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소설

 

 

이장욱 李章旭

2005년 문학수첩작가상을 받으며 작품활동 시작.

소설집 『고백의 제왕』 『기린이 아닌 모든 것』 『에이프릴 마치의 사랑』 『트로츠키와 야생란』, 장편소설 『칼로의 유쾌한 악마들』 『천국보다 낯선』 『캐럴』 『뜨거운 유월의 바다와 중독자들』 등이 있음.

oblako@hanmail.net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인생 최고의 기분일 때를 10, 자살충동을 느낄 만큼 우울할 때를 0이라고 한다면, 그날은 대략 3.5 정도의 오후였다고 말할 수 있다. 우울하기는 하지만 견디지 못할 정도는 아니고, 어딜 나가서 누굴 만날 생각은 들지 않지만 그렇다고 벤조디아제핀 계열의 약을 먹고 멍한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고 싶지도 않은 오후.

집 안은 고요했다. 당연한 일이다. 반지하 원룸에 혼자 사는 백수의 집이니까. 아니, 꼭 그렇지는 않은가. 백수라고는 해도 나는 무려 대학원생이고 그것도 철학과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다. 백수치고는 돈이 많이 드는 백수라고 하면 위안이 되나. 전직 은행원이자 현직 독거노인인 부친의 등골을 빼먹는 캥거루라고 하면 어떤가.

인생 최고의 기분일 때를 10, 자살충동을 느낄 만큼 우울할 때를 0이라고 한다면, 내 인생은 대략 3에서 5 사이를 흘러갈 것이다. 나에게 8 이상의 ‘하이’가 가능할 리 없다. 직관적으로 그렇게 느끼고 있다. 말하자면 인생 자체에 대해 기대치가 높지 않은 셈이다. 기대치가 높지 않으면 실망도 절망도 덜 하게 된다. 간단한 산수다. 내 삶이 3 이하의 ‘로우’로 떨어지지 않는 비결이기도 하다. 이 어지러운 도시를 떠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고.

니체에게서 연락이 온 것은 그런 저녁이었다.

“어이, 염세주의자? 나와라. 할 얘기가 있다.”

녀석은 늘 이런 식이었다.

 

니체는 박사논문으로 니체를 쓰겠다고 호언장담해놓고 아직 시작도 하지 못한 수료생이었다. 성별은 여성이지만 대화를 나누다보면 성별을 잊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그와 대학원 동기인 나는 휴학 후 여기저기서 인턴 생활을 하다가 복학해 쇼펜하우어로 간신히 석사를 마치고 이제 막 박사과정에 입학한 참이었다. “독일어도 못하는 쇼펜하우어 전공자라니 지나가던 개가 웃겠다.” 니체가 그렇게 놀릴 때마다 나는 헛웃음을 흘렸지만 맞말은 맞말. 과연 녀석은 학부에서 독문학을 전공한 이력이 있었고 나는 영어 외에는 할 줄 아는 외국어가 없었다. 독일어 공부를 안 한 건 아닌데 도대체 늘지를 않더라고. 내 푸념에 웬일로 녀석은 맞장구를 쳐주었다. “하긴 그렇지. 시제에 따라 변하는 것도 모자라서 성, 수, 격에 따라 단어가 바뀌는 게 말이 돼? 세상의 모든 굴절어들은 지구상에서 사라져야 한다. 한국어나 일본어 같은 교착어로 통일해야 돼.”

니체와 나는 그런 시시한 농담을 나누며 술잔을 기울이곤 했다. 나는 20세기로 연구방향을 바꿀 생각이었기 때문에 그럭저럭 영어만 해도 좋았다. 영어도 굴절어지만 고립어에 가깝게 변질되었다고 하던가. 세상의 모든 언어는 굴절어이면서 교착어이고 교착어이면서 또 고립어의 특성을 갖고 있다고 하던가. 요즘 논문이라도 쓰고 있는지 니체는 또 희떠운 소리를 해댔다. “인간은 세종류로 나눌 수 있지. 첫째는 루쏘적 인간. 열정과 단순함을 무기로 현실을 부정하고 이상향을 향해 직진하는 행동주의적 인간. 둘째는 괴테적 인간. 관조적이고 비활동적이며 거리를 두고 사색하는 데 특화돼 있는 인간. 셋째는 쇼펜하우어적 인간. 진실을 제 한 몸에 끌어안고 세계를 비관하며 모든 고뇌를 짊어지고 전진하는 인간. 바로 너인가?”

니체는 『반시대적 고찰』에 나오는 대목을 제멋대로 해석해서 내게 들이댔다. 니체가 영혼의 스승 쇼펜하우어에게 바친 찬사를 그런 식으로 비틀다니. 니체를 파시즘으로 왜곡한 히틀러까지 가지 않으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별달리 코멘트를 덧붙이지는 않았다. 니체는 나를 힐끗 보더니 술을 들이켜고는 말했다. “표정을 보니 오늘은 거의 3.0이나 3.5 레벨이겠군? 심연을 바라보면 심연도 그대를 바라본다. 그대는 쇼펜하우어로 논문을 썼지. 그대는 이미 염세적 인간이 된 것이다.”

니체는 그렇게 빙글거렸다. 이봐, 그만하라구. 그따위 종자 감별은 때려치워. 19세기 백인 남성 철학자의 종자 감별법이 21세기 대한민국의 그악스러운 자본주의에 가당키나 한가? 업그레이드가 좀 필요하지 않나? 차라리 엠비티아이가 효율적이지 않나?

나는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다. 맞고 틀리고를 떠나 니체의 말은 언제나 내 영혼의 무언가를 건드렸기 때문에. 나는 잔을 들어 마셨다.

