복해서 읊곤 했다. “요양보호사 선생님이라고 해야 해요. 선생님이에요”라고 선자씨는 똑같이 따라하며 강조했다. 국가고시에 당당하게 합격한 것이다 이거지. 선생님이라는 거지.

선생님,이라는 호칭에 선자씨는 한없이 기뻐했다. 진아는 그건 말일 뿐이라고 실제 상황에서는 그런 대접을 받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선생님이라는 단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고 뿌듯해하는 선자씨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묘했다. 한편으로는 이런 모습을 다른 누군가가 냉소적으로 비웃고 놀리지는 않을까, 곤란한 상황을 겪진 않을까, 걱정이 됐다. 그러나 선자씨는 누군가의 냉소와 비웃음을 그대로 두지 않을 것이다. 냉소를 냉소로 받아들이기보다는 맞받아칠 것이다. 그러면 상관없지 않을까.

문득 진아는 선자씨가 부러웠다. 처음에는 선자씨 같은 엄마를 둔 자녀가, 그리고 선자씨의 가족들이 부러운 건가 싶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아니었다. 진아는 선자씨가 부러웠다.

진아와 천변을 걷던 선자씨가 갑자기 손가락으로 나무를 가리켰다. 꽃봉오리 하나가 매달려 있었다.

“아직 이러면 안 되지.”

선자씨가 말하며 나무 쪽으로 꽃 쪽으로 달려갔다. 진아도 그쪽으로 향했다. 선자씨와 진아는 계절을 모르고 움튼 꽃봉오리를 바라보며 섰다. 두 사람은 고개를 저으며 큰일이라고 말했지만 축복인 듯 저주인 듯 튀어나온 하얀 꽃봉오리가 탐스러웠다. 수료식 전날이었다. 시험이 남아 있었지만 수업과 실습을 무사히 마쳤다는 것만으로도 감격스러웠다. 내일 멋지게 입고 오자고 선자씨가 말했고, 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다음 날, 수료식이 시작되는데도 선자씨가 오지 않았다. 수업과 실습에 한번도 빠진 적이 없고, 지각조차 한 적이 없던 선자씨였다. 진아는 선자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지 않았다. 문 쪽을 바라보았지만 수료식이 끝날 때까지 선자씨는 오지 않았다.

진아는 내내 선자씨를 생각했다. 전화도 받지 않아서 무슨 일인가 싶었다. 한밤중이 되어서야 선자씨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진아는 선자씨가 수료식에 오지 못한 사정을 묵묵히 들었다. “시험이 다음주 토요일 맞지? 그날 겁나게 춥던디.” 전화를 끊기 전에 선자씨가 씩씩하게 말했다.

 

선자씨가 수료식에 가지 못한 사정은 이러했다.

진아와 헤어지고 집에 온 선자씨는 다음 날 수료식에 입고 갈 투피스 치마 정장을 옷장에서 꺼내놓았다. 좋아하는 옷이었다. 옷에 붙은 먼지를 털어내고 어울리는 모자도 서랍장에서 찾았다. 선자씨는 흐뭇하게 웃으며 거실로 나가 책을 펼쳤다. 수료식은 수료식이고 당장 시험이 코앞이었다.

식구들이 잠을 자러 방에 들어가고 나서도 선자씨는 책을 보았다. 이제 조금, 정말 조금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었다. 알 것 같았다. 선자씨는 기출문제를 풀었다. 맞을 때도 있었지만 틀릴 때가 더 많았다.

치매 대상자가 사람들 앞에서 바지를 벗었을 때 요양보호사의 올바른 행동은? 선자씨는 5번 “감기 들어요, 바지 입으세요”를 골랐다. 오답. 정답은 3번, 말없이 바지를 입혀드려야 했다. 아니, 말 한마디 안 건네고? 선자씨는 고개를 저으며 다음 문제를 봤다.

“요즘 사는 게 재미도 없고 외롭고 살기 힘들어”라고 대상자가 말하면 요양보호사의 반응은? 선자씨는 “사시는 것이 왜 힘이 드세요?”라고 묻는 1번을 골랐다. 오답이었다. 정답은 “요즘 외롭고 힘드시나봐요?” 3번.

답이 왜 이거냐. 인정머리 없구만. 소리 내어 말하면서 선자씨는 계속 문제를 풀었다. 눈이 침침했다. 눈을 비볐다. 다음 문제. 4번. 틀렸구만.