쇼펜하우어로 논문을 썼다고 염세적 인간이 되는 건 아니다. 도스또옙스끼로 논문을 썼다고 영혼의 자해공갈단이 되는 건 아니듯이. 솔직히 말해서 나는 ‘의지’니 ‘힘’이니 하는 그런 형이상학 관념에는 이제 진절머리가 난다. 말이 좋아 형이상학이지 그냥 픽션 아닌가. 유전자나 호르몬의 작동 같은 맹목적 생명현상에 붙인 이름 아닌가……

오늘은 농담이 안 통하네? 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니체 앞에서 나는 3.5 레벨의 침묵을 지켰다. 니체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아, 이제 쇼펜하우어는 접었다 그 말이지? 신유물론? 그걸로 논문 쓴다고 했던가? 그래, 대세를 열심히 따라가라고. 철학을 공부하고 사유를 하는 자라면 이 시대의 정신사에 참여해야지.”

니체는 술을 마시면 희떠운 농담과 코미디에 재능을 보였고, 수사적이고 과장된 목소리로 우스꽝스러운 철학자 흉내를 내곤 했다. 너는 철학자보다는 코미디언이 어울릴 텐데? 그렇게 눙치면 니체는 또 이렇게 대꾸해올 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나의 희망사항이다! 비극의 탄생을 넘어서는 희극의 탄생이야말로 철학의 진정한 목적지가 아닌가! 운운.

하지만 니체는 자못 심각한 표정을 짓고는 이렇게 말했다.

“이봐, 두가지 소식이 있어. 하나는 안 좋은 소식이고, 또 하나는 더 안 좋은 소식이다. 어느 쪽을 먼저 들을 것인가?”

빨간 휴지 줄까 파란 휴지 줄까도 아니고, 좋은 소식과 안 좋은 소식도 아니고, 안 좋은 소식과 더 안 좋은 소식이라니. 또 싱거운 소리를 하려는 수작이 느껴져서 나는 웃음부터 터뜨려주었다. 그래봐야 3.5 레벨의 웃음이기는 하지만.

니체의 표정은 가벼워지지 않았다. “하나는 너에 관한 것이다. 이번에 학회에 제출한 논문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 대한 신유물론적 접근」, 맞나?”

그런데?

나는 미간을 좁히며 니체를 바라보았다. 그랬다. 나는 그 논문을 학회에 제출했고 심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박사과정 중에 논문을 두편 이상 발표하면 종합시험을 면제해준다기에 시작한 일이었다. 쇼펜하우어 공부는 좀 해두었으니 신유물론적 관점에서 재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쓴 글이었다. 특히 제인 베넷의 생기론적 신유물론을 참조했는데, 말하자면 논문의 출발점 자체가 아카데미의 폐해를 보여준달까. 예전에 공부해놓은 것에 현재의 핫이슈를 적당히 엮어서 한편을 쓰는 것. 일단 틀이 잡히면 적용하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신유물론자들은 대개 들뢰지앵이었고 들뢰즈는 니체에 대해 책을 썼으니 아무리 들뢰즈가 쇼펜하우어를 깠다고 해도 연관이 없을 수 없다. 사유 자체가 네거티브한데다 사회 시스템을 무비판적으로 승인했다고 쇼펜하우어를 욕해도 계보는 해체되지 않는다. 들뢰즈의 ‘욕망 기계’는 니체의 ‘힘에의 의지’에서 나온 것이고 ‘힘에의 의지’는 쇼펜하우어의 ‘의지’에서 나온 것이다. 들뢰즈가 니체를 연구했고 니체가 쇼펜하우어에 심취했으니 쇼펜하우어와 들뢰즈가 연결되지 않을 리 없다. 개체화의 원리를 직시하고 ‘나’라는 개체를 넘어서면 그곳에는 들뢰즈의 후예들이 신유물론을 주장하고 있을 것이다. 맑스가 헤겔을 유물론적으로 뒤집듯 쇼펜하우어를 유물론적으로 뒤집으면……

“그런데 그거, 문제가 좀 있다.”

문제? 문제가 있다는 건 나도 알고 있다. 너무 거창하고 엉성한 아이디어에 논리적 비약을 섞어 쓴 논문이었으므로……

“아니. 그게 아니고,”

니체는 말했다.

“카피킬러에서 30%가 나왔어.”

나는 말문이 막혔다. 카피킬러? 30%? 나는 그냥 내 생각을 썼을 뿐인데 카피킬러라니? 카피킬러 따위가 뭐라고 나의 독창성을 의심한다는 말인가? 나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니체는 그 학회에서 총무를 맡고 있었고 학회지 원고 수합에서 편집 일까지 도맡아 하고 있었다. 카피킬러 프로그램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새로 임기를 시작한 학회장의 방침이라는 건 나도 들은 적이 있었다.

“카피킬러라는 게 그래. 아무리 독창적으로 써도 걸리는 문장들이 있지. 새로운 걸 써도 비슷한 문장은 어디에나 있다. 그러니까 퍼센티지로 표시하는 거고. 네 논문도 별문제는 없겠지만 심사에서 혹시 문제제기가 있으면……”

니체는 말을 얼버무렸다. 내 표정이 일그러진 모양이었다. 나는 잔을 내려놓았다. 들을 가치도 없는 얘기가 아닌가. 그렇지 않아도 존재 수준이 3.5 레벨인데 이런 일로 3.0이나 2.5로 떨어지고 싶지는 않았다. 니체를 만나 술잔을 기울이면 그나마 4.5나 5.5까지 오르는데 오늘은 오히려 떨어질 것 같았다. 카피킬러라니. 30%라니. 나는 중얼거리며 잔을 비웠다. 인용 표시를 다 했는데 그럴 리가 없다. 프로그램이 각주를 제대로 체크하지 못한 게 아닌가? 나머지 문장들은 다 내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다. 내가 쓴 것이니 잘 기억하고 있다.

더 안 좋은 소식은 뭐야? 나는 의연하게 니체에게 물었다. 말도 안 되는 얘기는 때려치우고 다른 화제로 넘어가자는 뜻이었다.

“두번째는…… 나에 대한 것이다.”

나에 대한 것? 그러니까 니체 너에 대한 얘기?

“그렇지. 나에 대한 얘기. 물론 너에 대한 것이기도 하고.”

나는 빈 잔을 만지작거리며 니체의 입을 바라보았다.

“나는 너를 떠나려고 한다.”

니체는 그렇게 말했다. 예의 우스꽝스러운 문어체로 그렇게 말했다. 잠시 침묵하던 니체는 천천히 손을 들어 내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니체의 동작이 슬로우비디오처럼 보였다. 심장이 굳는 것을 느꼈다.

“너를 떠나고, 대학원도 떠나려고 한다.”

나를 떠나고 대학원을 떠난다. 나는 그렇다 치고, 대학원을? 대학원을 떠나? 왜? 어째서? 무슨 이유로? 나는 니체를 바라보았다. 아니, 노려보았는지도 모른다.

“이유는 네가 유추 가능할 것이다.”

유추 가능하다고? 나는 게으른 백수이고 가난뱅이이며 벤조디아제핀 계열의 약이 없으면 생활이 안 되는 종류의 인간이다. 나를 떠나는 것은 당연하다. 나를 만난다는 것 자체가 애초에 이상한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대학원은 왜? 학자로서의 미래에 환멸을 느껴서? 학계의 은근한 성차별 때문에? 철학이 재미없어져서? 진정…… 다른 길을 택해 루쏘적 인간이 되겠다는 건가?

……라고 말하는 대신, 나는 3.0 이하 레벨의 목소리로, 로또에라도 당첨된 거냐? 하고 멍청한 농담을 던졌다.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나는 잔을 비웠다. 평소라면 철학과의 풍토가 어쩌고저쩌고 학계의 구조적 문제가 블라블라 하다가 정부의 인문학 홀대를 성토해야 할 타이밍이었다.

니체는 니체답지 않게 침묵을 지켰다. 나도 더이상 말을 얹지 않았다. 침묵은 니체의 것이 아닌데. 침묵은 니체의 적인데. 나는 3.5 레벨에서 점점 더 낮은 곳으로 하강하고 있었다. 소주와 안주가 널려 있는 낡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우리는 깊은 침묵 속으로 잠겨들었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맹렬한 적의를 드러내며 지상을 난타하는 비도 아니었고 우울증적 무관심에 찌들어 가루처럼 흩날리는 비도 아니었다. 단지 세상이 가여워서 어쩔 수 없다는 듯 총총 내리는 비였다. 제 무게를 못 이기고 떨어지는 눈물이라고 해도 좋겠지만, 빗방울들은 이런 감상적인 의인화를 비웃겠지. 비는 보조관념이 되기 위해 내리는 것이 아니다. 빗방울은 단지 빗방울이고 아무런 감정이 없고 중력에 순응할 뿐이다. 기상현상의 하나에 인간이 제멋대로 의미를 붙여봐야 쓸데없는 짓이다. 니체의 마음에 내가 제멋대로 의미를 붙이고 이름을 붙이듯이. 사랑이라고. 그리움이라고. 연민이라고. 제멋대로.

아아, 하지만 빗방울들에게도 무심한 의지가 있다고 한들 그게 틀린 말일까? 객체화된 의지로서 빗방울들이 떨어지고 있다고 한들 영영 틀린 말일까? 빗방울들이 비극의 운명을 모른다고 해서 겨울비를 바라보며 눈물지을 인간의 마음까지 부정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니체와 헤어진 뒤 지하철역을 향해 걸었다. 우중충한 패딩 차림에 백팩을 멘 채 손을 주머니 깊숙이 밀어 넣은 채였다. 말하자면 누군가 시선을 돌려 나를 바라보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차림새. 지하로 내려가기 전에 건물 아래의 어둠 속으로 들어가 담배를 피워 물었다. 허공에 연기를 내뿜으며 빗방울들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자정이 가까운 도시. 밤의 가로등. 그리고 겨울비…… 장 뽈 싸르트르가 내 쪽을 힐끗 쳐다보더니 얼굴을 찡그리며 지하철 계단을 내려갔다. 한나 아렌트가 똑같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 후 지하철 계단을 내려갔다. 술을 마시면 취하게 되고 취하면 담배를 피우고 싶어진다. 나는 그게 좋았다. 이 인과율에는 모종의 필연성이 있다. 심리적인 측면보다는 물리적인 측면에서. 사회적인 측면에서는? 물론 진상 짓이지.

취했다고는 해도 세상이 빙빙 돌 정도는 아니었다. 말하자면 철없는 디오니소스적 열기에 미혹되지는 않은 상태. 나를 경멸하는 행인들의 존재 정도는 인지하는 상태. 아니 그런데 내가 니체를 사랑했던가. 아마도 그랬을걸. 나는 자문자답했다. 이 새끼, 내가 널 사랑하나보다, 하고 취해서 니체에게 호기를 부려본 적도 있었다. 그때 니체는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히히, 웃었지. 나도 니체를 따라 히히, 웃었다. 그 웃음 뒤에 공허가 남았던가, 아닌가.

니체는 낙관적인 쇼펜하우어이고 쇼펜하우어는 비관적인 니체이다. 결국은 쇼펜하우어가 옳다고 생각한다. 삶이란 수입보다 비용이 더 큰 사업이다. 사랑도 그렇다. 비용이 수입을 훨씬 초과하는 사업이다. 우리의 영혼은 언제나 적자이고 우리의 욕망은 과열 상태이거나 부재 표시로만 존재한다. 그건 우리가 초인이건 속물이건 마찬가지. 사랑이건 증오이건 마찬가지…… 아아, 이러니 니체가 쇼펜하우어 곁에 머물 수 있겠는가. 머물러서야 되겠는가. 나는 차창 밖으로 흘러가는 터널의 벽면을 바라보았다. 무수히 스쳐가는 캄캄한 어둠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열차에서 내려 승강장을 걸었다. 3.0 레벨의 기분에 빠진 채 터덜터덜 걸었다. 자정이 넘은 시간이었으므로 역사는 한산했다. 지하에서 지상으로 올라가는 사람들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산동네 빌라에 사는 사람들만이 이런 시간에 지하철을 이용하니까.