다음 문제. 섬망의 특징으로 옳은 것은? 2번 지남력장애. 이건 맞았다 맞았어. 고혈압 대상자의 식단은? 현미밥, 콩나물국, 삼치구이지. 이것도 맞았어. 선자씨는 문제가 이해가 되어서 기뻤다. 눈물이 났다. 눈에서 눈물이 났다. 줄줄 멈추지 않고 눈물이 나서 선자씨는 소매로 눈을 닦았다. 이상하네. 어, 왜 자꾸 눈물이 날까. 눈을 비비고 눈물을 닦았는데도 눈물이 났다.

흰 눈이 가득 내린 것처럼, 펑펑 쏟아지는 눈이 담장과 벽을 밀고 넘어와 방 안을 환히 채운 것처럼, 눈이 시렸다.

환하고 캄캄했다…… 아무래도 뭔가 이상이 생긴 게 틀림없었다.

선자씨는 다음 날 날이 밝자마자 바로 안과에 갔다. 안과에 가니 의사가 당장 백내장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그때 선자씨에게 든 생각은 정확히 이것이었다.

뭔 소리야. 내가 지금 공부를 해야 하는데.

선자씨는 오로지 공부 생각밖에 없었다. 시험이 얼마 남지 않았다. 선자씨는 그간의 공부들을 복기했다.

 

*

 

그 이후의 이야기를 진아는 살면서 간간이 떠올렸다. 가끔, 혹시라도 선자씨 눈에 문제가 생겼다면 어쩔 뻔했나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아찔했다. 안과에 다녀왔다는 선자씨에게 진아는 수료증은 나중에 언제든 찾아가도 된다 했다고 전해주었다. 괜찮냐고 묻기도 전에 선자씨는 괜찮다고 했다. 당장 수술해야 하는 것 아니에요? 진아가 걱정하자 선자씨는 내가 시험이 코앞인데 어쩔 거야, 하며 웃었다. 그리고 일주일이 지나 시험을 치렀다. 컴퓨터 시험이었기 때문에 선자씨보다 어린 50대, 60대 수강생들도 애를 먹었다. 버튼을 잘못 눌러 시험을 망쳐버린 사람도 있었다. 선자씨는 당당히 시험에 합격했다. 그것도 반에서 최고 점수로.

환한 미소의 선자씨가 나타났다. 나 합격이야 합격. 기적이야 기적. 웃음을 터뜨리며 선자씨가 나타났다. 선자씨는 기뻐했고, 그 장면을 기억에 오래 남겨두자고 진아는 생각했다. 선자씨는 수술 날짜를 잡았다. 진아는 합격하지 못했다. 반에서 딱 두명이 떨어졌는데 그중 하나가 진아였다. 2점, 합격선에서 딱 2점이 모자랐다. 선자씨는 진아를 놀리면서도 혼자 떨어진 게 아니니 얼마나 덜 망신스럽냐고, 딱히 위로는 아닌 말을 했다.

“박사님은 괜찮아. 박사님은 젊잖아. 다음번에 바로 붙지. 내가 했는데 이걸 못할 거야?”

선자씨는 합격하기까지 자신의 공부에 대해 했던 말을 하고 또 했다. 평생 해본 적 없는 공부였다는 말을 반복했다.

기적이라고 말하는 선자씨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진아는 생각했다. 선자씨의 행복을 진심으로 바라는 마음이 들었을 때 진아는 당황스러웠다. 내가 누군가의 행복을 바라고 기원할 만한 상황인가, 그런 처지인가.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자격이 없나, 자격이 없는 건가? 스스로에게 외치듯 되물었다. 그리고 마음껏, 진심으로 선자씨의 안녕을 생각했다. 선자씨에게 평온이 있길. 씩씩한 선자씨의 용기가 계속되길. 바라고 또 바랐다.

교육원에서 합격자들에게 합격증을 나눠주는 날, 진아는 꽃집에 들러 꽃을 골랐다. 꽃다발 가격을 물었다. 이건 3만원이고 이렇게 하면 5만 5천원이에요. 진아가 망설이자 가게 주인이 말했다. 3만원짜리도 이렇게 묶으면 풍성하고 좋아요. 진아는 3만원짜리 꽃다발을 골랐다. 겹겹이 포장지를 덧대어 한결 탐스럽고 풍성해진 꽃다발을 흔들며 진아는 선자씨를 축하하러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