P역은 서울 외곽에 위치해 있다. 근처에는 대규모 아파트도 대형 마트도 백화점도 없다. 주로 소규모 공장들과 빌라들뿐이다. 출퇴근 시간이라면 다양한 피부색의 노동자들이 왕래하겠지만, 지금은 밤이고 공장들은 밤의 어둠 속에 잠겨 있다. 어둠에 잠긴 공장지대를 지나 언덕을 오르고 골목을 통과해 한참 걸어 올라가야 빌라촌이 나온다. 팔구십년대 건물들답게 대개 붉은 벽돌로 되어 있고 옥상에는 초록색 도료가 칠해져 있다. 재개발을 한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늘 그렇듯 소문이란 질 나쁜 공기 같은 것이다. 오래전부터 동네의 골목을 흘러다닌 후텁지근한 공기. 선거철이 되면 재개발을 추진하겠다는 플래카드가 붙었다가 선거가 끝나면 슬그머니 사라졌다.

나는 외출하거나 귀가할 때도 가급적 출퇴근 시간은 피해 다녔다. 사람들은 늘 목적지가 있고 그곳을 향해 맹렬한 의지를 보이며 달려간다. 뒤처지는 것은 목적지가 없거나 있어도 별것 아닌 사람들뿐이다. 가령 나 같은. 세상에 별 도움이 안 되는. 쓸데없이 난해한 책이나 뒤적이다 돌아오는. 자의식 과잉에 무기력하기까지 한.

내 존재를 확인해주는 것은 지하철역의 개찰구 같은 것들뿐이다. 또는 카피킬러. 카피킬러? 카피킬러라니. 나는 고개를 흔들어 생각을 털어냈다. 쇼펜하우어 관련 논문을 읽고 인용을 했을 뿐이다. 그뿐이다. 하지만 따옴표를 꼼꼼하게 확인했던가? 남의 말과 나의 말을 정확하게 구분했던가? 남의 말과 내 말을 은연중에 혼용한 건 아닌가? 쇼펜하우어의 ‘의지’는 개체를 지배하는 맹목적인 힘인데, 니체에 이르러 그것은 ‘힘에의 의지’로 변주되는데, 마침내 초긍정 들뢰즈의 ‘욕망 기계’로 전환되는데, 이건 누구의 말인가?

나는 에스컬레이터에 몸을 실었다. 몇몇 사람들이 에스컬레이터를 급하게 걸어 올라갔다. 그들은 내 왼팔을 스치며 계단을 올라가 빠르게 사라졌다. 에스컬레이터에는 나를 포함해 두 사람밖에 남지 않았다. 나와 한 여자. 내 앞에 서 있는, 아니 내 위쪽에 서 있는, 한 여자.

검은색 마스크를 쓴 여자는 나보다 세 계단 위에 서 있었다. 취한 듯 기우뚱하게 몸이 기울어져 있었다. 야구모자 아래로 살짝 흘러내린 단발이 보였다. 꽤 낡고 얇아 보이는 회색 사파리 점퍼와 코듀로이 바지를 입고 흰 양말이 보이는 크록스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보기에 따라서는 이상한 패션이었다. 지금은 영하에 가까운 날씨에 비까지 내리고 있는데. 저런 차림으로는 매우 추울 텐데. 추위에 강한 사람인가. 그런데 카피킬러라니 대체 무슨 헛소리인가. 니체가 나를 떠난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리인가. 오븐에 넣은 반죽처럼 마음이 부풀어올랐지. 하지만 식은 뒤에는 평범하고 딱딱한 과자가 되었어……라고 니체는 말했다. 나는 수긍했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과자…… 식은 과자……라고, 니체를 따라 희미하게 중얼거렸던가, 아닌가. 식은 과자는 고소하지만…… 여전히 바삭하고 향긋하지만……이라고 니체가 침울하게 말했던가, 아닌가.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과자 부스러기 같은 생각을 털어냈다. 내 위에서 지상을 향해 올라가는 여자는 고개를 깊이 숙이고 있었다. 목이 휘어져서 머리가 툭, 떨어질 것 같았다. 나는 여자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여자의 상체가 에스컬레이터의 미세한 진동에 따라 흔들렸다. 정말 앞으로 고꾸라지기라도 할 듯한 자세였는데, 이럴 때 불안은 여자의 것이 아니라 나의 것이다. 취했나. 취했군. 나도 취했지. 과자처럼 취했지. 하지만 저 사람은 어딘지 불안해 보이는데. 불안이란 존재의 질병인데. 치유가 불가능한 질병인데. 왜냐하면 이 세계에는 우리 삶에 근거를 부여해줄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까. 붙잡을 만한 가드레일이 없으니까. 근원이니 본질이니 하는 것도 없고 존재의 월급이니 연금이니 하는 것도 없으니까. 신은 죽었고 국가는 폭주하고 개인은 늘 내몰리고 흔들리니까. 게다가 사랑은 떠났네. 그런데 이 에스컬레이터는 왜 이렇게 긴가. 왜 이렇게 깊은 곳에서 올라가야 하는가. 까마득하게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 하는가. 이 지하철역은 핵전쟁에 대비해 만든 건가. 핵이 터지면 지하는 안전한가. 지하 몇 미터가 되어야 방사능으로부터 자유로운가. 저 사람은 왜 저렇게 흔들리는가. 나는 왜 저이 때문에 불안한가. 우리는 왜……

에스컬레이터가 4분의 3 지점을 지나는 순간, 내 불안은 구체적으로 실현되었다. 에스컬레이터가 미세하게 덜컹거린 것이다. 기어와 기어가 어긋나는 소리가, 진동이, 내 몸을 파고들었다. 불쾌한 쇳소리가 역사 내에 울려 퍼지는 순간, 세 계단 위에 서 있던 여자가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몸이 휘청, 휘어졌다. 휘어졌다가 겨우 제자리로 돌아오는가 싶었는데 다시 에스컬레이터가 덜컹거렸고, 이번에는 좀 심하게 덜컹거렸고, 그 순간 여자는 완전히 중심을 잃었다. 오른발이 에스컬레이터 계단의 날카로운 모서리를 짚은 듯했다. 슬리퍼가 미끄러지면서 허공을 밟은 듯했다. 여자의 몸이 급격하게 뒤로 무너졌다.

그 순간 내가 여자보다 세 계단 아래 서 있던 것이 우연이었을까? 세 계단 아래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상으로 향하던 것이? 균형을 잃고 쓰러지는 여자의 등을 나는 황급히 붙잡았다. 나도 모르게 온몸에 긴급 경보가 울린 느낌이었다. 술기운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뇌 속의 알코올이 한꺼번에 휘발된 것 같았다. 나는 여자의 등을 밀어 올렸다. 아, 저기요! 저기요! 조심하세요! 여자의 등을 떠받친 채 나는 소리쳤다. 텅 빈 역사 안에 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여자가 겨우 몸을 가누고 다시 직립 자세로 돌아오기까지는 약 1.5초? 2초? 정도의 시간이 소요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물리적인 시간이란 얼마나 무의미한가? 그 순간 여자는 자신의 육체가, 자신의 존재가, 자신의 통제를 완전히 벗어난 상태를 경험한 것이다. 모든 것이 무너질 뻔한 시간을 통과한 것이다. 아마도 여자는 그렇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고 기억조차 못하겠지만.

여자는 겨우 균형을 잡았다. 균형을 회복한 뒤에도 여자는 위태로워 보였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반쯤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아, 뒤에 사람이 있네. 사람이 있다. 남자인가? 남자구나. 키가 작고 왜소한 남자네.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금방 내 몸이 크게 휘청인 것 같은데. 무슨 일이 있었지? 무슨 일이 있었어요? 무슨 일이? 여자는 그렇게 물어보려는 듯 입술을 달싹거렸다. 아니, 달싹거린 것 같았다. 마스크를 쓰고 있었으므로 여자의 입은 보이지 않았다. 모자와 마스크 사이의 캄캄한 두 눈이 나를 일별한 뒤 다시 앞으로 돌아갔다.

여자가 균형을 회복한 뒤에도 나는 두 손을 엉거주춤하게 들고 서 있었다. 허리춤까지 들고 서 있었다. 여자가 다시 중심을 잃고 넘어질지도 모르니까. 추락할지도 모르니까. 그 순간 나는 기묘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나는 내가 타인에게 종속되어 있다고 느꼈다. 포함되어 있다고 느꼈다. 내 존재가 타인에게 종속되고 포함되어 아무런 잉여가 없다고 느꼈다. 글쎄,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그 순간 나는 타인을 통해서만 존재했던 것이다.

미친.

나는 두 손을 천천히 내리면서 중얼거렸다. 내 말을 들었는지 여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여자는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아, 당신에게 한 말이 아녜요. 나 자신에게 한 말예요. 그렇게 말하려 했으나 여자는 이미 고개를 앞으로 돌린 뒤였다.

그러는 동안에도 에스컬레이터의 기어들은 성실하게 맞물려 돌아갔다. 기계의 운동이 우리를 상단으로 이동시켜주었다. 에스컬레이터를 벗어나면서 여자는 조금 휘청거렸지만 넘어지지는 않았다. 이번에는 여자를 붙잡지 않았다. 여기서는 넘어져도 다치지 않는다. 이곳은 평지이고 대리석 바닥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추락할 곳이 없다.

조금씩 비틀거리면서 여자는 3번 출구 계단을 향해 걸어갔다. 비틀거리면서도 잘 걸어갔다. 오른손을 올려 모자를 눌러 쓰기까지 했다. 출구 계단을 하나하나 올라가다가 벽을 잡고 멈추어 섰다가 다시 올라가다가…… 어쨌든 스스로의 힘으로 계단을 올라갔다. 흔들리면서 지상을 향해 나아갔다. 여자를 따라 올라가면서 나는 여차하면 다시 그를 붙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람의 머리란 단단해 보여도 무른 것이니까. 돌계단에서 넘어지면 에스컬레이터에서 못지않게 치명상을 입을 것이니까. 치명상.

치명상.

그렇다.

아까 에스컬레이터에서 추락했다면 이 사람은 어떻게 되었을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내가 에스컬레이터를 빠르게 걸어 올라가버렸다면? 여자의 왼팔을 스치고 지나가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면? 그곳의 평행우주에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것은 이제 여자 혼자뿐이다. 취한 자신 외에는 아무도 없다. 4분의 3 지점에 도달했을 때 에스컬레이터가 덜컹거린다. 아주 미세한 진동일 뿐이다. 하지만 취약한 누군가에게 그것은 존재의 모든 것을 흔드는 힘일 수도 있다. 진동 때문에 여자는 균형을 잃는다. 왼쪽 슬리퍼가 에스컬레이터 계단의 날카로운 모서리에서 미끄러진다. 발이 허공을 밟는다. 몸이 뒤로 쏟아진다. 넘어진다. 무너진다. 중력이 멱살을 잡고 패대기친다. 여자는 에스컬레이터 상단에서 까마득한 저 아래로 추락한다. 머리가 쿵쿵 부딪치는 소리가 역사에 울려 퍼진다. 철제 계단에 부딪치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몸의 관절들이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꺾인다. 의지와 욕망을 갖고 있던 여자의 머리와 몸은 의지와 욕망을 잃어버린 채 물질덩어리가 된다. 머리와 어깨와 무릎과 발목이 철제 계단들에 충돌한다. 날카롭고 완강한 모서리들이 그의 몸을 무참하게 공격한다.

추락은 에스컬레이터 맨 아래 칸에 도달해서야 끝날 것이다. 상체는 에스컬레이터 밖으로 나와 있고 다리는 여전히 에스컬레이터 계단에 걸쳐 있을 것이다. 그 자세로 덜컹덜컹 흔들릴 것이다. 온몸이 기괴한 방향으로 꺾여 있을 것이다. 사지가 제각각일 것이다. 뼈가 부러지고 관절이 부서질 것이다. 이 모든 일이 단 3초 안에 벌어질 것이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 누군가 황급히 119에 전화를 하고 구급대원들이 달려와 여자를 옮길 것이다. 앰뷸런스 안에서 응급실에서 응급처치를 할 것이다. 심폐소생술을 받아도 결국 내장이 파열되고 두개골이 함몰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질 것이다. 결국 뇌사상태 판정을 받고……

이것은 상상이 아니다. 어느 평행우주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우리의 존재는 임의의 무수한 가능성들 속에서 지속되고 유지되는 것이므로. 타인들과의 우연한 스침과 만남과 이별과 흩어짐 속에서 지속되는 것이므로.

다행히 여자와 내가 속한 세계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여자는 혼자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지도 않았고 추락하지도 않았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축축하고 무거운 느낌의 비였다. 역사 주위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바로 앞에 상가 건물이 있었지만 불은 꺼져 있었다. 가로등 빛이 희미하게 밤거리에 드리워져 있을 뿐이었다. 그 위로 빗방울들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무슨 세트장에 비가 내리는 느낌이었다. 환하고 맑게 총총 내리는 비를 10, 검고 무겁고 음울하게 내리는 비를 0이라고 한다면, 대략 3.5 레벨의 비라고나 할까.

공장 쪽으로 난 길은 19세기 리얼리스트가 그린 그림 속인 듯 어둠에 잠겨 있었다. 겨울이고 밤이고 비가 내리고…… 왜 이런 곳에 지하철역이 있는지 의아할 정도로 외진 곳. 언덕과 계단과 골목이 많은 곳. 공장지대를 지나 계단과 골목을 한참 올라가야 빌라촌이 나오는 곳. 그제야 주거지가 나오는 곳.

여자는 지하철역을 나오자마자 엉거주춤 좌우를 둘러보았다. 방향을 가늠하는 것 같았다. 중심을 잡지 못해 여전히 비틀거리는 자세. 저 사람은 집에 도착할 수 있을까. 어둡고 미끄러운 빗길을 취한 채 걸어가야 할 텐데. 꼬불꼬불하고 경사가 급한 계단을 혼자 올라가야 할 텐데. 그러다 발을 헛짚으면 다시 굴러떨어질 텐데. 치명상을 입을 텐데. 뇌진탕을 피할 수 없을 텐데…… 차가운 비. 피부를 할퀴는 추위. 가로등은 희미해. 상가 차양 아래의 어둠 속에 여자는 서 있었다. 고개를 숙인 채 서 있었다. 흔들리며 서 있었다.

취하신 것 같은데, 잘 가실 수 있어요?

나는 용기를 내어 물어보았다. 나로서는 드문 일이었다. 취기가 아니었다면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사마리아인 노릇을 하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무엇보다 여자는 넘어지지도 않았고 부상을 입지도 않았다. 아무런 상황도 발생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 역시 조금은 취한 사마리아인이 되어 물었다. 흔들리는 여자에게 물었다. 여자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어둠 속이고 모자며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여자는 대답을 하는 대신 손을 휘저었다. 갈 수 있다는 것인지 아니라는 것인지, 괜찮다는 것인지 안 괜찮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여자가 문득 웃음을 흘리는 듯하더니 뭐라 뭐라 중얼거렸다. 가야지, 가야지,라고 한 것도 같았고 괜찮아, 괜찮아,라고 한 것도 같았다. 내가 물어본 것에 대한 대답 같지는 않았다. 여자는 비관적인 사람으로 보였고, 원래는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이 무슨 일 때문에 예기치 않게 과음을 한 것이 틀림없었다. 추운 밤이었고,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는 다시 물어보았다.

집이 어디세요? 가실 수 있으세요?

이번에도 대답이 없었다. 상체가 휘적휘적 흔들릴 뿐이었다. 나는 가만히 서서 그 모양을 바라보았다. 자동차 헤드라이트가 불 꺼진 상가의 차양 아래 어둠을 훑고 지나갔다. 내 앞에 서 있는 사람을 훑고 지나갔다. 그 순간 여자는 뭔가…… 다르게 보였다. 모자 아래로 비어져 나온 머리카락이 거칠어 보였다. 어두운 피부색에 얼굴선이 굵어 보였다. 몸집은 작고 호리호리했으나 어깨는 생각보다 넓어 보였다. 여자는…… 남자인 것도 같았다. 게다가 이 사람은 눈을 치켜뜨고 있구나. 나를 바라보고 있구나. 모자챙 아래 드리워진 그림자 속에서 나를…… 노려보고 있구나.

갑자기 모든 게 낯설게 보였다. 아까 에스컬레이터에서 비틀거린 사람이 맞나. 나는 어째서 이 사람의 얼굴을 처음 보는가. 아, 아까도 실은 얼굴 같은 것은 보지 못했지. 옷차림으로도 구분이 되지 않았는데 나는 왜 여자라고 생각했을까. 그런데 그게 중요한가. 중요한가? 중요한 것은 안전하게 집으로 돌아가는 것인데…… 나는 앞에 서 있는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여자인지 남자인지 청년인지 중년인지 가늠이 되지 않는 사람의 얼굴을.

그의 눈이 어둠 속에서 반짝인 것 같았다. 나를 똑바로 바라보는 것 같았다. 입술을 떼어 무언가 말을 했다. 그렇다고 생각한다. 마스크 때문에 보이지 않았지만 나의 오성은 그렇게 이해했다. 입술이 움직였으므로 마스크의 천이 움직였을 것이다. 뭐라 말하려 했을 것이다. 그 순간, 내 앞에 서 있는 사람에게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그것을 정확하게 들었다.

가.

잠시의 적막 후에 덧붙이듯 그가 말했다.

씨. 발. 놈. 아. 가라고. 이. 개. 새. 끼. 야.

취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낮고 느리지만 명료한 발음이었다. 아나운서처럼 정확한 발음. 높낮이가 없는 어조. 책을 읽듯 중성적이고 기계적이며 무심한…… 욕은 욕처럼 들리지 않았다. 위협하는 목소리가 아니었고 저주하는 목소리가 아니었고 심지어 나에게 하는 말조차 아니었다. 이래서는 방금 한 말의 뜻을 이해할 수 없는데. 의미를 해독할 수 없는데. 하지만 이 사람의 시선은 나를 향하고 있지 않은가. 나를 바라보고 심지어…… 나를 노려보고 있지 않은가.

당신, 지금 그거, 나한테 한 말인가?

나는 그렇게 묻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정확하게 나에게 하는 말이라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에. 나는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취기가 몰려왔다. 알코올 기운이 머리 꼭대기로 몰려들었다.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건 뭔가. 한판 뜨자는 건가. 몸도 작고 호리호리한 분이…… 나도 작은 몸이긴 하지만…… 고교 시절 한때는 유도선수였다는 걸 알려드려야 하나…… 0.5초 안에 상대를 보도블록 바닥에 메다꽂을 수 있다는 걸 보여드려야 하나……라고 생각하는 순간, 마스크 속의 입술에서 다시 기계음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씨. 발. 놈. 아. 가라고. 이. 개. 새. 끼. 야.

나는 나도 모르게 그에게서 물러났다. 뒷걸음질을 쳤다. 목소리가 나를 밀어내는 느낌이었다. 물리적으로 밀어내는 느낌이었다. 보이지 않는 힘이 멱살을 잡고 밀쳐내는 느낌. 떠밀리듯, 나는 뒷걸음질을 쳤다.

그는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뒷걸음질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마주 바라보았다. 불현듯 그가 고개를 떨구더니 다시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땅을 바라보다가 나를 바라보다가 다시 땅을 바라보았다. 당장 지하로 꺼질 듯 고개를 깊이 숙였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비 내리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무게를 못 견디겠다는 듯 고개를 떨궜다. 완연한 취객의 모습이었다. 나는 멀찌감치 떨어져서 그 모양을 바라보았다. 그 꼴을 바라보았다. 꼬락서니를 바라보았다. 방금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것인지, 듣기는 들은 것인지 의심스러웠다. 뭐라고 했느냐고 물어볼 생각은 들지 않았다. 뭘 어떻게 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화도 나지 않았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교외의 지하철역 근처에는 인적이 없었다. 비 내리는 검은 아스팔트에 가로등 불빛이 희미하게 드리워져 있을 뿐이다. 비는 내리고 있지만 그렇다는 것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낭만도 없고 계시도 없다. 2.5 레벨 또는 1.5 레벨로 내리는 빗방울들이라고나 할까. 씨. 발. 놈. 아. 가라고. 이. 개. 새. 끼. 야……라고 뜻 모를 말을 중얼거리는 사람이 있고, 그와 나 사이에 비가 내리고 있을 뿐.

나는 몸을 돌렸다. 집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언덕길을 올라가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계단을 올라가서 골목으로 접어들고 좌회전과 우회전을 두번씩 한 뒤에 다시 계단을 걸어 올라가야겠다. 그러면 나오는 나의 원룸으로 돌아가야겠다. 혼자 욕설을 내뱉는 취객을 상대할 이유는 없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청년인지 중년인지조차 헷갈리는 취객을 상대할 계제가 아니다. 시비에 휘말리고 싶은 생각도 없다. 비가 내리고 있고 적막한 교외이고 취한 사람이 있을 뿐이므로……

나는 몸을 돌려 그를 떠났다. 이상한 욕을 하는 사람을 떠났다. 기계음 같은 목소리로 욕을 하는 사람을 떠났다. 비를 맞으며 걸었다. 가급적 무심하게 걸었다. 카피킬러와 니체가 번갈아 머릿속에 떠올랐다. 쇼펜하우어는 개체의 관심을 넘어서 개체를 초월하는 진실에 닿아야 한다고 했다. 예술을 통해서든 사유를 통해서든 거기서 고통의 극복이 가능하다고 했다. 나에 대한 카피킬러의 관심은 내 존재에 대한 모독이며, 카피킬러에 대한 나의 관심조차 내 존재에 대한 모독이다. 게다가 나는 니체를 사랑하지 않았던가. 니체도 나를 사랑하지 않았던가. 기억한다. 그 겨울, 미끄러운 길과 어두운 밤이 있고 눈 내리는 거리가 있던 그 겨울. 아득하게 눈이 내리던 그 겨울…… 이 새끼, 내가 널 사랑하나보다. 니체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건 언젠가 내가 니체에게 했던 말이었지.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내가 했던 말이었지. 니체는 히히, 웃었다. 내가 니체를 따라 히히, 웃었던가, 아닌가.

그 겨울, 나는 내 원룸에 누워 있었고 니체는 나를 껴안고 있었다. 내 이불 속으로 들어와 온몸으로 나를 껴안고 있었다. 팬데믹이 전세계를 휩쓸던 때였다. 질병관리청은 사회적 거리두기 수준을 격상시켰으며 언론은 방역지침을 지키지 않은 이들을 연일 질타하고 있었다. 나는 고열과 기침과 오한에 시달리고 있었으므로 아무도 만나려 하지 않았다. 만날 수 없었고 만나선 안 되었고 만나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그런데 그 아침, 약기운에 취한 채 밤새 고열과 기침과 혼몽에 시달리다 간신히 눈을 떴을 때, 내 이불 속으로 니체가 들어와 있었다. 니체는 나를 끌어안고 있었다. 그렇게 밤을 보낸 모양이었다. 니체는 왜 여기 있는가. 어떻게 여기 있는가. 지금 뭘 하고 있는가. 나는 니체를 부른 적이 없는데. 그런 기억이 없는데. 어째서.

미친.

나는 중얼거렸다.

이봐, 지금 뭐 하는 건가.

나는 니체에게 말했다. 나는 지금 전염병에 걸려 있고 네가 나를 접촉하는 것은 국가시책을 위반하는 것일 뿐 아니라 공공선에 비추어 완전히 비윤리적인 행위이다. 나는 질병관리청에서 제공한 약을 복용 중이고 일주일치 식량을 마련해둔 상태이며 따라서 네가 올 필요도 없고 와서도 안 된다. 너는 대체……

라고 나는 말했다. 나는 또 말했다. 너는 곧 고열과 기침과 오한에 시달릴 것이라고. 질병관리청에서 동선추적을 실시할 것이고 강제격리에 들어갈 것이라고. 자신을 잊고 세계를 잊고 고열과 기침과 혼몽 속에서 염세적인 생각에 시달릴 것이라고. 그것을 바이러스처럼 전파시키고 전염시킬 것이라고.

미친.

나는 중얼거렸다.

니체도 나를 따라 중얼거렸다.

미친.

그리고 덧붙였다.

이 새끼, 내가 널 사랑하나보다.

내가 대꾸했다.

미친. 고소한다.

그게 몇해 전이었던가. 사회적 거리두기가 2.5단계로 격상되고, 전국이 공포에 질리고, 동선을 누락한 사람들의 비윤리성이 도마에 오르던 그 시절……

미친.

그게 벌써 까마득한 옛일로 느껴지다니. 나는 원룸 비밀번호를 누르며 중얼거렸다. 도어록이 풀리는 소리가 울렸다. 나는 원룸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현관문을 열지 않고 멍하니 집 앞에 서 있었다. 취기가 몸을 흐물흐물 녹이는 느낌이었다. 카피킬러라니. 나의 생각이 진짜 나의 생각이 아니라는 뜻인가. 니체는 쇼펜하우어를 사랑했고 쇼펜하우어는 니체 안에서 다시 태어났는데 두 사람은 만난 적이 없었지. 모든 것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희미해지고 이윽고 고요해지네. 그 위로 눈은 내리고 비는 또 내리고……

미친.

그 순간, 이상한 열기가 나를 휘감았다. 열기가 아니라 취기였는지도 모르지만 취기건 열기건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몸을 돌려 반지하의 계단을 올라갔다. 골목길로 나가 우회전을 하고 좌회전을 하고 공장지대 쪽으로 난 계단을 다시 내려갔다. 나는 지하철역을 향해 걸어갔다. 뛰다시피 걸어갔다. 그자를 다시 만나야 한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어린애인지 중년인지 헷갈리는 그자를 만나야 한다. 검은색 마스크를 쓰고 야구모자를 쓰고 얇은 외투를 입고 슬리퍼를 신은 채 역사에서 혼자 비틀거리고 있는 그 취객을 만나야 한다.

맹목적이고 불가해한 욕망에 휩싸인 채 나는 P역으로 향했다. 씨. 발. 놈. 아. 가라고. 이. 개. 새. 끼. 야. 그렇게 말한 자를 찾아 물어보아야 한다. 기계처럼 말한 자를 찾아 물어보아야 한다. 대체 너 따위가 뭐길래 나에게 그런 욕을 하느냐고. 취한 채 혼자 비틀거리는 주제에 무슨 이유로 그런 욕을 하느냐고. 밤늦은 시간에 어둠 속에서 낯선 남자가 말을 걸어왔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면 순순히 수긍하겠노라고. 두 손 들고 받아들이겠노라고.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그 사람은 여전히 빗속에 서 있었다. 내가 역사를 떠날 때와 똑같은 자세로, 똑같이 흔들리는 꼬락서니로, 그 사람은 상가의 차양 아래 서 있었다. 상가 건물의 불은 꺼져 있다. 희미한 가로등 빛만이 보도블록에 드리워져 있다. 그 위로 차가운 비가 내리고 있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청년인지 중년인지 헷갈리는 취객을 향해, 나는 나아갔다. 나아간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자세로, 나는 나아갔다.

취기인지 열기인지 모를 힘에 휩싸인 채 나는 말하려 했다. 마침내 그를 마주한 채 지껄이려 했다. 나 자신에게조차 낯선 목소리로, 낯선 표정으로, 이렇게 외치려 했다. 내가 널 사랑하는 것 같다고. 사랑하는 것이 틀림없다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럴 수 없노라고. 19세기 그림 속 같은 세트장에서, 니체에게 외치듯이, 그렇게 선언하려 했다. 당신이 웃음을 터뜨릴 때까지, 웃다가 웃다가 불현듯 웃음을 멈추고, 미친……이라고 중얼거릴 때까지.

그 사람은 어둠 속에 서 있었다. 말없이 서 있었다. 검은색 마스크에 야구모자를 쓰고 얇은 외투를 걸친 채로. 코듀로이 바지를 입고 슬리퍼를 신은 취객으로서. 남자인지 여자인지 청년인지 중년인지 헷갈리는 사람으로서.

아니, 이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아까와는 다르게 보였다. 그는 노인에 가까워 보였다. 작고 왜소하고 구부정한 자세의 노인에 가까워 보였다. 야구모자 사이로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이 비어져 나와 있었다. 노인이, 확실히 노인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치뜬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노려보고 있다고 해도 좋은 시선으로. 평행우주의 다른 차원에 존재한다는 듯이. 깊은 침묵 속에서.

빗줄기가 굵어지고 있었다. 지상을 난타하듯이, 수천개의 바늘이 꽂히는 느낌으로, 빗줄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머리를 때리고 어깨를 때리는 느낌이었다. 살을 파고드는 느낌이었다. 나는 통증을 느꼈다. 머리가, 어깨가, 팔이, 바늘에 관통당하는 느낌이었다. 이 비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물리적 기상현상의 일부로서, 거대한 기상현상의 일부로서, 이 비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어둠 속에 서 있는 저 노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이다. 빗속에 영영 저렇게 서 있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알았다. 문득 니체가 보고 싶었다. 니체가 그리웠다.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렇다. 너는 떠날 것이다. 나를 떠날 것이다. 카피킬러가 옳았다. 나는 내 것이 아닌 세계에서 겨우,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당신들 속에 간신히,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이 새끼,

나는 중얼거렸다.

내가 너를 사랑하나보다.

아무도 나의 말을 듣지 못했다. 비 내리는 어둠 속에서 한 노인만이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에는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았다. 무심했다. 나는 그이의 눈빛 속에서 문득, 무서운 평화를 느꼈다.